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14화 (1,108/1,132)

< -- 1114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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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수송선에 있던 이디나가 큰 방패를 든 슈라와 십여 명의 경호를 받으며 천천히 내려섰다. 그는 헤네티들이 만들어 놓은 2층 높이의 단에 올라 그곳의 옥좌에 점잖게 자리를 잡았다. 아나콘다의 사정권 밖이긴 하지만 헤네티 경호원들은 위대한 현신에게 행여 파편이나 도탄이 날아들지 않도록 그의 주변에 투명한 강화 보호막을 세웠다.

“위대한 현신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사카가 칼을 번쩍 쳐들었다. 헤네티들은 일제히 뒤로 돌아서서 그들의 현신을 향해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들 모두는 전쟁이 삶 자체인 노련한 전사들이고, 산 아래 분지에서와 같은 의식적인 선동이나 격한 흥분 같은 건 필요가 없었다.

“저 밑은 이제 시작하려나봅니다.”

슈라의 말에 이디나가 등 뒤, 방금 떠나온 제플린 산 아래 분지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저지대 분지에서 마주하고 있는 35만의 칼데아군과 21만의 황실 동맹군들이 경쟁적으로 외치는 어마어마한 함성도 산 정상의 이곳까지 메아리치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칼데아군의 날카롭고 톤 높은 진격나팔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이 멀리까지 전해져왔다. 그에 질세라 황실군에도 임전태세를 알리는 굵고 긴 나팔소리가 분지를 흔들었다.

“언뜻 봐도 상대가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쿠마르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지만 이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경험해 본 일도, 전황을 이해할만한 지식도 없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하얀 물결의 칼데아 중장보병대가 산자락 오르막의 초입에 길게 포진하고 있는 황실동맹군을 향해 맹렬한 해일처럼 몰려드는 광경을 그저 무심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거였냐.”

이디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동맹군 후미에 있는 수백 문의 포대에서 칼데아군을 향해 날리는 어마어마한 포탄이 성기게 엉킨 실처럼 공중에서 마구 교차했고, 중간중간 날아가는 화염탄은 칼데아군 보병대 중앙에 수많은 붉은 구멍을 냈다. 멀리에서 지켜보는 전장은 마치 전위예술가가 그리는 거친 톤의 추상화처럼 혼돈 속에 질서가 있고, 강렬하며 아름다웠다.

“멋지구나.”

이디나의 평가는 간단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양쪽의 포격과 함성이 절박하리만큼 피치를 올렸다. 하지만 정작 충돌하는 순간, 그 찢어지는 굉음은 도리어 확 사그라졌다. 양쪽 날개가 먼저 충돌했고, 느리게 전진한 중앙이 제일 마지막에 부딪치며 황실 동맹군의 긴 대오가 마치 긴 로프를 흔들 듯 좌우 중앙 모두에서 크게 출렁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름답던 추상화는 누군가 손으로 문대어 망가뜨린 듯 혼란스럽고 지저분해졌다. 박자를 맞춰 울리던 우렁찬 함성도 사방에서 제멋대로 질러대는 고성으로 망가졌다.

“이쯤이면 잘 구경했다.”

산 아래의 처절한 전투 시작을 지켜본 이디나는 다시 고원의 전장으로 돌아앉았다. 그 사이, 크바르나들의 뒤, 포병대가 있는 철성 앞 계단에는 검은 무명포를 걸친 큰 키의 유학자와 붉은 황소가 새겨진 갑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나란히 서서 망원경으로 이쪽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뭔가 빠졌군요.”

슈라가 킬킬거렸다. 이디나의 입가에도 살짝 가식적인 웃음이 번졌지만 황제가 없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심정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럼 우리도 시작할 때가 되었냐.”

이디나는 전방에 보이는 검은 철성과 그 주변을 응시했다. 철성 앞 고원은 1만 가까운 양측 최정예 군대가 대치하고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이곳의 전장은 산 아래의 전쟁터와는 달랐다. 크바르나와 코런덤 모두 가벼운 경갑주만 입었고, 십여 명 남짓씩 헐겁게 모여 각자의 석궁, 혹은 마우저와 방패, 짧은 검을 조용히 손보고 서로의 뒤와 옆을 지켜 줄 동료를 격려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늘 하나 찌를 틈 없는 밀집대오도, 함성도, 기세싸움도 없었다. 양쪽 군대 모두에서 최대로 당겨놓은 발리스타 림이 그 조용함 속에서 당장 부러질 듯 뿌드득거리며 귀를 거슬리게 했다.

