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02화 (1,097/1,132)

< -- 1102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

.

.

“또 붕괴냐?”

놀란 지휘부 사람들의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미 여러 번의 붕괴사고를 겪은 엔지니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붕괴하는 것하고는 뭔가 좀 다른데……, 어쨌든 빨리 올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포에 질린 지휘부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허겁지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정체불명의 진동이 이어졌지만 작업자들에게는 아직 철수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진동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이어졌다.

“대체 무슨 진동이야!!!”

카나르가 허겁지겁 위로 올라왔을 때, 송풍로 주변 지상 작업자들과 흙막이벽에 쓸 벽돌을 빚고 있던 사역병들 모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는 윗분들이 모두 올라온 후에야 지하의 작업자들에게 대피를 알리는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10층 깊이의 모래구덩이에서 층층이 삽질을 하고 있던 작업자들은 그제야 장비를 내던지고 혼비백산해 각자 구역의 사다리에 매달렸다. 진동이 이어지면서 헐겁게 쌓여있던 모래층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거센 진동에 모래가 무너지며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역병들이 모래에 쓸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길 보십시오!”

누군가의 고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산 정상부를 향했다. 찢어지는 굉음이 일순간 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허엇.”

웬만해서는 놀라는 일이 없던 카나르가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멀리 산 정상부에서 거대한 토네이도처럼 시커먼 모래줄기가 하늘 높이까지 솟구치고 있었다. 모래 기둥은 버섯 모양을 그리며 하늘에서 점점 넓어졌다.

“머리 조심하십시오!!!”

누군가가 비명처럼 외쳤다. 버섯구름을 타고 하늘 높이 솟구쳤던 흙무더기에서 무게가 많이 나가는 자갈들이 다시 땅으로 쏟아지면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났다. 지휘부 사람들도 쏟아지는 모래와 자갈을 피해 노새 마차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염병할! 투구 어디 있어!! 투구!!!”

무심결에 뒤를 올려보았던 마누엘은 이마에 무언가를 얻어맞고 벌렁 쓰러졌다.

“아버지!!!”

뒤따라오던 딸 클리멘트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아버지를 번쩍 업고 산 밑을 향해 뛰어갔다. 그 와중에도 땅이 흔들리는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클리멘트는 마차 바퀴 밑에 숨어 몸을 바싹 웅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에, 이건 도대체 뭐야?”

거대한 모래구름은 어느새 몇 배는 더 커져서 산 정상부와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뒤따라온 교단 엔지니어도 마차 밑에 몸을 숨기며 오래된 도면을 허겁지겁 펼쳐들었다. 도면과 모래기둥을 몇 번이나 번갈아 쳐다본 엔지니어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놈들이 철성의 터빈을 다시 돌리고 있나봅니다!!!”

“학장님의 공이십니다.”

방호 헬멧과 고글을 쓴 두 사람이 바로 그 버섯구름이 시작된 중심 가까운 곳에 태연히 서서 하늘로 맹렬히 솟구치는 거대한 모래기둥을 올려보고 있었다. 철성 안의 터빈이 10개의 파이프를 통해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강풍에 모래가 하늘로 쓸려 올라가면서 송풍로의 제일 꼭대기 부분부터 서서히 지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공이 아니고 저 남부 친구들의 공이 9할일세.”

한 손에 철제 우산을 든 코리온이 마스크를 고쳐 쓰며 평소 진지한 그답지 않게 빈정거렸다.

“지금까지 꽉 막혀있던 송풍로를 완력으로 뚫어주느라 수고하지 않았는가. 그나저나 선물이라고 너무 약소한 것 아닌가 싶구먼.”

우르르 하는 진동음이 나며 제일 아래쪽 모래층까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리온이 복구한 2번 터빈에서 맹렬히 뿜어내는 공기는 칼데아군이 아래쪽을 거의 파내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던 송풍로 모래를 공중에 불어 올려 모래 제거작업을 깨끗이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셀 줄은 몰랐는걸요.”

사에나는 한 발을 슬쩍 내밀고 12개 파이프가 입을 벌리고 있는 송풍로 출구를 조심스레 내려다보았다. 워낙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10개의 송풍구에서 들려오는 귀를 찢는 굉음만으로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크!”

