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98화 (1,093/1,132)

< -- 1098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이번 편에는 사정상 약간 엽기적인....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 거부감을 느끼는 분은 살포시 다음편을 눌러주셔도 됩니다. ^^;; (당장은 아직 다음편이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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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바에자가 냉동 보관실의 침입자들이 얼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각, 상자에 숨어있던 바에자는 틈새로 몰려오는 어마어마하게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뚜껑을 바싹 조였다. 상자 부근에도 인화물질로 불을 붙였지만 냉기가 직접 닿는 것만 겨우 막는 정도였다. 틈새로 보이는 벽 한쪽의 온도계는 이미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치를 한참 밑돌고 있었다.

“미친 짓입니다! 이러다 우리가 먼저 죽습니다!”

요원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바에자는 모른 척했다. 센서의 오작동과 함께 최대출력으로 돌아가는 냉동기의 바람에 온몸이 꽝꽝 얼어붙는 것 같았다. 크테시폰의 주 동력계가 무너지기 전에 자칫 일행이 먼저 얼어 죽을 판이었다. 냉동기의 큰 소음에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았다.

- 미친 짓이어야 놈들도 예상을 못 하지. -

바에자는 배에 부상을 입고 밑에 누워있는 요원을 팔이 부러져라 꽉 끌어안았다. 그때, 맹렬히 돌아가던 냉동기에서 피익 하며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바에자는 용기를 내어 상자 위쪽을 아주 조금 열어보았다. 순간 냉기만 확 몰려들 뿐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가늘게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조명이 잠시 켜졌다가 도로 꺼지고 몇 번을 반복하더니 아예 불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 조금만 기다려. -

바에자는 나머지 상자에 숨어있는 요원들에게 알렸다. 그리고는 희뿌연 빙무 너머로 문이 있는 자리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 문이 잠겼다는 붉은 등이 켜 있던 자리는 이제 불이 꺼져 잠겼는지 열렸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이 거대한 냉동실의 문 여러 곳에서 철커덩 하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누군가가 밖에서 들어오려 하는 게 분명했다. 바에자는 여러 개의 문 중 가장 가까운 한 개의 문만 노렸다.

- 사격 준비 -

바에자는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꾹 참고 마우저 끝을 상자 틈새로 슬쩍 내밀었다. 잠시 후, 그가 노리고 있는 냉동기 부근의 문이 휙 열리더니 깜깜한 어둠 속에서 두꺼운 방한 작업복과 랜턴을 든 무리가 뒤뚱거리며 둔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 발사! -

순간 바에자가 쏜 마우저탄이 제일 앞에서 들어선 누군가의 머리를 정통으로 꿰뚫었다. 뒤이어 들어오던 자들이 상자 안에 숨어있는 요원들이 쏜 볼트에 놀라 주저앉았다. 쓰러진 자들이 작업자인지, 군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둔한 방한복 때문에 몸을 피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손이 언 황실 요원들이 쏜 볼트도 오발이 나거나 그리 정확하지는 않았다.

- 그냥 나가!!! -

거의 맨몸에 가까운 타크마가 살을 찢는 추위를 뚫고 제일 먼저 뛰어나가 2명을 몸으로 들이받았다. 손이 굳어 칼을 쓸 수도 없었다.

“이놈들 아직 살아있었어?”

누군가의 비명이 어둠 속을 울렸다. 선두에서 야시 기능이 있는 스코프를 끼고 앞장서던 이들이 우르르 무너지면서 랜턴을 들고 뒤따라오던 작업자들이 짙은 어둠 속에서 혼비백산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끔찍한 추위 속에서 이들이 멀쩡히 살아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던 듯했다.

“어이쿠!”

좁은 선내 복도에서, 그것도 두꺼운 방한복을 입은 작업자들이 서로 부딪치며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모습이 사방에서 보였다. 방한복은 추위에서는 이들을 지켜주었지만 방한 따위는 포기하고 맨몸으로 죽기살기로 뛰어나오는 적 앞에서는 도리어 걸림돌이 되었다. 바에자와 타크마를 선두로 일행은 그들을 짓밟고, 혹은 뛰어넘어 이 살을 에는 냉동실을 단숨에 빠져나갔다.

“잡아! 놈들이 남쪽 복도로 간다!”

뒤늦게 냉동기 부근에 도착한 교단 바에자가 고함을 질렀지만 황제 측 바에자는 그를 놀리듯 이미 냉동기 부근의 문 너머로 도망친 후였다.

