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8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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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크가 지도와 시계를 번갈아 확인하며 분견대 조종사에게 물었다.
“일출과 일몰 시간이 어떻게 되냐?”
“고위도라 새벽 4시 정도에 여명이 보이기 시작해 저녁 11시까지 해가 있습니다. 모래폭풍 때문에 지금까지는 지상에서 새벽이나 초저녁엔 밤이나 다름없었지만 내일쯤 낙진이 거의 가라앉고 나면 정상적으로 하늘이 보일 겁니다. 이제 봄이라 조만간 백야가 되겠죠.”
설명을 들은 릴라크가 지도를 가리키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원정함대 집결 끝났으니 접근 시작해라. 목표지 시각 19시, 황상께서 상륙을 지시한 시각이다. 해가 지기 전에 자리를 잡는다.”
베네루스는 꼭대기의 함교에서, 분견대 조종사는 오벨리스크의 보조 함교에서 동시에 키를 잡았다. 50척의 황실군 하임달 원정함대는 1번함을 선두로 하임달 9번 행성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익숙지 않은 베네루스가 애꿎은 분견대 조종사에게 툴툴거렸다.
“그나저나 저렇게 시계가 안 좋으면 원칙으로는 상륙 안 하는 게 맞는데.”
“그래도 모래폭풍이 남아있을 때 착륙하는 게 좋습니다. 오후 이 시간이 하루 중에는 그나마 기후가 낫습니다. 착륙이 어려운 게 나을지, 자폭셔틀의 벼락을 맞는 게 나을지를 비교하면요. 황상께서도 그걸 고려해서 상륙시간을 지금으로 잡으셨을 겁니다.”
“하긴, 자폭셔틀에 엔진이 박살나서 공중에서 꼴아박는 것보다야 착륙하다 랜딩보드가 주저앉는 게 낫지.”
베네루스는 하는 수 없이 북극 상공으로 천천히 고도를 낮추며 며칠 전 칼데아군이 먼저 상륙했던 고향 행성의 대기권으로 천천히 접어들었다.
“행성 에너지장벽이 없으니 여기까지는 만사형통이네.”
잠시 여유로운 척 하려 했던 베네루스는 함선이 갑자기 크게 흔들리자 순간 당황하며 키를 꽉 쥐었다. 검은 철성이 작동을 시작했고, 굵은 재도 가라앉아 칼데아군이 상륙했을 때에 비하면 대기가 나아졌다지만 몰아치는 모래폭풍은 초행인 황실군 조종사들에겐 여전히 큰 부담이었다.
“속도를 더 내십시오. 그편이 낫습니다.”
분견대 조종사의 조언에 50척의 황실군 함대는 시계 제로에 가까운 대기권을 맹렬히 속도를 붙여 나아갔다. 계기들의 절반 이상이 먹통이 되었지만 분견대 조종사가 ‘감’으로 대기 상태를 짚어내고, 함교 앞에 망원경을 들고 선 밀리타가 파란 빛이 감싸고 있는 거대한 분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방향을 알려주었다.
“분지 북쪽은 제플린 산 때문에 접근이 어렵습니다. 서쪽으로 돌아 들어갑니다.”
난기류에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며 경험이 없는 승무원들의 비명이 중간중간 함교를 울렸다. 이런 최악의 상륙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오벨리스크 지휘부의 고위급 무장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보였다.
“더 흔들립니다. 조심하십시오.”
베네루스가 방향을 돌리며 선체가 쿵쾅거리자 고상을 떨던 오벨리스크에서도 비명과 어찌된 것이냐는 고함이 툭툭 터져나왔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에서 상륙했던 칼데아군보다는 분명 나았다. 선체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방향을 잃을 만큼은 아니었다.
“산맥을 넘어갑니다!”
1번함은 판지셰르 분지의 경계를 이루는 서쪽 산맥의 고봉 사이를 휙 지나갔고, 뒤따르는 함대도 먼저 간 궤적을 따라 1척, 혹은 2척이 줄을 맞춰 차례로 산 사이를 통과했다.
“카나르의 자칭 황제가 보면 자존심 상하겠네.”
