< -- 1096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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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
그들이 나온 곳 옆으로는 보관고와 재생실, 실험실에서 쓰는 냉매와 실험용 가스탱크가 빼곡하게 들어찬 창고가 보였다. 견고한 철문 안을 슬쩍 들여다본 요원들이 몸서리를 쳤다.
“저 무서운 가스들 다 터뜨리면 볼만하겠다. 근데 그림의 떡이네.”
잠시 입맛을 다졌던 요원들은 수많은 환기장치들을 보고는 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기술요원이 앞서가는 바에자에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크테시폰은 궁전이면서 연구소에, 군수공장에, 신전과 병원, 병영까지도 모두 겸하고 있습니다. 효율적이긴 하지만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런 만큼 안전시설도 치밀하지.”
타크마가 천장에 줄줄이 박혀 있는 감지장치와 긴급 배기장치, 보안카메라와 소화시설을 가리켰다. 기술요원이 픽 웃으며 보안카메라 앞에서 양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문제는 지금 거의 다 죽었다는 거죠.”
타크마가 고개를 내밀어보니 복도는 어수선했다. 착륙 사고로 동력계가 손상되면서 동력 부족으로 메인 동력을 필수적인 곳으로 돌리면서 조명은 꺼져있고, 복도에는 착륙 도중 부서지거나 쏟아진 물건들을 한쪽에 수북이 쌓아놓은 상태였다. 급하지 않은 작업도 모두 중단되면서 직원들도 모두 자리를 비운 듯했다.
랜턴 대신 스코프를 쓴 10명의 일행은 쓰레기로 어수선한 복도를 가로질러 안쪽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기술요원이 헐떡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에 따르면 이들의 몸은 극저온의 냉동고에 보관했다가 해동을 거쳐 가사(假死)상태에서 컨디션 회복과정을 거친 후에 마지막으로 기억을 주입해 깨우는 것 같습니다. 가사 상태에선 오랜 시간 놔둘 수 없다고 하니 아마 실전에 투입되는 부대에 한해 한 벌씩만 해동해 두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정확히 어딜 부수어야 하지?”
바에자의 물음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의 앞에 [상온보관고 겸 재생실]라는 팻말이 걸린 문이 보였다. 내내 깜깜하던 곳에서 처음 인공 조명이 나타났다. 그 밑에 서 있는 2명의 운 없는 경비병들이 이들을 휙 돌아보았다.
“누……”
그들은 이 불청객들에게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그런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타크마가 던진 단검과 바에자가 쏜 마우저가 그들의 머리를 단숨에 박살을 내버렸다. 저항도, 싸움도 없었다.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바에자가 경계서린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죽은 경비병의 주머니를 뒤지니 출입 카드가 나타났다. 그 외의 자동 보안 장치는 동력 때문인지 꺼져있었다.
“쉽군……, 너무 쉬워.”
바에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앞에는 두 팔을 양쪽으로 활짝 벌려도 닿지 않을 크기의 금속제 문짝 2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출입구가 있었다. 케스난이 준 쪽지와 팻말대로라면 이 안에만 수천 개의 ‘즉시 깨울 수 있는’ 몸뚱이가 있을 터였다.
“뭔가 찜찜하다. 가방은 우리 주고 너흰 바깥을 지키고 있어.”
문을 열기 전, 바에자는 요원 중 2명에게 짐을 내려놓고 복도 양쪽을 경계하라며 손짓했다.
“들어가자.”
바에자와 타크마, 2개씩의 짐을 멘 6명의 요원들은 경비병이 지니고 있던 카드로 잠금을 풀고 양쪽에서 큰 문을 힘껏 밀어 열었다.
“후음.”
내부를 본 순간, 타크마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바에자의 걱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분명 제대로 들어온 듯했다. 문 안쪽에는 3개 층을 터서 만든 운동장만한 큰 홀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게 다……헤네티들입니까?”
문 정면으로는 차량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만큼의 넓은 통로가 나 있고, 그 양옆으로는 10층 정도의 강철 선반에 관 모양의 상자가 정리되어 쌓여있었다. 3층 높이에 있는 꼭대기층 선반은 위로 한참을 올려보아야 할 정도였고 통로에는 이 관을 올리고 내릴 때 쓰는 듯한 고소 작업차도 한 대 보였다. 선반과 상자에는 헤네티 각자의 코드와 이름이 새겨져 있고, 3분의 2 정도 채워져 있어 중간중간 빈 곳이 보였다. 선반에는 상자에서 깬 헤네티가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사다리와 발판까지 달려있었다.
