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0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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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제후군 7만과 서부제후군 7만의 선단이 도착했습니다.”
하임달 공략군을 맡은 슈로 기사단장 릴라크는 사령선 지휘소의 투명한 창밖 스페이스에 점점이 별처럼 나타나는 수많은 선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공략의 사령선은 황제와 황후가 볼토 트라우제의 반란을 진압했던 [1번함]이었다. 지금 이들이 서 있는 이곳도 당시 황후 아메스와 황빈 베아트릭스가 파냐드의 반역도들과 목숨을 건 혈전을 벌였던 바로 그 오벨리스크였다.
오벨리스크 상층부에 모인 지휘부에는 그레이오팔이고 재무대신인 밀리타, 이번 제2의 하임달 결전에서 가디언 부대를 맡을 제파가 함께 서서 선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넨 감회가 새롭겠어.”
제파는 혹시 악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을 슬쩍 흘겼지만 이 짓궂은 무장이 정말로 악의로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아주 많이요.”
제파가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지난 하임달의 결전에서 근위대의 일원으로 싸웠었고, 오르마즈의 최후의 돌격을 저지하고 근위대를 궤멸의 위기에서 구해낸 당시의 1등 공신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의 후손인 황제의 밑에서 당시의 동맹군이었던 남부와 맞서 싸워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황제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파는 꼭 참전시켜라]라고 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장군님 부군은 별 말씀 없으시고요?”
제파의 반격에 릴라크도 눈을 흘겼다. 그 역시도 카나르의 막내아들인 남편 루시도프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내심 신경이 쓰였지만 그보다는 남편이 아버지 카나르에게서 받은 상처가 더 컸다. 골수 유학자인 남편은 반역을 꿈꾸는 아버지 앞에서 충신의 도리에 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다가 ‘네 마누라 간수나 잘 해라’라며 흠씬 두들겨 맞고 집에 돌아와 내내 우울했다. 그리고는 이번 출정을 나서는 아내 릴라크에게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 외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실 황실군에는 자신 말고도 ‘반역의 가문’인 플라칼 가 출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황빈 베아트릭스부터 시작해 슬레이프니르의 루코프나 달리도 플라칼 가의 혈통이지만 이들 모두 33년 전 애당초 한 번 가문에서 내쳐졌던 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었다. 그러니 지금 또다시 그런다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황제는 당시도 이들을 믿어주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황상께선 괜찮으시답니까?”
“글쎄, 따로 연락 없는 걸 보니 별일 없겠지. 나도 빨리 원정군 사령관 딱지 좀 떼고 기사단장으로 날아다니고 싶은데.”
릴라크가 입을 삐죽거렸다. 이번 원정에서 사령관인 그의 역할은 이곳에서 황실군과 서부, 북부의 동맹군을 모두 이끌고 하임달의 황제 앞에 데려다놓는 것이었다. 그의 역할은 황제가 최고사령관 역할을 넘겨받는 순간 끝이 나고, 그 후엔 슈로기사단장으로 기병대를 이끌어야 했다. 최소한 계획에 따르면 그랬다.
“사령관이랍시고 갖은 보고에 서류로 치이는 건 영 취향이 아냐.”
“그래도 이 많은 최정예군을 한 번에 이끌어보는 게 어딥니까.”
릴라크가 비로소 픽 웃었다. 이번 동맹군에 속해 있는 황실군 1, 3군단은 과거 근위대의 창군 당시부터 있었던 만큼 황실군 내에서 자부심이 가장 높은 정예 보병군단이었다. 이후 1군단은 황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3군단도 항상 가장 위험한 곳에 주둔하며 경쟁적인 쌍벽을 이루었다. 슈로 기사단의 중장기병 1만과 슬레이프니르의 경기병 1만도 칼데아군의 기병보다는 분명 우위에 있었다. 여기에 극한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하는 사나운 에키트 족 1만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칼데아군이 가장 두려워할 부대는 황제의 친위부대인 친위군에 모여 있었다. 제국을 통틀어 황제만이 보유한 황실 가디언군단 1만은 예나 지금이나 제후들에겐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거기에 아샤드 경이 황제에게 바친 크바르나-시라즈 군단에서 지난 1진으로 출발 못 한 1천 이상이 함께하고 있었다.