이디나의 곁에서 물러나온 부단장 슈라는 여느 때처럼 병사들 사이에 서 있는 여단장 사카에게 다가갔다.

“개인화기는 우리 마우저가 훨씬 강하지만 포병대는 놈들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겠네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지.”

사카는 팔짱을 낀 채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내가 오른쪽의 3개 대대를 지휘할 테니 넌 왼쪽 3개 대대를 맡아라.”

“알겠습니다. 후훗.”

슈라가 이 긴장된 타이밍에서 뜬금없이 실실거리고 웃는 모습에 사카가 슬쩍 눈을 흘겼다. 슈라가 웃으며 해명했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몰랐는데……위대한 현신께서도 참 매력적이신 것 같습니다. 저도 꼬리 좀 치면 침실로 불러주실까요?”

“언젠 부를까봐 걱정이라더니.”

툭하면 이디나의 박색을 비꼬았던 ‘미남’ 슈라의 과거를 떠올린 사카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때마침 각 대대에서 준비 완료를 뜻하는 깃발이 차례대로 올랐다.

“승전 후에 보자.”

슈라의 쓸데없는 잡담을 머리에서 지운 사카는 이디나에게 다가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명을 주십시오.”

“선제공격한다. 작전은 그대들에게 맡긴다.”

이디나의 지시는 짧고 간단했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려던 이디나는 함께 만져지는 할룩스에 지레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표정을 감추며 핏빛 얼룩이 남아있는 손수건을 높이 쳐들었다. 카렐과 처음 만났던 날, 그가 머리에 감아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교단 측 지휘관들의 시선이 온통 그의 손수건에 쏠렸다.

“이단의 무리에 피의 심판을 명할지어다.”

손수건을 쥔 이디나의 손이 확 내려갔다.

“전진!”

사카의 고함과 함께 이곳에서도 드디어 전진나팔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돌격대인 코런덤의 X들은 소대, 분대별로 넓게 흩어져 고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편의 친위군 쪽에서 질세라 나팔이 길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사람의 발걸음보다 먼저 적진을 향해 날아간 건 양쪽의 포탄이었다. 교단군은 이전 근위대가 썼던 구형 아나콘다를, 친위군은 신형 아나콘다로 무장을 했고, 항상 그렇듯 시작은 포병대의 몫이었다.

“발사!”

후방의 교단군 포탄이 그간 분견대와 크바르나들이 어렵게 설치해 놓은 고원의 함정과 철조망, 장애물을 짓뭉개고 박살내어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100문 가까운 교단의 포대가 겨눈 건 적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먼저 왔던 세닉 가 패잔병들을 통해 알아낸 무른 모래땅에 뾰족한 탄두를 지닌 거대한 포탄을 계속 쏟아 부었다. 덕분에 멀쩡하던 땅바닥에 거대한 포탄 구멍들이 줄줄이 연결되어 즉석 참호가 만들어졌다. 황실군의 강화 석궁 사정권을 고려한, 코런덤들의 첫 번째 목표지였다.

“멈추지 마라! 포탄구멍까지 계속 전진해!”

사카의 명령을 시작으로 각 대대, 소대장의 고함이 포탄 떨어지는 굉음과 함께 전장을 울렸다. 수십 문의 친위군 포탄도 이들의 코앞에 쾅쾅 내리꽂혔지만 X의 감각과 기병을 능가하는 빠른 발로 무장하고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코런덤들에게는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도리어 이들을 가로막는 건 모래땅 얕은 곳에 보이지 않게 깔려 있던 수만, 아니 그 이상이 될 싸구려 가시들이었다.

“으익!”

부하들과 함께 맹렬히 달리던 사카도 발바닥이 화끈해지는 느낌에 휘청거렸다. 사카뿐만이 아니고 수십은 되는 코런덤 전사들이 달려가다 말고 휘청거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야, 이거!”

사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눈에 모래땅 안쪽에 얕게 깔려 있는 녹슨 쇳조각이 들어왔다. 사카는 거의 손가락 마디 깊이만큼 박혀있던 쇳조각을 힘껏 뽑아냈다. 억센 X전사들을 쓰러뜨린 건 포탄이 아닌, 녹슬고 오래된 쇳조각들이었다.

“아악!”

