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4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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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자가 그제야 웃으며 본심을 드러냈다.
“아트위야 현신이 마누엘 델루지 편을 들고 있는 게 맘에 안 들지 않소?”
“그 둘이야 제국이 생기기 전부터 사이가 좋았으니 내가 뭐라 할 수야 없지요.”
카나르가 순진한 촌부마냥 웃어보였지만 바에자는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트위야 현신은 지금 처지가 무척 궁핍하오. 서부에 있던 농학 연구소는 친위군의 기습에 재가 되었고, 궁전과 셔틀 제조창까지 황제의 공격에 박살이 나서 이젠 빈털터리나 다름없소. 거기에 외아들까지 죽어 후계까지 끊겨버렸지. 마누엘이 그 여자에게 뭘 원하는지 몰라도 지금 상태로는 썩은 동아줄을 붙들고 있는 꼴이지.”
“…….”
“이제 본인이 죽으면 트라에타오나 신은 집 잃은 신세가 되는 거고 그쪽 교단은 공중 분해되는 거요.”
바에자의 속내를 눈치챈 카나르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그럼 여기 하임달과 철성은 어찌되는 거죠?”
“현신이 없어진 교단의 재산은 교단법에 따라 바로 후순위 교단부터 하나씩 지명해서 가질 수 있소. 물론 교단이 행성을 차지한다는 건 그곳에 주 신전을 짓고 관리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지 그 소유라는 건 아니요.”
“에시마가 8교단이니 트라에타오나 바로 후순위지요?”
바에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카나르는 크테시폰 궁이 있는 저지대 쪽을 힐끔 돌아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6개 교단이나 있는 건 너무 산만하고 많긴 하죠. 하나쯤 줄어주는 게 그쪽에도 낫지 않나 싶긴 합니다.”
카나르의 속 보이는 웃음에 바에자가 헛기침을 했다.
“혹여 내가 관여한 게 밝혀지면 하임달 9번을 내가 못 차지할 수도 있소. 그러니 그쪽에서 손을 써 주시오.”
카나르도 자신이 얻을 이득을 절대 잊지 않았다.
“제게 해 주실 수 있는 건 말씀 안 하셨습니다.”
“이 먼지구덩이에 비가 내릴 때까지 수백 년 동안 하늘만 보긴 지루하지 않겠소? 우리야 신도들이 마르고 닳도록 굳건히 받쳐주겠지만 언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는 정치가가 수백 년을 보고 무언가를 추진한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지.”
“그 시간을 기다려 얻을 이득보다 포기했을 때 일시불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훨씬 크다면 충분히 고려해볼 수도 있는 사안이죠.”
교과서적인 답변을 하는 카나르에게 바에자가 신중하게 말을 건넸다.
“사제의 키가 없어 정상적으로는 황금탑을 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차피 큰 장비를 본토에서 가져올 참이요.”
“그 말은……황금탑을 뜯을 참이라고요?”
“나도 이 구질구질한 하늘 쳐다보면서 비 올 때까지 기우제나 지낼 맘은 없소. 그대에게 철성과 황금탑에서 뜯어낸 금과 은의 절반을 주겠소. 그것만으로도 이번에 들인 전비의 수백 배는 넘을 테고, 그대 가문이 보유한 금의 수십 배는 될 거요. 그럼 이 구질구질한 행성 따위 포기하고 떠나는 대가로 충분하겠소? 어차피 그대에겐 여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비엔이 있고, 조만간 황제에게서 아케메니아도 빼앗을 거 아니요?”
카나르가 턱을 똑똑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길게 수백 년 앞을 보고 행성의 미래 가치에 투자할지, 아니면 행성을 포기하고 당장의 어마어마한 황금을 차지할지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었다. 바에자가 그의 결정을 살짝 거들었다.
“여기서 황실과의 전쟁을 이긴다고 해도 그건 시작일 뿐이지. 아직 황실 잔여세력이 있고 제후들이 남아있으니 최소 몇 년간은 전 제국이 내전에 휘말릴 각오를 해야 할 거요. 그 동안 전비를 어찌 감당할 거요?”
