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7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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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이봐!”
긴장감이 감도는 세네피스의 진료실 밖이 네피의 쩌렁쩌렁한 고함으로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손을 번쩍 쳐든 네피가 껄껄대며 터빈실 쪽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대박이야! 한건 건졌어!!!”
“저 미련한 놈은 분위기도 모르고 방정맞기는…….”
툴툴대던 베흔은 네피, 자이납과 함께 잔뜩 풀이 죽어 오고 있는 익숙한 노인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어, 어……, 저 저놈…….”
베흔은 33년 전, 제위전쟁 당시 대신관 묘 지상에서 자신을 따돌리고 도망갔던 늙은 의사의 모습을 바로 기억해냈다. 이 늙은이에게 속아 대신관 묘에 들어갔던 바로 그날이 근위대장으로서 그의 좋은 시절도 끝장이 난 날이었다.
“허어, 이 영감탱이 13선지자인지 13귀신인지 묘에서 졸지에 날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도망가더니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사셨나봐?”
베흔의 솥뚜껑만한 손에 멱살을 붙들린 야투는 숨이 꽉 막혔지만 순식간에 자신을 에워싼 황실군과 친위군 무장들 앞에서 파랗게 움츠러들어 재채기 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에게 적대적인 건 아니었다.
“아프라스 야투 신관님?”
세네피스의 수술을 끝내고 피곤한 표정으로 모자와 장갑을 벗고 있던 니사도 이 뜻밖의 포로에 크게 놀랐다. 소속이야 어쨌든, 야투 박사는 마구스들을 뺀 교단의 일반 신관들 중에는 가장 상급자였다. 니사는 베흔과 야투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급히 갈라놓았다. 사실 베흔도 잠시 몽니를 부렸을 뿐, 이제와 야투에게 옛 화풀이를 하려는 맘은 없어보였다.
니사가 야투의 망가진 옷을 추슬러주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뒤엔…….”
니사는 뒤따라오는 크바르나 병사들이 진 들것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이런 맙소사. 아트위야 현신이십니까?”
니사는 주변 시선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였다. 진료실 앞을 서성거리던 크바르나들도 ‘현신’이라는 말에 일제히 그를 따라 우르르 끓어 앉았다.
“하여간, 이 새끼들은 적도 구분 못 해.”
베흔과 네피가 아트위야의 들것 주변에 줄줄이 꿇어앉는 크바르나들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찼다. 인사를 마친 니사는 들것에 누워있는 아트위야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그의 숨결은 희미했고 아름답던 오드아이는 평소의 빛을 거의 잃고 있었다.
“어쩌다 이리 되신 겁니까?”
야투 박사는 자신을 험악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황실군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더듬더듬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굴에서 추락하셨다. 골반을 다치신 것 같아. 내 팔은 그냥 부러진 것뿐이야.”
“이렇게라도 발견되셔서 다행입니다. 이봐, 당장 응급수술이라도 해야겠다.”
니사는 아트위야의 들것을 든 크바르나들에게 진료실로 따라 들어오라 손짓했다. 수술복과 장갑을 다시 챙기며 진료실에 들어서려던 니사는 문 앞을 떡 막고 선 누군가에 가로막혔다.
“라말라 신관, 물러나라.”
난처해진 니사가 이 ‘또 다른 현신’을 올려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코리온이 사나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반역도당 앞에서 멋대로 고개를 숙이다니.”
주먹을 꽉 쥔 코리온의 손끝은 당장이라도 아트위야의 목을 졸라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놀란 니사가 몸으로 아트위야의 앞을 막아섰다.
“허나……엄연한 현신이십니다. 어느 신을 품고 계시건 제겐 상관없습니다. 신관으로서, 의사로서의 도리입니다.”
니사가 항변했지만 코리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정밀한 외과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의사는 그대뿐이다! 나머지는 햇병아리 군의관들이나 임상경험도 거의 없는 구조단의 해부학자들뿐이잖나! 당장 황상의 수술도 해야 하고 황태후의 예후도 어찌될지 모르는데 그대가 저자의 수술을 하겠다면 어쩌라는 거냐!”