사카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솟았다. 적의 부비트랩과 철조망, 마름쇠를 대비해 바닥을 최대한 탄탄하게 보강한 신발과 정강이 보호대까지 신었지만 이번 쇳조각은 그런 신발까지 꿰뚫고 발바닥에 손톱 깊이만큼 푹 박히고 바로 부러졌다. 사카는 이런 쇳조각이 군화바닥을 뚫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뭐가 이래!”

마름쇠를 뽑아내려던 사카가 버럭 짜증을 냈다. 신발에 박히자마자 부러지는 이런 마름쇠는 그도 처음이었다. 끝이 부러졌으니 뽑아낼 수도 없었다. 녹이 슨 것을 보아 철성의 구조물로 쓰이던 것을 뜯어내 온 것이 분명했다. 이 기분 나쁜 마름쇠를 밟은 수십의 코런덤들은 가는 도중 줄줄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그 뒤였다.

“철망 위에서 피해!”

사카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모래땅에서 급히 빠져나갔다. 친위군이 날린 포탄이 발을 다쳐 못 움직이고 있는 코런덤들의 머리 위를 덮쳤고, 부서진 마름쇠 조각이 다시 치명적인 파편이 되어 흙과 함께 사방으로 날렸다.

“지독한 놈들!”

사카는 발바닥에 마름쇠가 박힌 채로 고통을 견디며 다시 돌진했다. 맨발로 달릴 수는 없었다. 인내와 훈련으로 다져진 코런덤들에게 발바닥의 구멍 정도는 충분히 버틸만한 고통이었다.

“바로 앞에 포탄구멍이다!”

그때까지 땅에 포탄을 쏟아 부으며 임시 참호를 만들어낸 교단군 포병대가 일제히 사격을 멈추었다.

철망에 걸리지 않은 덕분에 사카보다 앞장서 나아간 슈라가 포병대가 미리 파 놓은 포탄구멍에 뛰어들면서 뒤따라온 수백의 코런덤들도 그곳에 일단 자리를 잡았다. 포격과 철망에 100명이 넘는 동료를 잃었지만 이곳에 일단 자리를 잡으면서 최소한 4분의 1은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친위군의 강화석궁 유효 사정권에 들어가면서 이들의 머리 위로 이젠 포탄에 더해 크바르나와 분견대가 날리는 위력적인 강화볼트가 쌕쌕 소리를 내고 스쳤다.

“우리 마우저 맛을 보여줘라!”

슈라가 손을 앞으로 향하며 외쳤다. 지금껏 돌격하며 당하기만 했다면 이젠 친위군이 상상도 못 해 봤을 수천 발의 마우저 일제 사격으로 응징을 할 때였다. 포탄구멍으로 몸을 피한 3천의 코런덤들이 일제히 쏘아대는 마우저 사격이 지금껏 당한 포격에 복수를 하듯 친위군의 참호에 꽂혔다. 철성 앞의 전투는 산 아래의 전투와는 이제 다른 시대를 상징하고 있었다.

“조심해!!!”

돌격해오던 코런덤들이 날린 일제사격에 크바르나들이 쌓아놓은 모래둔덕이, 흙 포대와 방벽에 쩍쩍 소리를 내며 쪼개어져 날아갔고, 군데군데에서는 비명도 울렸다.

제일 선봉에 있던 세닉 가의 발리스타는 흙 포대 위로 살짝 나와 있던 림에 마우저를 제대로 얻어맞고 케이블이 끊겨 공중으로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팽팽하게 당겼다가 끊긴 케이블의 끔찍한 칼춤에 운 없는 병사의 허리가 동강이 나 튀어 오르는 소름끼치는 광경이 사방에서 똑똑히 보였다.

죽은 것이 크바르나일지, 분견대일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종군하고 있는 세닉 가 포로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친위군 방어진에 어마어마한 공포를 안긴 것만은 분명했다.

“부서진 발리스타 옆에서 피해! 이 멍청이들아!”

코리온과 함께 임시로 포병대를 맡은 페로의 찢어지는 고함이 울렸다. 코리온을 돕는 임시 지휘관이라는 말에 처음엔 불만투성이였던 그도 일단 전투에 들어온 후엔 ―코리온의 예상 그대로― 욕과 고함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며 말없이 탄도를 잡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코리온의 무언가 부족한 자리를 과할 만큼 열심에 메우는 중이었다.

“이씨! 구경났냐!!! 계속 쏘지 못해!”

