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5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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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군의 기습’을 상대하기 위해 낙진 속으로 달려나갔던 헤네티들이 돌아오기까지는 십여 분 남짓이 걸렸다. ‘황실군으로 추정되는’ 자들은 깜깜한 어둠을 사이에 두고 헤네티, 플라칼 가 정찰대와 수십 발의 볼트를 주고받은 후 달아나버렸다. 플라칼 가 정찰대와 함께 그들을 추격했던 헤네티들은 황실군의 볼트와 강화석궁 한 자루를 찾아냈지만 핏자국도, 시체도 없었다.
“젠장, 한 놈도 못 잡았나봐.”
허탈해진 헤네티는 노획한 석궁을 어깨에 둘러메고 수직굴이 있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석궁이 이전 협곡 전투에서 세닉 가가 노획했던 황실군 석궁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어?”
흡기구로 돌아온 헤네티들은 동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동료들의 시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리한 칼에 목이나 옆구리가 공격당한 것이 정상적인 교전을 벌인 것이 아니고 기습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아트위야도, 야투 박사도 보이지 않았고, 굴 위에 덮은 합판은 떠날 때 모양 그대로였다. 죽은 헤네티의 배에는 피가 묻은 황실군의 제식 단검이 박혀 있었다.
“우릴 끌어내고 기습한 게 분명해!”
헤네티 한 명이 울부짖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구스를 지키던 동료들이 황실군에 몰살당했다고 생각한 헤네티들이 일순간 패닉 상태가 되었다.
신경이 곤두서 있던 헤네티들은 어둠 속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급히 석궁을 겨누었다.
“누구야!”
“우리야! 쏘지 마!”
랜턴을 휘두르며 나타난 플라칼 가 정찰대장은 동굴 주변에 흩어진 시체들에 깜짝 놀란 척했다.
“세상에, 여긴 또 왜 이래!”
정찰대장이 부하들에게 주변을 확인하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헤네티들의 관심은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었다.
“현신님! 현신님! 어디 계십니까!”
헤네티들은 주변의 어둠에 대고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현신님은 대체 어떻게 되신 거냐고!”
절망한 몇몇 헤네티들은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반쯤 얼이 빠져 사방을 의미 없이 빙빙 돌기만 했다. 정찰대장도 당황한 척 함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우리도 저쪽에서 누가 석궁을 쏴서 달려갔었는데……황실군 놈들이 우릴 끌어내놓고 납치해간 것 아니야?”
플라칼 가 정찰대원들의 호들갑과, 현신님을 찾는 헤네티들의 울부짖음이 몰아치는 검은 폭풍 사이를 빙빙 맴돌았다. 그가 바로 자신들 발밑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헤네티들은 아트위야의 이름을 외치며 사방으로 헐레벌떡 흩어졌다.
“학, 학.”
잠시 의식을 잃었던 야투는 얼굴 위로 모래가 쏟아지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를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던 때가, 갑자기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이, 어딘가 부딪치며 눈앞이 번쩍했던 것이 차례로 기억났지만 그 이후로 아무 기억이 없었다. 검은 폭풍으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던 바깥에 비하면 주변은 소름끼칠 만큼 조용했다.
‘살아있는 거 맞아?’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자 야투는 이마에 달린 랜턴으로 가까운 곳을 볼 수 있었다. 꼭대기에서 몇 번을 미끄러지고 부딪치며 떨어진 야투는 검은 재가 잔뜩 섞인 고운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단번에 바닥까지 추락했다면 끝장이 났겠지만 다행히 동굴은 완전한 수직이 아니었다. 몇 번을 구르고, 미끄러지고, 부딪치며 떨어진 그를 밑바닥에 쌓인 푹신한 검은 재가 받아주었다. 두툼한 방한복과 등에 맨 배낭도 그를 도와준 듯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오른쪽 팔과 손목이 찢기고 부러진 것 같았지만 분명 살아는 있었다.
“세상에, 검은 재 덕분에 살게 될 줄이야.”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여자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현신님?”