코리온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하필 이 급한 때’ 나타난 불청객들 때문에 정작 황제의 수술 일정이 어그러질 판이었다. 하지만 니사로서는 현신이 죽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대는 황상의 수술을 해야 한다. 이 여자는 저 늙은이 혼자 알아서 수술하게 놔두고 가서 쉬고 있어라.”
“팔이 부러진 노인이 어떻게 환자를 수술합니까?”
코리온의 어처구니없는 지시에 니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때, 아트위야가 고개를 비틀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골반을 다치고 내상을 크게 입은 아트위야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당장 배를 열고 응급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코리온이 진료실 앞을 막아서고 있으니 니사도, 야투 박사도 발만 구를 수밖에 없었다.
“제발, 상태를 확인만이라도 하겠습니다. 급한 혈관만이라도 막으면 몇 시간은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대에겐 황상이 우선인가! 저 여자가 우선인가!”
코리온의 호통이 쩌렁 울렸다. 보다 못한 야투 박사까지 코리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니사와 야투의 읍소에도 코리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선 채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닥쳐라, 황상의 수술이 최우선이다. 세 개를 다 갖출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기나 하나!”
코리온의 말에 야투가 눈을 크게 뜨고 코리온을 올려보았다.
“사, 사제의 키를 찾았다고요?”
옆에 있던 베흔이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히죽거렸다.
“그래, 너희가 죽어라고 찾던 그거. 이제 황상의 잔딕을 빼는 일만 남았다고. 미안하지만 라말라 박사에겐 저 고양이눈 여자 말고 황상의 수술이 우선이야. 저 여자 수술은 네가 왼손으로 직접 하던지, 연구실 해부학자님들이나 의학교 갓 졸업한 새파란 군의관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
“저기, 저어, 그러시면…….”
야투가 주변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제가 황상……의 제거수술을 도와드리면 아트위야 현신의 수술을 해 주시렵니까?”
야투는 코리온 앞에 고개를 바싹 숙여 붙인 채 주변 사람들의 눈치만 연신 살폈다. 베흔이 기가 막혀 확 쏘아붙였다.
“지 손도 망가진 놈이 누구 수술을 해?”
“아니……제가 한다는 게 아니고요……황상의 잔딕을……제가 설치했거든요.”
순간 사람들 사이에 파문이 번졌다. 코리온의 눈가에 노기가 확 솟구쳤고, 네피는 펄쩍 뛰며 도끼에 손을 가져갔다.
“맙소사, 그게 이 늙은이였어???”
당황한 니사는 당장 야투를 쳐 죽이겠다며 덤벼드는 네피와 가디언들을 급히 막아서며 이 눈치 없는 늙은이를 쳐다보았다. 흥분한 이들 앞에서 자신이 황제의 잔딕을 설치했다고 털어놓는 건 날 죽여달라고 나서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지금 그런 소리를 왜 하세요?”
니사의 핀잔에도 야투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절 죽이시면 황상의 특이한 손목에 관해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죽이시는 겁니다.”
야투의 느닷없는 벼랑 끝 전술에 도끼를 쳐들고 있던 네피까지 기가 죽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지금껏 야투를 잡아먹을 듯 몰아붙이던 코리온까지도 당혹스러워했다. 야투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코리온은 마지못해 진료실 앞을 비켜주었다.
“내가 사제의 키를 닦을 1시간 내로 저 여자의 처치를 끝내고 황상의 수술을 준비해라. 혹 황상께 일이라도 생겼다간 네놈을 저 고양이눈 여자와 함께 터빈 안에 넣어서 돌려버릴 테다.”
코리온은 평소 잘 안 쓰던 험악한 표현까지 섞어가며 야투를 기겁하게 했다. 낯빛이 파랗게 질린 야투는 아트위야의 들것을 들고 허겁지겁 진료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뒤따라 들어온 니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저분 잔딕을 설치하신 게 맞아요? 제가 알기로 신관님은 그때…….”
“쉿.”
야투 박사는 니사의 의심에 찬 시선을 슬쩍 외면하며 왼손으로 간이 단층촬영기를 집어 니사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니사도 물러나지 않았다.
“신관님, 방금 말씀하신 게 맞냐고요?”
니사의 추궁에 야투 박사가 마지못해 솔직히 대답했다.