“전투를 대비해서 재생 대기 중인 몸인가 보다.”
바에자는 통로를 가로질러 홀 중앙의 탑에 다가갔다. 통로는 이 탑을 중심으로 십자 방향으로 나 있고, 탑에서 뻗어 나온 수백 개의 굵은 케이블이 중간중간 가지를 치며 각 상자들에 연결되어있었다.
“이쯤이면 2천 개 가까이 되겠다. 한 번에 최대한 많이 전투에 내보내려고 이렇게 큰 규모로 둔 것이겠지.”
바에자는 탑에서 뻗어 나와 각 상자에 연결되어있는 케이블을 빙 둘러보았다. 수백 개의 케이블이 공중을 덮고 있어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쪽에도 문이 있습니다.”
타크마가 십자로 교차하는 통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엔 큼직한 잠금장치가 달린 육중한 철문이 보였다. 바에자는 케스난에게서 받은 지도를 새삼 확인해 보았다.
“이 옆방은 주 냉동실일 거다. 재생 대기 중인 몸뚱이 대부분이 저기 있을 거다. 크기도 여기보다 몇 배는 크겠지.”
“그럼 우리가 가져온 연료로 다 태우기는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함께 온 보안국 기술요원이 대신 대답했다.
“이 크테시폰 자체를 어찌하지 않는 한 저 많은 몸뚱이를 다 파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탑이 재생되는 몸뚱이에 기억을 전송하는 중앙장치인 것 같으니 여기만 부수면 놈들도 한동안 재생을 못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에자가 따라온 일행에게 서두르라고 손짓했다. 손짓을 받은 보안국 요원들은 탑의 중요한 제어장치가 있을법한 곳을 골라 등에 힘들게 지고 온 인화물질 상자를 묶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들려온 작은 기척을 제일 먼저 느낀 건 가디언인 타크마였다. 밖에 두고 온 2명의 요원들이 누군가와 싸움을 벌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미처 도우러 나가기도 전에 그들의 비명이 먼저 들려왔다.
“이런!”
당황한 바에자와 타크마는 유일한 다른 출구가 있는 냉동실 쪽 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6명의 훈련받은 요원들도 그들을 따라 뛰었다.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동실 문이 확 열리더니 중무장한 3명이 마우저를 들고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매복?”
냉동실에 숨은 자들이 정체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이들을 향해 사방에서 볼트가 날아 들어왔다. 정확히는 몰라도 분명 한둘이 아니었다. 바에자는 옆의 선반 밑으로 몸을 날렸고, 6명의 요원들 중 2명이 날갯죽지와 배에 볼트를 맞고 바닥에 뒹굴었다. 밖에서 낸 소리 때문에 타이밍을 놓친 적군들이 내뱉는 욕지거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이씨! 눈치 챘잖아!”
바에자는 허리에 볼트를 맞고 쓰러진 요원을 불끈 짊어지고 선반을 후다닥 기어올라 상자들 사이로 쏙 모습을 감추었다. 뒤이어 등에 볼트를 맞은 요원을 짊어진 타크마도 그 옆 선반 틈새로 몸을 감추었다. 수천 개의 상자들이 고작 두세 뼘 간격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선반은 이 다급한 순간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들은 상자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빈 자리에 몸을 바싹 웅크리고 호흡까지 멈추었다.
- 움직이지 마라. -
모두에게 바에자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상온보관실의 거대한 선반 곳곳의 틈새에 흩어진 일행은 잔뜩 숨을 죽이고 문 쪽을 노려보았다.
“이거 실망이야. 난 베흔 놈이나 보안국장 그년 정도는 들어와 줄 것 같아서 이 임무를 조르고 졸라 받았는데 말이지.”
