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3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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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철성을 켠 게 분명합니다.”
시커멓게 변한 하늘을 올려보던 이디나는 수하들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입에 체리 한 알을 넣었다. 크테시폰의 뒷부분이 홀랑 날아갔지만 다행히 이디나가 마구스들을 모아 만찬을 열곤 하던 뱃머리의 높은 전망대는 별 문제가 없었다. 칼데아군 경보병대 사령관을 맡은 마구스 하페즈가 중무장한 갑옷 차림으로 서서 입을 열었다.
“송풍로 공사장에서 사역병 9백 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 같습니다. 칼데아군의 분위기가 아주 흉흉합니다.”
눈에 망원경을 대고 있던 가르시바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카나르 그 인간은 9백이 아니고 9천이어도 별 신경 안 쓸걸.”
“신경은 안 써도 기분은 아주 많이 나빠하는 것 같던걸요. 그놈의 철성 다 태워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더군요. 농담이 아닌 것 같습디다.”
하페즈와 함께 칼데아군에서 한 자리를 맡은 네코가 옆에서 거들었다.
“누구 멋대로? 철성은 우리에게 주기로 했잖아?”
항상 낙천적인 가르시바가 혀를 쑥 내밀며 빈정거렸다. 쿠마르와 함께 마구스들의 시중을 들던 야투 박사가 대신관을 따라 덩달아 하늘을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하늘로 올라간 먼지가 가라앉을 무렵이면 황실군이 도착하겠군요. 자기네 우군의 도착시간에 딱 맞춰 켰을 테니까요.”
“적이지만 존경해야겠어. 그렇게 죽긴 아까운 인물이긴 해.”
이디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손은 어느새 불룩한 배를 쓰다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바에자 현신은 왜 아직까지 안 오나?”
가르시바가 별 생각 없이 냉큼 대답했다.
“글쎄요, 근위대들 분위기 추스른다고 나가서 정신이 없나봅니다.”
눈가를 찡그렸던 이디나는 야투 박사, 아트위야와도 짧게 눈짓을 나누었다.
고참 마구스들의 분위기를 모르는 하페즈는 한쪽에서 사무적인 이야기만 계속 이었다.
“적이 어디에 상륙을 시도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공격 방향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날씨가 좋아질 듯 보이니 우리 코런덤은 셔틀을 이용해 철성에 공중 강습을 하는 편이 제일…….”
하페즈는 그제야 이디나와 아트위야, 야투 박사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귀엣말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디나가 그제야 머쓱하게 웃으며 아트위야에게 자리에 돌아가 앉으라고 손짓했다.
“아, 미안하오. 아트위야 현신이 남부 놈들에게서 철성을 어떻게 지켜야 할는지를 물어서. 안 그래도 지난번 황실의 공격에 트라에타오나 궁전을 홀딱 잃지 않았소? 철성을 되찾으면 아트위야 현신이 그곳을 개인 궁전으로 쓰고 싶어 하는구려.”
마구스들이 다들 웃었지만 하페즈는 귀엣말을 나누던 그 셋의 표정이 이미 빤한 상의하는 것 치고는 너무 심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임달은 마구스들의 옛 합의에 따라 트라에타오나 교단의 권역이니 철성과 황금탑을 되찾는다면 그곳을 관리할 책임도 두말할 것 없이 아트위야의 몫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초짜 마구스인 그가 함부로 따져들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살짝 돌려 물었다.
“해발고도가 그리 높은 곳을 궁전으로 쓰실 수 있겠습니까? 트라에타오나 신도들을 죄다 고산병 환자로 만드시려고요?”
“그건 바다가 홀딱 말라있는 지금 이야기이고요, 이 행성의 대기가 정상화되어 다시 바다가 생기면 거긴 지금 고도의 절반밖에 되지 않을 거랍니다.”
“1백년 후요? 2백년 후요?”
마구스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야투 박사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곳은 이미 변화의 티핑 포인트를 넘어갔습니다.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일단 이 극지에 첫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수년간 상상하기 힘든 만큼의 폭우가 이어질 겁니다. 50년만 눈 딱 감고 기다리면 행성의 7할이 물에 잠기고 여기 판지셰르 분지는 심해 밑바닥이 될 거랍니다.”
“허, 의사선생님께서 언제 기상학까지 공부하시었소?”
가르시바가 습관처럼 빈정거렸다. 야투 박사가 어색하게 웃음을 보였다.