“난 구경만 했고 니딘투벨이 설치했어. 내가 했다손 쳐도 그 먼 옛날 수술을 내가 어떻게 아직까지 기억하겠냐?”
“예에?”
기겁을 한 니사가 얼른 진료실 문을 잠갔다. 황제의 구세주일지 모른다고 믿었던 야투의 어처구니없는 고백에 니사는 기가 막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맙소사, 그래서 그분 눈을 그렇게 열심히 피한 거예요? 그러면서 왜 책임 못 질 이야기는 하셨어요! 당장 황상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라고요?”
“안 그랬으면 아트위야 이분이 지금 여기 누워있으시겠나?”
야투가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양반 손목에 관해 잘 안다는 것까지 거짓말은 아냐. 아스탈 그 분도 손목에 시상하부가 있었으니까. 그 양반 손목과 대충 비슷하겠지. 뭐, 아니면……말고.”
야투 박사도 부담스러운지 주름이 잔뜩 진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 제발 그러길 기도하세요.”
니사가 퉁명스레 쏘아붙이며 아트위야의 골반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책임 못 질 큰소리에 그도 한 몫을 했으니 이젠 그도 공범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코리온도 이 늙은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땅히 대안이 없어 일부러 속아 넘어가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직접 메스를 잡아야 하는 니사로서는 과연 이 노인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진료실 안에서 니사와 야투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꿈에도 모르는 가디언들은 야투를 잡아온 덕분에 황제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졌을지 모른다며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때, 철성 밖을 지키던 가디언 힐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외쳤다.
“하늘이 맑아지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에 모두의 표정에 긴장이 감돌았다. 터빈 작동으로 일시 공중에 솟았던 큰 먼지들이 다시 땅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의미였다.
“분지에는 한두 시간 내로 수송선 착륙도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여기 철성은 그보다는 조금 늦겠지만 어쨌든 여기도 적의 사정권에 들게 됩니다.”
가디언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지금껏 양쪽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한편으로는 이 철성을 적에게서 지켜주었던― 모래폭풍이라는 갑옷이 벗겨지고 이제 철성의 황실군, 친위군도 적과 알몸을 드러낸 채로 맞서야 한다는 의미였다.
검은 철성이 작동을 시작하고 9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교단에는 행방불명된 아트위야와 야투 때문에 이미 비상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할룩스를 두들겨도 그들과는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들을 수색하러 나온 사카의 헤네티들은 그 둘이 공격을 당했다는 수직굴까지 도착해 일대를 뒤졌지만 강한 모래바람이 이미 웬만한 흔적은 다 지워버린 후라 그들이 정말로 황실군에 납치당했는지,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음모에 휘말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수직굴에 내려갔던 헤네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올라왔다. 사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수직굴 밑에까지 부하들을 보냈지만 밑으로 내려갔던 부하들은 고개를 저으며 되돌아 나왔다.
“플라칼 가 정찰대가 이미 둘러본 것 같은데 검은 재만 꽉 차 있습니다. 그냥 막다른 구멍입니다. 검은 재를 두는 지하 창고였던 것 같습니다.”
사카가 낯을 찡그렸다. 그로서는 재 밑에 또 다른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겉보기는 그저 검은 재만 꽉 차 있는 구덩이에 불과했다.
“위대한 현신께 뭐라 말씀드리냐.”
사카는 웬만해서는 절망하는 법이 없는 억센 사내였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보통의 무장도 아니고 현신이, 그것도 다하카르 교단의 2인자와 함께 실종이 된 건 교단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사카의 할룩스가 대신관 비서인 쿠마르의 이름을 보이며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우음?”
사카가 움찔했다. 그가 놀란 건 대신관이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아니고 수십 스타디아가 떨어진 크테시폰과 통신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부하들이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 훨씬 맑아졌습니다. 오후 6시인데도 웬일로 해가 보입니다. 이런 날이 있었던가요?”
하늘을 올려보니 검은 철성의 작동으로 온통 검은 폭풍에 뒤덮였던 판지셰르 분지의 하늘이 어느새 이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도 더 맑아져 있었다. 서쪽 하늘에선 희미한 태양도 보였고 군데군데 누런 폭풍이 옅어진 곳에서는 하늘 색깔 비슷한 곳도 보였다.
