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99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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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자와 타크마는 당초 들어왔던 공동구를 허겁지겁 기어서 나아갔다. 이젠 깊이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부터는 사느냐 죽느냐의 시간싸움이었다. 바에자는 케스난에게서 받은 쪽지지도를 펼쳐보았다. 함정이었는지는 몰라도 지도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여기쯤이면 되겠다.”
제일 뒤에 따라오던 요원이 등에 지고 온 가스탱크를 비틀어 열었다. 탱크가 열리며 폭발성 가스가 공동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니 빨리 가십시오, 부딪쳐서 불꽃 생기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일행은 혹 몸을 최대한 낮추고 공동구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공동구에는 이미 이들이 뿌린 가스가 꽉 들어찬 상태이고, 누군가 제대로 불만 당기면 끝이었다.
“2분 남았습니다.”
앞서가는 타크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뒤따라오는 일행을 재촉했다.
“저 때문에……저 버리고 가셔도 됩니다.”
배를 다친 요원이 희미해지는 의식을 가다듬으며 애원했다. 바에자와 동료 요원들이 가스실에서 찾은 큰 주머니에 그를 묶어 질질 끌고 가느라 속도가 점점 느려져 일행의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러다 가스실이 터지면…….”
“닥치랬다.”
앞에서 주머니를 끌고 가던 바에자가 대뜸 몸을 돌려 그 요원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놀란 부상병은 그제야 조용해졌다.
“1분 남았다.”
바에자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 시계는 가스실의 탱크 더미 밑에 설치해 놓은 고체 인화물질에 불이 붙는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일단 불이 붙으면 1차 폭발로 가스실에 채운 가스에 불이 날 거다. 화재 때문에 온도가 올라가 임계치가 되면 2차로 가스실 탱크들이 차례로 터지면서 진짜 불꽃 쇼가 벌어질 거야.”
공동구의 거의 끝에 다다른 일행의 앞에 바깥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적이 있을까요?”
- 매복이 분명 있을 거다. 우리가 나갈 곳은 여기밖에 없으니까. -
바에자의 목소리가 일행 모두의 귀가 아닌 머리를 울렸다. 바에자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쓱 닦아내고는 마우저를 꺼내 쥐었다.
- 하지만 루토하고 코런덤들은 없을걸. 아마 그년이 다른 곳으로 보냈겠지. -
바에자가 마우저의 탄창을 확인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교단에 남은 바에자가 자신과 루토, 혹은 코런덤을 마주칠 수 있게 시나리오를 짰을 리가 없었다. 그가 알면서도 적의 매복에 일부러 기어든 이유였다.
제일 선두의 타크마는 일행이 처음 들어왔던, 착륙 사고로 외피가 찢겨나갔던 곳을 흘끔 내다보았다. 외피를 때우는 공사를 위해 빼곡하게 설치되어 작업용 비계는 여전했지만 한 시간 전까지 바글거리던 작업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매복을 모른 척 공동구를 슬그머니 나섰다. 그와 동시에 복도 곳곳 틈새에 매복하고 있는 에시마 교단 헤네티들의 머릿속에 익숙한 지시가 전해졌다.
- 사격 중지. 숨어있지 말고 복도로 나와라. -
명령을 받은 헤네티들은 어리둥절해졌지만 바에자의 익숙한 말투이고, 머릿속으로 바로 전해지는 분명한 그의 지시였다. 그들은 매복해 있던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나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쉿.”
타크마와 보안국 요원들은 당장 저들을 쏘아 죽이고픈 욕망을 꽉 누르며 바로 그들 코앞을 아무렇지 않은 듯 가로질러 비계로 걷기 시작했다.
- 뭐야, 너희 뭐 하는 짓이야! 쏘지 않고 뭐 해! -
뒤이어 다른 바에자의 정반대 지시가 방금 모습을 드러낸 헤네티들에게 전해졌다.