최소한 질로는 제국 최강의 부대를 모두 모아놓은 셈이지만 이번에 출발하는 황실군-친위군을 모두 합쳐도 7만이 조금 넘는 정도니 칼데아군에 숫자로는 상대가 아니었다. 여기에 7만씩의 서부군과 북부군을 합친다 해도 40만에 육박하는 칼데아군에 비하면 절반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북부 보병대 6만과 기병 1만 도착했음을 보고 드립니다.”
먼저 통신이 연결된 타슈카 라코타 장군의 얼굴이 나타났다. 타슈카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북부군은 이전 못지않게 용맹하고 남부에 대한 적개심도 높지만 오르마즈 경께서 계셨던 때와는 달리 통일되게 내세울 명장이 아직 없습니다. 황상께서 직접 지휘하신다면 몰라도 제후군별로 너도나도 목소리가 높아 다루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 친구들 지휘할 사람은 이미 하임달에 가 있네.”
타슈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르마즈가 있던 시절 북부 장병들은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북부의 명장 계보는 하임달에서 치명타를 입었고, 근위대가 130여 년간 북부에 엄격한 군비통제를 가하면서 사실상 맥이 끊긴 상태였다.
자유분방한 북부인들은 지금까지도 누군가 강력하게 이끌지 않으면 ―먼 옛날 초기의 북부연합군처럼― 너도나도 도끼만 들고 날뛰는 난장판을 만들기가 일쑤였다. 30여 년 전, 카렐이 그들의 기백을 잠시 이전으로 돌려놓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강력한 지휘관이 없으면 모래알로 돌변하는 이전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최고제후 세네피스는 이전의 강병을 되찾기 위해 황실군 못지않은 최고의 갑주와 무기로 무장을 시키고, 젊은 장교를 길러냈지만 아직 실전경험도 없는데다 카리스마 넘치는 최고지휘관의 부재는 제후군 전체에 큰 구멍이었다. 세네피스가 어린 주페와 마리안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웬만한 지휘관은 이네들 기질을 감당 못 할 겁니다. 최고의 명장을 붙여주지 않으면…….”
타슈카는 자신의 고향인 북부의 장병들에게 행여 별 볼일 없는 무장이 배치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이번 원정군의 웬만한 부대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무장들을 지휘관으로 배정받았지만 북부군만 지휘관이 없는 상태였다. 굳이 따지자면 예르마크 경이 남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전 부하들과 직접 칼을 맞대는 대신 황도에 남아 장태자와 황궁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걸. 오르마즈 경도 인정했던 최고 중 최고였으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무장을 딱히 떠올릴 수 없었던 타슈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계속 물을 시간은 없었다. 테나토에서 서부군을 이끌고 온 황비 네페티가 사령실에 연결되면서 황실 지휘부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 꿇어앉았다.
릴라크는 갑옷을 입고 있는 네페티의 모습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황비 전하, 이젠 위험한 일은 소장들에게 맡겨두시고 안전한 황궁에서…….”
“황상께서 내게 하임달에 오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네페티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망토자락을 확 여미었다.
‘어휴, 또 시작이네.’
릴라크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얄궂은 인연인지는 몰라도, 지난 제위전쟁 말미에서도 황제의 명령까지 사칭해가며 적의 심장에 들어가는 릴라크를 억지로 뒤따라와서는 자칫 일을 크게 망칠 뻔했던 것이 네페티였다. 그때의 악몽이 남은 릴라크로서는 저 상전을 모셔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때, 엔지니어의 날카로운 고함이 사령실을 울렸다.
