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16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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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용 꿀꿀이죽답게 맛도 기가 막히군.”
황제의 농담에 니사는 이번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컵을 내려놓은 황제는 에스더와 주페의 부축을 받으며 두 발로 힘껏 땅을 디디고 섰다. 의사로서는 수술이 끝나자마자 일어나려는 이 황당한 환자를 당연히 말려야 했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프레임으로 단단히 고정시켜놓은 카렐의 왼팔을 걱정스레 보며 말했다.
“왼팔은 3, 4일은 못 쓰실 겁니다.”
“오른손만로도 칼 잡기는 충분하다.”
니사는 주페가 황제의 낡은 전투수트 위에 무기벨트와 대신관의 칼을 채워주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마친 카렐은 잠시 꺼 놓았던 자신의 [공식 지휘용 할룩스]를 켰다. 켜기가 무섭게 이곳 철성 앞은 물론이고 분지에서 들어오는 갖은 전문과 보고가 쉴 새 없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다수는 해당 지휘관들이 알아서 대답을 하고 명령을 하달했지만 그 중 들어온 지 약간 시간이 지난 전문 하나가 카렐의 눈이 확 들어왔다.
[적장 헤즈가 가디언을 포함한 수백의 병력을 이끌고 흡기구로 들어왔음. 대응 지시 요망. 자이나브 카메네이.]
‘흡기구’라는 단어와 ‘헤즈’라는 이름에 카렐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카렐은 침착하게 지시를 하달했다.
[카메라 설치하고 철성으로 퇴각해라. 황제.]
무장을 끝내고, 전황 확인도 끝낸 카렐은 수술실 구석에서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아프라스 야투 박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대의 얼굴이 기억나. 아주 먼 옛날.”
황제의 섬뜩한 웃음에 야투가 지레 놀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약속은 지켜야지.”
카렐은 야투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그리고는 이번엔 에스더에게만 의지해 수술실을 비틀비틀 나섰다. 잔뜩 기가 죽은 야투는 고개를 숙인 채 카렐의 뒤를 소리 없이 따라갔다. 마하는 카렐의 소지품을 챙겨들고 따르려 했지만 이미 마리안이 품에 안고 히죽거리며 웃어 보이고 있었다.
방을 나선 카렐은 아무 설명도 듣지 않은 채 몇 칸 옆방으로 다가갔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2명의 크바르나들이 황제의 모습에 얼른 자리에 꿇어앉았다. 카렐은 그들의 어깨를 한 번씩 토닥여주고는 문을 열었다.
“우읍.”
코와 입에 파이프를 꽂은 채 병상에 있던 세네피스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허리 아래가 말을 듣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카렐은 세네피스에게 다가가 꼭 안고 눈가에 입을 맞춰주었다.
“사랑합니다.”
대화 같은 건 필요도 없었다. 세네피스의 벅차오르는 심장이, 눈에서 흘러나오는 짭조름한 눈물이 그에게 그대로 느껴졌다. 카렐은 방금 자신의 손목에서 뽑아낸 13번 잔딕을 그의 한 손에 살며시 쥐어주었다. 카렐이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세네피스는 그와 떨어지지 않으려 팔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힘을 주었다. 카렐은 수술자국이 있는 그의 허리 뒤를 다정히 어루만져 주고는 그를 다시 자리에 눕혀주었다. 잠시 저항하던 세네피스는 결국 그의 품을 다시 놓아주었다.
“저쪽은?”
카렐은 맞은편의 아트위야에게 담요를 여미어주고 있는 야투 박사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아트위야도 무사히 돌아온 야투의 모습에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둘 다 비록 적이지만 이젠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카렐은 우뚝 서서는 아트위야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드아이는 카렐의 차가운 그레이오팔 앞에서 이 와중에도 잠시 기세를 세우려 했지만 결국 시선을 살며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트위야는 카렐의 손이 뺨을 짚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위대한 현신의 집에 잘 오셨소. 아트위야 현신. 편히 쉬다 가시오.”