바에자가 유도하지 않아도, 카나르는 이미 이 행성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출정 전까지만 해도 그를 포함한 칼데아의 제후들은 ‘고향 행성’에 기대가 대단했었다. 실리페 태후가 주고 간 파일은 눈 딱 감고 10년, 20년만 기다리면 마술처럼 파라다이스가 될 것 같은 꿈을 심어주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막상 와 본 이곳 현실은 그런 꿈을 산산조각내버렸다. 그는 이곳 말고도 행성 곳곳에 탐사단을 보내놓았지만, 그들의 대답도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그가 당초 탐냈던 적도 부근의 육괴는 수십 년째 비만 내려 발도 디딜 수 없는 진흙탕뿐이고, 그게 아니면 이곳 같은 추운 사막이 전부였다. 생명체도 먼 옛날 땅속에 숨어있던 미생물과 박테리아 정도가 전부라는 보고였다. 이곳에 어느 생명체를 어떻게 이식시켜야 할지도 전혀 정보가 없었고, 물론 그런 생명체의 DNA도 없었다.
‘손해 보는 장사는 분명 아닌데.’
바에자의 말대로 이곳의 환경이 개선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이런 곳을 개척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바에자가 ‘당장 뜯어서 주겠다는’ 황금탑의 금덩이는 훨씬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아트위야 현신만 제거하면 됩니까?”
한참의 고심 끝에 카나르가 입을 열었다. 바에자가 목소리를 한 단계 낮추고 냉큼 대답했다.
“대신관 주변에도 이곳을 전처럼 되돌리는 데 미친 늙은이가 하나 있소. 그자가 없어져야 내 일이 쉬워질 것 같소. 가능한 황실군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처리하면 좋겠소.”
“야투 박사까지요?”
“요즘 아트위야 현신과 잘 붙어 다니니 처리하기 어렵지 않을 거요.”
바에자가 둘의 근황을 살짝 귀띔해 주었다.
“둘 다 황금탑과 철성에 관한 것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지.”
바에자는 품에 숨겨 온 지도 한 장을 쓰윽 내밀었다. 그곳엔 그가 분지 일대에 풀어놓은 근위대 가디언 정찰병들이 가져온 ‘아주 특별한 내용’이 표시되어 있었다.
“크테시폰을 부수고 도망간 적 특공대의 뒤를 추적하다가 찾았소.”
“허, 이거 대박인데요.”
지도를 본 카나르의 표정에 웃음이 번졌다. 그 다음 내용은 바에자가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카나르는 바에자가 같은 마구스의 최소한의 양심 덕분에 차마 소리 나게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죠. 대신 약속만 지켜 주시고요.”
잠시 눈빛을 주고받은 둘은 그대로 뒤돌아서서 경비초소를 나섰다. 밖에는 여전히 모래폭풍이 까맣게 휘몰아치며 이들을 바깥세상의 소식과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바에자는 다시 크테시폰으로 걸었고, 카나르도 칼데아군 병영으로 각각 걸음을 옮겼다. 음모의 큰 틀은 결정되었고, 이젠 실행하는 것만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검은 철성과 연결된 흡기구를 찾았다 이 말씀이시죠?”
아프라스 야투 박사는 칼데아군 정찰병이 가져온 보고서에 거의 넋을 놓고 있었다. 고향 행성과 검은 철성, 이곳의 부활에 관해서는 집착에 가까울 만큼 열성적인 그에게 철성의 흡기구가 발견되었다는 건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철성이 고지대의 깨끗한 공기를 빨아들여 분지 안으로 불어넣어주는 것이라면서요? 아마 맞을 겁니다.”
보고서를 들고 온 카나르의 아들 헤즈가 정찰병이 가져온 지도와 메모 꾸러미를 야투 박사와 아트위야에게 쓰윽 내밀며 능글하게 웃었다.
야투가 아트위야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미리 확인하고 온 그는 이 절세미녀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산 잘 타는 특수부대 놈들을 뽑아 분지 주변 산맥 정상의 능선을 따라 도보로 정찰을 시켰죠. 그랬더니 이렇게 딱 걸렸지 뭡니까.”
