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18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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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공격하라고?”
카나르의 중상과 돌격명령에 제일 놀란 건 네코 마구스였다. 원래 계획은 반대편에서 근위대가 북부보병대를 돌파해 적이 흔들리면 그때 기병대가 돌진하는 것이었다.
“아직 때가 아닌데!”
시작부터 최고지휘관이 쓰러지고 상황이 돌변하면서 네코가 크게 당황했지만 ‘황제’의 명령을 받은 4만의 칼데아군 기병들은 그의 명령이 있건 없건 진격나팔을 울리며 이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맘에는 들지 않지만 지휘 체계상 카나르의 아랫사람인 네코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에자가 이끌고 있는 연합군 우익에 이어 이번엔 좌익까지 ‘예상치 않게’ 모두 교단 마구스들의 지휘를 받게 된 셈이었다. 네코는 칼데아의 황제기를 대신 쳐들고 고함을 질렀다.
“돌격! 총 돌격이다!”
보병대 뒤에 밀집해 있던 4만의 칼데아군 기병대는 분지 서쪽을 온통 은빛으로 뒤덮고 북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가는 모래가 기병들의 걸음걸음에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많지 않은 숫자의 선봉대들이 말 뒤에 넓은 망사 모양의 그물을 펼치고 돌진하는 때문이었다.
“선봉대는 최대한 앞서나가고 본대는 먼지구름 속에 숨어서 나아간다! 최대한 넓게 퍼져! 적 포병대는 우리를 못 보면 끝이다!”
네코가 각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4만의 칼데아 기병들은 선봉대가 일으켜놓은 모래구름 바로 뒤에 숨어 얇고 긴 띠 모양을 이루고 전진했다. 평상시 쐐기 모양, 혹은 사각의 대오로 두껍게 돌진했던 이들은 말들의 어깨가 닿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좌우로 바싹 붙어 촘촘하고 얇은 대오로 전진했다. 네코가 거의 무한에 가까운 넓은 전장과 모래바람을 이용해 생각해 낸 나름의 속임수였다.
“허, 내가 이런 광경을 다 볼 줄이야.”
맞은편 동맹군 진영에서 1만의 서부 낙타병부대를 이끄는 하지즈 장군이 혀를 찼다. 그의 시야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뭉게뭉게 치솟는 모래구름이 마치 세상을 덮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돌격을 지켜보는 황실군과 서부 병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직 기병전 경험은 적을 테니까 내 옆이 있지 말고 저 후미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
하지즈 장군은 바로 옆에 슈로 기사단 차림새로 있는 젊은 무장에게 단호하게 주의를 주었다. 이번 전투에서 슈로 기사단에 배치된 제네르의 양자 자말은 이곳 지리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하지즈 장군 곁에 연락관 역할로 와 있었다.
“나도 될성부른 떡잎을 처음부터 꺾어버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즈 장군은 자말의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와 그가 탄 붉은 말을 한 번씩 휙 둘러보고는 혼자 픽 웃었다.
“네 어머니한테는 다른 어머니들의 10배는 더 고마워해야 할 거다.”
사실 하지즈 장군은 이 청년을 본 순간 친아버지가 누군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었다. 그는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자랐던 아버지의 티를 벗고 총명하고 곧은 진짜 군인으로 커가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는 제네르에게 내심 존경심까지 품게 되었다.
“적이 가까워졌습니다! 포격을 허락해 주십시오!”
포병대 지휘관의 요청이 할룩스로 들어왔다. 하지즈 장군은 손을 번쩍 쳐들었다.
“발리스타!”
100문이 넘는 황실군 우군의 포병대가 모래구름 속에서 돌격해오는 4만의 기병대를 향해 포탄을 날렸다. 하지만 칼데아군 기병대의 꼼수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모래먼지 안으로 날아간 포탄의 절반 이상은 적을 전혀 맞추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떨어져 더 큰 모래구름을 만들었다.
“투창!”
황실군의 슬레이프니르 경기병 1만이 모래구름 사이로 투창을 던졌지만 곡사로 던진 투창은 별 효과는 없었다. 네코의 변칙적인 용병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직사로 쏴!