정신이 퍼뜩 든 야투가 옆을 돌아보았다. 어둠 한쪽에서 출발할 때 그가 아트위야의 어깨에 달아주었던 노란 랜턴 빛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던 야투는 모래에 허벅지까지 푹 빠지고 말았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만 막상 그 위에 있으려니 꽤 성가셨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바닥을 기어 불빛으로 다가갔다. 위에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굴 밑바닥은 운동장처럼 넓었다.
팔이 부러진 것을 빼면 그럭저럭 온전한 야투와는 달리, 아트위야는 낯빛이 파랗게 변한 채 모래 위에 쭉 뻗어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야투는 모래에 몸 절반이 파묻혀 있는 아트위야를 허겁지겁 밖으로 끌어냈다.
“이런.”
야투가 고개를 저었다. 아트위야의 한쪽 다리는 마치 고무인형처럼 뒤로 꺾여 있고, 나머지 한쪽 다리도 무릎이 앞으로 꺾여 보기에도 끔찍했다.
“무릎과 골반이 부서졌나봅니다. 움직이지 말고 계십시오.”
그는 랜턴으로 머리 위를 비춰보았다. 하지만 머리에 단 약한 랜턴 불빛은 채 꼭대기까지 닿지도 못한 채 중간에 끊겨버렸다. 할룩스를 꺼냈지만 될 리가 없었다.
야투는 아트위야의 얼굴을 짚었다. 그는 아름답던 오드아이에 눈물을 품은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골반이 부서지면서 내장기관에도 큰 손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제발,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현신께서 돌아가시면 트라에타오나 신께서 어디에 깃드신단 말입니까?”
아트위야는 대답도 못 한 채 힘겹게 신음했다. 아트위야가 저 상태로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는 건 야투 정도의 명의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야투 스스로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떨어지며 충격을 받고, 피도 많이 흘린 그 역시 몸이 심하게 떨리고 기운을 잃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곳에 억지로 모시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죄책감에 이판사판이 된 야투는 돌을 쥐고 기어가 동굴 벽을 힘껏 쳤다. 밖에 있는 것이 플라칼 가 정찰대인지, 교단 헤네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반의 확률로라도 헤네티들에게 여기 상황을 전할 수 있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굴을 따라 웅웅거리며 소리가 울려 퍼지기는 고사하고 무언가 둔탁한 것에 가로막힌 듯 메아리조차 없었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마구 벽을 쳤지만 소리는 전혀 퍼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현신님. 모두 제 잘못입니다.”
야투는 죽어가는 아트위야의 앞에 꿇어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먼 옛날 구조단 시절, 다하카르의 선배 성직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단장 타리프 신관의 비밀에 관해 털어놓으라고 협박을 당했던 그날처럼 그는 무기력함에 떨고 있었다.
몇 분의 끔찍한 시간이 흘렀다. 아트위야의 고통스런 신음과 야투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빼면 주변은 소름끼칠 만큼 조용했다. 우두커니 앉아있던 야투는 별 생각 없이 바닥을 긁어보았다. 검은 재와 모래가 섞인 윗부분을 긁어내고 보니 그 밑에는 거의 순수한 검은 재가 한가득 잡혔다.
‘이게 다 뭐야?’
순간 긴장한 야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손을 밀어 넣었더니 팔뚝까지 쑥 들어가는 것이 대체 어느 정도 깊이까지 쌓인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맙소사. 여기 다 모여 있잖아.’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검은 재는 한때 생장촉진제였고, 사람들의 수명을 갉아먹는 독이면서 한편으로 호드르 산에서 발전소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을 만큼 강력한 인화물질이기도 했다. 이런 검은 재가 분지를 온통 뒤덮었는데도 산이 불바다가 되지 않은 건 흙, 모래와 섞여 농도가 낮아 임계점에서 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엔 사람을 빠뜨려 죽이고도 남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순수한’ 검은 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검은 재를 얻고 싶어 안달했던 죽은 아스탈이 보았다면 춤을 추었을 광경이었다.
“1번 터빈이……검은 재를 걸러내는 거였나?”