- 달려!! 멈추지 말고!! -

처음 들어왔단 문이 아니다 보니 일행도 어디에 있는 건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냉동기의 오작동으로 지금까지 근근이 동력을 공급하던 주 발전기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크테시폰 전체가 일시적으로 고철덩이가 되었고, 지금이야말로 이들이 달아나건, 혹은 목적을 성취하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사실이었다.

“응급 소화 장치도 당연히 맛이 갔겠지?”

타크마의 이 한 마디는 크테시폰에 최악의 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 기술요원이 등에 멘 배낭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인화물질이 아직 1개 남았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할지 빤하지.”

바에자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일행은 어둠 속에서 대충 감에 의지해 방향을 꺾었다. 그들은 중간에 누군지 정체도 모르는 사람 서넛과 마주쳤지만 조명이 꺼지고, 혼란에 빠진 와중에 맞은편에서 쫓기듯 달려오는 사람이 대체 누군지 이쪽도, 그쪽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여깁니다!”

그들의 앞에는 처음 공동구에서 빠져나올 때 보았던 가스 보관실이 마찬가지로 문이 고장 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올 때는 유심히 지켜보지 못했었지만 랜턴을 비추고 보니 실험실과 냉동실, 해동실에서 쓰는 갖은 가스가 탱크에 담겨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특히나 냉매가스와 액체질소, 각종 탄화수소, 심지어 수소가스까지 산처럼 쌓여있었다. 바에자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감돌았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케스난을 20층 영빈관까지 끌고 내려온 헤네티들은 그를 침대 위에 던져놓고는 위험천만한 갈고리가 박힌 손목을 비단끈으로 침대머리의 기둥에 묶어놓았다. 그리고는 나머지 한 손도 반대편에 묶으려 했다.

“놔둬. 한 손으로는 아무 짓도 못 할 테니까. 인형 같은 년 데리고 놀아봐야 재미도 없어.”

살름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툴툴거렸다. 그는 상처에 약을 발라주겠다는 침소 시녀를 짜증스레 쫓아내고는 울고 있는 케스난에게 다가가 그의 고개를 뒤로 휙 꺾어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지난번에도 살고 싶어 나랑 억지로 하느라 죽을 것 같았지? 오늘도 재미있는 상황극이야. 난 아주 못된 악당이고 넌 일방적으로 당하는 역할이지. 이번에 맘에 안 들게 굴면 네 아들 옆에 산 채로 꽂아 줄 테다.”

살름은 케스난의 드레스를 북 찢어내고 가슴을 드러냈다. 케스난이 싫다며 기를 쓰고 고개를 저었지만 악당이 되려고 단단히 맘먹은 살름은 그의 어깨를 비틀어 침대 위에 거칠게 내리누르고 바지를 벗었다.

“암사자는 지 새끼 물어 죽인 수컷하고 잘도 붙어먹던걸. 너도 엉덩이 대고 가만히나 있어.”

살름은 케스난의 턱을 붙들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는 그 안에 자신의 성기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케스난이 몸부림을 치며 뱉어내려 했지만 살름의 괴물 같은 손이 턱을 꽉 붙들고 있어 고개와 턱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거, 거러우…….”

케스난의 저주는 입 속에 파묻혀 빠져나오지도 못했다. 그때, 히죽거리는 살름의 얼굴이 깜박거리는 조명 속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조명은 곧 다시 되돌아왔다.

“엇? 뭐야?”

지레 놀란 살름이 고개를 들고 천장의 조명을 올려보았다. 불이 다시 꺼지더니 이번엔 한참을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잠시 후, 다시 불이 켜졌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수작이야!”

밑에서 크테시폰 수리를 하고 있는 작업자들 때문에 벌어진 문제라고 생각한 살름은 다시 케스난의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계속해, 딴생각 말고.”

그렇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이번엔 비상 상황을 알리는 사이렌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놀라고 당황한 살름이 케스난의 턱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고 협탁의 할룩스로 팔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에게 붙들려있던 이 독한 여자의 정체를 그때까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막 할룩스를 잡았던 그는 돌연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살름의 귀청을 찢는 비명이 방 안을 길게 울렸다. 그는 쥐고 있던 할룩스를 떨어뜨리며 그대로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조명이 깜박거리며 다시금 짧게 켜졌던 1초 남짓의 순간, 그는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보고 말았다. 성기가 잘려나간 다리 사이에서 피가 철철 흘러 바닥의 카펫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으, 으아아아…….”