페로가 동료의 끔찍한 죽음에 놀란 포병들 사이를 칼을 들고 뛰어다니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포로들이 토막이 난 동료 포로의 시체를 허겁지겁 뒤로 옮겼다. 50문이나 되는 발리스타를 책임지고 있는 5백여 명의 포병대는 분견대와 포로로 잡힌 세닉 가의 포병들, 크바르나가 온통 뒤섞인 잡탕부대지만 일단 전투에 들어간 이상, 미친 듯이 쏘는 것 외에는 따로 생각할 것도 없었다.

“계속 쏴! 포탄 저축해놨다가 저승에서 쏠 거냐!”

페로는 쏟아지는 마우저 사격 속에서 놀라 바싹 얼어붙어있는 세닉 가 포로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악을 썼다. 교단군의 포대 성능이 황실군을 못 따라오는 것처럼, 황실의 석궁 성능이 아무리 개량되었다고 해도 마우저의 상대는 아니었다. 코런덤들이 쏟아붓는 위력적인 마우저 탄 세례는 포대 앞에 쳐 놓은 모래포대를 두세 발만에 누더기로 만들어 안쪽까지 날아 들어왔다.

“너희! 너희 당장 모래주머니 더 가져와서 쌓아! 씨발, 계속 쏴대야 저놈들도 마우저를 못 쏠 것 아니냐, 이 멍청이들아!”

넘어져 있는 포병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던 페로는 투구 바로 뒤를 스치는 마우저 탄에 놀라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 개새끼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 따위 잡것을 쏘아대!”

페로는 바로 뒤의 탄약통에 맞고 튕겨 나온 마우저 탄두를 집어 모래포대 너머로 집어던지며 바락바락 악을 썼다. 탄도를 계산하다 말고 뒤에서 그 광경을 본 코리온이 어처구니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페로의 악다구니가 이어지는 가운데 코리온이 침착하게 지시했다.

“사각을 3만큼만 높여라. 5문은 놈들 머리 위에 연막탄을 쏘고…….”

코리온은 바람에 흩날리는 자신의 머리칼 끝을 보며 눈꼬리를 쳐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바람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옆에 놓인 습도계를 보았다.

“흐음.”

그는 남쪽 하늘을 올려보았다. 모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미세하게 곡선이 진 지평선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아주 희미하고 가는 회색빛 띠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는 평소와 어딘지 달랐다. 코리온은 옆에 있는 조수 라스에게 물었다.

“황상께서는 어떠시냐?”

“방금 봉합이 끝나고 깨어나시길 기다리는 중이라 합니다.”

“들어가 봐라. 곧 깨어나실지 모른다.”

“지금요?”

라스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깨어나시기를 기다렸다가 이제 때가 되었다고 말씀드려라.”

“알겠습니다.”

라스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 철성을 향해 돌아섰다. 코리온을 남겨두고 들어가는 것이 내키기 않아 중간에 몇 번을 머뭇거렸지만 등 뒤에서 휙 스쳐 철문에 명중하는 마우저 탄에 기겁을 하고 놀라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제발 무사하세요.”

철문 안에 뛰어들기 직전, 라스가 마지막으로 본 건 포탄구멍에 웅크리고 1차 집결을 마친 3천의 코런덤들과 그 뒤를 메운 수천의 헤네티들이 함성을 지르며 철성 앞의 방어선을 향해 돌격해오는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흐익.”

라스는 회랑을 가로질러 뛰어가 황제가 있을 철성 안쪽의 수술실로 향했다. 등 뒤에서 포탄을 더 날리라는 페로의 고함과 적을 막으라는 크바르나들의 절규, 양쪽의 포탄이 떨어지는 굉음이 땅을 울리고 있었다.

“제발, 폐하, 제발 깨어나 계세요, 제발.”

회랑 끝의 황금탑 있는 곳이 이렇게까지 멀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거의 숨이 턱 끝에 닿아서야 끄트머리에 있는 황제의 수술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까지 가디언과 병사들로 버글거리던 황금탑 앞에서는 어른들이 전장으로 다 나간 빈자리에 주페와 마리안 둘만 남아있었다. 바깥의 처절한 전쟁터와는 달리, 이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마리안은 [투아렉 상사] 가방을 열고 안을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라스 아저씨, 이 안에 예쁜 씨랑 모종이 가득 들었어요.”