헬멧 위에 제법 큰 돌을 맞은 사에나가 얼른 뒤로 물러나 코리온의 철망 우산 밑으로 피했다. 제일 아래쪽의 가장 큰 구멍 2개는 1번 터빈과 연결되어있어 여전히 사용할 수 없지만 10개의 구멍에서 불어내는 공기로도 송풍로에 남은 모래와 흙, 심지어 자잘한 돌까지도 불어 올리기는 충분했다. 덕분에 안 그래도 모래폭풍으로 시계가 최악이던 산 정상부는 자기 발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새카만 암흑에 뒤덮여버렸다.

“눈 깜짝할 새 오밤중이 되었군요.”

“멋진 밤이지 않은가.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어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면 좋지 않으리.”

코리온의 뜬금없고 생뚱맞은 시조 타령에 황당해진 사에나가 슬쩍 눈을 흘겼다. 그는 말 그대로 새카매진 하늘을 올려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몇 시간이나 이 상태로 있겠습니까?”

“7시간 정도? 그 후엔 분지부터 점점 맑아지기 시작하겠지. 여기 꼭대기까지 맑아지려면 좀 더 걸릴 테고.”

“21만의 우리 원정군이 분지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 정도가 되겠습니까?”

“글쎄.”

천재 코리온도 이 질문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황제령의 황실 원정군 출발까지 2번 터빈을 고친다는 것도, 출발에 맞춰 터빈을 켜서 수백 년간 숨죽이고 있던 송풍로를 숨 쉬게 하는 것도 모두 계획대로였다. 모래폭풍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면 하임달의 결전 당시처럼 깨끗한 하늘과 공기 아래에서 황실 원정군과 칼데아군과 벌일 한 판의 마지막 대결만이 남아있었다.

그때, 큼직한 헬멧을 쓴 크바르나 병사가 언덕 위에서 헐레벌떡 내려와 알렸다.

“서쪽 동굴에 계시던 황태후와 세 황자분들께서 행방불명되셨습니다!”

“황태후께서?”

사에나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지만 코리온은 아니었다. 그는 먼지가 잔뜩 앉은 방호복을 추스르며 다시 언덕 위로 향했다.

“되돌아가야겠다. 내 할 일이 생길 것 같구나.”

철성에 주둔한 황실 사람들의 분위기는 지난 하루 내내 흉흉했다. 베흔은 본토에 있는 정적 페로까지 동원해 ‘단 1분이라도 빨리 사제의 키를 빼내라’며 세네피스를 억류하고 있는 아샤드를 압박하는 중이고, 아샤드 역시 세네피스가 황제령으로 돌아가 안전하게 수술을 받아야 한다며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내분의 와중에 정작 세네피스 자신의 목소리는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벽에 있은 코런덤의 기습은 세네피스에게 위기라기보다는 기회였다. 지난밤 크테시폰의 폭발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교단 코런덤들은 새벽 무렵부터 북벽의 작은 구멍으로 화풀이에 가까운 무자비한 포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제플린 산의 북벽을 마주보는 산 정상에 사정거리가 40스타디아나 되는 근위대 아나콘다를 설치하고 고작 현관문 크기의 동굴 구멍이 차가 드나들 만큼 커질 때까지 무차별로 포격을 퍼부어댔다.

쉴 새 없이 포격을 얻어맞은 서쪽 동굴은 진동과 굉음, 먼지로 견디기 힘들만큼 흔들렸다. 그 정도면 귀가 밝은 마리안이 귀가 아파 못 견디겠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마하는 먼지 때문에 더러워 못 참겠다고 짜증을 내도 이상할 것 없는 정도였다. 게다가 충격에 돌덩이가 떨어지고 지반이 흔들리며 안에 있는 누구라도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황제 가족들을 못 나오도록 묶어놓았던 크바르나들도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샤드는 혹시나 하는 맘에 크바르나 경호원을 둘이나 붙였지만 황자들, 그리고 세네피스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오판에 지독한 불운까지 겹쳤다.