릴라크의 한 마디에 긴장된 오벨리스크에도 잠시 웃음이 흘렀다. 막판에 병력을 억지로 늘리느라 어중이떠중이 수송선까지 다 동원해야 했던 칼데아군과는 달리 황실 동맹군에는 강제 징발한 민간 수송선도 그리 많지 않았다. 선단 절반 이상이 훈련받은 군용함선들이라 앞서서 착륙하려 아귀다툼을 벌이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분지 남쪽에 남부 숙영지가 보여! 어마어마한데!”
망원경을 든 밀리타가 산을 넘자마자 분지 남쪽을 가리켜보였다. 하지만 다른 조종사들의 육안으로는 적군이 있는지 없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머리에 파란 구름모자 같은 걸 쓴 곳이 철성이 있는 곳이냐?”
밀리타의 물음에 분견대 조종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거기가 제플린 산입니다. 그 남쪽 사면이 목적지입니다. 적의 간이 에너지장벽 바로 북쪽입니다.”
“이쯤이면 적의 방공망 안에 들어갈 텐데.”
베네루스는 밀리타가 손으로 표시해 준 지도를 보며 걱정을 드러냈지만 분견대 조종사가 고개를 저었다.
“모래폭풍과 검은 재 때문에 자기 와이어는 유효범위가 확 줄어드니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자폭셔틀은 감지거리가 짧아질 테지만 그래도 조심하시는 편이…….”
이 조종사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밀리타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적진에서 뭐 동그란 게 수십 개 올라오는데!!!”
“자폭셔틀입니다.”
베네루스가 급히 스캐너를 보았지만 검은 재와 모래폭풍 때문에 둔해진 스캐너에는 아예 표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밀리타의 다음 말이 조금이나마 이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절반 정도는 여기로 안 오고 그대로 다시 떨어지는데? 나머지의 절반 정도는 엉뚱한 데로 가고 있고, 여기로 오는 건 예닐곱 개 정도?”
“어쩌지?”
베네루스가 막 고민을 시작한 그때, 오벨리스크에서 사령관 릴라크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쩌긴 어째, 그냥 밀어붙여. 이 새끼야.”
그제야 릴라크의 스타일을 깨달은 베네루스는 최대한 출력을 높여 목적지인 제플린 산의 남쪽 사면으로 속도를 붙였다. 겁에 질린 밀리타의 목소리 톤이 조금 전보다 2배는 높아졌다.
“자폭 셔틀이 또 올라와! 몇 개는 여기로 날아오는데!”
“제기랄! 올라오던지 말던지요!”
목적지를 앞두고 베네루스가 급격히 속도를 늦추었다. 평소보다 감도가 훨씬 둔해진 스캐너에 적이 날린 자폭셔틀 2개가 근거리에서 돌연 확 모습을 드러냈다.
“이크!”
적의 자폭셔틀 역시 추적기능이 약해 1개는 그대로 옆을 스쳐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1발이 꽁무니에 바싹 달라붙었다. 뒤이어 뒷골이 흔들릴 만큼 강한 충격이 1번함을 뒤흔들었다.
“우현 부근에서 터졌습니다!”
베네루스가 얼른 상태를 확인하며 화면 속 릴라크에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쪽의 대답은 생각 외로 냉랭했다.
“추락하는 거 아니면 그만 징징거려!”
기겁을 한 베네루스는 다시 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옆구리에 한 발을 맞은 1번함은 크게 흔들리고 있지만 당장 추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뒤따라오는 함대에서도 서너 척이 맞은 듯 다급한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자폭셔틀 또 한 발이 스쳐 날아갔고, 그의 눈앞에 제플린 산 남쪽 자락의 완만한 경사면이 나타났다. 황제가 말했던 상륙예정지였다.
망원경으로 밑을 내려다본 밀리타가 걱정스레 말했다.
“적군 초소나 작은 부대가 몇 개 보이는데?”
“상관없습니다. 그냥 짓밟고 상륙하면 됩니다.”