“예에?”
당황한 헤네티들은 무심결에 교단 바에자가 숨어있는 뒤쪽의 소화기함 쪽을 휙 돌아보았다.
-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서 있어라. -
이번엔 황제 측 바에자가 마우저를 번쩍 쳐들고 소화기함을 겨누었다.
- 저놈을 쏘지 않고 뭐 해!!! -
- 움직이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
완전히 모순된 두 명령 속에서 판단력을 잃은 에시마 헤네티들은 쏘지도, 안 쏘지도 못한 채 황실 일행에게 비계까지 도망칠 천금 같은 시간을 주고 말았다. 그제야 황제 측 바에자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음을 눈치챈 교단 바에자가 참다못해 소화기함 뒤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우저를 겨누고 ‘진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멍청이들! 바로 저놈이 가짜라고!!! 당장 쏴!”
“누가 할 소리를!!!”
황제 측 바에자도 얼굴에 쓴 마스크를 확 벗어던지며 상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양쪽이 쏜 마우저가 서로를 향해 공중을 갈랐지만 이번엔 양쪽 모두 상대를 파악하고 있던 만큼, 그리 정확하지는 못했다. 교단 바에자는 소화기함 모퉁이를 맞고 튕긴 도탄에 가슴을 스치고 벌렁 주저앉았고, 황제 측 바에자도 왼팔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헤네티들의 귀에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내 상대니까 쏘는 놈은 죽인다!!! -
헤네티들은 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더 혼란에 빠졌다. 눈치 빠른 몇몇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쓰러진 황제 측 바에자에게 석궁과 마우저를 날렸지만 그들이 머뭇거리고 쏘지 못한 몇 초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타크마는 부상을 입고 쓰러진 바에자를 번개같이 끌어안고 작업용 비계로 몸을 날렸다.
“꽉 잡고 계십시오!”
긴 팔다리에 키 크고 날렵한 타크마가 체조선수처럼 비계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한 층을 그대로 훌쩍 뛰어내렸다. 순간, 바에자의 손목에 찬 타이머에서 점화시간을 알리는 불이 켜졌다.
“저놈 쫓지 않고 뭐 해!!!”
교단 바에자가 가슴의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벌떡 일어나 헤네티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목소리’가 진짜 지휘관의 것임을 확인한 헤네티들이 뒤늦게 공동구 출구와 비계로 달려가며 볼트와 마우저를 쏘아댔다. 그렇지만 채 몇 발 쏘지도 않아, 그들은 발밑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뭐지?”
그들이 서로 마주본 순간, 공동구 안쪽에서 터져나온 시뻘건 불빛이 헤네티들을 공중으로 날려버리고 이미 찢겨 있던 크테시폰의 측면으로 무시무시한 불길을 내뿜었다. 가스실에서 공동구로, 복도로 터져 나온 화염이 크테시폰의 후미, 13, 14층을 뒤덮으며 퍼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열기가 불길과 충격파를 타고 확 스쳐 지나갔다.
“우익!!!”
소화함 뒤에 숨어있던 바에자는 반사적으로 상자 안으로 몸을 날렸다.
첫 화염이 한바탕 지난 후, 바에자는 소화함 틈새로 슬며시 눈을 내밀었다. 크테시폰의 기자재들이 충격에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방에 먼지처럼 날리고 있고, 너덜너덜해진 공동구에선 충격으로 수도관이 터졌는지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염병할! 그 썩을 놈!! 아직도 안 죽었어!!!”
폭발이 일단 지났다고 생각한 바에자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소화함을 빠져나갔다. 검은 연기로 앞이 거의 보이지 않고, 곳곳에 화재가 나서 타들어가고 있는 듯했지만 가장 큰 위기는 넘긴 듯했다. 하지만 달아나버린 황제 편 바에자 일행은 선내의 연기와 바깥의 검은 모래폭풍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염병할!!! 저 개새끼들이!!!”