카렐은 그대로 휙 돌아 방을 나섰다. 이번엔 에스더의 부축 없이 자신의 두 발로 느리지만 땅을 딛고 한 발씩 황금탑을 향해 나아갔다.
“우와아, 다 나았다, 다 나았다.”
마리안이 카렐의 앞을 어수선할 만큼 팔짝거리며 앞장서서 수술실을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마치 카렐의 속을 훤히 읽고라도 있는 듯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황금탑 앞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황금탑 앞에 도착한 카렐은 한쪽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직경 2척 남짓의 작은 동그라미와 그 한쪽에 생뚱맞게 박혀 있는 작은 천조각이 드러났다. 이곳에 도착했던 첫날, 그를 충격에 빠뜨렸던 바로 그 문이었다. 카렐은 야투 박사 쪽을 돌아보았다. 아트위야를 달래주고 카렐을 뒤쫓아 온 야투는 잠긴 문에 여전히 박혀있는 천조각에 충격을 받은 듯 눈물을 감추며 자신의 왼팔을 쳐다보았다.
카렐은 목걸이 주머니에서 사제의 키를 꺼냈다. 영롱한 무지개빛은 지난 수백 년의 세월과 이곳에 깃든 끔찍한 피의 역사를 무색하게 했다. 카렐은 이번에는 자신만만한 손길로 문에 보석면을 댔다.
짧은 기다림 후, 600년 가까이 잠겨 있던 둥근 금고문이 서서히 밖으로 밀려나오더니 그 주변으로 마치 태양의 코로나처럼 눈부신 빛이 뿜어 나왔다. 내부로 바깥공기가 취익 소리를 내고 빨려들어가며 지레 놀란 사람들이 한 발씩 물러났지만 카렐은 눈을 부릅뜨고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문이 완전히 열린 후에도 사람들은 눈이 부셔 잠시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어마어마하네.”
카렐은 한 뼘 두께가 넘는 둥근 문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사람 한 명이 기어서 들어갈 크기의 안에서 고리를 당겨 열거나, 밖에서 사제의 키로 여는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는 듯했다. 카렐은 넓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구멍 안에 몸을 겨우 밀어 넣었다.
좁은 원형 평면의 실내는 물건까지 가득 쌓여 두세 사람 이상은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내부는 타리프의 일지에 언급된 모습 그대로였다. 문 왼쪽에는 수만 권의 책들이 까마득히 높은 천장까지 꽉 차 있고, 오른쪽에는 복잡한 계기판과 스위치로 가득한 기계장치가 보였다. 그리고 문 맞은편에는 유리로 된 투명한 벽 안에 바늘처럼 가는 튜브 수십만, 아니 수백, 수천만 개가 까마득한 꼭대기까지 꽉 들어차 탑의 벽을 뒤덮고 있었다.
“허어.”
웬만해선 놀라는 법이 없던 카렐의 입이 떡 벌어져 닫히지 않았다. 탑을 이루는 황금의 가치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이 내용물의 가치만으로도 교단이 황금탑을 탐낼 이유는 충분했다.
“어떻게 하나도 썩지 않았지?”
카렐은 책 한 권을 꺼내 열어보며 뒤따라 들어오는 야투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는 문 안쪽에 있는 손잡이와 연결된 공조장치를 가리켜보였다.
“워낙 중요한 곳이라 사람이 없을 때는 특수한 불활성기체가 자동으로 충전되도록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친 몸으로 구멍을 힘겹게 기어 넘어온 야투 박사가 지친 숨을 탁 내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문가에 꿇어앉아 바닥에 있는 시커먼 물체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젊고 정의감 넘치던 청년 야투의 건장한 팔뚝은 긴 기계 밑에 깔린 채 자신처럼 색이 변하고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어 돌아온 주인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야투 박사가 울먹이며 물었다.
“물론.”
