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1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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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데아군에게 3일차 저녁은 지옥과도 같았다. 검은 철성에 대한 첫 공격을 시도했던 세닉 가는 생각하기도 싫은 참패를 기록하고 돌아와 한참 기세가 오르려던 원정군의 사기를 반토막을 내 놓았다. 사실 세닉 가의 패전은 이런 대군의 원정에서 그리 큰 타격은 아니었다. 세닉 가는 원정군에서 주력부대도 아니고, 이렌느의 전사한 자녀들이 그리 무게감 있는 존재들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칼데아군의 패전 충격은 교단이 입은 피해에는 댈 바도 아니었다. 지독한 모래폭풍 속에서도 숙영지 전체에서 훤히 보였던 크테시폰의 폭발은 칼데아와 교단 장병들 모두를 경악에 빠지게 했고, 당연히 이길 것으로 믿었던 원정군의 자신감에도 큰 생채기를 내 놓았다. 그렇게 지독한 밤이 지나고, 있으나마나보다 조금 나은 햇살이 모래폭풍 사이로 비치면서, 지난밤의 참상이 하나 둘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남은 몸뚱이를 최대한 옮기는 중입니다.”
28층 함교에 선 이디나는 옆의 야투 박사가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선미 쪽의 처참한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미에 붙어있던 사각형의 연구소 블록은 폭발지점을 중심으로 윗부분이 완전히 날아가 마치 숟가락으로 퍼낸 듯 우묵하게 주변부만 남아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폭발지점 바로 아래의 12층부터 블록의 꼭대기인 22층까지 속살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무너지고 불에 탄 금속제 구조물과 내장재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이전에 무얼 하던 곳이었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나머지 5명의 마구스들도 날이 밝으며 조금씩 나타나는 참상에 할 말을 잃었지만 주인인 이디나만큼은 아니었다.
“지난밤 괜찮으셨는지요?”
야투 박사는 이디나의 불룩한 배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 정도도 괜찮지 못하면 그게 대신관의 혈통이냐?”
이디나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짜증스레 대답했다.
“몇 개나 건졌느냐?”
이디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12층 바닥까지 폭삭 주저앉은 13층에서는 연구원과 작업자들이 불에 타거나 산산조각이 나버린 상자들 가운데서 성한 것들을 가려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투 박사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냉동 상태에 있던 건 8할 이상 파손되었습니다. 다행히 상온보관 중이던 코런덤 몸은 1차 폭발 직후에 연구원들이 임기응변으로 강제 부활시켜 제 발로 탈출시켰습니다. 그 많은 캡슐을 다 끌어낼 시간이 없어서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2천 명 정도가 빠져나왔습니다.”
“그럼 그 2천 명은 지금 같은 코런덤이 2명씩 있다는 거냐?”
이디나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군사적인 불리함을 감수하고 코런덤을 ‘반드시 1명’만 유지하는 건 그들에게 부활한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코런덤 운영의 대원칙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폭발에서 육체를 구하느라 아직 원형이 죽지 않은 2천 정도를 강제로 살려놓았으니 거의 비슷한 기억, 같은 몸을 지닌 코런덤 쌍둥이 형제가 얼떨결에 생겨난 셈이었다. 야투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혹시 몰라 그들에겐 모두 낙인을 찍어 표시했습니다. 부대도 따로 편성해서 서로 못 만나게 하고 있고요. 그들 역시 위대한 현신께 충성스런 헤네티들입니다.”
“그건 알아.”
이디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육체를 다시 만들려면 얼마나 걸리냐?”
“줄기세포로 다시 분화시켜 처음부터 몸을 만들려면 두세 달 이상 걸립니다.”
야투 박사가 한 번 더 눈치를 보고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최신 기억을 자동으로 이식하는 데이터 장치도 완파되었습니다. 몸이 있어도 넣을 데이터가 없습니다. 전송장치도 완파되었고, 데이터도 열흘 전에 정기 백업해놓은 옛날 데이터가 전부입니다. 옛 데이터로 재생을 시킨다 해도 일정 교육이 필요할 겁니다.”