송풍로에서 솟구쳐 오른 시커먼 모래폭풍은 언덕 밑의 칼데아군만 혼란에 빠뜨린 건 아니었다. 이미 모래폭풍으로 시계가 최악이던 정상 일대는 송풍로에서 날아오른 낙진까지 시커멓게 뒤덮으면서 친위군 병사들까지 완전히 장님으로 만들었다.

그 와중에 마하가 발이 아파 걷기 힘들다고 징징대며 크바르나 한 명에게 업혔고, 잠시 후엔 신기한 소리가 난다며 튀어나간 꼬마 마리안은 나머지 크바르나 병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놀란 병사가 꼬마를 쫓아갔고, 동생을 찾겠다며 주페가 허락도 안 받고 쫓아갔고, 다른 병사가 그들을 붙잡으려 잠시 한눈을 판 순간 마하와 세네피스가 사라져버렸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에스더는 허둥지둥 돌아온 크바르나에게 세네피스가 간 방향을 반대로 알려줘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감각이 뛰어난 크바르나들이지만 깜깜한 재 속에서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진 일가를 모두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에스더 귀인께선 괜찮으실까요?”

일행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주페가 동굴 쪽을 돌아보며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분이 황상을 제일로 뵙고 싶으실 텐데 이래도 되나 모르겠어요.”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으니 태자 너까지 신경쓸 이유 없다. 누구 하나는 남아있어야 했으니.”

세네피스가 차갑게 쏘아붙이며 마스크와 방풍망토를 바싹 여미었다. 하지만 속 깊은 주페는 여전히 편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야 우리보다 발이 느리던지 앞을 못 보셔서 그런 거지 어디 원해서 그러셨겠어요? 아까 표정이 너무 슬퍼 보이셨어요. 나중에라도 꼭 모셔와서 그분 수발하실 수 있게 해야 할 텐데.”

그때, 이번엔 마하가 냉큼 끼어들었다.

“방금 황상께서 가슴이 아프셨어요.”

“엉?”

황제 이야기에 지레 놀란 세네피스가 ‘어떻게?’라고 물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 역시 방금 전, 가슴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지만 고산증에 숨이 찬 것이 겹치며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었다.

마하는 이런 세네피스의 충격에 한술 더 보탰다.

“여기 오는 동안 세 번이나 그러셨어요.”

얼굴이 창백해진 세네피스는 못 들은 척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했다.

신중한 주페가 무조건 철성으로 돌아가고 보겠다는 세네피스의 막무가내 계획에 살짝 딴죽을 걸었다.

“우리끼리 철성에 다가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우리 편 누군가 적으로 오인하고 공격할 수도 있어요. 누가 마우저라도 쏘면 한 방에 죽을지도 몰라요.”

“부서지는 게 내 몸속에 든 사제의 키만 아니면 된다.”

부릅뜬 세네피스의 두 눈을 본 주페는 순간 온몸을 오싹하게 하는 한기까지 느꼈다.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세네피스는 아이들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앞장서서 성큼성큼 나아갔다.

주페와 마하가 그 뒤를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거리가 얼마나 남은 거죠?”

“글쎄, 1시간쯤 가면 되지 않나 싶다.”

주페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내 발끝도 제대로 안 보일 만큼 시커먼 재에 뒤덮여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오전이라는 시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냥 깜깜한 암흑 그 자체였다.

“앞이 보이세요?”

“이 위의 고개만 올라가면 철성이 보이겠지.”

세네피스는 움푹 팬 땅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행여 분견대나 크바르나와 마주쳤다가는 다시 동굴로 끌려갈 수도 있으니 도로로는 갈 수가 없었다. 이 4명의 R, X들은 길도 없는 정체불명의 언덕을 그저 앞장서는 세네피스 한 명만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잠깐만요.”

마리안이 세네피스의 옷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잔뜩 지친 세네피스가 마지못해 이 손녀를 휙 돌아보았다.

“왜?”

“저 앞에 사람들 소리 나요.”

그제야 움찔한 세네피스가 얼른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앞을 훤히 잘 보지만 딱히 군사훈련을 받은 일이 없어 숨어있는 군인들이나 참호 같은 것을 분간하지는 못했다. 마리안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확인한 세네피스는 크바르나 혹은 시라즈 여단 2명이 일행이 지나갈 오르막을 내려다보는 참호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역시 대낮의 짙은 어둠에 당혹해하고 있는 듯했다.