마리안이 [돌매화]라고 쓰인 손가락만한 작은 봉지를 내보였다. 카렐이 투아렉 상사 사장님 행세를 할 때 썼던 이 가방 안에는 수백 개의 종자 봉지와 비료, 소금 샘플이 가득 들어있었다. 가방엔 마리안이 등에 멜 수 있게 오빠 주페가 묶어 준 멜빵도 달려있었다.

“분명 나 주려고 여기까지 갖고 오셨을 거예요. 여기에 나랑 같이 꽃이랑 나무 심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하셨거든요.”

작은 손으로 씨앗들을 열심히 정리하는 소녀의 모습에 라스의 가슴 속이 울컥해졌다. 아이가 수술실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저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황상께선 왜 안 나오세요? 나 무서운데.”

라스의 말문이 잠시 탁 막혔다.

“이제 나오실 겁니다. 옹주 마마.”

큰소리는 쳤지만 정말로 그럴지는 별 자신이 없었다. 그는 똘망똘망 눈을 뜨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수술실 문을 두드렸다. 짧은 기다림 후, 안에서 문이 빠끔히 열렸다. 문을 열어준 건 니사가 아니고 에스더였다.

“황상께선…….”

“쉿.”

라스가 마리안의 손을 잡고 조심조심 안에 들어섰다. 병상 위의 광경을 본 라스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니사가 황제의 입과 코에 꽂아놓았던 보조호흡장치를 조심조심 뽑아내고 있었다.

“폐하?”

마하가 보물처럼 가슴에 꼭 안고 있는 황제의 왼쪽 손목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있고 눈동자도 가늘게 열려 있었다. 마리안이 후다닥 달려가 카렐의 오른팔을 와락 안았다.

“히이이. 저 왔어요.”

에스더가 얼른 말리려 했지만 아이의 작은 손을 느낀 카렐의 눈동자가 조금 더 커졌다. 라스가 병상 옆을 보니 쟁반 위에 12, 13, 14번 잔딕과 사제의 키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주페는 황제에게서 안 떨어지겠다며 버티는 철없는 동생을 붙들고 뒤로 물러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라스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

“이제야 진짜 자유의 몸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라스가 황제의 병상 앞에 꿇어앉아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8시간 가까운 길고 끔찍한 수술을 이겨낸 황제는 자신의 첫 번째 해방노예를 돌아보며 엷게 웃었다.

라스가 카렐에게 바싹 다가가 속삭였다.

“학장께서 이제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카렐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 마리안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준 카렐은 긴 팔을 죽 뻗어 쟁반 위의 잔딕 3개와 사제의 키를 큰 손 안에 덥석 쥐었다.

“나, 날 일으…….”

카렐은 보조호흡장치 때문에 아직 욱신거리는 목구멍으로 어렵게 소리를 내며 에스더를 돌아보았다. 에스더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니사에게 먼저 물었다.

“일어나셔도 되겠나?”

“큰 절개수술을 하신 것이 아니니 이론적으로는 상관없습니다만……아직 기운이 없으실 텐데요.”

“그럼 주사든 뭐든 기운을 빨리 찾게 해 드려. 빨리.”

에스더가 주페와 함께 카렐의 가슴을 안고 조금 일으켜주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빛이 강해지고 있는 황제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제가 말린다고 어차피 여기 누워계시지는 않으실 거죠?”

카렐이 에스더의 눈을 올려보며 엷게 웃었다. 에스더는 잔딕들과 사제의 키를 가죽 주머니에 담아 다시 카렐의 목에 걸어주고는 그의 콧잔등에 한참동안 입을 맞추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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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시작했습니다. 카렐의 생각대로 될지, 이디나의 생각대로 될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방향이 될지.....는 두고보시면 아실 테고요. 마리안과 마하 같은 딸이 매달려 애교를 떨면 없는 호랑이 기운도 솟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ㅎ

이 뒤에 이어질 부분이 자르기가 뭣해서 이번 편은 이전 편보다 아주 약간...짧아졌네요.

(그나저나 어떤 분인지 엔딩을 앞둔 막판에 평점 1점 드립 그만 좀 하시고요;;;;)

* 지난 공지에서처럼 현재 http://www.vein.pe.kr/ 게시판에서는 엔딩 출판본 종이책 예약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5월 9일까지이니 예약기간 혜택을 받고픈 분께서는 날짜 꼭 지켜주시고요,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세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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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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