살름이 바닥에 쓰러진 채 몸부림을 치며 방 한쪽의 비상벨을 눌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벨을 몇 번을 눌러도 작동이 되지 않았다.

“이, 이년이…….”

이성을 잃은 살름은 피가 줄줄 흐르는 사타구니를 붙들고 일어서서 침대 위에 여전히 묶여있는 케스난을 덮쳤다. 그 사이, 케스난은 살름의 성기를 퉤 뱉어내고는 치마 안에 숨겨놓았던 전기독침을 휙 뽑아 살름의 목에 대고 쏘았다. 아들을 코앞에서 잃은 케스난에겐 이제 더 이상 가릴 것도 없었다.

“아아악!”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마비된 살름이 침대 위에 쓰러지며 바들바들 떨었다. 한 손이 여전히 묶인 케스난은 기를 쓰고 팔을 뻗어 반쯤 벗겨진 살름의 바지춤에 있는 단검을 휙 뽑았다. 은 장식과 태양의 문장이 새겨진 이 단검은 이 변태의 허리춤에 있기는 과분할만큼 화려했다. 케스난은 손을 묶고 있는 비단끈을 힘을 주어 자르려 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대체 무엇으로 만든 날인지는 몰라도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비단끈이 써억 하고 단번에 썰려나갔다.

풀려난 케스난은 여전히 침대 위에 뻗어있는 살름을 걷어차 바닥에 떨어뜨렸다. 방 안에 또다시 깜박이며 불이 들어왔다가 도로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하지만 사이렌은 여전히 귀청을 찢을 듯 울리고 있었다.

“암사자처럼 엉덩이 대고 가만히나 있으라고?”

케스난은 군용 스코프를 더듬더듬 꺼내어 끼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는 전기충격에 몸이 굳은 살름이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떨며 움직이지만 운동신경을 무력화시키는 독까지 온몸으로 퍼져 감각만 겨우 살아있을 뿐이었다.

“그럼 넌 숫사자처럼 니 물건이나 핥고 있어, 이 변태야.”

케스난은 잘린 살름의 성기를 그의 입 안에 처박고는 구둣굽으로 턱을 꽉 밟았다. 숨이 막힌 이 거구가 부들부들 떨며 저항했지만 지금의 케스난에게 자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는 자비를 애원하며 내미는 살름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그곳엔 둥근 돌이 박힌 마구스의 백금팔찌가 반짝이고 있었다.

“현신? 웃기고 자빠졌네!”

때마침 불이 켜졌다. 케스난은 공포에 질린 채 훤히 열려있는 그의 손목에 칼을 푹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마치 도축업자가 가축의 다리를 잘라내듯, 그의 관절 사이로 칼을 빙 돌려 손을 뼛속까지 도려냈다. 자신의 손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는 살름의 눈빛과 얼굴색이 하얗게 변해갔다.

“애엄마 칼질 솜씨가 어떠냐?”

케스난은 잘린 손목을 약간 남은 힘줄과 신경, 핏줄 째로 확 잡아 뽑았다. 토막이 난 그의 손과 함께 손목의 살 속에 박혀있던 마구스 팔찌도 쨍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살름이 얼굴을 기괴하게 찡그리며 바닥에서 의미 없이 뒹굴었다. 케스난은 잘라낸 손을 그의 입 안에 마저 힘껏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숨이 끊겨 고개가 뒤로 툭 넘어가는 모습을 씩씩거리며 지켜보았다.

아들의 살인자를 보며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던 케스난은 누군가 밖에서 문을 쾅쾅 두들기고 있는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퍼뜩 차렸다. 손은 온통 피투성이이고 옷은 찢겨 너덜거리고 있었다. 밖에서 나는 소리를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조금 전 살름에게서 쫓겨난 그의 시녀였다.

“발렌틴?”

그의 머릿속에서 아들의 마지막 비명이 떠나지를 않았다.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아들의 시신을 이곳에 둔 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스코프를 끼어서 자신에게만 앞이 보이는 것일 뿐 크테시폰 안은 이미 암흑천지였다.

“기다려, 엄마가 갈게.”