“아니, 처음이다.”
하늘이 맑아지고 통신도 열렸지만 사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현신님과 통신이 안 되는 게 날씨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고.”
사카는 그제야 할룩스를 켜고 그 너머의 창백해진 쿠마르의 얼굴을 확인했다.
“왜 이제야 받으십니까?”
쿠마르가 버럭 화를 냈다. 쿠마르의 표정만 봐도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 대답도 없는 사카에게 쿠마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쪽은 병사들에게 맡겨두고 빨리 돌아오라는 위대한 현신의 명이십니다.”
“알았다.”
사카는 평소처럼 왜냐는 둥, 무슨 일이냐는 둥 잡다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관의 명령이라면 군말 한 마디 없이 따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트라이크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카에게 쿠마르가 먼저 상황을 설명했다.
“비엔과 통신이 연결되면서 새 소식들이 무더기로 들어왔습니다.”
“네 표정을 보니 좋지 않군.”
“수비군 사령부가 황실군에 함락되었답니다. 플라칼 종가도 베아트릭스 그년 손에 넘어갔고요. 위대한 현신께서 늦기 전에 당장 철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라 하셨습니다.”
사카의 걸음이 트라이크 앞에서 딱 멈추었다. 그의 살기를 띤 얼굴이 무얼 뜻하는지는 쿠마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쿠마르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슈라 대장도 전사한 것 같습니다.”
“당장 재생이 불가능하냐?”
사카는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억지로 감추고 쿠마르를 노려보았다. 쿠마르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지난 사고 때 상온저장고에서 강제로 깨운 자들 중에 슈라 부단장의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기억이 몇 달 전으로 퇴행했겠지만……어쨌든 슈라 부단장을 다시 보실 수는 있습니다.”
사카는 별 대답 없이 트라이크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슈라가 마지막 생존의 동아줄을 잡은 건 다행이지만 이렇게 억지로 깬 슈라가 그가 이전에 알던 그 슈라라고 해야 할는지는 자신도 의문이었다. 사카는 왈칵 솟으려는 눈물을 감추며 트라이크에 속도를 바싹 붙였다. 쿠마르가 그의 속도 모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방금 황실군 선단의 첫 수송선이 외계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위대한 현신께서 그래서 서두르시는 모양입니다. 황실군은 한두 시간 내에 여기 분지에 상륙을 시도할 것 같습니다. 철성도 내일 아침이면 수송선으로 상륙 가능할 것 같다고 하고요. 드디어 길이 열렸습니다.”
사카는 고개만 끄덕거리며 거센 모래를 날리고 속도를 붙였다.
“지금 카나르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니 플라칼 가 놈들은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종가에 남아있던 첩 3명과 자식 4명이 셔틀 추락으로 몰살당했답니다. 헤즈 놈의 딸들까지 다 죽었고요. 분위기가 뒤숭숭할 테니 그쪽은 피해서 오시고요. 언제쯤 도착할 것 같죠?”
“지금 가고 있다고 말씀드려라.”
“아시겠지만 그분께서 철성에 함께 올라가겠다고 하십니다.”
사카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겐 나름의 불만 표시였지만 상대방은 그 속내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흠이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는 대신관의 뜻에 애당초 반대할 맘은 없었다.
사카는 새삼 다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셔틀을 띄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겠지만 철성이 뿜어내는 강력한 공기에 일시 솟구쳤던 무거운 먼지들이 급격히 가라앉으면서 놀랄 만큼 빠르게 맑아지고 있었다. 철성에 항공기가 다가갈 수 있는 때는 몇 달 내 처음이었다.
“자기네 상륙군 들여보내려고 철성 자체는 자살골을 넣은 셈이죠.”
쿠마르의 기분 나쁜 웃음에도 사카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쿠마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황실의 상륙군을 들여보내기 위해 철성의 공기정화장치를 최대한 돌리면서, 이제 철성 자체는 교단과 칼데아군의 항공 공습에 고스란히 노출된 꼴이었다.
“칼데아군은 뭐 하고 있고?”
사카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물었다.
“적이 여기로 오는 상황을 미처 예상을 못 했던지라 이제야 방공망을 설치하느라 부산합니다. 지난 몇 시간동안은 바깥출입도 못 했으니 지금이라도 하려는 모양입니다.”