경기병들이 직사로 투창을 쏘았지만 근거리에서 그들에게 허락된 건 단 한 발이 전부였다. 수백의 칼데아군 중장기병들이 직사로 날아든 투창을 맞고 휘청거리거나 일부는 말에서 나동그라졌지만 그 정도를 피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경기병들은 일단 후방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효과가 있다! 계속 나아가! 거리가 1스타디아 안쪽으로 가까워지면 선봉대는 뒤로 빠지고 중장기병은 먼지 밖으로 튀어나가서 적에게 정면 돌진한다!”
신이 난 칼데아 기병대는 포격과 경기병대의 공격이 모두 통하지 않자 혼비백산하고 있는 황실군에 눈 깜짝할 1스타디아 안쪽까지 접근했다.
앞줄에서 그물로 먼지를 일으킨 선봉의 기병들이 속도를 늦추고 뒤로 물러나고 뒷줄에 있던 진짜 중장기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모래구름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을 맞이하는 황실의 슈로기사단 1만과 낙타병 1만은 이미 창을 세우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엔진 켜!”
동맹군 1선 뒤에서 꽁무니를 보이고 있던 대형 병력수송셔틀들이 일제히 최대의 출력으로 엔진을 켜고 이착륙용 로터를 돌리기 시작했다. 순간 조금 전 칼데아 기병들이 일으킨 먼지구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모래바람이 돌격해오는 칼데아군의 얼굴을 덮쳤다. 이번엔 동맹군 쪽의 꼼수였다.
“으이익!”
모래구름 사이로 막 뛰쳐나가 황실군을 덮치려던 칼데아군 4만의 기병대는 갑작스런 맞바람에 돌연 시야가 막히며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동맹군 황실기병대 쪽에서 돌격나팔이 울렸다.
“전진!”
1만의 서부 낙타병들을 이끄는 하지즈 장군의 함성이 제일 먼저 올랐다. 낙타병들의 진형은 칼데아군과는 정반대였다. 100기 단위의 거대한 쐐기꼴 돌격대오 100개가 다시 세 덩이로 모여 하늘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한 삼각형 3개를 이루고 칼데아군 기병대의 중앙을 덮쳤다. 두껍고 탄탄한 진형의 낙타병들은 고작해야 두세 줄로 이루어진 칼데아군의 얇은 대오 중간을 맹렬히 덮쳤다.
“중앙을 뚫어라! 두 토막 내버려!”
하늘까지 치솟은 모래구름 속에서 양군의 충돌이 벌어지며 비명과 굉음이 땅을 울렸다. 모래구름에 파묻힌 양쪽 장병들이 볼 수 있는 건 주변 몇십 척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유령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적 한두 명에게 무조건 무기를 휘두를 뿐 주변 상황은 파악할 수 없었다. 모래구름 밖에서도 비명과 굉음만 들을 수 있을 뿐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하지즈 장군과 낙타병 지휘관들의 고함이 경쟁적으로 울렸다.
“멈추지 말고 계속 전진해! 방향 잃지 말고 움직여!”
말보다 훨씬 덩치가 큰 낙타에 오른 서부의 낙타병들은 거대한 창을 위에서 휘두르며 칼데아군 기병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모래바람과 푹푹 빠지는 모래땅에 익숙한 이들에겐 이곳이 앞마당 같았다.
그들과 맞서는 칼데아 기병도 필사적이었다.
“죽든 살든 일단 놈들을 차단해라! 돌파당한 지휘관은 목을 베겠다!”
회심의 수가 생각 외의 역풍에 꼬이면서 당황한 사령관 네코는 누가 듣기에도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도 자신의 차단 명령이 통하리라 믿은 건 아니었다. 최대한 얇고 넓게 분산되어 있던 칼데아 기병대는 포격에는 강했지만 반대로 강력한 돌격부대에는 맥없이 돌파를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즈 장군이 이끄는 200기의 서부 근위기병들이 4만의 칼데아군 기병대의 얇은 대오를 뚫고 제일 먼저 모래구름을 빠져나왔다.