20명 가까운 코런덤들과 건들거리며 모습을 나타낸 건 조금 전 크테시폰 밖에서 보았던 교단의 바에자였다. 그를 뒤따라온 루토와 코런덤들은 복도를 지키고 있던 2명의 보안국 요원의 잘린 목을 바닥에 무표정하게 동댕이쳤다. 바에자의 의심과 저들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몰살당했을 순간이었다. 바에자도, 타크마도 ―아마 케스난까지도― 교단의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파티 준비하느라 얼마나 오랫동안 애를 썼는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잡놈들 열댓 명이라니. 함선이 부서지는 것도 참고 기다렸는데 뭐 이런 거지같은 경우가 다 있담. 괜히 기대하면서 기다렸잖아.”
복도 중간에 우뚝 선 교단 바에자는 주변을 빙 둘러보며 빈정거렸다. 위장포로 몸을 감싼 황제 측 바에자는 7층 선반에 엎드려 있었다. 황제 측 바에자가 당장이라도 저 원수 같은 쌍둥이를 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순간 위치가 노출되면 끝장이었다.
“이봐, 이 새끼들은 어쩔 수 없이 죽였지만 너희 같은 잔챙이들은 죽이기도 귀찮으니 그냥 기어 나와. 너희끼린 작전이 힘들다고 윗분들 좀 불러들여 주면 전쟁 끝날 때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출세도 시켜줄 테니까.”
교단 바에자가 여유를 떨며 홀을 꽉 채운 강철 선반들을 둘러보았다. 너그러운 척을 하고 있지만 실상 워낙 규모가 크다보니 이 어마어마하고 촘촘한 선반들 사이를 다 뒤지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서였다. 방패를 든 헤네티들이 잔뜩 긴장한 채 바에자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을 거느리고 느긋하게 홀 중심으로 나아간 바에자는 데이터 탑 앞에 설치되다 만 7개의 인화물질 가방을 주워들며 킬킬거렸다.
“맥 빠지게 해서 미안한데, 여기 이 탑은 뭔가 그럴싸하게 치장해놓긴 했는데 데이터 처리장치가 아니고 그냥 케이블 뭉치를 보호하는 통이야. 태웠어도 별 소용이 없거든?”
선반 사이에 숨은 바에자가 이를 빠득 갈았다. 그는 숨을 멈춘 채 선반 사이로 슬쩍 눈을 내밀고 보관실 상황을 살폈다. 교단 바에자와 그 일당 20여 명이 자신들이 들어온 출구 부근에 모여 있고, 옆방인 냉동실로 이어지는 철문 앞을 3명의 헤네티가 두꺼운 방패로 막아서고 있었다.
“빨리 나와! 당장 나오지 않으면 더 매운 맛을 보게 될 테니까!”
이쪽에서 반응이 없자 짜증이 난 교단 바에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홀의 선반 사이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들은 10층 높이로 쌓인 수천 개의 상자들 사이 어딘가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래, 시간을 끌겠다 이거지?”
인내심이 바닥난 교단 바에자가 처음 들어온 정문 쪽으로 물러나더니 안에서 단단히 잠가버렸다. 이제 이 상온보관실 안에는 덫에 걸린 생쥐 신세가 된 8명과 그 3배가 넘는 교단 헤네티만이 남게 되었다.
“됐다. 가스 뿌려.”
교단 바에자와 헤네티들이 투구의 안면을 닫고 필터를 작동시켰다. 뒤이어 공중에 있는 환기장치에서 쏴아 하는 정체모를 바람소리가 강하게 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제일 꼭대기층에 있던 요원이 내는 으윽 하는 신음에 바에자는 그제야 정체를 깨달았다.
- 숨 멈춰. -
황제 측 바에자의 지시가 내려졌지만 어차피 숨을 참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있었다. 바에자의 결정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마우저 끝이 선반 틈새로 슬그머니 빠져나와 주 냉동실로 이어지는 철문 앞, 그곳에서 큰 방패로 벽을 쌓고 있는 3명의 헤네티들을 향했다.
“엇?”
냉동실 문 앞의 헤네티가 방패 위로 슬그머니 눈을 내민 순간, 무언가 번쩍 하는 것과 함께 그의 운명도 끝이 났다. 거의 10척(3m) 높이에서 꽂힌 마우저탄이 방패 위를 휙 스쳐 그의 눈부터 뒷목까지를 단숨에 뚫었다.
“우읍!”