“이 넓은 분지 어디로 상륙할지 알고?”
쿠마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군대 문제에 관해 잘 모르는 그에게 사카가 무표정하게 조언했다.
“위대한 현신께 회전은 불가피하다고 말씀드려라.”
“제가 방향을 잡아드리는 대로 항로를 잡으시면 됩니다.”
전령 겸 도선사 역할로 황실 공략군 사령선인 [1번함]에 막 도착한 분견대 셔틀 조종사가 지휘소 오벨리스크에 올라와 황제가 보낸 문서 꾸러미를 사령관 릴라크에게 전했다.
“수고했다.”
릴라크는 황제가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쓴 편지와 지도를 꼼꼼히 살핀 후, 자리에서 일어나 함교와 연결하라고 손짓했다.
“착륙합니까?”
함교를 맡은 황제 전용기 조종사 베네루스는 난생 처음 보는 희한한 기후대에 착륙해야 한다는 것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함교의 큰 창 옆에는 착륙할 때 조종사의 눈을 대신할 밀리타도 망원경을 눈에 대고 서서 지상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긴장하고 있는 함교 승무원들에게 셔틀 조종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지난 몇 시간에 비하면 천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베네루스는 못 들은 척 정면의 대형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착륙 지점은…….”
릴라크는 분견대 조종사가 전해 준 손지도와 자신이 가진 하임달의 작전지도를 비교하며 세심히 위치를 확인했다. 오벨리스크의 풍경은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딘지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였다. 상석에 어깨를 쫙 펴고 앉은 릴라크와는 달리 정작 가장 상급자인 총리 페로는 구석진 자리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뚱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앉아 눈만 흘기고 있었다.
그동안 황제령에서 함께 출발한 서부와 북부군 수송선까지 속속 도착해 선단의 규모는 어느새 50척으로 늘어나 스페이스를 꽉 채워갔다.
“여기에 착륙한다.”
릴라크가 가리킨 곳은 철성이 있는 제플린 산의 바로 남쪽, 얼마 전 세닉 가 패잔병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 언덕 바로 아래였다.
“여기부터 송풍로 밑단까지 길게 전개한다.”
“하임달 결전이 있던 곳보다 훨씬 산에 바싹 붙었군요.”
하임달 참전용사인 1군단장 타슈카의 말에 릴라크가 까칠하게 대꾸했다.
“그때 어찌 싸웠는지는 내 관심 밖이야. 이번 전투는 카렐 대제의 전투다.”
황제가 오르마즈 경과 비교당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린 타슈카가 무안하게 얼굴을 붉혔다.
내내 조용하던 페로가 불쑥 물었다.
“철성에는 바로 상륙할 수 없는 거냐?”
“알아봤지만 그곳은 아직 폭풍이 덜 가셔서 상륙이 어렵습니다. 일러도 내일 아침쯤에나 가능할 겁니다. 총리께선 손님 자격이시니 회의 중엔 가만히 계셔 주면 좋겠습니다.”
릴라크의 주의를 받은 페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 콧대 높은 독재자 스타일 무장은 총리라고 따로 신경 써 주는 법이 없었다. 원래 계획에 없었던 페로가 느닷없이 개인 셔틀을 몰고 쫓아와 이 1번함에 도킹했을 때도 릴라크는 원정군의 공식 지휘체계 명단에 없는 개인 자격 손님이니 구석에 조용히 있으라며 지휘소의 최고 상석에서 엉덩이도 떼지 않았다.
합리적으로 따져보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국구이고 총리인 페로의 권세를 생각하면 감히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릴라크는 함내에서 제일 상석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고, 페로는 말석에서 차나 마시며 눈치를 감내하는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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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분들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페로의 등장입니다. 다만 찌그러져 등장하는 게 문제이고요.....;;비엔의 전투는 결과만 다루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나저나 3부의 출판본 노블레스 연재가 오늘부로 100회를 찍었네요. 연재본에 비해 조회수 성적이 너무 시원찮아 속은 상하지만 어쨌든 나름 자축을 해 봅니다.;;; 연재본은 출판본이 나올 때 전후해서 잠시간 연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없이 가시지 말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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