헤즈가 내민 지도에는 검은 철성이 있는 제플린 산 바로 동쪽 산에 X자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 산 정상의 높이는 제플린 산 정상과 맞먹는 60스타디아(9,000m)라 외부의 더러운 공기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답니다. 흡기구는 중턱 정도에 있고요. 흡기구를 이용하면 혹시 검은 철성으로 잠입할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서 여쭈러 왔습니다.”
검은 철성에 관한 물음에 더 신이 난 건 헤즈보다 야투 박사였다. 그는 방금 받은 지도를 벽에 압정으로 꾹 눌러 박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리 현명하지 못해요. 적이 철성을 켰다면서요? 여기 말고도 아마 감춰진 흡기구가 수십 군데가 더 있을 겁니다. 그런데 모두 철성 내부의 터빈과 연결되어 있어서 잘못 들어갔다가는 그냥 빨려가서 갈은 고깃덩이가 될 거요. 흡기구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야투가 난색을 표했지만 헤즈는 이런 대답을 하는 박사의 속내가 철성이 혹시라도 손상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능청맞게 대답했다.
“솔직히 저흰 철성에 관해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몇 시간 후면 적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라 지금 답사단을 서둘러 보내려 합니다. 트라이크를 타고 한 30분이면 닿는 곳이라서요. 혹시 두 분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 물론 야투 박사께선 몸이 안 따라주실 테니 어쩔 수 없고요. 생각해 보니 고산지역이라 박사를 모시고 가기는 좀 힘들지도…….”
헤즈가 갈등하는 기색을 보이자 야투가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내 다른 건 몰라도 고산병에는 강하니 걱정 마시오. 젊은이들보다 훨씬 낫다니까!!!”
야투는 헤즈가 가자는 이야기를 채 꺼내기도 전에 앞장서서 허겁지겁 서류와 외투를 챙기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20분 후에 정찰대가 이곳에 들르게 하겠습니다.”
헤즈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트위야가 마지못해 일어나며 물었다.
“내가 꼭 가야 되는 거냐? 대신관께서도 외출은 가능한 하지 말랬잖나?”
아트위야는 전보다 훨씬 짙어진 모래폭풍을 내다보며 구시렁거렸다.
“저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
야투가 방풍망토와 고글, 장비를 허겁지겁 챙기며 말했다.
“알고 보니 이렌느 그년도 철성을 점령하면 체계적으로 약탈하려고 미리 계획을 다 세워놨었답니다. 솔직히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그년이 공격에 실패한 게 정말로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아트위야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임달의 주인인 그에게 누군가가 황금탑을 탐냈다는 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썩을 년이 감히 손댈 게 따로 있지!”
흥분한 아트위야가 이마를 만지며 자리를 빙빙 돌았다. 야투가 나가기 싫어하는 그를 계속 자극했다.
“문제는 황금탑에 든 것들을 탐내는 게 그년뿐만이 아닐 거라는 거죠. 누구라도 가서 놈들이 흡기구를 통해 황금탑에 들어가는 걸 막지 않으면 위대한 현신께서 철성을 공략하기 전에 불청객이 먼저 입을 댈지도 모릅니다. 놈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라도 현신께서 잠시 얼굴을 보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트위야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철성을 켜면서 통신도 완전히 두절되어 기지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알았어, 내 헤네티들도 20명쯤 데려가지. 아예 거기에 상주하게 해야겠어.”
기대에 들뜬 야투와 그에 비해 신경이 곤두선 아트위야가 20여 명의 헤네티들과 함께 크테시폰을 나섰다. 그들 앞에는 플라칼 가의 특수부대원들이 정찰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씨 하고는. 지금 대체 몇 시야?”
아트위야는 깜깜한 하늘을 올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온통 까만 재가 뒤덮어 하늘이건 뭐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데려다놨다면 분명 한밤중이라 대답할 풍경이었다. 이런 날씨는 도착한 이후 처음이었다.
“낮 2시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야투가 조그만 배낭을 등에 꽉 조이며 싱글벙글했다. 누구라도 나가기 싫을 상황이지만 그는 혼자 신이 나 20대 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기상학자 친구들 말이 지금이 피크일 뿐이고 서너 시간 후면 마술처럼 가라앉을 거랍니다. 철성이 풀로 돌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10척만 넘어가도 사람이 안 보이는데 이걸 어째?”