바에자는 소화함에 있던 소화기를 꺼내 일어섰다.
“괜찮냐!”
바에자가 소화기를 들고 쓰러진 부하들 사이로 뛰어갔다. 크테시폰의 동력이 죽어 화재경보는 물론 소화장치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바에자가 할룩스를 빼들고 루토를 불러냈다. 그에겐 엉뚱한 명령을 주어 위층으로 보내놓은 상태였다.
“이봐! 그쪽은 어떠냐! 소방대는 어디 있고!”
“모르겠습니다. 그냥 큰 충격이 한 번 휩쓸고……어찌된 것인지는 여기보다는 그쪽에서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루토도 얼떨떨한 목소리였다. 바에자도 불이 정확히 어디서 시작된 건지, 어떻게 꺼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황실 특공대를 잡기 위해 13층과 14층을 거의 비워놓아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알 수가 없었다.
“혀, 현신니임…….”
어딘가에서 신음과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문득 뒤를 돌아본 바에자는 조명이 꺼진 어두운 복도에서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현신님……이 불……당장 꺼야 합니다.”
얼굴과 손발, 다리에 중화상을 입은 연구원 한 명이 당장 쓰러질 듯 걸어와서는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바에자가 그자의 멱살을 덥석 붙들고 물었다.
“불이 어디서 난 거냐! 어디어디가 타고 있는 거야!!!”
“연구소 블록 중앙의 가스실이 타고 있습니다. 안이 너무 뜨거워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공동구도 파손되어 약품실에 물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헤네티들 목 뒤에 설치하는 마그네슘과 알루미늄 분말까지 공기와 수분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대로 놔두면…….”
바에자의 눈이 확 커졌다. 그는 할룩스를 빼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 소방대를 13층의 연구실과 냉동실로 보내! 빨리!!!”
그는 연구원을 눕혀놓고 크테시폰 안쪽으로 헐레벌떡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발짝 가지 않아, 그는 찢긴 공동구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마치 마녀 1백 명, 아니 1천 명이 가성으로 울부짖는 것 같았다. 조금 전 있었던 첫 폭발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소리였다.
“이런…….”
그는 지금 크테시폰 중앙으로 달려갈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달아나!!!”
바에자는 먼저 도망간 황실 특공대들을 쫓아 크테시폰의 외피 찢긴 곳의 비계로 몸을 날렸다. 그의 뒤를 바싹 쫓아온 마녀의 울부짖음은 고막을 찢는 굉음으로 돌변해 등 뒤를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뒷덜미를 따라잡힌 바에자는 조심이고 뭐고 없이 비계 파이프를 손으로 붙잡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이 찢겨 피가 흘렀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아악!”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량에 등 뒤를 받친 것 같은 충격이 그의 등 뒤를 후려치면서 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그가 느낀 건 온 천지를 뒤덮은 어마어마한 불길과 살갗이 파르르 떨릴 만큼 어마어마한 굉음이었다. 그 짧은 순간, 그는 어쩌면 크테시폰에 최후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황제 측 바에자가 교단 바에자에게서 도망치던 그 시각, 아직 크테시폰 안에 있는 케스난은 아들의 손을 잡고 어둠과 혼란에 빠진 된 크테시폰의 16층 복도를 필사적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그가 아이를 데리고 메인 홀을 빠져나왔을 때, 그는 선체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런 정전에 놀라 복도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진동에 불안에 떨었지만 어찌하라는 지시도, 아무런 방송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때, 발렌틴이 무언가 킁킁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불났나봐.”
케스난이 코끝에 신경을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아직 그의 감각엔 딱히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바에자 현신은 안 잡혔나?’
케스난은 함께 들어온 바에자 일행에게도 당연히 불상사가 벌어졌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그들이 성공적으로 불을 낸 건지, 아니면 매복에 걸려 싸우다가 일이 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나가야 돼, 빨리 따라와.”