릴라크가 빨리 상륙하라며 베네루스를 재촉했다. 1번함은 아직 적군이 군데군데 뛰어다니는 사면에 상륙을 위해 멈춰섰다. 그때, 또 한 발의 자폭셔틀이 측면에 명중하면서 선체가 옆으로 휙 기울었다. 함교에 있던 사람들이 우수수 한쪽으로 쓰러졌고, 오벨리스크에서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스캐너에선 자폭셔틀 하나가 이쪽을 노리고 또 날아들고 있었다. 저것까지 맞는다면 아무리 맷집 좋은 군용함이라 해도 분명 위험했다.
“상륙합니다!”
베네루스는 세 번째로 얻어맞느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출력을 확 낮추었다. 함선이 자유낙하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고도를 푹 낮추자 동시에 중력도 확 낮아지면서 조금 전보다 더 큰 비명이 함교와 오벨리스크를 뒤엎었다.
“우악!”
1번함은 랜딩보드가 감당할 수 있는 거의 한계치의 충격으로 땅바닥을 쿵 하며 딛고 섰다. 갑자기 낮아진 중력에 기겁을 했던 사람들이 이번엔 정반대의 엄청난 중력에 나뒹굴었지만 충격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어서요.”
계기판에 이마를 처박았던 분견대 조종사가 멍이 든 이마를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이 함선을 노리고 날아들던 자폭셔틀이 함교 바로 옆 지면에 명중하며 엄청난 불꽃을 공중에 피워올렸다. 막 착륙한 1번함은 그 충격에 또다시 휘청거렸지만 최소한 이제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자폭셔틀이 떨어진 위치를 본 베네루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빨리 착륙하지 않았더라면 함교에 정확히 명중했을 위치였다.
“해치 엽니다. 불 켜고 선봉대 내려보내겠습니다.”
베네루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밑바닥 해치를 여는 버튼을 올렸다. 부르릉 하고 해치가 내려가는 육중한 진동음이 울리더니 선봉대인 에키트 보병대와 경기병대가 우르르 몰려나가는 모습이 스크린에 비춰졌다. 동시에 함선의 모든 외부 조명이 일제히 켜지면서 산자락의 초저녁 옅은 어둠을 쫓아냈다. 이제 이것으로 1번함 조종사로서의 베네루스의 가장 큰 임무는 완수된 셈이었다.
“모두 내려! 상륙이다!”
오벨리스크에선 사령관 릴라크가 주변의 무장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지휘소에 모여 있던 각 부대 지휘관들이 각자의 부대를 찾아 앞 다투어 빠져나갔다.
훤히 불을 켜고 위치를 알리는 1번함을 중심점으로, 나머지 함선들도 차례차례 제플린 산의 남쪽 사면에 자리를 잡았다. 운이 좋아 온전히 착륙하는 것이 절반 정도이고, 자폭셔틀에 한두 발 이상 맞아 생채기가 난 것도 여럿이었다. 심하게 당한 서너 척은 연기를 풀풀 뿜으며 엉뚱한 산 중턱에, 혹은 제 위치가 아닌 곳에 볼썽사납게 머리를 처박고 가까스로 병력만 내려놓았다. 남부의 방공망을 정면 돌파하느라 4척을 날렸던 비엔 공략군을 빼면 황실군 역사상 최악의 상륙이지만 그래도 먼저 도착한 칼데아군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생각보다는 낫네.”
한숨 놓은 베네루스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남부가 쏜 수많은 자폭셔틀 중 명중한 건 채 10분의 1도 되지 않으니 분견대 조종사 말대로 검은 재와 모래폭풍이 최소한 오늘까지는 황실 원정군을 보호해 준 셈이었다. 철성이 제대로 돌아가면서 이나마 있는 재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내일 해를 볼 즈음에는 훨씬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보니 어스름이 내려앉는 초저녁 하늘 사이로 오로라가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짜증나는 검은 재와 모래폭풍이 없었다면 하늘을 색색의 향연으로 물들이는 화려한 장관이었을 것 같았다.
훤한 조명이 비치는 함교의 창밖으로, 백마를 타고 달려나가는 릴라크와 지휘부의 모습이 보였다. 황실 깃발을 직접 어깨에 둘러멘 릴라크는 바닥에 깃발을 푹 꽂아 넣으며 사람들에게 주먹을 번쩍 들어보였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선봉대 장병들이 지르는 우렁찬 고함이 방송을 통해 이 함교에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지난 몇 달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랜 동안 황제가 칼을 갈며 준비해 왔던 21만의 황실 동맹군이 ‘새로운 황제령’인 하임달 9번 행성에서 드디어 황실다운 힘을 발휘할 준비를 갖춘 셈이었다.