야투는 랜턴으로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동굴 바닥 군데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낡은 기계와 부품들, 파이프 조각들이 박살이 난 채 뒹굴고 있었다. 이 위에 있다가 무너진 건물은 검은 재를 1차로 걸러내는 정제시설이었고, 이 거대한 수직 동굴은 걸러낸 검은 재를 모으는 창고였던 듯했다. 랜턴 불빛을 키워보려 했던 야투는 움찔하며 손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니 스파크 하나가 이 일대 모두가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득 쌓인 재 한쪽 구석에는 밑으로 파내려간 쥐구멍 비슷한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검은 재를 파낸 자리에 폐드럼통을 줄줄이 끼워 무너지지 않도록 해 놓은 것이었다. 안쪽으로 랜턴을 비춰보니 그 반대편에 다른 공간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정찰대장이 말했던, 검은 철성으로 이어지는 수평 굴이 분명했다.
‘저 안쪽에서 나왔나 본데?’
야투는 드럼통을 끼워놓은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파는 족족 줄줄 흘러내리는 검은 재 사이로 통로를 내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헛.”
야투가 얼른 랜턴을 끄고 머리 위를 올려보았다. 인기척과 함께 로프 하나가 옆에 툭 떨어졌다. 헤네티가 내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야투의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야투는 한쪽에 뒹굴던 녹슨 파이프를 왼손에 쥐고는 숨죽이고 위를 노려보았다. 로프가 흔들흔들하는 것이 누군가 내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야투는 귀를 잔뜩 곤두세우고 내려오는 자가 소리를 내기를 기다렸다. 저들이 아트위야를 구하러 오는 헤네티라면 내려오며 현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소리를 질러 상황을 알릴 터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안되겠다.”
야투는 쓰러져 있는 아트위야를 바닥에 끌고 문제의 ‘구멍’ 쪽으로 기어갔다. 아트위야의 어깨에 달린 랜턴 불빛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지, 위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안 죽었어?”
온전한 왼손으로 아트위야의 뒷덜미를 움켜쥔 야투 박사는 기를 쓰고 구멍으로 기어갔다. 도망칠 곳은 저곳뿐이었다. 마찰이 거의 없는 고운 재 덕분에 당기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이미 몸을 크게 다친 아트위야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위에서 걸쳐진 로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괴한도 서둘러 내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발 견뎌 주십시오.”
야투는 검은 재 안쪽으로 파고들어간 드럼통 파이프에 다리부터 몸을 뒤로 집어넣었다. 드럼통은 어른 한 명이 겨우 통과할 크기지만 호리호리한 야투에겐 배낭을 메고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트위야를 드럼통 안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드럼통의 잘린 모서리에 등이 걸리며 아트위야가 짧게 비명을 냈지만 야투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아트위야의 옷이 북 찢기며 안으로 쑥 빨려 들어왔다.
“조금만 참으세요!”
야투는 늙고 여윈 몸에 온 힘을 다해 아트위야를 잡아당겼다. 반대편에서는 로프를 타고 내려온 플라칼 가 정찰대장이 높은 곳에서 서둘러 뛰어내리다가 검은 재에 발이 빠져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야투는 드럼통을 타고 뒤로 기어내려가 다시 아트위야를 힘껏 잡아당겼다. 드럼통 두세 개가 이렇게 길고 갑갑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어딜 도망가!”
정찰대장이 쏜 볼트가 드럼통 입구 부근에 팅 소리를 내고 박혔다. 정찰대장이 이 둘을 쫓아오려 했지만 고운 재에 종아리까지 푹 빠진 발이 문제였다. 야투는 그 사이 다시 아트위야를 더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엉덩이 뒤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지만 앞에서 석궁을 쏘아대는 적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무작정 몸을 뒤로 빼내고 아트위야를 드럼통 밖으로 온 힘을 다해 끌어냈다.
“이놈들이!”
정찰대장이 재에 박혀버린 신발을 아예 벗어버리고 맨발로 기어서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드럼통을 빠져나온 야투 박사는 재에 박혀있던 통을 온 힘껏 뽑아냈다.
“어, 어!”