그는 바닥에 떨어진 살름의 마구스 팔찌를 주워들고 그 안쪽에 아직 굳지 않은 살름의 피를 잔뜩 묻혔다. 이 팔찌의 정체와 사용법에 관해선 황제에게 들은 일이 있었지만 예상대로 풀려줄 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는 이제 두 발 남은 전기독침을 꽉 쥐고 문 앞으로 다가가 숨을 가다듬었다. 그는 제발 밖에 헤네티만은 없기를 바랐다.

“현신님! 현신님 계십니까! 크테시폰의 동력이 나갔습니다! 비상동력이 있는 26층으로 빨리 오시라는…….”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 랜턴을 들고 있던 시녀가 무심결에 빛을 겨눈 순간, 그가 본 건 한 손에 웬 펜 모양 막대를, 나머지 한 손에 피로 범벅이 된 손에 마구스 팔찌를 들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혀, 현신께선…….”

시녀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뺨에 상대가 쏜 전극이 지직거리며 날아와 꽂혔다.

“흐읍!!!”

시녀는 비명조차 못 지른 채 자신의 주군처럼 자리에 픽 쓰러지고 말았다. 케스난은 쓰러지는 시녀를 방 안에 던져놓고 문을 닫은 후, 크테시폰 영빈관의 복도를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은 이미 며칠이나 지낸 만큼 그 어디보다도 익숙했다. 그는 아직 더운 살름의 피가 묻은 팔찌를 품에 꽉 끌어안고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발밑에 희미한 비상등이 켜 있지만 그저 길이 어딘지만 알려줄 뿐 상대가 누군지, 손에 묻은 것이 피인지 그냥 얼룩인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비켜! 비키지 못해!”

케스난은 마주친 누군가를 거칠게 밀어내며 악을 썼다. 크테시폰의 내빈들이 머무는 영빈관 복도는 돌연 꺼진 조명과 사이렌에 놀라 몰려나온 사람들로 엉망진창이었다.

“선창으로 내려가야 하는 거 아냐!!!”

“염병할! 엘리베이터가 먹통이야! 어디로 가라는 거야!!!”

“황실 특공대가 들어온 건 혹시 아닐까?”

케스난은 사방에서 잡다하게 들리는 소음에서 귀를 막은 채 언젠가 살름과 함께 간 일이 있던 보안계단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마구스와 고위 신관들이 유사시에 탈출로로 이용하는 길이지만 그만큼 아무나 드나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람들의 북적거리는 복도에서 빠져나온 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비상동력으로 유지되는 잠금장치가 붉은 불이 켜진 채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제발 열려라.”

케스난은 살름의 아직 축축한 피가 묻어있는 팔찌를 잠금장치에 가져갔다. 어두운 곳에서 보니 현신의 신선한 피가 묻은 팔찌가 아직은 흐릿하나마 빛을 내고 있었다. 긴장되는 짧은 순간이 지난 후, 마구스의 존재를 인식한 잠금장치가 탁 소리를 내며 풀렸다.

“헉, 헉.”

케스난은 팔찌가 마르지 않도록 옷 안에 꽁꽁 감싸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들 발렌틴이 말뚝에 묶여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는 모습에 계속 눈가를 맴돌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맨발로 숨이 넘어가도록 16층까지 뛰어내려온 그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성직자나 내빈들이 주로 있는 위층보다 보안 수준이 낮은 하층부는 더 엉망이었다. 이곳 역시 비상조명을 빼면 암흑천지였다. 랜턴을 들고 뛰어다니는 작업자들도 보였고, ‘냉동기’를 외치며 악을 쓰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승무원을 제외한 일반인들은 선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거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찌된 일이냐며 승무원을 붙들기도 했다.

“홀, 메인 홀이 어디야!!!”

케스난은 마주오던 승무원 차림의 아무나 붙들고 다짜고짜 물었다. 랜턴을 들고, 공구 벨트를 매고 있던 그 기관실 승무원은 케스난의 손발에 묻은 피에 기겁을 했지만 멍한 얼굴로 반사적으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쭉 가시면…….”

케스난은 그대로 메인 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착륙사고로 보조동력기가 멈춘 상태에서 혼자서 크테시폰의 그 많은 동력을 겨우겨우 받치고 있던 메인 제너레이터가 냉동기의 과부하로 작동을 멈췄다는 것 따위는 당장 그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죽은 아들을 거두어 나가거나, 최소한 함께 죽는 것 말고는 생각할 여지조차 없었다. 교단 무리들이 살름의 죽음을 알았다 해도 일단은 영빈관이 있는 위층만을 차단한 채 케스난을 찾고 있을 터였다.