“제 분야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각별한 곳이라 저희 교단 최고의 학자들을 동원해 따로 조사를 했습니다.”
“하긴, 그대의 손이 황금탑 안에서 주인을 부르고 있겠구려.”
오랜 트라우마를 찔린 야투 박사가 붉어진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이디나는 걸핏하면 독설로 분위기를 흐리는 가르시바에게 입조심하라며 사나운 표정을 해 보였다. 먼 옛날 구조단의 유일한 생존자이고, 당시까지만 해도 생존자 아기를 구하기 위해 화염방사기 앞에 뛰어들 만큼 용기가 넘쳤던 야투 박사에게 이곳은 누구보다 뼈에 사무친 곳이었다. 그런 만큼, 이곳을 손에 넣은 이후 생명이 넘치는 곳으로 되살리는 프로젝트에 가장 열심인 것도 야투 박사였다.
“철성을 공격할 때는 나도 올라가겠다.”
사람들의 당혹스런 시선이 일제히 6시 방향에 쏠렸다. 이디나는 부른 배를 한 손으로 짚은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야투 박사가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지금 고귀한 혈통을 태중에 품고 계시온데 어떻게…….”
“그러니 올라가려고 하지. 내 꼭 황제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보려 한다.”
이디나가 딱 잘라 대답하며 배를 두 손으로 짚었다.
“내 따로 알아봤다. 아주 민감한 때만 아니면 고산지역에 잠시만 머무는 건 큰 상관없다고 들었다.”
“하오나 태중의 아기가 얼마나 귀한 혈통이온데…….”
“시끄럽다, 감히 위대한 현신의 결정에 따지고 들지 마라.”
이디나는 짜증스레 손을 젓고는 검은 재가 뒤덮은 머리 위를 올려보았다.
“내 3천의 코런덤을 데리고 철성과 황금탑을 칠 테니 그대들은 여기서 황실군을 상대해 주시게나. 그나저나 바에자 현신이 근위대를 잘 이끌어줘야 할 텐데.”
이디나는 무심결에 자신의 마구스 팔찌를 더듬었다.
아트위야는 이디나의 손목에 있는 팔찌에서 나오고 있는 희미한 빛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느 바에자 현신이요?”
아트위야의 뼈 있는 농담에 이디나가 눈을 흘겼다. 이디나의 팔찌는 먼 옛날, 두 명의 공동대신관이 있던 2대 대신관 시절 그와 같은 이름을 가졌던 먼 할머니의 것이었다. 후대 대신관들이 두 대신관 중 좀 더 오래 산 또 다른 대신관의 팔찌를 끼면서 이 팔찌는 수백 년을 창고에 묻혀있었지만 오르마즈가 야푸르의 팔찌를 가지고 달아나면서 이 오래된 팔찌는 아버지 아스탈의 몫이 되었다. 다행히 이 팔찌는 아버지 때에도, 지금 이디나의 손목에서도 변함없이 빛을 내며 그의 대신관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해주고 있었다.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이디나는 야투 박사를 바싹 불러들여서는 귀엣말로 지시했다.
“아까 말한 대로, 두 바에자의 혈흔을 찾아내서 유전자를 채취해 와라. 자네와 아트위야 현신이 확인해.”
근위대를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마구스 회의에 불참한 바에자는 검은 먼지구름이 솟구치는 송풍로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바에자는 이미 몇 번을 읽고 또 읽은 본토로부터의 전문을 재차 확인해 보았다.
- 다하카르 교단과 트라에타오나 교단 사람들이 어머님의 안부를 알아보러 다니고 있습니다. -
바에자는 전문을 확 구겨 주먹 안에 움켜쥐었다. 아트위야 못지않게 눈치 하나는 빠른 그는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가 본토의 신전에 혹시라도 다하카르 교단 사람들이 얼씬하고 있는지 알아보라 지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그의 뒤를 캐고 있는 건 아트위야와 야투 박사가 분명했다. 대신관도 알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대신관의 측근들에게 알아본 바로는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목에 건 마구스 팔찌를 들어보았다. 팔찌를 좀 하고 다니라는 아트위야의 잔소리에 엉뚱한 대답을 했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이 팔찌를 하고 싶은 건 바로 바에자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황궁에서 돌아온 직후, 아픔을 견디며 팔목에 꽂은 이 팔찌에선 전혀 빛이 나지 않았다. 분명 두 명의 바에자의 유전자가 똑같은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이 팔찌에 있어서는 무언가 달랐다. 결국 그는 팔찌를 차는 것을 포기하고 궁색하게 목에 걸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인기척에 지레 놀란 바에자가 얼른 팔찌를 옷자락 안에 감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씀하신대로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마스크를 쓴 에시마 교단의 유전연구소장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있었다. 바로 복제 바에자를 만들던 주인공이었다. 바에자는 소장에게 바싹 다가오라고 손짓하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흔적 남기지 않았겠지?”