드럼통이 빠지며 구멍이 도로 무너지자 당황한 정찰대장이 몸을 날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 안에서 미끄러진 드럼통은 다시 재 속으로 푹 파묻혀 들어가 버렸다. 수평 동굴로 뚫린 유일한 구멍이 드럼통과 함께 재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저 늙은이가!!!”
정찰대장이 칼집으로 재를 파내고 다시 통을 찾아내 끌어올리려 했지만 놀랍도록 고운 재는 파는 족족 그대로 무너져 그의 고생을 헛수고로 만들었다. 1분이 넘게 악을 쓰며 바닥을 파 보려 했던 그는 결국 지레 지쳐 칼집을 내던지고 말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재를 밑으로 파내려갈 수가 없었다.
“젠장! 있는 대로 다 내려와!”
그는 할룩스에 대고 소리를 질렀지만 먹통이었다. 그는 지원군을 데리러 허겁지겁 로프를 다시 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드럼통을 빼낸 야투는 탈진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의 앞에는 수직굴에서 흘러내린 검은 재 무더기 한쪽으로 찌그러진 드럼통들이 뒹굴고 있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미친 듯이 기운을 냈지만 고지대인 이곳에서 늙은 그가 이렇게 힘을 쓰는 건 거의 목숨을 거는 정도의 중노동이었다. 그는 넘어갈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트위야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묻기는 했지만 그가 대답을 못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저 그가 살아서 눈을 껌벅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야투에겐 충분했다.
“놈이 곧 지원군을 데리고 쫓아올 텐데……여기 있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야투가 막 들어온 수평굴을 돌아보았다. 으스스한 입을 벌리고 있는 굴은 차 두 대가 딱 붙어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제법 넓었다. 이 끝에는 검은 철성이 있을 테지만 이곳에서 제플린 산과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그곳까지 족히 수백 스타디아는 될 게 분명했다. 늙은 야투와 중상을 입은 아트위야가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닐뿐더러, 설사 갈 수 있다 해도 적의 입 안으로 제 발로 들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될 소리였다.
“어쩌죠? 안으로 더 갈 수도 없고.”
야투는 무심코 천장을 올려보았다. 잠시 한숨을 내쉰 그는 아트위야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쩌면 가는 길에 맨홀처럼 빠져나갈 출구가 또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은 더 들어가겠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습니다.”
말은 했지만 다리와 골반이 부서진 아트위야를 어떻게 옮겨야 할지는 막막했다. 설상가상으로 야투 역시 오른팔을 크게 다쳐 업을 수도 없었다. 그는 드럼통을 박을 때 썼던 듯한 합판을 밑에 깔고 아트위야를 눕혔다.
“일단 출발하겠습니다. 신께서 우리 길을 밝혀주실 겁니다.”
야투는 랜턴 하나에 의존한 채 아트위야가 누운 합판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눈앞의 암흑, 그 너머에 있는 적, 그리고 그보다 더 두려운 어떤 것의 공포가 그를 짓눌렀지만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이쪽뿐이었다.
“학, 학.
야투 박사는 채 1스타디아도 못 가 헐떡대기 시작했다. 바닥엔 모래와 검은 재가 깔려 제법 미끄럽긴 했지만 바퀴도 안 달린 합판에 사람을 싣고 끌고 가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몇 발짝 더 들어가자 댐퍼가 보였다. 공기가 철성 쪽으로만 흐르고 역류하지 않도록 비늘 모양으로 줄줄이 세워진 금속판이었다. 댐퍼는 수백 년을 버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태가 거의 완벽했다. 지치고 판단력까지 흐려진 야투는 먼저 왔던 정찰대가 댐퍼 부근에서 인계선을 발견했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아무 생각 없이 금속판을 밀고 그 사이를 지나갔다. 그의 손이 닿은 곳에서 먼지가 우수수 쏟아지더니 금빛이 은은하게 흐르는 원래의 색깔이 드러났다. 댐퍼에 걸려 있던 아주 가는 인계선이 소리도 없이 툭 끊겼다.
“괜찮으신가요?”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전혀 모르는 야투가 아트위야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걸려 끊긴 인계선을 남겨둔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부비트랩이었다면 둘 다 끝장이 났겠지만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는 자신이 인계선을 건드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계속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건 뒤쫓아오는 플라칼 가 정찰대는 물론 철성의 친위군과도 마주치지 않기를, 혹은 터빈이 작동해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황을 접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 전까지 이곳을 나갈 구멍을 찾아내야만 했다.