이디나가 눈을 감으며 무심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교단군의 가장 큰 강점이었던 ‘부활’ 기능을 최소 몇 달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일단 코런덤과 근위대의 기억을 새로 백업하고 있지만 어차피 전송장치가 없이는 무용지물입니다. 코윈에 있는 예비 전송장치를 최대한 빨리 뜯어 보내라고 연락했지만 해체하는 데만 사나흘 이상 걸릴 거라는 연락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문제는?”
이디나의 시선이 더 사나워졌다.
“오늘 중으로 비엔의 페스트 군단에 보낼 몸 5만 개가 준비 중이었는데 거의 다 잃은 것 같습니다. 그쪽은 데이터도 날려서 더 재생이 안 됩니다.”
이디나가 이마를 짚었다. 그는 웬만해서는 절망하는 모습을 보인 일이 없었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황실에서 좀비군단으로 부르는 페스트 군단 5만은 제네르가 공격하고 있는 비엔을 지키는 핵심 전력이었다.
“그러니까, 페스트 군단은 지금 있는 몸뚱이가 죽으면 끝이라는 뜻이냐?”
이디나는 흉측한 폭발 현장에서 시선을 움직여 황제가 있는 제플린 산 쪽을 돌아보았다. 옆에 선 사카가 침울해진 이디나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희 코런덤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디나가 놀란 표정으로 사카를 돌아보았다. 평소 말수도 거의 없고 윗사람에게도 듣기 좋은 말이라고는 해 주는 법이 없던 이 무뚝뚝한 사내가 돌연 끼어들어 이런 말을 하는 모습도 퍽이나 낯설었다.
“그대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코런덤들이 많이 낙담하긴 했나 봐.”
속내를 찔린 사카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디나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생에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었다는 것뿐이지 너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염려할 것 없다. 이번에 강제로 재생시킨 2천 명은 칼데아군 보병대에 보내서 황실군을 상대라는 걸 돕도록 해라. 쌍둥이들이 만나게 하는 일은 없게 해야지.”
“설마 며칠 새에 대규모 전투를 벌일 일은 없겠죠?”
야투 박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이 상황에서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는 재생을 못 하는 지금 이 상황에 황실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설마.”
가르시바가 몸을 떨었다.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칼데아군과 교단군에게 이곳은 그저 황제령을 치기 위해 한 발 거쳐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황제령에서 대군이 사라졌다지?”
이디나가 눈가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바로 몇 분 전, 이곳의 칼데아군과 교단 수뇌부에도 북부와 서부, 황제령의 이상동향이 전달되었다. 황실군과 친위군, 서부와 남부의 제후군까지 연합한 20만이 넘는 대군이 황제령에 집결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이곳의 지휘부도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차였다.
“아마 비엔 5번 행성에 원군을 보냈거나 6번 행성으로 갔겠죠. 거기 황빈이 군단 하나만 데리고 궁색하게 고립되어있다면서요.”
마구스 신분으로 이곳에 선 하페즈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네르가 지휘하는 10만이 넘는 황실군이 이미 5번 행성에 자리를 잡은 채 테나스 이그나토의 군대와 힘 싸움을 벌이는 중이고, 베아트릭스가 플라칼 가의 영지인 6번에서 플라칼 3군단과 함께 시간을 끌며 머물고 있으니 이참에 황제가 남부를 아예 끝장내겠다며 덤비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가르시바 마구스가 킬킬대며 뒤를 이었다.
“카나르 녀석은 도리어 그걸 바라는 모양입니다. 칼데아군의 견고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니까요. 대신 오늘 중이라도 철성을 되찾아 바로 수베르와 황제령으로 역습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모양이던걸요.”
제플린 산을 올려보는 이디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양쪽 모두 빈집이라 이건가? 사생결단이로군.”