케스난은 아이의 손목을 부러져라 쥐고 가장 가까운 선미 쪽 계단을 향했다. 나가는 출구는 1층의 선창 꽁무니에 있으니 어떡해서든 그리로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잘 따라오던 발렌틴이 계단 앞에서 갑자기 저항을 하며 엄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이리로 가지 마.”
“왜? 빨리 따라와!”
“이쪽이 더 뜨거워, 여기서 무슨 일이 났나봐.”
케스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해 보니 바에자 일행의 표적인 연구소 블록이 배의 뒷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케스난의 코에는 아직 느껴지는 것이 없지만 이번만은 아이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방향을 돌려 우현 쪽 계단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아이의 존재는 그에겐 걸림돌이기보다 도리어 무기였다. 사람들은 겁에 질린 어린아이를 데리고 달리는 엄마의 모습에 앞을 비켜주었고, 심지어 경비병도 아이가 다쳤다며 울부짖는 피투성이 엄마의 호소에 계단 방향을 손으로 알려주기까지 했다. 어찌저찌 계단에 도착한 케스난은 허겁지겁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가 다시 힘을 주며 저항했다.
“엄마, 이 밑에도 불났나봐. 탄내 나. 더운 공기도 올라오는 것 같아.”
때마침 승무원들 모두가 기다리던 선내 방송이 지직거리며 울려 퍼졌다.
- 현재 13층과 14층 연구소 블록에 화재가 발생해 진화 중이다. 해당 층 통과를 금지하며, 응급요원들은 소화용구를 갖추고 12층과 15층의 블록 경계에 집결할 것. -
“엄마, 아래층 불 나서 지나지 말래잖아.”
발렌틴은 계단을 계속 내려가려는 엄마의 손을 붙들고 저항했다. 13, 14층이면 겨우 두 층 아래이고, 불은 위와 옆으로 번지고 있을 테니 무사히 지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불이 났어도 지금 나가야 돼. 당장.”
케스난은 아랑곳없이 아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저항하던 아이도 이번엔 군말 없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15층에 도착한 순간, 케스난은 밑에서 올라오는 연기와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마구스를 죽인 그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못 내려가고 위층에 묶였다가 교단에 잡혀죽으나, 내려가다가 불에 타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엄마 믿어.”
모래폭풍에서 쓰던 마스크로 입가를 가린 케스난은 아이를 옆에 꽉 붙이고 열기가 올라오는 14층으로 뛰어내려갔다.
“흐읍!”
계단을 내려온 케스난이 기겁을 했다. 선미 쪽에서 몰려온 검은 연기가 이미 복도를 꽉 채우고 있었다. 처음 가려 했던 계단으로 갔었더라면 여기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한 곳과 마주쳤을 것이 뻔했다. 케스난은 아들의 팔뚝을 쥐고 한 층을 더 내려갔다.
“엄마!”
발렌틴이 엄마의 팔을 꽉 안았다. 13층 계단 부근은 이미 불지옥이었다. 계단과 바닥, 벽 양옆의 솟구치는 불길만 보일 뿐 그 외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케스난은 다리가 굳어버린 아이를 거칠게 잡아끌며 사납게 외쳤다.
“핏줄 값도 못 하다니! 군말 말고 따라오지 못해!!!”
케스난은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을 그제야 떠올렸지만 이제와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는 불타고 있는 계단과 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악을 쓰고 내려갔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뛸 수도 없었다. 불 위를 밟은 맨발이 익어가고 치맛자락에 불이 붙는 것을 느꼈지만 기를 쓰고 견디며 계단을 필사적으로 내려갔다.
“엄마 조심해.”
잠시 떨었던 아이도 엄마의 팔을 꽉 잡고 뒤를 따라갔다. 케스난은 아들의 물음에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갑자기 옆에서 커진 불을 본 케스난은 아이를 번쩍 안아 자신의 몸으로 감싸고 불 옆을 훌쩍 뛰어서 넘어갔다.