- 한 번에 나가! 냉동실로 간다! -
바에자의 명령을 받은 보안국 요원 8명이 선반에서 우르르 뛰어내려 냉동실 문 앞에 남아있는 2명의 헤네티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문 쪽에 있는 교단 측 바에자와 루토는 직각으로 꺾이는 모퉁이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로 볼 수 없으리라는 믿음 하나에 기댈 뿐이었다.
“어, 어…….”
옆의 동료가 단 한 발에 쓰러지자 놀란 2명의 헤네티가 자신들에게 몰려드는 황실 요원들에게 마우저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보안국 일행의 선두에서 달려들던 바에자가 얼굴의 모자와 마스크를 확 벗어던졌다.
“어, 어?”
익숙한 바에자의 얼굴에 깜짝 놀란 헤네티 둘이 마우저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물론 바에자는 그들이 깊이 생각할 여유 따위를 주지는 않았다. 바에자가 당긴 두 번째 마우저탄이 또 한 명의 목을 정통으로 뚫었고, 마지막 한 명은 타크마가 던진 칼에 방패를 얻어맞고 뒤로 벌렁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뒤에서 ‘교단 바에자’가 쫓아오는 고함이 들려왔다. 타크마는 넘어진 채로 마우저를 막 쏘려는 헤네티를 밟고 서서 목에 힘껏 칼을 찔러 넣었다.
“문 열어! 빨리!”
타크마는 옆의 냉동실로 이어지는 단단한 고정식 철문의 고리를 힘껏 비틀어 열었다.
그 사이, 정문 쪽에서 달려온 교단 바에자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나타냈다. 여느 때처럼 선두를 마다않고 달려온 그는 부상을 입은 동료를 부축해 도망치는 보안국 요원의 다리를 겨누고 마우저의 방아쇠를 당겼다.
“아악!”
2명의 몸을 동시에 관통한 마우저 탄은 바닥에 큼직한 구덩이를 남기고 다시 튀어 올라 벽을 부수어 놓았다. 또 한 명의 보안국 요원이 허리에 마우저를 맞고 바닥을 굴렀다. 바에자는 쓰러지는 보안국 요원들을 훌쩍 뛰어넘어 나머지 황실 무리에게도 마우저를 날리려 했다. 그때, 막 냉동실 문을 비틀어 연 황실 편 바에자가 뒤에서 쓰러진 보안국 요원들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두 바에자의 시선이 몇 달 만에 다시 정면으로 마주쳤다.
“흐흡!!!”
문을 겨눈 교단 바에자의 손이 아주 짧은 순간 굳어버렸다. 정확히는 그의 머리에, 판단 시스템의 밑바닥에 세뇌된 무언가가 그의 손을 잡아 붙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의 질투, 혹은 생존본능이 대신 손을 움직여 방아쇠를 당겼다. 같은 순간, 냉동고 앞에 있는 바에자 역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앗!”
두 바에자의 옆에 있던 특등급 가디언들이 동시에 몸을 날려 그를 덮쳤다. 교단 바에자가 쏜 마우저 탄은 바에자를 껴안은 타크마의 머리 위를 스친 후 냉동고의 육중한 금속제 문짝에 큼직한 흠을 내 놓고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아악!”
교단 바에자의 짧은 비명과 함께 루토에 깔린 그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그의 한쪽 귀가 찢겨 너덜거리고 있지만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다.
“현신이시여!!”
바에자의 피에 놀란 루토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사이, 그를 쏜 황실 편 바에자는 타크마의 보호를 받으며 냉동실 안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뒤이어 사격을 피한 3명의 운 좋은 보안국 요원들이 냉동실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난 괜찮으니까 저놈들을 잡으란 말이다!”
교단 바에자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루토를 거칠게 밀어내며 악을 썼다. 루토의 헤네티들이 허겁지겁 냉동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문은 쿵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있었다. 루토가 문을 여는 핸들을 돌리려 했지만 안에서 무언가를 끼웠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염병할!!!”
루토가 문짝을 힘껏 걷어찼다. 3명은 잡았지만 나머지 5명은 결국 안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는 마우저를 맞고 쓰러져 있는 보안국 요원들에게 쿵쾅거리며 다가와 얼굴을 걷어찼다.
“뭐야? 뒈졌어?”