네코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혼자 킬킬거리다가 가르시바의 눈짓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디로 간 건지는 몰라도, 황제가 그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면 황제령과 서부, 북부의 핵심 지역은 이제 사실상 텅텅 비었다는 뜻이었다. 이곳의 원정군 역시도 저 철성만 차지하면 그곳에 있는 통제소를 장악해 황제령을 바로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상황이니 서로가 서로의 심장을 겨눈 상황이었다.
“양쪽 모두 함께 상대의 심장을 친다면 칼데아군 쪽이 조금 더 유리하죠. 이놈들은 연합체라 따로 ‘심장’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지만 황실은 황실군 사령부와 황궁이라는 급소가 만천하에 드러나 있으니.”
“어쩌면 그 대군이 여기로 오는 것일 수도 있죠.”
모두의 놀란 시선이 이 황당하고 뚱딴지같은 의견을 내놓은 곳을 향했다. 그곳엔 지난밤의 폭발에서 등과 얼굴에 부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 나온 바에자가 얼굴과 몸에 붕대와 드레싱을 덕지덕지 붙인 채 풀죽은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수로요? 멀고 먼 길 달려서 6일 후에 도착한다고요?”
아트위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안 그래도 빤히 예상하고 있던 황실군 특공대의 기습조차 막지 못한 바에자에게 다른 마구스들, 특히나 이디나의 원망이 폭발 직전이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버린 바에자로서는 고개도 들기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요.”
공격적인 질문을 받은 바에자가 평소의 넘치는 자신감이 무색하게 더듬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황제가 삼각루트를 복구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황궁 지하에 놔두고 온 ‘또 다른 바에자’를 황제가 구해냈다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통제소 장치도 분명 함께 발견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황제의 삼각루트 복구가 실패했으리라는 그의 호언장담은 이미 깨진 상황이었다.
‘분명해, 그게 틀림없어.’
바에자는 끓는 속을 삭이며 한숨만 내쉬었다. 지난밤, 그는 병실에 누워 모든 것을 계산해 보았다. 황실 일행이 제플린 산 위의 철성을 죽어라고 지키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었고, 그들이 도착했던 날 양쪽 모두에서 루트 재건을 시도했다면 오늘내일 중으로 루트가 완공되리라는 계산도 충분히 가능했다.
‘황제 동맹군들이 여기로 오는 게 틀림없어.’
바에자가 머리를 싸쥐었다. 황제의 대군이 몇 시간 이내로 도착할 테니 당장이라도 말을 해야 하지만 자칫 황궁 지하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함께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어쩌면 제가 지난번 황궁 지하에서 끄고 온 삼각루트 장치를 놈들이 복구했을지도…….”
“그때는 다 잘 되었다더니……실패했을지 모른다는 거요?”
바에자답지 않은 자신 없는 태도에 마구스들의 의심에 찬 시선이 온통 쏠렸다. 특히나 개코 아프라스 야투 박사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그 늙은이의 시선을 본 바에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 저녁, 바에자는 크게 다친 몸을 무릅쓰고 응급실에서 무작정 빠져나와서는 크테시폰 주변부터 확인했었다. 그는 혹시라도 달아난 ‘또 다른 바에자’의 시체가 부근에서 발견되지 않을지 전전긍긍하며 주변을 뒤졌지만 도리어 그런 행동이 재생실 피해 상황을 확인하고 있던 야투 박사의 눈에 딱 띄고 말았다. 바에자는 ‘내 헤네티들이 다쳤는지 몰라서’라고 둘러댔고, 야투 박사도 ‘수고하십시오’라며 지나갔지만 그는 박사가 일부러 자신을 뒤쫓으며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냥 그럴지도 모르니 대비는 해야 한다는 것이죠.”
다른 마구스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지은 죄가 있던 바에자는 지레 더 당황해 서둘러 한 발 물러섰다. 야투 박사의 귀엣말을 들은 이디나가 어색해진 상황을 얼른 수습했다.