“으익!”
그 순간, 이미 화상을 입은 발바닥 밑에 무언가를 밟은 케스난은 13층과 12층 사이의 계단참을 헛디디고 미끄러지며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엄마, 조심해!!!”
품에 안긴 발렌틴도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이번엔 아들이 엄마의 어깨를 꽉 감싸 안고 있었다. 얼떨결에 12층까지 굴러 떨어진 케스난이 억지로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 역시 가스로 차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일단 뜨거운 화염이 있는 층은 지나온 듯했다.
그런데 이 층에도 못지않게 나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의 찢어지는 고함이 들려왔다.
“고물 쪽은 이미 옮겨 붙었어!!!”
“좌현에도 불이야!!!”
“환기구에서 연기가 나와! 제기랄!!”
12층 안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13, 14층을 태우고 있는 불이 아래로까지 번지고 있는 듯했다. 10층에서 12층은 연구원들의 숙소라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공황상태에서 몰려나온 인파는 쓰러져 있는 모자를 걷어차거나 짓밟으며 계속 지나갔다.
“엄마! 조심해! 일어나요!”
인파에 밀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던 케스난은 누군가 어깨를 받치고 힘껏 일으켜 세워 어깨에 들쳐 메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바닥에 끌린 순간, 발목에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아, 아아악.”
케스난이 부르르 떨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계단을 구르면서 왼쪽 발목이 바깥으로 완전히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웬 작은 손이 그의 겨드랑이를 덥석 끌어안았다.
“엄마, 조금만 참아요. 내가 지켜줄게.”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를 끄집어낸 발렌틴은 5척(150㎝) 조금 넘는 작은 몸으로 한 뼘이 넘게 큰 엄마를 어깨에 불끈 짊어지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케스난은 자기도 모르게 아이의 목을 꽉 안았다. 힘이 들어간 아들의 단단한 어깨와 목이 든든했다.
“그분께서 보시면 기뻐하실 텐데…….”
“8층이야, 엄마, 좀만 참아.”
발렌틴은 이성을 잃고 계단을 내려가는 인파 속에서 기를 쓰고 자리를 만들며 엄마의 몸을 추스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공기는 한결 나아졌지만 케스난은 뒤틀린 발목 때문에 여전히 고통에 떨고 있었다. 도망치는 사람들과, 불을 끄려 뛰어올라가는 소방대원들이 계단에서 거칠게 몸싸움을 벌였다.
“비켜요! 우리 엄마 다쳤다고요!!!”
아이는 그 와중에도 어른들 사이로 기를 쓰고 길을 내며 빠져나가 2층을 지나고, 마지막으로 1층 선창에 발을 디뎠다. 바깥과 이어진 문이 있는 이곳은 불을 끌 준비를 하는 사람들, 위층에서 도망쳐온 사람들로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그 와중에 헤네티들이 사방에서 고함을 지르며 질서를 유지하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계단을 다 내려온 발렌틴은 그제야 엄마를 내려놓고 어깨로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엄마, 어디로 가요? 이제 어디로 가야 돼요?”
“밖으로, 선미 쪽 해치로 나가.”
발렌틴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밀치고 막 해치로 움직이려 했다. 이때 코런덤의 군청색 제복 차림의 헤네티가 불쑥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 짓을 저지르고 어디로 가시려고?”
놀란 발렌틴의 걸음이 딱 얼어붙었다. 위층에서 벌어진 일을 아는 자가 분명했다. 케스난은 아이와 케스난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동료를 부르려는 헤네티의 손등에 마지막 독침을 당겼다.
“으윽!”
전기충격에 놀란 헤네티가 발렌틴의 뒷덜미를 쥔 손을 놓치며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발에 주저앉던 적들과는 달리 이 X는 그 와중에도 케스난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케스난이 코런덤의 손등을 갈고리로 콱 찍으며 악을 썼다.