그에게 얼굴을 차인 보안국 요원은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간 채 입과 코에서 피를 주르르 흘렸다. 옆에서 다른 보안국 요원을 확인한 헤네티도 고개를 저었다.
“이놈도 죽었습니다. 자살캡슐을 씹은 것 같습니다.”
루토가 치를 떨었다. 가까스로 쓰러뜨린 보안국 요원 3명 중 1명은 마우저에 즉사했고, 2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였다. 그가 황실에 보안국장으로 있었을 때만 해도 보안국 요원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황제에 의해 발탁되어 새로 키워진 이들 젊은 요원들은 포로가 되느니 서슴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요원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니 귀 밑에 노예문을 지운 흔적이 보였다.
“해방노예로군.”
해방노예들이 황제에게 광적으로 충성한다는 말은 들은 일이 있었지만 그도 이렇게 눈앞에서 실감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루토는 멍한 얼굴로 잠긴 냉동실 문을 돌아보았다.
‘아냐, 뭔가 헛것을 본 거야.’
루토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문이 닫히던 마지막 순간, 그는 적군 사이에서 바에자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내가 미쳤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친 바에자에게로 돌아갔다. 귀를 다친 바에자는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씩씩거리며 잠긴 냉동실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가 무언가 상처 이상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루토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 말고는 다른 문은 다 잠겼으니 못 달아납니다. 당장 병력을 동원해서 들여보내 소탕하겠습니다.”
“안 돼.”
순간 낯빛이 창백해진 바에자가 정색을 하며 급히 손을 저었다. 자칫 헤네티들이 전투 도중 황제 측 바에자와 마주친다면 큰일이었다. 혹여 그가 사로잡혀 입을 연다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어마어마한 폭탄이 될 터였다.
“냉동실은 여기보다 4배나 큰데 놈들을 어떻게 찾겠다는 거야! 그것도 저렇게 추운 냉동실에서!”
“허나…….”
머뭇거리는 루토에게 바에자가 씩씩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그놈들 못 봤냐? 방한복도 없었어. 저 안에서 한 시간이나 버티면 다행이지.”
루토가 생각해 보니 바에자의 의견도 그럴싸했다. 도망친 적은 방한복은 고사하고 장갑이나 두꺼운 신발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긴, 지금쯤 들어간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올라가서 냉동실 온도를 최대한 낮추라고 전해.”
바에자가 잠겨 있는 냉동실 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놈들을 얼음덩이로 만든 다음에 끄집어내면 되니까.”
바에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단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한 후라면 저자를 찾아도 위험은 덜했다. ‘황제가 교묘하게 성형한 가짜 바에자를 보내어 진짜인 날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고 둘러대도 그 사실을 증명할 도리는 없었다.
“그 뒤엔 내가 직접 들어가 끄집어내겠다.”
루토의 생각대로, 냉동실에 들어온 바에자와 타크마 일행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선택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후회하고 있었다. 이 살인적인 공간은 하얀 빙무가 사방으로 시야를 막고 있어 대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선뜻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이 바닥을 디딜 때마다 반사되어오는 긴 메아리로 보건대 방금 지나 온 상온저장고의 몇 배는 되리라는 건 분명했다.
일행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덜덜 떨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곧 그들의 앞을 하얀 얼음이 잔뜩 붙은 웬만한 건물만한 유리캡슐이 막아섰다. 손으로 얼음을 털어내고 보니 그 안에는 밖에서 보았던 상자 백여 개가 빽빽하게 쌓여있었다. 빙무 사이로 다시 주변을 돌아보니 이런 거대한 유리 냉동실이 격자 모양으로 이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캡슐 안은 거의 절대온도 가까운가봅니다.”
캡슐의 온도계를 확인한 보안국 기술요원이 비틀거리며 말했다. 손발의 감각이 죽어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요원이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정보를 따오지 못한 탓입니다.”
“어차피 다른 도리가 없었어.”
타크마가 풀 죽은 요원에게 억지로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코 밑과 입술에도 하얗게 얼음이 달라붙어있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연기처럼 공중으로 무럭무럭 솟아올라 주변 가까운 곳에 달라붙었다.
“반대편에 혹시 문이 없나 보자.”
추위에 턱의 감각이 사라지면서 바에자의 말소리가 어눌했다. 그도 무거운 걸음으로 반대편으로 가까스로 걸었다.