.

세네피스는 정찰병들을 피해 조금 더 험한 바위 밑으로 움직였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너덜지대를 올려본 세네피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히 아이들까지 데려왔다는 생각에 그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마리안이 또 그의 옷을 툭툭 당겼다.

“저기서도 소리 나요. 이번엔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은데요? ”

마리안이 손으로 너덜지대 위를 가리킨 순간, 세네피스는 지친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또?”

당황한 세네피스가 얼른 마리안의 손을 붙들고 뒤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주페가 그를 막아섰다.

“잠깐만요, 저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베흔은 뜬금없이 함께 나가자는 코리온의 제안에 내심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세네피스와 황자들의 실종 소식에 책임 소재를 놓고 아샤드와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있던 그는 코리온이 눈짓으로 바깥을 가리키자 처음엔 짜증부터 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같은 눈짓을 보냈고, 베흔은 시라즈 여단 병사 4명을 데리고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따라나선 길이었다.

“지금 어딘지 알고나 가는 겁니까?”

베흔은 철성을 나온 코리온이 서쪽의 이상한 골짜기로 걸음을 옮기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지금 온 곳은 비탈진 너덜지대 때문에 수비군들도 정찰할 때를 빼면 별로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베흔이 랜턴을 켜들려 하자 코리온이 얼른 손으로 저지했다.

“분란 일으키기 싫으면 켜지 않는 게 나을 걸세.”

그때, 베흔은 깜깜한 밑에서 들려오는 웬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에 움찔했다.

“위에 누구냐?”

세네피스의 소리에 지레 놀란 베흔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때, 웬 하얀 형체가 확 튀어나오더니 베흔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히이, 안녕하세요.”

베흔은 언젠가 본 듯한 어린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올려보고 있는 광경에 숨이 멎을 뻔했다. 자신을 처음 보고도 웃음부터 보인, 그의 생애 두 번째 아이였다.

“우와, 콧수염 멋있다. 아저씨가 베흔이시죠? 네피 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아, 맞다, 네피 할아버지가 저얼~대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라 했는데.”

“옹주.”

코리온은 인형 같은 아이를 보며 헤벌레해진 베흔에게서 마리안을 휙 떼어내고는 내리막 밑에 대고 말했다.

“여긴 모두 같은 편입니다. 올라오십시오. 황태후 폐하.”

먼지를 까맣게 뒤집어쓴 세네피스가 양쪽에서 주페와 마하의 도움을 받으며 너덜지대를 비틀비틀 걸어 올라왔다. 코리온과 마주친 세네피스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 그랬지? 내가 죽든 말든 눈 하나 깜짝 안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러기를 원하시면 기꺼이 그래 드리지요.”

코리온은 휙 돌아서며 철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베흔과 그를 따라온 시라즈 병사들도 세네피스의 일행을 재빨리 에워쌌다.

코리온과 세네피스 일행은 아샤드를 따르는 전(前) 크바르나들이 있는 곳을 피해 철성으로 향했다. 세네피스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상태가 어떠시냐?”

코리온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짧고 잦은 발작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간격이 점점 짧아져서 지금은 20분쯤 됩니다.”

“맙소사, 그걸 어떻게 견디신다고.”

세네피스가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고통스런 얼굴로 이마를 싸쥐었다.

평소보다 훨씬 짙어진 모래폭풍 아래 검은 철성의 모습이 세네피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깜깜한 밤과 같았다.

“그런데 날이 왜 이 모양이냐?”

“오늘 내일 중으로 결전이 있을 겁니다.”

베흔이 코리온의 손을 잡고 졸졸 따라가는 마리안을 슬쩍 자기 쪽으로 당기며 대답했다. 자리에 잠시 멈추었던 세네피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행이군, 이번 결전은 내가 곁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으니.”

철성 앞에 도착한 일행은 아샤드가 소식을 듣고 훼방을 놓기 전에 서둘러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 좁은 철성 안에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된 겁니까, 학장님?”