바에자의 물음에 소장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9번부터 13번까지 모두 죽이고 시체와 관련 자료까지 모두 소각 완료했습니다. 이젠 그냥 평범한 연구소입니다.”
바에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증거를 인멸했어도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복제된 자매 바에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며 느끼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심기가 불편한 건 굳이 물적인 증거가 없어도 그 비밀을 세상에 까발릴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복제 바에자를 구분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방법이 또 있느냐?”
바에자가 소장에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이 소장도 그를 의심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최소한 지금까지 이 소장은 그에게 전과 다름없이 충성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고 난 소장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목에 박은 발화장치를 빼면 원칙적으로는 구분이 불가능합니다만…….”
“몸을 까야 아는 것 말고.”
“유전자가 완전히 동일한 일란성쌍둥이라 해도……어느 유전자가 활성화될지를 결정하는 [메틸화]는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일어납니다. 물론 둘의 메틸화를 연관해 읽어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긴 하지만……충분히 능력 있는 학자라면 누가 원형이고 복제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말하는 걸 보니 자넨 가능할 테고, 또 누구?”
바에자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물었다. 머뭇거리는 소장에게 바에자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물었다.
“아트위야 현신이나 아프라스 야투 박사 정도면 가능하겠냐?”
“물론 그 두 분 정도 능력이면 약간의 시간투자로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바에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자신의 정체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공교롭게도 그 둘이라면 그가 상상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점점 근접하고 있었다. 그는 야투 박사와 아트위야가 크테시폰의 폐허에서 둘의 혈흔을 찾아내 결과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고맙다.”
바에자가 조용히 옆으로 돌아섰다.
“그럼 이제 둘 남았구나.”
마구스의 의도를 이해 못 한 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장은 바에자에게 인사를 꾸벅 올리고는 짙은 재를 뚫고 허둥지둥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 소장이 현신의 말뜻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신의 모습이 안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내려온 그는 등 뒤에서 무언가 엄청나게 빠른 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흐읍!!!”
단숨에 목을 꺾인 소장이 한 번 부르르 떨고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눈 깜짝할 새 소장을 죽인 루토는 시체를 짊어지고 외진 바위 밑으로 달려가 휙 내던졌다. 그곳엔 먼저 살해당한 에시마 교단 연구원들의 시체 십여 구가 깊고 큰 구덩이에 묻혀있었다. 모두 복제 바에자를 만드는 데 관여했던 자들이었다.
“다 끝낸 것 같다. 묻어라.”
루토는 구덩이를 둘러싸고 있는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위에 흙을 덮기 시작했다. 가디언들이 시체를 다 묻고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루토는 바에자가 있는 언덕 위로 서둘러 돌아갔다.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
바에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루토는 평소 명랑하고 자신감에 넘치던 바에자가 근심에 가득 차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토는 좋은 일, 나쁜 일 모두를 항상 자신과 나누던 바에자의 이런 모습에 아쉬움보다는 걱정이 더 많이 들었다. 아랫사람들을 끔찍이 아끼는 바에자가 교단의 중요한 재산인 연구원들을 10명이 넘게 몰살한 것도 그가 처음 본 낯선 모습이었다.
바에자가 궁색하게 변명을 했다.
“그놈들은 죽어야 해서 죽은 거야. 다른 교단에 기밀을 흘리려 했어.”
“물론입니다. 현신께서 당연히 옳은 결정을 내리셨겠지요.”
바에자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려 했던 루토는 돌연 무기를 덥석 쥐고 돌아섰다. 가뜩이나 지독한 재에 낙진까지 더해져 X인 그의 감각도 전보다 무뎌져 있었다. 누구라도 예고 없이 바에자에게 다가온다면 그가 지켜야 했다.
“놀랄 것 없다. 나와 만나기로 한 사람일 테니까. 넌 물러나 있어라.”