“넌 달아나!”
케스난이 아이를 밀었지만 발렌틴은 차마 엄마를 두고 도망치지는 못했다. 발렌틴은 쓰러진 코런덤의 뒷덜미에 달려들어 귀를 다짜고짜 물어뜯었다.
“으아아악!”
아이에게 귀를 뜯긴 코런덤의 비명이 선창을 울렸다. 화재에 놀라 혼비백산 흩어지던 사람들까지도 일제히 돌아보게 만들 만큼 큰 소리였다. 사람들의 관심 사이로 웬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곳엔 작업자 차림새의 호리호리한 남자 한 명이 소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X는 목 뒤에 달라붙은 꼬마를 떼어달라며 손짓하려 했다.
“미안.”
그 순간, 그 남자, 자말이 든 소화기에서 독한 소화액이 확 뿜어 나와 X의 얼굴을 뒤덮어버렸다. 그 사이, 남자와 똑같은 작업자 차림의 두 사람이 케스난과 발렌틴을 덥석 낚아 선창에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말은 독침을 맞고, 귀를 뜯기고, 소화액까지 뒤집어쓰고 휘청거리는 헤네티의 머리를 소화기로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뛰기 시작했다.
“빨리!!! 뒷문으로!!!”
독한 소화액을 쓰고 주저앉았던 코런덤도 뒤늦게 일어나 쫓으려 했지만 눈에 들어간 소화액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말이 던진 소화기에 발이 걸려 엎어지고 말았다. 그는 선창의 인파 사이로 도망치는 자말 일행을 가리키며 할룩스를 빼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저, 저 새끼들, 꼬마하고 외팔이 여자 데리고 도망가는 무리 붙잡아!!!”
케스난을 구해낸 자말은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건 아랑곳없이 선창에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거칠게 헤치며 선창 출구로 뛰었다. 그들은 선창 한쪽에 세워놓았던 더러운 트라이크에 훌쩍 올라탔다.
“괜찮으십니까? 그분께서 어떡해서든 두 분을 꼭 구해내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긴 2차로 다시 폭발할 테니 빨리…….”
또다시 크테시폰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에 케스난과 자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번 진동은 조금 전 13층과 14층에 화재를 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발렌틴을 뒤에 앉힌 자말이 부웅 하는 귀를 찢는 엔진 소리와 바퀴 미끄러지는 마찰음을 내며 선창의 사람들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조심하고 말고를 따질 여유는 없었다. 세 대의 트라이크는 영문도 모른 채 흩어지는 인파 사이를 미친 듯 폭주했다.
“저, 저놈들 막…….”
선창 입구에서 자말 일행에게 석궁이나 마우저를 쏘려던 경비병들도 선체가 지진이라도 맞은 듯 흔들리는 상황에서 경비병들도 정면으로 미친 듯 질주해오는 3대의 트라이크까지 막을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날아간 한 발의 마우저가 자말 바로 뒤를 따라가던 트라이크를 스쳤다.
“으익!”
겨드랑이에 마우저를 맞은 요원이 휘청거리며 트라이크가 중심을 잃었지만 바로 뒤에 케스난을 앉힌 그 요원은 그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스로틀을 더 깊숙이 밟았다.
“나가! 나가라고!!!”
무심코 선창 바깥쪽 창문을 내다본 자말은 선체 바깥에서 시뻘건 불길이 그들과 경주하듯 몰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염병할!!!”
자말의 트라이크가 넘어지는 경비병들을 짓밟으며 크테시폰의 주 출구인 선창의 선미 쪽 출구로 펑 소리를 내고 튀어나갔다. 뒤이어 나머지 2대도 살이 떨리는 엔진 소리로 사방을 울리며 크테시폰의 1층을 빠져나왔다. 뒤이어 꽈광 하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며 엄청난 충격파가 몰려와 맹렬히 도망치는 3대의 트라이크 뒷부분을 후려쳤다. 순간 뒷바퀴가 살짝 들리며 중심을 잃고 좌우로 휘청거렸다.