철성의 문 바로 안에선 아샤드 경이 십여 명의 크바르나, 분견대장 세하와 마르텔로까지 데리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코리온 일행을 당황하게 한 건 그들 뒤에 놓여있는 병상이었다. 담요로 온몸을 돌돌 말은 황제가 코리온과 자신의 아이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카렐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마리안이 후다닥 달려가 그의 여윈 얼굴을 와락 안고 뺨에 뽀뽀를 했다. 마하도 질세라 달려가려 했지만 흉흉한 분위기를 직감한 주페가 동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딸의 품에 안긴 카렐은 입 끝에 걸려있던 험악한 말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닮은 딸의 고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오느라 힘들었겠구나.”

카렐은 다시 세네피스에게 고개를 돌리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오후면 황실군 선단이 도착합니다. 의료선도 올 겁니다.”

카렐이 끓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세네피스도 물러나지 않았다.

“황상이 저승에 간 후라면 꺼낼 이유도 없지요. 다른 이들이 죽든 말든 기념품으로 그냥 갖고 있으렵니다.”

세네피스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길은 자신과 황제 사이에 서 있는 아샤드 경과 분견대 일행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비켜라, 난 지금 당장 빼내겠다.”

“못 합니다. 전 그분의 유지를 따라…….”

아샤드가 세네피스 일행의 앞을 막아서며 당장이라도 무기를 잡을 태세를 취했다.

“젠장!!! 당장 앞에서 황제가 죽어가는데 160년 전에 날 버려놓고 떠난 사람 유지를 대체 어느 세월까지 받들겠다고!!!”

세네피스의 분노에 찬 고함이 철성 안을 메아리치며 울렸다. 세네피스의 이 말에 가장 놀란 건 아샤드, 그리고 카렐이었다.

“아샤드 경, 당장…….”

막 지시를 내리려던 카렐의 입술이 우당탕 하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딱 굳어버렸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가 있는 곳을 향했다. 뒤에서 날아온 박스에 뒷목을 제대로 얻어맞은 카렐이 털썩 소리를 내며 이불 위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제가 그랬습니다.”

카렐에게 살금살금 다가왔던 다룬이 부서진 상자 조각을 얼른 옆에 내던졌다. 니사가 축 늘어진 황제의 고개를 추슬러주며 악을 썼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니사가 정신을 잃은 황제에게 얼른 달려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특등급 가디언이 급소를 피해 기술적으로 친 덕분에 목 옆에 가시가 박혀 피가 조금 나는 것을 빼고는 큰 상처는 없었다.

“명령권자이신 황태후 폐하께 제 목숨을 맡기겠습니다.”

다룬은 주인 페로에게서 받은 전문을 주머니에 감추며 재빨리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곳엔 [내 지금 가고 있으니 싫다고 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당장 수술 받게 해, 이 멍청아.]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평소라면 카렐이 쓰러진 모습에 노발대발했을 세네피스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감히 황상을 친 녀석은 독방에 3시간 동안 가둬 놓고 반성하게 해라.”

세네피스가 여전히 길을 막고 있는 아샤드를 향해 성큼 나섰다. 수술 거부를 고집하던 황제가 의식을 잃었으니 이제 두 번째 명령권자는 세네피스였다.

“니사 라말라 박사. 당장 수술을 준비해라.”

“그건 안…….”

말대꾸를 하려는 아샤드에게 세네피스가 대뜸 이를 드러냈다.

“항명하겠다는 거냐?”

“이곳에서 수술하신다고 사신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라말라 박사도 황상의 잔딕 제거수술에는 자신이 없어하고 있는 걸 압니다. 시상하부가 있는 특이한 손목을 열어 본 일도 없다고 말입니다. 어차피 이렇게 급하게 해 봤자 황상도 위험해집니다!”

아샤드가 마지막으로 주변에 대고 호소했지만 황제 편 사람들 중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엔 코리온이 나서서는 아샤드에게 다가가 손으로 밀었다.

“비키게.”

“……못 비킵니다.”

저항하는 아샤드의 눈을 코리온이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헤네티의 굳은 의지는 그의 특별한 능력으로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다. 그때, 코리온이 아주 작게 그의 귀에 속삭였다. 순간, 깜짝 놀란 아샤드의 눈이 주먹만해졌다.