멀리 메인 홀의 큰 양쪽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렌틴!”

케스난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확 열어젖혔다. 모두가 드나드는 공용 시설이라 잠금장치 같은 건 없었다. 아들을 찾는 케스난의 고함이 10층 높이도 더 되는 어마어마한 공간을 메아리치며 맴돌았다.

“발렌틴!!! 엄마가…….”

상처투성이가 된 케스난의 맨발이 바닥에 딱 달라붙었다. 그는 조금 전 아들 발렌틴을 빼앗겼던 웅장한 홀의 입구에 서 있었다. 지난번 수십 명의 사형수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 들어왔던 바로 그 문이었다. 말뚝이 꽂힌 단상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유령처럼 흔들리고 있는 2개의 랜턴 불빛이 보였다. 아이와 어른의 얍 얍 하는 기합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발렌틴?”

딱 한 발 남은 독침을 손에 꽉 쥔 케스난이 다친 발을 비틀거리며 단상으로 다가갔다. 단상 밑에서 흔들거리고 있든 2개의 랜턴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케스난은 군용 스코프를 벗고 랜턴 불빛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걸음은 조금씩 더 빨라졌다.

“엄마?”

불빛으로 칼싸움 놀이를 하고 있던 발렌틴이 케스난을 휙 돌아보았다. 그는 랜턴에 비추는 엄마의 모습에 후다닥 달려왔다. 케스난도 한쪽 무릎을 꿇고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린 아들이 피투성이가 된 엄마의 뺨에 몇 번이나 얼굴을 부벼댔다.

“엄마, 왜 이래? 어디 다쳤어?”

그때, 6척이 훨씬 넘는 큰 키의 여자가 뚜벅뚜벅 이 모자에게로 걸어왔다. 케스난은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전기독침을 그쪽을 향해 얼른 겨누었다. 상대가 무기를 들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그 여자는 조금 전의 아이 같은 목소리를 얼른 감추고는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대한 현신께 여쭈었더니 크게 화를 내시며 아이를 해치지 말라고…….”

하페즈는 누더기가 된 케스난의 옷과 아버지의 주먹질에 찢긴 얼굴, 손에 범벅이 된 피를 보고는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다. 한 발 늦은 것을 깨달은 그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케스난의 독침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독침을 쥔 케스난은 자신이 죽인 남자와는 사뭇 다른 그 딸의 반짝거리는 눈빛과 기품 넘치는 얼굴을 올려보았다. 아이를 죽이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갈등하던 하페즈가 결국 대신관을 끌어들여 아이를 구해낸 게 분명했다. 전기독침 한 번만 당기면 이 여자도 그 아비의 뒤를 밟게 할 수 있지만 천하의 케스난도 이번만은 차마 쏠 수가 없었다.

망설이던 케스난은 독침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가슴에 품고 있던 살름의 태양 단검과 마구스 팔찌를 하페즈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신은 이미 당신에게 깃들어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 순간부로 새로운 샤마시 마구스가 된 하페즈는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케스난은 가슴에 손을 모아 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아들과 함께 돌아섰다. 혼자 남겨진 하페즈는 손을 꼭 잡고 떠나는 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억지로 참으려 하고 있지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울음도, 드러나는 슬픔도 없었다. 시체 냄새로 가득한 이 웅장한 홀에는 새로운 마구스의 슬픔어린 침묵과 떠나는 모자의 발자국 소리만 흘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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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 있었던 [얘들아 톱 하나 가져와라]에 이어.....케스난이 또 한건 저질렀습니다.

케스난이 잘했다고 생각하시면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이라도~~~( ̄∇ ̄)ブ~~★

출판본 완결본인 3부 7, 8권은 600~700페이지 이상의 두꺼운 책 2권으로 낼 예정입니다. (대신 특수 압축지를 써서 두께는 줄이려 합니다.) 이번엔 연재분에 빠진 에피소드들이 굉장히 많아 내용이 많이 방대해졌습니다.

3권을 2권으로 묶은 분량이라 인쇄비는 3권 몫이 들어 책 가격이 그만큼 올라갈 것 같습니다. 3권으로 내는 꼼수를 쓰는 대신 2권으로 솔직하게 가격을 올려받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올려받아도 이전 출판만큼 팔린다고 치면 손해가 좀 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대신 구매하신 분들께 답례할 이벤트도 하나 생각중에 있습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인터파크, T스토어, 올레eBook, 리디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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