“으익!!!”
뒤에 앉은 발렌틴이 자말의 허리를 끊어져라 꽉 안았다. 첫 폭발에 놀라 나와 있던 사람들이 충격에 날아가 주저앉았고, 심지어 그 지독하던 검은 모래폭풍까지 멀리로 확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트라이크를 가까스로 바로잡은 자말은 그제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크테시폰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자말의 얼굴에 이 지독한 어둠을 산산이 조각내는 시뻘건 불빛과 열기가 반사되고 있었다.
“우와우!!!”
자말이 손바닥으로 계기판을 탁 치며 고함을 질렀다. 뒤쪽 중간층에서 시작된 거대한 폭발이 시뻘건 화염과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연구소 블록은 물론 맞닿은 부분의 메인 블록까지 파편으로 만들어 공중에 산산이 흩어놓고 있었다. 얼마나 망가졌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공중에 비처럼 쏟아지는 크고 작은 파편 무더기만으로도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몇몇 사람들이 떨어지는 파편에 맞아 쓰러지거나 이성을 잃고 도망치고 있었다.
“끝장이다!!! 이놈들아!!!”
자말은 거의 4분의 1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크테시폰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였다. 제국 최대의 웅장함을 자랑했던 크테시폰은 심장부에서 폭발한 수소가스와 각종 화공약품의 연쇄폭발에 어느새 제국 최대의 고철덩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구소의 가연성 탱크를, 무기 제조시설의 화공약품을 순서대로 건드리며 연쇄폭발을 계속 일으켰다. 멀리 황제가 있는 제플린 산 위에서도 보이고 남을 어마어마한 대폭발이었다.
“아주 죄다 박살이 나 버려라!!! 이놈들아!!”
그때, 공중에서 떨어진 정체모를 쇳덩이가 쿵 소리를 내며 앞에 떨어지면서 놀란 자말이 허겁지겁 방향을 틀었다. 폭발로 공중에 높게 솟구쳤던 파편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지면서 이젠 크테시폰 뿐만이 아니고 주변 일대까지 또 다른 전쟁터가 되었다. 이 와중에 감히 이들을 찾아내어 쫓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군인도, 지휘관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검은 모래폭풍 너머에서 검은 그림자 몇 개가 뒤를 바싹 따라붙고 있었다. 놀라 무심결에 무기를 집으려 했던 자말은 머릿속을 울리는 익숙한 소리에 얼른 무기를 거두었다.
- 계속 가!!! -
바에자와, 그를 구하러 갔던 산토스가 트라이크를 몰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이고 있었다. 냉동실에서 전사한 4명을 뺀 11명이 속속 뒤에 따라붙으며 크테시폰의 폭발과 모래폭풍이 겹치며 온통 난장판이 된 칼데아군 진영 동쪽 끄트머리를 질주했다.
“동쪽 산으로 올라갑니다! 따라오세요!”
지리에 익숙한 산토스가 트라이크에 속도를 붙여 앞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직 채 철조망도 완성되지 않아 야광 테이프만 세워놓은 숙영지 경계를 그대로 휭 뚫고 지나가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검은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분지 평원 너머로 모습을 감추며 칼데아군과 교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후, 이곳에서 이들의 모습을 다시 본 사람은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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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가장 화끈(?)하게 마무리한 에피소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편은 끝나는 부분이 애매해서 좀 길어졌네요;;; 계산해보니 다음편은 좀 짧아질 것 같군요.
어쨌든 엔딩으로 잘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출판본은 엔딩 부분 마지막 얼개를 맞추는 작업이 어려워서 고생중입니다;; 이게 끝나야 공지를 올리는데;;;
그냥 가시지 말고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이라도~~~(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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