코리온이 다시 그의 어깨를 밀치자 결국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밀려나 길을 내주었다.

“황상은 내가 침실로 옮겨 돌봐드리겠다. 황태후께는 의무실에 자리를 내라. 라말라 박사는 제거수술을 준비하고.”

코리온은 카렐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병상을 직접 밀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뒤에 남겨진 니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샤드 경을 쳐다보았다. 저 고집쟁이 헤네티가 말 한 마디로 무너질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코리온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막 물으려는 니사에게 풀이 죽은 아샤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쓰러진 대신관을 대신해……하마타 수장으로서 명한다고 하셨습니다.”

니사의 턱이 툭 떨어졌다. 그의 표정에 놀라움과 기쁨이 뒤엉켜 번졌지만 지금은 기뻐하며 웃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따라오십시오, 황태후 폐하.”

니사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누르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네피스는 사제의 키가 자리를 잡고 있는 허리 뒤쪽을 만지작거리며 철성의 회랑을 따라 황금탑이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좋은 시설도, 수술 도구도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길지 저도 모릅니다.”

니사는 세네피스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황금탑 옆의 의무실 쪽문을 열었다. 제대로 갖춰진 수술실은 물론 아니었다. 조명장치가 달린 야전용 간이수술대는 이미 수많은 부상병들이 지나가 엉망이었고 약장에는 약품이 채 절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부상병들이 다 써서 보시다시피 없는 약품도 많습니다.”

세네피스의 표정이 굳었다. 용기를 냈지만 그도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냐?”

“정확히는 모릅니다. 열어서 상태를 봐야 압니다. 짧으면 한두 시간에 끝날 수도 있지만 손이 많이 필요하다면 대여섯 시간 이상 걸릴지도 모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할 방법은 없고?”

망설이던 니사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전신마취를 하지 않는다면……마취시간도 줄이고 피드백도 가능해 시간이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대신 많이 고통스러우실…….”

“짧아질 수만 있다면 마취는 안 해도 좋다.”

세네피스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함께 수술을 진행할 살람이 걱정스런 얼굴로 ‘정말 그렇게 할 겁니까?’라며 입놀림으로 물었지만 니사는 못 본 척 그에게 손짓으로 준비를 명했다. 살람은 한기가 도는 진료실에 난방장치를 켜고 이전에 니사가 본토에 주문해 가져왔던 척추 수술 도구―코리온이 자신이 가져왔다고 둘러댔던―들을 상자에서 꺼냈다.

“지금부터 괜찮다고 이야기할 때까지는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옷을 모두 벗은 세네피스는 살람의 도움을 받아 낡은 야전 수술대 위에 몸을 눕혔다. 밑에 면포를 깔았지만 쇠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느낌이 그의 살갗을 뚫고 파고들어왔다. 그동안은 당연하다 여겼던 황궁 내의원의 보드라운 병상과 따스한 공기, 첨단 시설은 이 중요한 시각엔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는 문득 어린 시절, 북부 코윈의 뼈저리게 춥던 수용소를 떠올렸다.

“신이시여, 이 고귀한 공주와 그의 열쇠를 지켜 주소서.”

니사가 세네피스의 등에 새겨진 문장을 마치 기도하듯 읽어 내려가며 국소마취제의 바늘을 찔렀다. 주사바늘의 아픔 때문인지, 아니면 이 글을 새겼던 오르마즈와의 마지막 날 때문인지, 세네피스의 눈가에 돌연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후, 니사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개합니다. 이상을 느끼면 말씀해 주세요.”

세네피스가 눈을 감았다. 160년간 그의 몸 안을 지키던 이 흉물과 ‘살아서든 죽어서든’ 작별을 고할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

.

.

비싸도 너무 비싸게 굴던 키가 이제 끝장이 납니다.

덧 : 코리온의 저 뜬금없는 시조 타령은 황X이가 길고 긴 동짓날 밤 연인을 그리며 지은 것이랍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없이 가시면 미워요~~~( ̄∇ ̄)ブ~~★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인터파크, T스토어, 올레eBook, 리디북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