모두가 감격에 겨워하던 그 시간, 1번함 꽁무니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트라이크 몇 대가 검은 철성이 있는 산사면을 부릉거리며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운 모래가 가득 쌓여 걸음조차 디디기 힘든 제플린 산의 남쪽 산사면은 어제 철성에서 패전한 세닉 가 패잔병들이 우르르 굴러 떨어지면서 칼데아군이 농담 삼아 ‘인간폭포’라고 이름을 붙인 곳이었다. 경사도 가파른데다가 모래가 가득 쌓여 굴러 내려올 수는 있지만 아무도 올라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하지만 괴물만한 앞바퀴 2개에 뒤에는 트랙을 단 집채만 한 트라이크들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언덕을 꾸역꾸역 기어 올라갔다.
그들의 모습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이 복잡한 와중에 그저 손님 자격으로 1번함을 빌려 타고 온 그들을 굳이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1만의 황실군이 하임달에 첫발을 디디던 감격스런 저녁, 정작 황제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선단이 도착하기 얼마 전, 완전히 의식을 잃은 황제는 ‘황실군이 도착했어요.’라는 에스더의 속삭임에도 손끝과 눈꺼풀만 조금 움직였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 상태는 자정이 넘어간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들으셨어요?”
카렐에게선 이번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철성 2층의 냉기가 도는 방 안에서 옛 카파키 가 작업자들이 썼던 낡은 야전침대에 누워 이렇게 맥 빠진 시간과, 짧은 발작 사이를 오가며 죽음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중이었다. 십여 분 전, 또 한 번의 짧은 발작을 겨우 살아서 넘긴 카렐은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채 옆에서 지켜보는 식솔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있었다.
“폐하, 곧 수술을 시작한다고요.”
아트위야의 응급수술을 서둘러 마치고 돌아온 니사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황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낙담한 니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카렐의 손을 꼭 맞쥐고 있던 에스더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알아들으셨다. 분명 손에 힘이 들어가셨어.”
에스더가 억지로 웃으며 카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반대편에 있던 마하까지 바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알아들으셨어요! 알지도 못하면서 엉뚱한 소리 하지 말아요!”
얼굴까지 붉어진 마하가 니사에게 거의 호통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공격적인 기세에 지레 당황한 니사가 헛기침을 했다.
에스더가 황제의 손을 어루만지며 침착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사제의 키는 준비가 된 거냐?”
“현신……리쿠 학장께서 곧 가져오실 겁니다. 아래층에 수술실을 꾸며놨고 야투 박사도 준비가 끝났으니 그리로 모시려 합니다.”
에스더는 니사를 따라온 야투를 의심이 잔뜩 서린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는 황제의 수술에 포로를 참여시키는 것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차였다. 하지만 카렐의 손목을 열어 본 사람은 야투 박사가 유일하다는 니사의 설득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에스더가 황제의 수술에 함께 들어가겠다고 한 것도 ‘그자가 딴생각이라도 했다가는 자신의 손으로 목구멍에 구멍을 내 버리겠다는 살벌한 의도에서였다.
“잠은 좀 자고 나왔고?”
에스더가 데데한 얼굴의 니사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를 생각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니사는 어제 오후 세네피스의 수술을 한 후 바로 아트위야의 응급수술을 하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안한 에스더에게는 피곤에 찌들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니사의 얼굴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태후 계신 병실에서 잠깐 자고 나왔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야투 신관님은 저보다 상태가 훨씬 좋으시고요.”
“수술할 의사가 오른팔이 부러져서 어디 써먹는다고?”
에스더가 짜증스레 쏘아붙였다. 황실군 군의관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야투는 자신의 손에 곧 목숨을 맡길 황제의 모습을 두려움 반, 당혹스러움 반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반쯤 한숨이 섞인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얼마 만에 이런 수술을 해 보는지 기억도 안 나는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술을 앞둔 두 의사들의 입가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둘은 양대 교단에서 마구스 바로 밑의 2인자들이고,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의이지만 잔딕 제거는 생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니사는 황제를 살리기 위해, 야투는 자신과 아트위야가 살기 위해 이 수술을 꼭 성공해야 했다. 실패는 황제 혼자만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니사의 물음에 야투가 고개를 저었다.