세네피스 황태후의 제거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철성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수술이 4시간째에 접어들면서 사람들 사이에 하나 둘 걱정의 목소리가 나왔다. 세네피스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룬에게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었다가 깬 황제는 황태후의 수술이 시작되었다는 말에 길길이 날뛰었지만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던 황제는 의식을 잃었고 그 뒤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상태를 확인한 코리온은 언제 깨시겠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마리안과 주페를 시켜 서쪽 동굴에서 북벽 방어시설 공사를 하고 있는 귀인 에스더를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원정군에 혹시 총리가 함께 오고 있냐는 엉뚱한 물음으로 사람들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런데 총리께서 오고 계시냐고 물은 게 뭐가 그리 놀랄 일이라고 그래?”
눈치 없는 다룬의 물음에 네피가 혀를 끌끌 차며 자신보다 더 둔한 이 동기를 슬쩍 노려보았다. 수술이 진행되는 내내, 가디언들은 진료실 문 앞 회랑의 황금탑 부근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세네피스에게 혹시라도 탈이 생기지 않을지 전전긍긍하느라 탈진해버린 아샤드 경과는 대조적으로 가디언들은 황제가 부활할 것이라는 기대에 잔뜩 들뜬 모습들이었다.
“어쨌든 총리께서 오고 계시긴 한 거야?”
“글쎄, 오신다고 해도 여기 올라오실 수나 있겠어? 오겠다고는 하셨는데 솔직히 황제와 총리가 한 자리에 있는 것도 거시기하고……솔직히 최악의 경우에도 황후나 장태자께서 아직 믿음을 줄 만큼은 아니시잖아.”
다룬의 무심한 대답에 네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육포를 질겅거리고 씹으며 안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코리온이 팔짱을 낀 채 제자리를 몇 번이나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 양반은 왜 수술에 안 들어가고 저러고 있어? 의사 면허도 있으시다며 천재 이름값은 해야지?”
“같은 R이라서 수술에 들어가 있으면 함께 고통을 느낀다나 봐요. 외과의도 아니고 해부학자시고요.”
옆에 쭈그리고 있던 경호대장 카토가 네피의 육포를 나눠먹으며 끼어들었다. 서쪽 동굴 앞에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던 카토도 그럭저럭 걸어다닐 만큼 나아진 상태였다.
“그래서 저렇게 엉거주춤하고 계시잖아요.”
자이납이 코리온을 다시 턱으로 가리켰다. 평소 막대처럼 꼿꼿하던 코리온이 지금은 꼬부랑 영감님처럼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불편한 걸음으로 서성대고 있었다.
“라말라 박사님이 신경외과 권위자라면서 왜 저리 걱정이래요?”
“권위자 할아버지가 와도 저런 엉터리 진료실에서 수술 제대로 하긴 쉽지 않을 텐데.”
네피의 불평을 듣기라도 한 듯, 니사의 보조를 하던 살람이 창백해진 얼굴로 뛰어나와 코리온과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표정이 굳어진 코리온은 살람을 따라 진료실에 들어가려다가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다못한 아샤드 경이 다가가 살람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아니냐!!! 황태후께선 무사하신 거냐?”
아샤드의 서슬퍼런 기세에 당황한 살람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직은……괜찮으십니다.”
“아직은?”
“최대한 신경을 썼지만 조직이 조금……많이 손상되었습니다. 출혈이 심해 수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당장 내 피라도 맞으면 가져가!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잖아! 발현자도 아니시니 혈액형만 맞으면 되잖아!”
아샤드의 인식표를 힐끔 확인한 살람은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한쪽에 모여 간식을 먹고 있는 분견대 병사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세 명을 골라내어 진료실 안으로 사라졌다.
“느낌이 안 좋은데요. 잘 안 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가디언들 사이에 끼어 있던 사에나가 끙끙대며 다시 제자리를 오가고 있는 코리온을 곁눈질했다.