“1분 남았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스페이스의 한 지점, 워프루트 출구를 나타내는 1백여 개의 비컨들을 향했다. 지난 2달간, 친위군 공병대가 수리하고 보강해 놓은 워프루트 스페이스 시설들이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창 위의 화면에는 황궁 지하에 있는 삼각루트 통제소의 계기판이 비쳐지고 있었다. 1만에서 시작한 숫자가 이제 1이 남아 깜박이고 있었다. 황제령, 서부, 북부에서 집결한 선단이 비컨 주변에서 깜박거리고 빛을 내며 마치 작은 별들처럼 보였다.
“30초 남았습니다!”
“엔진 작동.”
사령선 [1번함]의 함교를 맡은 에이스 조종사 베네루스가 스로틀을 올렸다. 화면의 통제소 계기판이 깜박거리며 붉은 색으로 바뀌더니 숫자가 0으로 바뀌었다. 거의 동시에, 비컨들의 빛이 수백, 수천 배로 밝아지며 워프루트의 입구를 밝혔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릴라크가 시계를 보았다. 그의 시계는 이미 고향행성, 하임달 9번의 북극 제플린 산에 맞춰져 있었다.
“현지 시각 아침 9시다. 황상께서 계신 곳으로 출발한다.”
1번함의 엔진이 최대로 작동되며 워프루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선단 50여 척도 그 뒤로 줄을 이어 따랐다.
“현지 시각 저녁 6시에 다시 보자.”
워프루트 개통으로 바빠진 건 황제령의 군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시설이 좋은 황궁에서 사제의 키 제거수술을 받기로 한 하임달의 세네피스 역시 1분이라도 빨리 황제령으로 달려가야 했다. 제플린 산 북쪽 절벽의 길이 뚫렸고, 적이 세닉 가의 패전과 크테시폰의 폭발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지금이야말로 세네피스가 행성 밖으로 빠져나갈 기회였다.
그런데 정작 세네피스는 승전에도 고사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세네피스는 황제의 상태를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크바르나 단장 아샤드 경도 황궁에 돌아가 수술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을 뿐이었다.
“곧 워프루트가 열릴 겁니다. 혹시라도 적이 이 북쪽 루트를 눈치채기 전에 지금 나가야 합니다. 불릿에 워프루트를 이용하시면 황궁까지 5시간이면 갑니다. 수술 시간 고려해도 이틀 후면 사제의 키를 갖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철성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다시 서쪽 동굴을 찾아온 아샤드 경이 억지로 웃으며 세네피스를 달래주려 했지만 황제에게 가지 못해 신경이 곤두선 세네피스에겐 소용이 없었다.
“그래, 키만 돌아오고 난 그 시간에 황궁 수술실에서 마취가 덜 풀려 헤롱대고 있겠지!!!”
씩씩대던 세네피스는 대뜸 아샤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가만, 왜 니사 라말라 박사는 왜 안 왔느냐?”
“예?”
아샤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카렐의 호언장담대로라면 세네피스의 척추 수술은 신경외과의인 니사가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세네피스와 함께 황궁에 함께 돌아가야 할 니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말해 봐라, 라말라 박사가 왜 안 왔냐고!!!”
눈치 빠른 세네피스의 지적에 아샤드 경이 대답을 못 하고 계속 머뭇거렸다. 세네피스 정도면 니사가 자리를 못 떠난다는 것에서 황제의 상태가 그만큼 최악이라는 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라말라 박사는 이곳에서 부상자가 많아…….”
“닥쳐라! 안 온 게 아니고 못 온 게 아니냐!!! 황상의 상태가 어떻길래!!!”
세네피스는 자신처럼 동굴을 못 떠나고 있는 주페와 마하, 마리안, 에스더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나 크바르나와 함께 방금 도착한 마하는 왜 여길 못 떠나게 하냐며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황상께서 가족들을 철성에 못 오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황상과 연락을 시켜주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샤드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의 미심쩍은 태도에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에스더의 표정까지도 함께 굳어버렸다. 아샤드는 두 명의 크바르나들에게 세네피스를 가리켜보였다.