“바에자 현신의 뜻은 알겠소. 내 그럴 가능성도 고려해 볼 것이니 지난밤 잠도 못 주무신 현신들께선 돌아가 눈이라도 좀 붙이시오. 바에자 현신은 많이 다치셨으니 몸 좀 더 추스르시고요.”
일단 궁지에서 빠져나간 바에자가 무언가에 쫓기듯 허겁지겁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머지 마구스들도 투덜투덜거리며 함교를 나섰다.
“하페즈 현신.”
막 문을 나가던 하페즈가 멈칫하며 이디나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아침의 회동 내내 바에자 못지않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의 이런 태도가 그저 처음 마구스 신분으로 이 자리에 선 긴장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계 신탁을 받은 지 이미 400년이 넘은 그는 언제든 마구스에 올라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는 이미 마구스가 된 네코, 가르시바의 아들 누르와 함께 교단에서도 가장 잘 준비된 후계자였다. 말 그대로 얼떨결에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은 이디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 아이를 살려두라 했지 놓아주라 한 건 아닌 것 같소만?”
“……그 어미가 제게 전기충격기를 겨누어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팔찌를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는 하페즈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쳐다보던 이디나가 표정을 돌변하며 그의 넓은 어깨를 손으로 탁 쳤다.
“훗, 그렇군요. 그깟 꼬마의 목숨보다야 현신의 목숨이 백 배는 소중하지요. 잘 행동하시었소. 이제 현신으로 날 충실이 받들어주실 귀한 몸인데. 그나저나 경보병대 지휘에 아비 몸의 장례까지 치르게 되어 정신이 없으실 테니 빨리 가 보시오.”
이디나는 허겁지겁 멀어져가는 하페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손은 어느새 불룩한 배를 더듬고 있었다.
“내가 데리고 키우는 편이 나았을 텐데…….”
“위대한 현신이시여.”
야투 박사가 다시 바싹 다가서는 느낌에 이디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박사는 아트위야와 무어라 귀엣말을 나누고는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호드르 산의 발전소 폭발에서 살아 돌아온 때부터 뭔가 미심쩍기는 했습니다만…….”
이디나가 그 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트위야가 어깨를 으쓱하며 씁쓸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처음엔 바에자 현신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어서 두려워 팔찌를 못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었지 이런 것까지 생각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트위야와 눈짓을 한 번 나눈 야투 박사는 이디나에게 화질이 크게 망가진 사진 한 장을 내놓았다.
“에시마 교단 놈들이 혹시라도 우리 기술을 빼돌릴까 해서 상온보관실에 몰래 설치한 감시 카메라 화면입니다. 폭발에 크게 훼손되었지만 몇 컷은 겨우 건졌습니다.”
이디나가 눈에 힘을 주고 화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야투 박사는 이 대신관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폈지만 이 젊은 대신관은 다른 여느 때처럼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막판에 딱 한 마디 물었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냐?”
야투 박사도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알 수 있으면 저도 좋겠습니다.”
눈썰미 좋은 아트위야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자의 손등을 보셨습니까?”
“움?”
“바에자 현신의 손등엔 옛날 타르서스의 전투에서 얻은 흉터가 있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일부러 안 지우고 있었죠. 그런데 지난밤 엘리베이터에서 손목을 보여줄 때 확인해 보니 깨끗하더군요.”
이디나의 눈꼬리가 살짝 길어졌다.
“생각해 보니……황궁 지하에 다녀온 이후에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았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정말로 황제가 워프루트를 뚫었을지도 모르고요. 오늘이면 대충 계산이 맞습니다.”
“그래서 황실군이 이리로 올지도 모르겠다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 것이군.”
이디나는 함교의 다른 방향 창가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루토를 동반한 바에자가 아직 불편한 걸음으로 에시마 교단의 블록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럼 혹시 현신의 어미는 알아봤느냐? 일리안에 있는 걸로 아는데?”