계기판에 다가간 카렐은 의자 옆에 놓인 낡고 오래된 배낭을 발견했다. 배낭에는 [제5구조단]라는 스탬프가 희미하게 남아있고, 그 옆에는 [타리프 카파키]라는 이름이 펜으로 쓰여 있었다. 타리프가 이 문을 마지막으로 열었을 당시 갖고왔을 이 가방은 탑 안의 다른 물건들처럼 상태가 완벽했다.
“주페, 들어와 봐라.”
카렐은 아들 주페에게 가방을 열라고 눈짓했다. 주둥이를 열자 접이식 야전삽이 나왔고, 그 밑에는 물통과 간식, 그리고 외과수술도구가 담긴 주머니가 나타났다. 주머니 한쪽을 살며시 열자 안에서는 조금 전 카렐의 수술에 썼던 것과 같은 잔딕 3개가 나타났다. 3개의 잔딕을 쥔 주페가 카렐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1, 3, 5.”
카렐은 새로 구한 잔딕에 새겨진 숫자를 읽어보았다.
“넌 나 같은 고생은 하지 않을 거란다, 주페.”
주페는 아무 말 없이 카렐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사제의 키와 15번 잔딕이 이미 있으니 이제 그의 머리에 든 16번 잔딕을 빼낼 모든 것이 갖춰진 셈이었다. 카렐은 숨 죽이며 울고 있는 아들의 등을 다정히 토닥여주었다.
“이제 정말로 홀가분하구나.”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일어난 카렐은 황금탑 한쪽의 계기판 앞에 앉았다. 먼 옛날 이곳에 온 타리프 신관을 당황하게 했던 계기판은 여전히 낯선 글자들 투성이지만 카렐이 당시의 타리프와 다른 건 이들의 글자를 조금이나마 읽을 줄 안다는, 그리고 이들의 터빈을 직접 고쳤다는 사실이었다.
“폐하! 폐하! 깨셨어요?”
자이납의 호들갑스런 목소리는 이 멀리에서도 바로 분간이 되었다. 흡기구에서 빠져나온 자이납이 황금탑 앞까지 달려와서는 허락도 받지 않고 안으로 후다닥 기어 들어와 카렐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에스더도, 마하도 감히 못 했던 짓을 저지르는 자이납의 모습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카렐은 이번만은 이 철없는 아가씨를 꾸짖지 않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하지만 그의 작고 묵직한 배낭을 툭 쳤던 카렐은 대뜸 눈을 흘겼다. 황제의 사나운 눈길에 자이납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네가 돌아왔으니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다.”
자이납에게서 일단 시선을 돌린 카렐은 계기판에서 [1번 터빈]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지금껏 조용하던 황금탑 앞이 시끌시끌해졌다. 철성 앞의 전투를 지휘하던 카토가 부상병 둘을 어깨에 짊어지고 무어라 비명 비슷한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뒤로도 중상을 입은 부상병들을 업거나 짊어진 병사들이 입구 쪽에서 안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카렐은 바깥의 전투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폐하! 깨셨습니까!”
부상병을 짊어지고 도착한 카토가 황제의 모습에 감격하며 얼른 무릎을 꿇었다. 카렐은 구질구질한 대화 대신 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어찌된 것이냐?”
“2차 방어선도 뚫렸습니다! 싸울 자리가 부족해 부상병들부터 철성 안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철성 바로 앞 계단의 3차 방어선으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포대는?”
“아나콘다는 후방에 있어 아직 쓸 수 있지만 남부에서 노획한 포대는 태워버렸습니다.”
카토의 뒤로 수십, 아니 수백의 부상병들이 동료의 등에 업혀서, 혹은 서로서로 의지해 어렵사리 몸을 피해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걷기도 버거운 카렐의 지금 이 몸으로는 전장에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철성 안쪽의 회랑은 어느새 밖에서 실려 온 수많은 부상병들, 이미 죽은 시체들로 가득 찼고 전장의 찢어지는 함성과 비명이 조금씩 가까워오고 있었다. 전장이 철성 바로 앞 정원까지 가까워진 듯했다. 카토가 고개를 저으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지금 총리와 대군이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땐 이 안으로 물밀 듯 몰려들 겁니다! 적의 방공부대가 고원을 장악해서 지원군이 오기도 어렵습니다.”