돌부리에 걸려 자빠질 뻔했던 아트위야가 다시 짜증을 냈다. 야투가 그의 어깨에 작은 랜턴을 달아주었다.
“트라이크를 타고 후딱 다녀올 수 있다니까 얼굴만 비치고 바로 돌아오세요.”
헤네티가 모는 트라이크에 오른 둘은 깜깜한 어둠을 뚫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흡기구가 발견되었다는 곳은 전장과는 반대편이고, 적이 있을만한 곳도 아니고, 높기는 해도 험악한 곳도 아니었다. 앞장서는 플라칼 가 특수부대원들은 미등을 크게 켜고 뒤따라오는 헤네티들을 인도했다.
“제플린 산이 이 정도만 되면 좀 좋겠어.”
트라이크 뒷자리에 앉은 아트위야가 옆의 트라이크를 달리는 야투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말대로, 트라이크는 경사가 제법 급하기는 해도 딱히 거치적거리는 곳 없는 언덕을 힘차게 달려 올랐다.
“잘 올라가니 좋긴 한데 고산병이 문제네.”
“이젠 별 게 다 걱정이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야투가 껄껄대며 대답했다. 트라이크가 너무 빠르게 올라가 적응할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30여분을 올라간 후, 트라이크가 한 군데 몰려서 멈춰 섰다. 워낙 깜깜해 산의 어느 위치에 와 있는 건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시커먼 재에 강풍까지 몰아쳐 트라이크에서 내린 아트위야가 주저앉을 뻔했다.
“여기가 대체 어디냐?”
“대충……산 중턱의 이 바위 부근입니다.”
함께 온 플라칼 가 특수부대 정찰대장이 지도에서 위치를 집어주었다. 일행은 검은 철성이 있는 제플린 산 서쪽으로 이어진 또 다른 산의 중간쯤 와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쪽으로 쭉 가면 검은 철성이겠죠. 물론 중간에 협곡과 절벽이 있어서 지상으로 가지는 못합니다.”
정찰대장이 동북쪽을 가리켰지만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야투는 ‘지상으로’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 듯 입가를 씰룩거렸다.
“흡기구가 어디냐?”
“아, 이쪽일 겁니다. 발밑 조심하십시오.”
정찰대장이 어딘가로 둘을 이끌었다. 10척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깜깜한 장막에 가로막혀 있어 한 발짝 한 발짝이 조심스러웠다.
“이크!”
바닥에 확 나타난 시커먼 구멍에 지레 놀란 야투가 급히 뒷걸음쳤다.
“발밑 조심하시라니까요.”
정찰대장이 바닥에 깔아놓은 합판을 걷어내자 대형 화물차 두세 대쯤 그냥 삼키고도 남을 크기의 가파른 수직 동굴이 보였다. 어둠 때문인지, 깊이 때문인지 밑바닥은 보이지도 않았다.
“원래 이 자리에 건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기계 흔적도 보이고요. 바닥에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무너져 있어서 위험한 것 같아 합판을 덮어놨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직동굴 위에 누군가 건물을 지었던 기초가 보였다.
야투 박사가 굴 밑에 랜턴을 비추며 중얼거렸다.
“윗부분 건물은 바람에 날아간 건가? 그나저나 이게 흡기구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동굴 밑에 내려가 보니 위에서 떨어진 송풍기가 있더군요. 철성이 있는 쪽으로 난 인공동굴도 찾았고요. 인공동굴 중간에 역류 방지 댐퍼가 있는 걸 보고 철성의 흡기구라는 걸 알았죠. 철성도 그렇게 맹렬하게 공기를 뿜어내려면 어디선가 빨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댐퍼 부근에서 인계선을 발견해서 그 이상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부비트랩이면 큰일이니까요.”
야투는 동굴 안에 바싹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검은 모래폭풍이 주변을 몰아치는 소음 뿐 동굴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런데 지금은 공기가 그리 세게 안 들어가고 있는데?”
“그야 터빈 모두를 다 돌리는 게 아니니까.”
바람 속에서 뒤늦게 뒤뚱거리며 다가온 전문가 아트위야가 정확히 이유를 집어냈다.