“그게……한 달이 넘게 행방불명이라고 합니다.”
눈치빠른 야투 박사가 즉시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의 대답에 이디나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는 제플린 산이 있는 북쪽을 올려보며 입가에 힘을 꽉 주었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지, 그의 눈가가 의미 없이 여기저기 움직였다.
거의 십여 분만에 이디나가 입을 열었다.
“진짜 바에자든 아니든 그자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군. 카나르 그자에게 알려라. 황실군이 이리로 오고 있을지도 모르니 철성을 최대한 빨리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고.”
“재생장치가 고장이 나 단기전으로 가면 우리가 불리합니다.”
“철성에 황제가 직접 와 있다면 말이 다르지.”
그제야 아차 싶어진 야투 박사도 동시에 제플린 산을 올려보았다.
“맙소사, 양쪽에서 워프 루트를 열었다면 황제가 이미 저기에…….”
“철성 앞까지 길을 뚫으면 그 뒤는 우리가 공격하겠다고 전해라. 황실군은 카나르 그놈이 맡게 해.”
“알겠습니다.”
‘공격’이라는 말에, 이번엔 사카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황제령에서 황실의 동맹군 21만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그 시각, 카나르 황제는 송풍로 공사장이 있는 산 8부 능선에 와 있었다.
무차별로 인력을 쏟아 부은 대공사가 사흘째 이어지면서, 모래 밑에 완전히 파묻혔던 송풍로는 그새 거의 대부분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이번엔 밑에서 끌어올려 송풍로 옆에 쌓아놓은 모래가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다시 수천의 병력을 동원해 즉석에서 흙막이 벽까지 쌓아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하늘에서 보면 송풍로의 양옆을 마치 평행한 둑이 한 겹을 더 감싸고 있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수만, 수십만을 동시에 동원할 수 있는 칼데아군이 아니라면 이런 빠른 복구는 엄두도 못 냈을 대역사였다.
카나르는 언제 붕괴할지 몰라 위험하다는 엔지니어들의 만류도 무시한 채 송풍로 바닥까지 내려와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난 사흘간 붕괴사고만 대여섯 번이 있었고, 모래에 깔려 죽은 사역병들만 200명이 넘었다.
그렇지만 카나르는 ‘시간이 지체되어 전사할 숫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며 공사 강행을 지시했다. 그 소식에 일선 사역부대들의 분위기가 흉흉해지면서 그는 [송풍로 밑에서 일하는] 사역병들에게 노동자 열흘치 일당에 해당하는 위험수당을 얹어주기로 했지만 불만은 여전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이렇게 작업장까지 나와 얼굴을 보여주는 쇼라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걸 지었는지 몰라도 공사 하나는 진짜 끝내주게 해 놨답니다.”
함께 온 아들 헤즈가 단단한 인조석 벽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성분을 분석한 교단 기술자들 말이 오래된 곳은 8백 년이 넘었고 6백 년쯤 전에 세워진 곳도 있답니다. 붕괴되지 않도록 100척이 넘는 앵커를 산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수천 개를 박은 모양입니다.”
“그럼 이걸 200년 넘는 기간 동안 지은 거라고?”
카나르와 함께 온 마누엘이 혀를 내두르며 위를 올려보았다. 10층 건물 깊이의 송풍로는 주머니처럼 중간이 약간 넓어졌다가 꼭대기에서 다시 바싹 좁아져 밑에서 올려보면 하늘이 마치 긴 선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불안정할 수도 있는 구조인데도 벽에는 더러워진 흔적 뿐 금이 간 곳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제 얼마나 남은 거냐?”
마음이 급해진 카나르는 쓸데없는 구조 따위에서 곧 관심을 끊고 가장 궁금한 내용부터 다짜고짜 물었다. 공사를 지휘하는 교단 엔지니어가 대신 대답했다.