“손목이라 구조가 남달라서 설치도 한나절이 걸렸네. 상식적으로 제거는 그 이상 걸리지 않던가?”
그때, 코리온이 불쑥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지난 몇 시간 돋보기와 작은 솜, 핀셋을 들고 씨름한 코리온의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도 ‘유학자의 도리’라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였지만 세네피스와 카렐의 수술을 준비한 지난 하루 이틀간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이젠 질끈 묶은 긴 머리에 턱에도 거뭇거뭇 수염이 돋아 마치 이곳에 살던 카히나 무리의 하나가 된 것 같았다.
“키는 준비되었습니까?”
니사의 물음에 그는 돌돌 말은 비단 손수건을 사람들 앞에 펼쳐보였다.
“이게 맞는가?”
코리온의 눈초리가 야투의 겁에 질린 눈동자를 똑바로 향했다.
“가짜를 만들었으니 진짜가 어찌 생겼는지도 누구보다 잘 안다는 뜻이겠지?”
야투는 조심조심 손수건 위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진짜 오팔을 능가하는 영롱한 무지개빛의 손톱만한 조각이 이 많은 구경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에 수술용 돋보기를 대고 조각을 구석구석 확인한 야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가 맞습니다.”
키의 진위를 야투에게 확인하는 것이 불만스러워진 에스더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허리춤에는 여치하면 야투의 목을 벨 칼이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니사에게 가장 불안한 건 야투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걸로 황금탑 문을 열어보셨습니까?”
“아니.”
코리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안 열렸다면 안 할 텐가?”
사제의 키를 쥔 니사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에스더는 그의 손에 오르마즈에게서 뽑아 온 12번 잔딕, 그리고 마하가 교단에서 빼앗았던 14번 잔딕을 모두 넘겨주었다.
“그럼 부탁하네.”
사제의 키와 두 개의 잔딕을 모두 쥔 니사의 작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니사는 카렐의 식솔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왼쪽 손목에서 마구스 팔찌를 벗겨냈다. 카렐이 마지막으로 쓰러진 이후, 빛을 거의 잃은 손목의 돌은 팔찌가 벗겨지고 피 구멍에서 침이 빠지면서 결국 완전히 꺼져버렸다.
“내가 갖고 있을래!”
마하가 얼른 손을 내밀었지만 니사는 황제의 다른 소지품들처럼 이곳의 유일한 배우자인 에스더의 손에 넘겨주었다. 마하는 니사가 황제의 물건을 모두 에스더에게만 맡기자 잔뜩 골이 나 눈을 흘겼다. 니사는 화가 난 이 소녀가 폭주하기 전에 얼른 당근을 던져주었다.
“황상께서 고통을 덜 느끼시도록 마하 대군께서도 수술에 함께 들어와 계셨으면 합니다.”
그때, 오빠 품에 있던 마리안이 카렐의 침대 밑에 기어들어가 안 보이게 꽁꽁 감추어놓은 낡은 상자 모양 가방을 끌어안고 기어 나왔다. 카렐이 쓰러지기 전, 자신의 침대 밑에 몰래 감춰둔 듯했다. 찾는 솜씨 하나는 일품인 마리안이 이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황상 꺼 아니에요? ‘마라부트 투아렉’은 또 누구예요?”
마리안은 가방 위에 붙어있는 [투아렉 상사 사장 겸 영업부장 마라부트 투아렉]이라는 낙타 그림의 명함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이는 가방 손잡이에 코를 킁킁거리고는 혼자 해해거리며 가방을 꽉 안았다.
“히이이, 황상 냄새 맞아.”
“그거 언니한테 내놔.”
황제의 물건을 모두 차지하고 싶은 언니 마하가 눈을 흘기자 꼬마는 들기도 버거운 가방을 끌어안고 재빨리 오빠 주페의 뒤로 도망갔다.
“싫어, 내가 갖고 있을래.”
“이제 모셔가야 합니다.”