바에자가 루토에게 괜찮다며 손짓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마구스의 앞을 물러나오던 루토는 바에자에게 다가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곳엔 황제의 망토를 두른 카나르가 주변을 잔뜩 의식하며 수하 하나 없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짙은 재 속에서 만난 카나르와 바에자는 사람의 시선을 더 피하려는 듯 시커먼 재 너머 어딘가로 다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게 분명한데.”
루토는 자리에 멍하니 선 채 바에자와 카나르가 사라진 쪽을 계속 지켜보았다. 가디언인 그의 감각으로도 그 둘이 조금 더 멀리 떨어진 빈 경비 초소에 들어갔다는 것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카나르가 거추장스런 마스크를 벗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허름한 초소 창밖으로는 갑자기 짙어진 검은 모래폭풍 때문에 한밤중처럼 시커먼 색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에자는 그에게 씨익 웃어 보이는 선에서 마구스의 품위를 해치지 않고 인사를 끝냈다.
“그동안은 왜 그리 만남을 피하셨는지.”
카나르는 황제라는 품위에 어울리지 않게 또다시 헤픈 웃음을 보였다. 바에자는 이 남자가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 인맥을 쌓기 위해 용을 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괜스레 아트위야 현신에게 오해를 받을까봐.”
카나르가 풉 하고 웃었다. 그가 황제로서의 체면도 내버리고 바에자와 친분을 만들려는 것도 바로 아트위야 때문이었다. 하임달의 주인인 아트위야가 델루지 가의 마누엘과 각별한 친분관계를 뽐내면서 카나르는 혹 하임달의 주도권을 델루지 가에 빼앗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에자는 하임달의 주인은 아니지만 교단 내에서 아트위야와 묘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둘은 7교단과 8교단으로 서류상 서열로도 비등했고, 실제 교단 내 권력도 막상막하를 다투고 있었다.
“명색이 황제니 이 자리에서 엎드려 가슴에 손을 대라고는 안 하겠소.”
바에자가 조금 전까지의 자신 없던 모습을 내버리고 이번엔 마구스다운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내 그대에게 꼭 알려주고픈 내용이 있어 불렀소이다.”
귀가 확 열리는 말이었지만 카나르는 이번엔 값싸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마구스가 공짜로 던져주는 정보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정보 하나는 백만금보다 귀할 수 있지요.”
카나르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호기심을 덧칠하고 바에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대에겐 실망스런 내용일 수도 있는데…….”
바에자가 슬쩍 뜸을 들이며 카나르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이 남자도 쉽사리 패를 내보이지 않았다. 결국 급한 바에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리페 베로 태후가 남부제후들에게 뿌리고 다닌 소위 [실리페 파일]은 상당부분 과장되고 조작된 것 같소.”
카나르의 눈동자에 의심과 노기가 동시에 번졌다. 남부 가문들이 대군을 몰고 이 고약스런 하임달까지 달려와 깃발꽂기에 열중하고 있는 건 이곳에 10년 이내로 큰 비가 내릴 것이고, 100년 후면 1억 이상의 인구를 정착시킬 수 있는 1급 행성이 될 것이라는 파일 내용 때문이었다.
“우리가 속았다고요?”
“아아, 과장되었다는 것이지 거짓말이라는 건 아니오. 다만 비가 내려 바다가 생기려면 아직 200년 이상 기다려야 하고, 검은 철성 같은 대규모 시설을 적어도 10개 이상은 더 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국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가치가 높은 줄로 알았던 행성이 기대보다 훨씬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에 카나르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도 바에자의 말을 냉큼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바에자가 살짝 부연설명을 붙였다.
“우리도 그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했지만……이곳 주인이 될 아트위야 현신과 여기를 복원하는 데 일생을 바친 야투 박사 눈치 때문에 쉬쉬하고 있었을 뿐이요. 까놓고 말해, 이 행성 자체는 우리에겐 몰라도 그대에겐 가치가 없는 쓰레기지.”
“제게 이런 고급정보를 전해주시는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바에자는 대답 대신 카나르에게 먼저 물었다.
“약속대로 검은 철성을 아트위야 현신에게 넘겨줄 참이요?”
“말씀하시는 대로 여기가 쓰레기 행성이라면 까짓 거 못 넘겨드릴 이유가 없죠.”
“아트위야 현신이 철성에 그리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시나 보오?”
드디어 덫에 걸려든 카나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에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에자가 그를 향해 픽 하고 비웃음처럼 이를 드러냈다.