“밖으로 모셔라. 주페 태자 저하, 황제령까지 다시 불릿을 몰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화가 난 세네피스는 마찬가지로 풀이 죽은 주페 태자와 함께 동굴의 방을 나섰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는 황제의 지금 상태를 모르고, 그가 아는 건 자신의 등에 박힌 키를 빨리 뽑아내야 황제가 산다는 것뿐이었다. 제플린 산 정상 부근에선 셔틀이 출발할 수 없으니 오늘 새벽, 마리안과 헨지가 굴 바깥을 이어놓은 구멍을 통해 산부터 내려가야 했다.
“여기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구멍 앞에서 기다리던 크바르나가 몸에 묶는 하네스를 내밀었다. 이 구멍은 이제 산 정상부를 외부와 연결하는 황실의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어른이 겨우 지나감직한 크기였던 북벽의 구멍은 이후 도착한 크바르나들이 장비를 동원해 거의 문짝 크기로 키워놓았고, 짐을 올리는 도르래까지 설치되어 북벽 밖에 정박한 장거리 수송선에서 군수품들을 마저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좀 흔들려도 안전하니 염려 마십시오.”
세네피스는 크바르나 병사와 함께 줄을 매고 여전히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깎아지른 북벽에 매달렸다. 안전하다고는 했지만 워낙에 모래폭풍이 강하고 심하게 흔들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차라리 보통 사람이라면 보이는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겠지만 시야가 훤한 세네피스의 그레이오팔 눈에는 20스타디아(3,000m) 가까운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그 밑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절벽 밑에는 5백의 크바르나-시라즈 군단을 태우고 온 황실의 수송선과 분견대 셔틀, 그리고 아주 작아 눈에 보일둥 말둥 한 푸른색 불릿이 보였다.
도르래가 풀리며 세네피스와 병사는 강풍 속에서 절벽을 계속 내려갔다. 두 사람이 중간쯤 내려갔을 무렵, 남쪽 하늘에서 웬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세네피스는 물론 줄에 함께 매달렸던 크바르나도 당황하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웬 거대한 형체가 산 남쪽에서 정상을 넘어오는 모습이 세네피스의 눈에 보였다.
“우리 편이 또 올 게 있냐?”
세네피스의 물음에 크바르나 병사가 당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답을 미처 듣기도 전에, 세네피스는 그 중형 수송선 옆에 새겨진 머리 셋 달린 용의 문장을 볼 수 있었다.
“맙소사, 교단 놈들이잖아.”
“내 이럴 줄 알았지.”
크테시폰의 병영 블록을 몰고 지난밤 내내 분지 주변을 뒤진 코런덤 여단장 사카는 제플린 산 북벽 너머에서 황실의 수송선과 등반 라인을 발견하고는 이를 갈았다. 철성을 공격하던 세닉 가에서 ‘철성 서쪽 동굴에서 정체불명의 수백의 X들이 몰려나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처음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제플린 산을 오르는 길은 둘뿐이었고, 둘 다 칼데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세닉 가의 충격적인 패전과 그 후폭풍이 지난 직후, 대신관 이디나는 ‘혹시 적이 다른 길을 찾아낸 것일지도 모르니 산 주변을 뒤져봐라’며 그를 내보냈다. 지독한 모래폭풍 때문에 제대로 된 정찰은 그간 엄두도 못 냈지만 그 정도의 병력이라면 분명 상당한 크기의 수송선을 타고 왔으리라는 생각에 그는 크테시폰의 병영 블록을 통째로 몰고나와 지난밤 내내 제플린 산 주변을 샅샅이 뒤졌었다.
“지난번 제플린 산 서쪽에서 놓쳤던 그 수송선입니다. 맙소사, 여기에 와 있을 줄이야.”
블록의 조종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옆에 선 사카의 표정이 분노가 스쳤다. 먼 옛날 문서만을 믿고 북벽을 미처 생각 못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당장 착륙해 공격한다.”
여전히 절벽 중간에 매달려있던 세네피스는 적의 수송선 블록이 옆을 휘익 스치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크게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함께 내려가는 크바르나가 몸을 감싸 준 덕분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워낙 진동이 커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었다. 위에서 지켜보는 아샤드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산 아래 정박 중인 수송선에서 아샤드에게 다급히 물어왔다.