애가 타는 얼굴로 철성 출구 쪽을 한 번 돌아본 카토가 카렐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며 간절하게 말했다.
“저희가 전멸할 때까지 남아 시간을 끌겠습니다! 1번 터빈의 흡기구가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부디 폐하라도 빨리 빠져나가십시오.”
“입방정 떨지 마라.”
카렐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터빈의 제어장치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1번 터빈을 끄면 큰 계획 모두가 망가진다.”
카렐은 이미 예열이 돌고 있는 1번 터빈의 스위치를 보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흡기구로 탈출하려면 1번 터빈을 꺼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카렐에겐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카렐은 황금탑 문 밖으로 보이는 진료실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 안에는 보조호흡장치에 의존해 겨우 숨을 잇고 있는 세네피스가 누워있었다.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철성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
시계를 확인한 카렐은 보란 듯 터빈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철성에서 가장 큰 터빈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우우웅 하는 진동이 철정 전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일단 카나르에게 선물부터 보내주자꾸나.”
헤즈가 흡기구 굴에 들어선지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수레를 뒤따라오던 부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전하, 숨 쉬기가 좀 편해지지 않으셨습니까?”
“음?”
헤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고 보니 산소 부족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괴로워하던 병사들의 안색이 훨씬 나아졌고, 헤즈 스스로도 숨을 쉬기가 훨씬 편했다.
“벌써 철성에 가까워졌나?”
“아직 그 정도는 아닐 텐데요? 중간에 환기구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때, 앞장서 나아가던 가디언들이 보내는 경고 신호가 헤즈와 병사들의 할룩스를 울렸다. 잘 훈련된 병사들은 재빨리 굴 양쪽으로 흩어졌고, 둔한 헤즈도 엉금엉금 기어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앞장서가던 가디언 둘이 헐레벌떡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가디언이 숨을 헐떡거리며 헤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소리? 누가 온다고?”
“아닙니다. 무슨 이상한 진동음이 정면에서 오는 것도 같고……기류도 이상합니다.”
“무슨 멍청한 소리야?”
버럭 화를 냈던 헤즈는 그러고 보니 갑자기 숨을 쉬기 편해진 것이 뭔가 이유가 있는 듯했다.
“뭔지는 몰라도 정체를 알 때까지는 조심해서 들어가는 게 낫겠다.”
긴장한 병사들은 이번엔 숨을 죽이고 굴 양쪽에 붙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호흡은 점점 더 편해져 병사들이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수레에서 내린 헤즈도 그리 힘들이지 않고 병사들과 속도를 맞춰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일행은 다시 댐퍼 하나를 지나갔다. 앞장서가던 예민한 가디언들이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또다시 기계 진동이 느껴진다는 손짓을 했다. 별 생각 없이 가디언을 쫓아 댐퍼의 날개 밑을 지난 헤즈는 등에 두른 여우모피의 털이 굴 안쪽을 향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을 안으로만 들여보내는 댐퍼의 황금 날개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람이……안쪽으로 불잖아?”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털이 움직이는 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끔찍한 상상을 떠올린 헤즈는 여우털 만큼이나 자신의 피부에서도 모든 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나, 난 볼일이 있어 잠시 돌아가야겠다. 너흰 계속 들어가.”
창백해진 헤즈는 안쪽으로 향하는 부하들을 놓아둔 채 혼자 뒤돌아섰다.
“예?”