“솔직히 저라면…….”
“황태후 그 양반이야 죽든 살든 이판사판 빼내고 지금쯤 황제 수술을 준비하고 있겠지. 그치?”
평소 사에나를 귀신 보듯 하던 네피가 냉큼 받았다. 이번엔 베흔이 아샤드를 짜증스레 곁눈질했다.
“그럼 황제가 우선이지 황태후가 우선이라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뭐, 내가 베흔 널 썩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네.”
가디언들 사이에 짧게 웃음이 오갔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그때, 마리안, 주페와 함께 서쪽 동굴에서 달려온 귀인 에스더가 창백해진 얼굴로 철성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유일한 황제의 배우자인 만큼,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사람들 앞을 휙 지나 황제가 있는 2층의 침실로 사라졌다.
모두의 관심이 진료실과 황제의 방에 쏠려있는 그때, 이번엔 터빈실이 있는 제일 안쪽에서 검댕 투성이의 엔지니어 한 명이 헐레벌떡 코리온에게로 달려왔다.
“저, 저기! 큰일입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던 분위기는 엔지니어의 고함에 와르르 무너졌다. 엔지니어도 자신의 고함에 사람들이 죄다 놀라 돌아보자 당황한 눈빛이었다. 코리온까지도 인상을 쓰며 그 엔지니어를 노려보았다.
“지금 여기 분위기가 보이지 않느냐?”
“아, 아니, 그게……전에 황상께서 1번 터빈 흡기구에 설치해 놓으신 인계선에 뭔가 걸렸습니다.”
놀란 베흔과 네피, 가디언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섰다.
“그쪽으로 적이 온다고?”
당황한 코리온이 가디언들을 돌아보았다.
“1번 터빈은 지금 수리중이요. 흡기구로 들어가는 정비구를 열어 줄 테니 적이 온 건지, 오작동한 건지 확인해 주시오. 갈림길도 없는 길고 좁은 동굴이니 중간중간 길목만 막으면 적이 아무리 많아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거요.”
“그런 데 들어갔다가 누가 모르고 여기서 터빈 켜면 어쩐대요? 그럼 팥죽이 되는 거예요?”
자이납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치 없이 입을 열었다가 네피에게 꿀밤을 맞았다.
“에잇, 재수 없게.”
“적의 정체를 모르니 정규군보다는 크바르나들이 가는 게 낫겠소.”
베흔이 이곳 분위기를 계속 흐리고 있는 아샤드에게 가 보라며 눈짓을 했지만 황제파들이 혹시라도 세네피스를 포기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그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보였다. 베흔 역시 혹시라도 세네피스에게 일이 생겼을 때 격분한 아샤드가 얼토당토않은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곳을 비울 맘이 없었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서 서로 눈싸움만 벌이고 있는 둘을 보다 못한 네피가 무기를 챙겨 불쑥 나섰다.
“씨발, 아무래도 내가 갈 일 같네. 크바르나 병력이나 좀 빌려주쇼. 자이납 너도 몸 나았으면 같이 가자.”
“에익, 갈 테면 혼자 가지 왜 물귀신처럼…….”
네피는 몸서리를 치며 도망가려는 자이납의 귀를 덥석 잡았다. 아샤드가 부하들 몇을 눈짓해 불러들였다.
“크바르나 20명을 데려가시오. 오작동한 건지도 모르니 신형 인계선하고 부비트랩 장비도 가져가시오.”
“빈말로라도 직접 간다는 소리는 안 하네.”
베흔이 툴툴거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결국 네피가 자이납, 크바르나들과 함께 터빈실로 향하고, 황금탑 앞은 다시 무서운 침묵과 긴장이 감돌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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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투와 아트위야가 양쪽을 싸움붙이는 거간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ㅎㅎㅎ 세네피스의 수술은 막판이 되어가고 카렐의 차례가 가까워집니다.
이번엔 책의 권수가 2권일지 3권일지 원고작업 막판에나 결정될 것 같아 예약기간이 2주 정도로 짧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의 공지 내고 얼마 안 가 바로 인쇄에 들어갈 참입니다.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없이 가시면 미워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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