“달아나야 합니까?”
아샤드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워프루트가 열리기 직전, 나름 최대한 빨리 세네피스를 출발시키겠다며 데려나왔지만 적이 이렇게 빨리 북벽 루트를 발견했으니 난감했다.
“황태후께서 타실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쪽에 우리 병력이 얼마나 있느냐?”
“주변 경계를 맡은 2개 분대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비전투원인 승무원들입니다.”
아샤드는 착륙을 하려 고도를 낮추고 있는 적 함선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적 수송선에 얼마나 탔는지는 몰라도 이대로 있다가는 착륙해 있는 수송선까지 모조리 붙잡힐 판이었다.
“내일 본대가 올 때까지 일단 퇴각해라.”
아샤드의 퇴각명령을 받은 황실 수송선은 미처 이곳에 올리지 못한 보급품들과 승무원들을 허겁지겁 태우고 해치를 닫았다. 그 옆에서 대기하던 분견대의 장거리 셔틀도 엔진을 켜고 출발했고, 주페가 몰고 온 초록색 불릿은 원격으로 제일 먼저 이륙했다. 내장재를 뜯어내고 아무 것도 싣지 않은 빈 불릿은 가볍게 이륙해 산 북쪽으로 서둘러 속도를 붙였다.
교단 수송선은 황실 수송선이 달아난 자리에 착륙해 병력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렵게 개척한 북벽의 루트가 단 몇 시간 만에 다시 막히는 순간이었다. 황실 수송선을 쫓아낸 그들은 바닥까지 늘어져 있는 황실군의 로프와 리프트 장치에 불을 질렀다.
“황태후 폐하를 끌어올려!! 빨리!!!”
크바르나 병사들이 도르래의 동력을 최고로 끌어올리고 여전히 절벽에 매달려있는 세네피스를 끌어올렸다. 강풍 속에서 절벽에 매달린 채 흔들리고 있던 세네피스는 온몸이 여기저기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며 가까스로 꼭대기의 구멍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땅을 디딘 세네피스는 아샤드 경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꼴 좋구나.”
“……죄송합니다.”
절벽에서 헛걸음만 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세네피스에게 아샤드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워프루트 개통과 함께 세네피스를 산 밖으로 내보낼 길이 막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서둘렀어야……. 저녁이면 여기에 20만이 넘는 황상의 본대가 도착할 테니 그들을 시켜서 이 길을 다시 뚫으면…….”
“닥쳐라.”
세네피스는 그의 변명을 듣지도 않은 채 하네스를 확 벗어던지고는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당황한 주페도 격분한 그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갔다.
동굴을 걷는 세네피스의 입 안에서 욕이 절로 새어나왔다.
“하루나 늦추라고? 하루나?”
세네피스는 이를 빠득 갈며 카렐과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던 사제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이런 초조함이 괜한 건 아니었다. 아무도 카렐의 근황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카렐이 대충 어느 방향에 있는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혹시라도 많이 아프지는 않은지 미세하게 전해져왔지만 어제부터는 그에게서 아무 느낌도 없었다. 마치 카렐이 이 세상에서 확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사제의 방에 도착한 그는 허름한 문을 비틀어 열었다. 안에 있던 에스더와 마하, 마리안이 그를 휙 돌아보았다. 세네피스 못지않게 황제 걱정에 안절부절 못 하던 에스더는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되신…….”
세네피스는 에스더와 주페, 마하와 마리안을 한 번씩 돌아보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가족밖에 없구나.”
순간 얼굴이 굳은 에스더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시도 때도 없이 비빈들에게 질투를 부리는 황태후지만, 최소한 황제에게 해가 되는 결정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네피스는 평소 눈길도 주지 않던 이들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끼리 철성으로 가자꾸나.”
세네피스는 이젠 더 이상 아랫것들을 믿을 맘이 없었다. 저들이 수술을 안 시켜준다면 직접 칼로 째서라도 키를 빼낼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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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테시폰의 불꽃쑈가 끝났고....이제 사제의 키 운명(?)이 결정되는 새 에피소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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