“철성까지는 이제 9할쯤 온 셈이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내로 개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카나르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감돌았다.
그때, 이전에도 이렌느를 화나게 했던 ‘벽돌만한’ 송화기를 든 통신병과 장교가 헐레벌떡 달려와 이번엔 전문을 내밀었다.
“대신관의 연락입니다.”
장교가 작은 목소리로 알렸다. 최소한 아직까지 이들이 교단과 손을 잡았다는 건 ‘공식적으로는’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카나르도 정치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가능한 이디나와의 직접 만남은 피한 채 전문으로 의사만 전달하는 중이었다.
쪽지를 본 카나르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출발했다는 20만이 넘는 황실군이 어쩌면 여기로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군.”
“예에? 비엔이 아니고요?”
일행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들도 황실군의 이동을 보고는 받았지만 당연히 이미 제네르가 가 있는 비엔으로 가는 추가병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저 자기네 정보원이라고 밖에는 근거가 안 적혀있는데……사실일까?”
“제가 들은 바로는 헛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마누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카나르가 무언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실군을 우리가 맡는 동안 철성에 대한 공격을 자기네가 하겠다는군.”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닐까요? 철성에 뭐 대단한 걸 숨겨놨다거나.”
의심 많은 헤즈가 두둑한 목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차피 철성은 우리가 그네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건데 그냥 하게 놔두죠. 까다롭게 굴지 말고 줄 건 확실하게 주고 시작합시다. 이렌느 경 말이 지금 철성에 있는 건 수백의 가디언들이라는데 플라칼 가 보병을 얼마나 처박으시려고요?”
교단에 친분이 각별한 마누엘이 빈정거렸다. 쓸데없는 의심으로 머뭇거리던 카나르와 헤즈도 철성에 있는 적병들이 X라는 말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럼 별 수 없군. 우린 철성까지 길만 내주고 물러나는 수밖에.”
카나르는 사뭇 아쉬운 얼굴로 모래 파내기 작업을 하고 있는 수많은 제후군 사역병들을 쳐다보았다. 잇속에 밝은 이렌느가 황금탑의 ‘떡고물’을 노리고 서둘러 공격했다가 망신을 당하고 돌아온 꼴을 보니 그도 저 끔찍한 고지대에 별로 올라가고픈 맘이 들지는 않았다.
그의 관심은 곧 분지 쪽으로 움직였다.
“20만의 병력이라면 분명 분지에서 우리랑 붙을 맘일 텐데, 그쯤이면 충분히 싸워볼만하겠지?”
카나르가 바삐 계산을 해 보았다. 이곳의 병력은 칼데아군 35만에 교단 쪽에서는 코런덤 3천, 옛 근위대 3만까지 합쳐 38만에 육박하니 황실이 서부와 북부제후들까지 탈탈 털어 데려온 병력도 그 절반 조금 넘을 뿐이었다. 헤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듣자하니 황실군은 그 중 7만밖에 안됩니다. 그쯤이면 교단의 옛 근위대하고 코런덤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상대할 만합니다. 서부와 북부의 제후군은 우리 수준이나 크게 다를 게 없거나 도리어 못하니 만만하죠. 그러니 별것 아닌…….”
목소리를 높이던 헤즈는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에 말꼬리를 흐렸다. 나머지 지휘부의 시선도 일제히 작업자들이 모래를 파내고 있는 위쪽을 향했다.
“또 붕괴냐?”
놀란 지휘부 사람들의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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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정으로 연재가 좀 늦었습니다.
세네피스는 대형사고(?)를 준비중이고, 슬슬 마지막 전투의 멍석이 깔리는 중입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없이 가시면 미워요~~~( ̄∇ ̄)ブ~~★
참고로, 봄부터 시작할 차기작의 가제는 [콜로니 : 사르코시스트 No.12]입니다. 아마 프리미엄이나 노블레스로 연재될 것 같습니다. 전자책은 가능한 동시에 내려 합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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