“철성이 그 오랜 동안 멀쩡히 돌아간 게 어떻게 가능했다고 보시오? 물론 대신관대와 오르마즈 그놈 죽기 직전에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지만 상식적으로 그 오랜 세월이 지났으면 이미 고철이 되었어야 정상인데.”
“빙빙 돌려 말씀하시는 게 습관이심은 이미 알고 있으나 빨리 주제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카나르가 듣다못해 짜증을 냈다. 바에자도 여기서 더 시간을 끌지 않았다.
“철성을 짓는 데 들어간 황금은 우리가 추산하건대 1천2백만 관(45,000ton)쯤 되지 않나 싶소. 아마 은도 거의 비슷하게 쓰였겠지. 당시 이 행성에서 유통되고 있던 모든 황금의 절반은 들어간 것 같소. 따져보면 철성이라기보다는 황금성이라고 해야 맞지.”
순간 카나르의 다리가 휘청했다. 다른 건 몰라도 황금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도 명색이 황제인 그가 놀랄 만큼 천문학적인 분량의 황금이라면 그 누구라도 순수하게 감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에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혼란 초에야 너도나도 황금을 모으느라 금값이 올랐겠지만 결국 멸망 직전엔 금도 빵 한 조각 앞에서 똥값이 되었을 테니 당시엔 금 모으기는 어렵지 않았을 테지. 황금과 은으로 탑을 세우고, 터빈과 중요한 부품마다 금을 사용하고, 씌우는 게 꿈만은 아니었지 않겠소?”
카나르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그도 철성의 황금탑이 ‘진짜 금칠을 한’ 것일지 모른다는, 그저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는 들었었지만 이런 천문학적인 숫자를 귀로 확인한 건 처음이었다. 정말로 그 정도의 금이라면 제국의 경제를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거기에 철성에 있는 기후 조절장치를 쓰면 이후 여기에 정착할 제후들을 사실상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지. 물과 산소를 가지고 아라무트에 세든 제후들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암살교단처럼 말이요. 그대 가문에도 해당되는 말이요. 그뿐인가? 거기엔 사통팔달인 이곳의 삼각루트 통제소도 있소. 장기적으로는 그걸로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어마어마하지.”
바에자는 카나르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머릿속으로 황금의 가치를 계산하느라 다른 이야기는 전혀 귓속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는 듯했다.
“나와 거래를 하겠소?”
카나르의 얼을 쏙 빼놓은 바에자가 숨겨놓은 수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카나르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무슨 거래 말씀이십니까? 이미 황금탑을 넘겨드리기로 합의했고,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요?”
카나르는 야심찬 마구스의 빤한 속셈에 바로 넘어가지 않고 한 발 빼는 척을 했다. 교단에게 약속대로 줄 건 주고 시작하자는 마누엘과는 달리, 그는 하임달에 진주하며 교단과 한 약속을 곧이곧대로 다 지킬 맘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내심 ‘혹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임달 전체를, 아니 검은 철성이라도 꿀꺽할 맘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교단에 협조적인 마누엘의 견제와, 철성에 있는 황제의 최정예 X들을 쫓아낼 때까지 만이라도 교단에 충실할 참이었다.
그런 그의 속을 읽은 바에자가 한쪽 송곳니를 드러내고 능글하게 웃었다.
“왜 갑자기 약한 척이시오? 지금 그 탑이 갖고 싶어 속이 팍팍 타지 않소?”
바에자의 사악한 미소 앞에서 카나르도 차마 더 순진한 척은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제게 하고픈 제안이 있으신 것이겠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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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부터 치고 받고 밀고 당기는 사실상 마지막 싸움이 시작됩니다. 막판 난장판을 만들어놓을 참입니다. ㅎㅎㅎ 수술실에 들어간 세네피스 이야기는 잠시 기다려 주시고요.
(원래 이번 편 앞으로 약 10회 분량의 비엔 공방전이 들어가지만 연재본에서는 맥이 끊기지 않도록 건너뛰고 출판본에만 담을 예정입니다. 장태자와 엘룬, 제네르, 베아트릭스의 원성이 들리는 듯;;; ㅎㅎㅎ)
출판본 원고작업도 거의 진척되어 본격적인 교정작업 시작을 오늘내일 하는데 잠도 못 자고 몰아붙여도 참 만족스럽게 정리하기가 힘드네요. ^^;; 어쨌든 조만간 교정작업 맡을 분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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