니사가 들것을 든 힐러와 카토에게 손짓을 보내자 에스더는 카렐의 마구스 팔찌를 품에 꼭 안고 그의 병상에서 한 발 물러났다. 마리안은 낡은 가방을 마치 카렐인 양 끌어안고 오빠 주페를 올려보았다.
“오빠,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 나으시는 거야?”
“응, 한 밤만 자고 일어나면 이제 너 안고 뽀뽀해 주실 거야.”
주페는 빤한 거짓말을 하며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카토와 힐러가 니사의 지시를 받으며 카렐을 조심조심 들것에 옮겨 눕혔다. 마하는 잠시라도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그의 한 손을 놓지 않고 침대 위를 기어 넘어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내려가자.”
황제의 들것을 든 두 가디언이 2층의 방을 나섰다. 황금탑이 있는 철성의 널찍한 1층 홀에는 이 늦은 시각에도 황제의 수술 소식을 듣고 모인 가디언과 분견대원, 크바르나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황제를 기다리며 모여서 있었다.
“제국의 네 번째 황제이시며 어둠과 공포, 천둥과 뇌우를 지배하는 위대한 현신 카렐 대제이시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 두 직함을 함께 외치는 카토의 우렁찬 목소리에 1층에 모여 있던 전사들이 우르르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철성을 수호하는 R의 사제이시다.”
카토의 뒤이어진 목소리는 결국 목이 메어 끝에서 푹 죽고 말았다. 카토와 힐러는 황제가 누운 들것을 앞뒤로 들고 삐거덕거리는 철제 계단을 내려갔고, 니사와 야투, 황제의 가족들은 굳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계단 밑에 모여 있던 전사들이 양쪽으로 우르르 갈라지며 그들에게 길을 내 주었다.
“눈 뜨셨어!”
마하의 외침에 앞에서 들것을 들고 가던 카토와 니사가 얼른 카렐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말로 그는 긴 속눈썹 사이로 그레이오팔을 가늘게 드러낸 채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수술실로 향하는 그의 시선은 이 마지막 순간까지 철성을 함께 지켜 온 X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에 담겠다는 듯 그들의 얼굴 사이를 빠르게 움직였다.
카렐의 수술이 있을 방은 황금탑 바로 옆, 옛날 작업자들이 숙소로 썼던 먼지투성이의 썰렁한 방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황제는 자신의 들것을 따라 몰려드는 수십의 전사들을 향해 천천히 오른쪽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검지와 중지를 한 번 꼬아보이고는 그 안으로 사라졌다.
“와하하!!!”
이 와중에도 행운을 그리며 들어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뒤에 남겨진 자이납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기 시작했다.
“나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술 사주시기예요!”
카렐이 알았다며 엄지를 번쩍 들어보였다. 자이납이 큰 소리로 웃는 모습에 다른 병사들도 하나 둘 웃음을 터뜨렸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았고, 그뿐이었다. 자이납은 눈꼬리에 글썽이는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목소리가 수술실 안에까지 전해지도록 아주 큰 소리로 웃었다.
허름한 수술대에 누운 카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본 코리온은 피곤에 찌든 니사와 팔이 부러져 수술실에서는 아무 구실도 못 하는 야투, 이 둘의 손에 그를 놓아둔 채 천천히 뒤돌아 나왔다. 이젠 운명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길 뿐이었다. 닫히는 문 뒤로, 야투 박사의 자신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개선을 그어야겠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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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수술의 시작입니다. 마하와 마리안은 벌써 자매의 전쟁(?)을 시작했고요.
마지막 출판본 원고작업은 막바지에 들어갔습니다. 원고는 끝났고 이제 마지막 손질과 교정만 마무리하면 됩니다. (권수가 안 정해져 공지는 막판에 올릴 예정입니다.) 그나저나 교정 맡으신 분들이 메일에 답장이 없으신데 메일함 확인 부탁드립니다.;;;
출판본 작업관계로 한동안 연재분의 연재 간격은 1주에 한 번, 금요일로 조정하려 합니다. 노블레스 연재는 지금까지처럼 하루 3, 4편씩 계속 올립니다. 가능한 노블레스 엔딩을 먼저 내려 합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없이 가시지 말고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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