“이게 몇 번이랑 연결된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안 돌리고 있나보지.”
“이거 합판 덮어놓은 지 꽤 됐는데 그대로인 걸 보니 한동안은 흡기구로 사용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할까요?”
정찰대장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그는 오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그곳을 통해 철성에 잠입할 수 있느냐’며 물어 야투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었다.
사실 이곳으로라도 철성에 가고 싶어 애가 타는 건 야투 자신이었다. 이 너머의 황금탑은 젊고 정의감 넘치던 청년 야투의 잘린 팔을 품은 채 이젠 노욕에 가득한 속물로 몰락해버린 그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곳을 잊지 못한 타리프 신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투에게 그곳을 다시 밟는 건, 아니 황금탑을 켜고 이곳을 원래 모습으로 돌리는 건 그에겐 마치 종교적인 사명감 같았다. 서로 협력만 못 했을 뿐, 그와 타리프 신관의 꿈은 기본적으로 같았다.
“일단 켰다가는 그대로 빨려 들어가서 소시지 고기처럼 잘게 갈릴 거라니까 그래.”
야투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플라칼 가 특수부대원들에게 잔뜩 겁을 주었다. 그로서는 이자들이 이곳을 통해 철성으로 들어가 먼저 손을 대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럼 여기 접근해 있는 것도 위험한 건가요?”
정찰대장의 물음에 야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언제 켜질지 모르는 믹서나 마찬가지라니까. 쓸데없는 짓 말고 물러나는 게 좋겠어. 빨리 뚜껑 다시 덮어.”
야투의 손짓을 받은 플라칼 가 병사들이 아찔한 구멍 위를 합판으로 다시 가렸다. 그때, 마지막 합판을 덮던 플라칼 가 병사들이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 안 났습니까?”
“응?”
아트위야가 헤네티들의 뒤로 얼른 몸을 숨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트위야의 헤네티들은 X들은 아니지만 마구스에게 목숨까지 맡긴 광신도들인 만큼 누구보다 믿음직한 최정예병이었다.
“기다리십시오.”
20여 명의 플라칼 가 특수부대 정찰병들은 정찰대장과 병사 두셋만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무기를 빼들고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검은 폭풍 속에서 그들의 형체는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렸다.
“이봐, 적을 어디서 봤다는 거야?”
헤네티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큰 소리로 물었지만 달려 나간 플라칼 가 정찰병들 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내 부하들이 갔으니 좀 기다려 봐요.”
정찰대장이 현신을 보호하느라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헤네티들에게 도리어 짜증을 냈다. 헤네티들로서는 그저 자신들의 마구스를 몸으로 에워싼 채 플라칼 가 정찰병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얼굴이 창백해진 아트위야는 수직동굴 옆의 바위 옆에 야투와 함께 몸을 바싹 숨긴 채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특별한 능력도 이런 곳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짧은 기다림이 지난 후, 갑자기 주변에서 고함과 비명이 뒤섞여 들리더니 볼트가 마구 날아들기 시작했다. 헤네티들은 황실군의 강화석궁 볼트라는 것을 바로 파악했다. 방금 달려 나간 플라칼 가 정찰병들과 황실군이 제법 먼 어딘가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는 듯 보였다.
“너흰 현신님을 지켜!”
헤네티들은 아트위야의 곁에 동료 셋을 남겨놓은 채 볼트가 날아온 방향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정찰병들을 도와 황실군들을 최대한 빨리 무찔러야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자신의 헤네티들까지 뛰어나가면서 아트위야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그는 무장들 못지않게 대담한 마구스이기는 했지만 전쟁터에 직접 나와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당황한 그는 함께 있던 플라칼 가 정찰대장이 자리에 남아있는 부하 정찰대원들과 슬쩍 눈짓을 나누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뒤다!”
정찰대장의 느닷없는 고함에 아트위야 옆을 지키던 헤네티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에서 나타난 건 황실군이 아니고 정찰대장이 내지르는 칼날이었다. 동료로 알고 있던 자의 칼에 순식간에 목을 베인 헤네티가 피를 쏟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변에서도 자리에 남아있던 정찰대들이 자신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던 아트위야의 헤네티들을 뒤에서 기습해 눈 깜짝할 새 쓰러뜨렸다.