“저깁니다.”
빙무 너머로 불빛을 본 타크마가 헐레벌떡 달려갔지만 두꺼운 금속제 문에는 붉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 타크마가 힘껏 문을 비틀었지만 특등급 가디언인 그의 힘으로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잠갔습니다.”
바에자도, 그를 뒤따르는 4명의 보안국 요원들의 표정도 흙빛이 되었다. 특히나 마우저에 날갯죽지가 찢긴 채 동료들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한 명은 이미 울고 있었다.
“전 어차피 가망이 없으니 나가기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닥쳐라, 나보다 먼저 죽겠다는 개새끼는 용서 못 한다.”
바에자가 시린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이를 드러냈다. 또 다른 바에자를 눈앞에서 본 그의 머릿속엔 이제 분노밖에 남은 게 없었다.
“어?”
주변을 의미 없이 두리번거리던 타크마의 눈에 이 냉동실의 운전 장치인 듯한 큰 패널과 거대한 냉동기가 보였다. 일행은 기뻐하며 그리로 달려가 위에 붙은 얼음을 손으로 닦아냈다.
“온도를 높일 수 있겠느냐?”
바에자의 물음에 기술요원이 언 손을 호호 불며 패널의 장치를 이것저것 만져보았다. 하지만 곧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온도를 지금 이 이상으로는 못 올리게 되어있습니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냉동기로 움직였지만 냉동기는 육중한 철창과 유리에 가로막혀 아예 접근할 수가 없어보였다.
“그럼 그렇지, 염병할, 그렇게 쉬울 리가 있나.”
바에자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일행 모두 손발이 완전히 마비되어 이젠 걷기도 쉽지 않았다. 그때, 기술요원이 이 패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온도 센서와 일행이 지고 있는 3개의 인화물질 상자, 육중한 냉동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몸뚱이를 담는 상자 몇 개가 반 채로 뚜껑이 열린 채 놓여있었다. 기술요원은 추위 때문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일행을 힐끔 돌아보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잘못된 정보로 일행 모두를 이 궁지에 빠뜨린 죄책감에 풀이 죽어서인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바에자가 그런 눈치를 못 본 척 퉁명스레 말했다.
“할 말 있으면 얼어 뒈지기 전에 눈치 보지 말고 해.”
“제가 크테시폰의 동력이 절반 이상 나갔다고 말씀드렸던가요?”
“그래.”
“크테시폰에서 동력을 가장 많이 먹는 곳이 추진기를 빼면 바로 이 냉동실입니다. 온도가 올라가면 이 많은 몸뚱이들의 보관에 문제가 되니 냉동기는 최우선 순위로 돌리고 있을 겁니다.”
“군더더기 설명 빼고 핵심만 말해!”
입이 굳어가던 바에자가 버럭 화를 냈다.
“여기 온도를 높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대신 ……화재감지기를 끈 후에 저 온도센서 밑에서 이 인화물질을 천천히 태우면 센서가 오작동하면서 온도를 낮추기 위해 냉동기가 최대출력으로 돌아갈 겁니다. 물론……실제론 이 방의 온도가 지금보다 훨씬 낮아지겠지만요.”
옆에서 듣던 타크마가 경악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더 낮춰? 미쳤냐! 우릴 다 얼려 죽이려고!”
“조용히 해.”
요원의 의도를 읽은 바에자가 타크마에게 손을 뻗었다. 이 요원은 당장 얼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온도를 높이는 것이 아닌, 정반대의 전혀 엉뚱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가능하겠냐?”
“제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아마 냉동장치는 동력의 최우선 순위에 있을 겁니다. 냉동기가 폭주하면 이미 고장난 주 동력에 과부하를 걸어 전체를 블랙아웃시켜 버릴 수 있을 겁니다.”
“크테시폰 전체를 멍텅구리 쇳덩어리로 만든다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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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자의 설욕전(?)이 어쩌다 살짝 꼬여버렸습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열흘 가까이 독감이 안 떨어져 죽을 맛인데 냉동실을 묘사하려니 빙의(?)까지 되어 더 죽을 맛입니다. 다음 회엔 아들을 쫓아 올라간 케스난이 등장합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지 마시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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