굴에 들어가던 경호부대 장병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헤즈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눈치 빠른 헤즈의 부관이 허겁지겁 그를 따라 돌아섰고, 나머지 장병들도 걸음을 멈춘 채 부관만을 데리고 뒤뚱거리며 출구 쪽으로 가고 있는 헤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조금 전 헤즈의 부관에게서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던 병사들이 스리슬쩍 헤즈를 따라 걸음을 돌렸다. 경호대장이 그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어딜 명령도 없이 이탈을…….”
경호대장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의 눈썹과 머리카락이 안쪽을 향해 점점 강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댐퍼 날개의 진동이 점점 커지면서 덜덜덜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굴을 울렸다. 당황한 경호대장도 주춤거리며 헤즈를 따라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아, 아무래도…….”
경호대장은 앞장서 도망가고 있는 헤즈와, 아직 영문도 모른 채 동굴에 서서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부하들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여, 여기서 나가는 게 낫겠다.”
그제야 위험을 직감한 5백의 경호부대원들도 주춤거리며 뒤돌아섰다. 몇몇 성질 급한 병사들은 헤즈를 쫓아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고, 나머지 병사들도 영문을 모른 채 그 뒤를 따라갔다. 당황한 헤즈가 자신을 따라오는 병사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전진하지 않고 뭐 하는 짓이야!”
헤즈가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에게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지만 대장인 그가 파랗게 질려 도망가는 모습과 마구 떨리고 있는 댐퍼 날개를 본 경호부대원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빨리…….”
헤즈가 막 재촉을 하던 그 순간, 흡기구를 막고 있던 댐퍼의 날개 수백 개가 일제히 안쪽을 향해 휙 열렸다. 동시에 거의 태풍 같은 강풍이 안쪽으로 확 몰아치기 시작했다. 몸이 둔한 헤즈는 바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훈련받은 병사들도 휘청거리며 줄줄이 중심을 잃었다. 어마어마한 바람이 몰아치면서 바닥의 흙과 잡다한 자갈들이 날아올랐고 굴 안은 일시에 지옥이 되었다. 이 바람에 밀려가면 과연 어찌될지는 상상하고픈 광경이 아니었다.
“흐익!!!”
헤즈가 강풍에 버티며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댐퍼 날개 밑을 빠져나갔다. 이 바람에 맞서서 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뒤이어 이제야 위험을 직감한 경호부대 병사들도 사색이 다 되어 댐퍼 밑을 빠져나갔다.
“이봐! 이봐!”
헤즈는 도망가는 젊은 병사의 발목을 덥석 잡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병사는 그의 손을 떨쳐내고 혼자서 바람에 버티며 바깥쪽으로 뛰었다.
“저 개새끼, 잡히기만 하면…….”
헤즈가 울부짖었다. 바람은 점점 강해져 이젠 똑바로 일어서는 것도 힘들었다. 그나마 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바람을 이기며 필사적으로 출구 쪽으로 기어갔지만 평상시에도 자기 발로 걷기 힘든 헤즈에게는 무리였다.
“좀 도와줘!”
도저히 혼자 갈 수 없게 된 헤즈는 다행히 옆을 지나가는 가디언의 하얀 팔찌를 덥석 붙들었다. 그나마 이 가디언은 그를 바로 내버리지 않고 힘을 주어 함께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가디언이라 해도 보통사람 체중의 2배가 넘는 그의 비둔한 몸을 강풍을 맞으며 끌고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잘 훈련된 병사들은 몰아치는 바람을 이기고 앞으로 기를 쓰며 빠져나갔다. 헤즈를 끄는 운 없는 가디언도 끙끙대며 그를 데리고 다음번 댐퍼를 넘어갔다.
“돌아만 가면 네게 크게 포상할 것이니…….”
헤즈의 목소리는 강해진 바람소리에 뒤섞여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제 시작이었다. 멀리 댐퍼의 날개 사이로 무언가 시커먼 것이 날아드는 광경이 보였다. 헤즈의 눈에는 마치 검은 지옥의 구름이 바람을 타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후읍!”