“흐잇!”
정찰대장은 헤네티를 쓰러뜨리자마자 아트위야를 덥석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훨씬 빠른 몸놀림으로 그의 손을 미끄러져 흡기구를 덮은 합판 위로 헐레벌떡 도망쳤다. 야투도 이 배신한 정찰대들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뒤를 쫓았다.
“헤네티들 어디 있어! 여기 배신자들이…….”
야투와 아트위야의 비명은 몰아치는 검은 폭풍이 그대로 삼켜버렸다.
“저것들이!”
정찰대장이 그 둘을 쫓아가려다가 아직 미약하게 숨이 붙은 헤네티의 손에 옷자락이 잡히며 앞으로 벌렁 엎어지고 말았다. 그 사이, 아트위야와 야투는 흡기구를 거의 건너 달아나고 있었다. 다급해진 정찰대장은 쥐고 있던 큰 칼을 다짜고짜 아트위야의 등 뒤에 던졌다.
“아악!”
합판 위를 뛰어가던 아트위야가 큰 칼에 놀라 중심을 잃고 구멍 위에 덮은 합판을 밟고 말았다. 그의 체중을 버티지 못한 얇은 합판이 옆으로 죽 미끄러지며 아트위야의 몸이 그 밑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함께 달아나던 야투가 뒤로 휙 돌아서며 비명을 질렀다.
“현신님!!!”
야투가 손을 내밀었다. 바닥이 꺼지면서 앞으로 꼬꾸라진 아트위야가 흡기구의 수직 동굴 입구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야투가 버둥거리는 아트위야의 손을 붙잡았지만 늙은 그의 기운으로는 키 큰 아트위야를 한 팔로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동굴 밑을 내려다보고는 공포에 질린 아트위야가 기를 쓰고 올라오려 했다. 떨어지는 것도 떨어지는 것이지만 이 흡기구가 작동하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지경을 당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고운 모래가 덮인 미끄러운 벽에서는 자꾸 신발이 미끄러졌다.
“꽉 잡으세요!”
야투가 두 손을 다 내밀어 아트위야의 손을 꽉 잡고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동굴 건너편에서 정찰대장이 마지막 헤네티의 목을 베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야투로서는 현신인 아트위야를 버리고 혼자 달아날지, 아니면 이대로 함께 죽을지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 그는 밑에 매달려 있는 아트위야의 오드아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현신님, 어떡해야 합니까?”
“너라도 도망가서 알려!”
아트위야가 울먹이며 손을 놓았지만 정작 야투는 현신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 사이 달려온 정찰대장이 바닥에 엎드려 아트위야를 붙들고 있는 야투를 향해 칼을 번쩍 쳐들었다.
“이 늙은이 질기기도 하네!”
야투가 공포에 몸을 움츠리며 정찰대장이 내려찍는 칼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그의 칼끝이 박사의 얼굴 옆을 베어내며 휙 스쳤다.
“아앗!”
칼을 피하려다 중심을 잃은 야투는 밑에 매달린 아트위야의 체중에 휙 끌려들어갔다. 그리고는 먼저 빠진 아트위야와 함께 검은 굴 안으로 긴 비명을 남기며 멀어져갔다. 뒤이어 어딘가에 부딪치는 소름끼치는 충격음이 안에서 몇 번이나 들려왔고, 비명은 그대로 잦아들었다.
“씨발, 독한 놈.”
정찰대장은 둘이 사라진 굴에 대고 랜턴을 최대한 강하게 켰지만 밑바닥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쿵 소리를 끝으로 비명이나 신음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깊이로 보아 온전히 떨어졌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즉사했는지, 아니면 마지막 숨이라도 붙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그 둘은 언제 켜질지 모르는 믹서의 칼날 위에 떨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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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세네피스의 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래도 비엔 에피소드가 빠지면서 굉장한 분량을 건너뛴 것이라 이 정도고요....(그것까지 합치면 아마 단일 시간에 가장 길고 많은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분일지 모르ㅤㅇㅔㅆ군요.)
어쨌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엽기적인 장치(?)의 등장입니다. ㅋㅋㅋ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없이 가시면 미워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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