숨이 꽉 막힌 헤즈가 눈을 감고 몸부림을 쳤다. 흡기구의 입구 부근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던 검은 재가 강해진 바람과 뒤섞여 안으로 몰아쳐 들어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농도의 검은 재가 주변을 온통 뒤덮어 주변이 눈 깜짝할 새 암흑이 되었고, 목구멍에 재가 들어차 숨이 막힌 병사들 몇은 기운을 잃고 뒤로 우르르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충성스런 가디언은 주군의 무거운 몸을 힘껏 잡아끌었다.
“으우웁!”
헤즈는 손목과 팔이 빠지는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빠진 건 손목이 아니고 손목을 감싸고 있는 갑옷이었다. 헤즈의 몸을 버티지 못한 장갑 끈이 끊어지면서 그의 손이 장갑에서 쑥 빠져나왔다.
“아, 안 돼!”
헤즈의 비명이 동굴을 꽉 채운 검은 재 속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비명과 뒤섞였다. 가디언의 손마저 놓친 그는 어마어마한 강풍에 굴 안쪽으로 주르르 밀려갔다. 이번엔 잡아 줄 사람도, 잡을 것도 없었다. 아니, 고정된 물체는 모두 흉기였고, 병사들은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전장에서 항상 그를 지켜주었던 가문 후계자라는 지위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헤즈는 활짝 열려 있는 댐퍼의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한 바퀴 빙 돌아 그 너머로 쑥 빨려갔다.
“살려줘!”
이젠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돌벽에, 댐퍼에 온몸을 계속 부딪치며 끝도 없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이 얼떨떨한 와중에도 바람에 끌려가는 그 시간이 너무도 길고 길었다. 공포에 휩싸인 그는 차라리 갑옷과 투구를 안 입었더라면, 차라리 일찌감치 머리가 깨져 죽거나 의식을 잃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끔찍한 후회를 했다.
그는 바로 오늘 아침, 코앞에서 사지를 찢어 죽인 종가 경비부대 장병 일족들을 문득 떠올렸다. 그들이 죽기 직전 자신을 노려보던 저주서린 눈동자가 왜 갑자기 생각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다시 벽에 부딪쳐 빨려가던 그는 짙은 검은 재 너머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이번엔 댐퍼가 아니었다. 무언가 쿵쿵쿵 돌아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고 밖에서 빨려 들어온 갖은 쓰레기가 뒤엉키며 귀를 찢는 굉음이 울렸고, 곧 헤즈의 차례가 되었다. 그 순간, 그가 본 건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 예리한 날이었다. 지금껏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끔찍하게 죽이고도 지난 수많은 혼란기, 심지어 제위전쟁에서도 살아남았던 억세게 운 좋았던 잔혹한 사내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종가를 잃은 칼데아 제국은 이로써 장태자마저 잃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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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즈가 불쌍하신 분께서는 한 손으로 물구나무서서 두 발 다 드세요....
출판본 원고 작업으로 피곤해서 살짝 맛이 갔나봅니다;;; 키보드에 이마 처박고 엎드려 자다가 깨보니 2시간이 지났네요; (그것도 전화가 와서 깼네요;;) 배고프고 팔 저려 죽겠슴당;; 일어났더니 다리가 후들거리네요.
(그나저나 근 한달 남게 어떤 분인지 계속 평점 폭격을 맞았더니 결국 작품 전체 평점이 조금 깎였네요...ㅠ.ㅜ;; 아이고 가뜩이나 없는 다리 힘이 더 풀리네요.)
* 지난 공지에서처럼 현재 http://www.vein.pe.kr/ 게시판에서는 엔딩 출판본 종이책 예약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5월 9일까지이니 예약기간 혜택을 받고픈 분께서는 날짜 꼭 지켜주시고요,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세요~~~( ̄∇ ̄)ブ~~★
많은 분들께서 북큐브 전자책을 문의주셨는데, 북큐브에 전송 완료되어서 조만간 판매 개시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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