“이야훗!!!”
칼데아 기병대를 돌파한 낙타병들은 엉덩이를 바싹 쳐들고 두드리며 조롱을 퍼부었다. 낙타병단이라는 묵직한 망치질을 당한 칼데아 기병대는 순식간에 중앙이 무너지며 양쪽 날개만 남았다.
이젠 뒤에서 기다리던 황실 기병대가 나설 차례였다.
“슈로 기사단 돌격!”
낙타병단에 뒤이어 1만의 슈로 기사단이 오른쪽의 칼데아 기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양쪽의 ‘중장기병대’가 처음 정면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숫자는 적지만 기량과 무장에서 앞서는 슈로 기사단은 2배가 넘는 숫자의 칼데아 기병대를 향해 전혀 기죽지 않고 정면충돌했다.
“저 저질 기병들에게 진짜 기병이 누군지 알려줘라!”
자존심 강한 슈로 기사단의 지휘관들이 찢어져라 외쳤고, 숫자에서 압도적인 칼데아 지휘관들도 지지 않았다.
“쥐뿔도 없이 콧대만 센 것들 따위는 머릿수로 밟아버려!”
수많은 양쪽 기병들이 첫 충돌에서 바닥에 굴렀고, 한 번 뒤엉킨 양쪽 군대는 거대한 회오리가 휘말리듯 주변을 돌며 조금씩 한 덩어리로 섞이며 숨 막히는 난전에 접어들었다. 사방에서 창 자루가 공중을 돌고, 부러진 창이 여기저기로 튀고, 무기를 잃은 기병들이 칼과 철퇴를 뽑아들고, 혹은 남의 무기를 주워들고 새 적을 찾아 달려들었다.
슈로 기사단이 오른쪽의 적병들과 적과 살과 살을 맞대고 특기인 근접전을 벌이는 사이, 1만의 슬레이프니르도 자신들의 장기를 살릴 때였다. 발 빠른 1만의 슬레이프니르를 지휘하는 달리는 넓은 평지를 접하고 있는 적의 왼쪽 기병대를 삽시간에 에워쌌다.
“놈들을 주변에서 견제해라! 정면 돌격하지 말고 사격만 하고 빠져! 고립된 놈들만 치고 10기 이상이 쫓아오면 낙타병들에게 맡겨라!”
검은 갑주로 점점이 헐거운 대오를 이룬 경기병들은 낙타병들의 공격으로 중앙이 무너지며 평야 중간에 둥둥 뜬 섬이 되어버린 칼데아군의 왼쪽 기병대에 중투창을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우르르 쏟아 부었다.
“젠장, 아주 전통적인 대결 그대로가 되어버렸네.”
서둘러 후방으로 빠져나온 네코가 전장을 지켜보며 툴툴거렸다. 그는 무언가 색다른 대결을 원했지만 연막공격과 분산배치라는 자신의 회심의 수에 적 역시 맞바람으로 맞서면서 결국 양쪽 모두가 장군멍군한 셈이었다.
“그나저나 기병전의 주인공 역할을 낙타병에게 내주다니, 황실 기병대도 초라해졌네.”
네코는 지금까지의 전과에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듯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를 보며 픽 비웃음까지 퍼부었다. 이쪽은 황제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지만 동맹군 우군의 상황도 별반 좋을 건 없었다. 릴라크는 사령부에 묶여 있고, 우군 사령관이 될 뻔했던 베아트릭스까지 머리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 후송되면서 예비지휘관 하지즈 장군이 사실상 주인공이 되었으니 얼떨결에 사령관이 된 지금 네코의 처지와도 비슷했다.
“잠시 무너졌지만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곧 수습해 반격하겠습니다.”
중앙을 맡은 기병군단장의 흥분한 목소리가 네코의 할룩스로 들어왔다. 낙타병들의 일제돌격에 낙마하거나 부상을 입은 중앙의 기병들이 서둘러 다시 말에 오르고 부상병을 옮기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첫 번째 힘 대결에서 이쪽이 한 발짝 뒤로 밀려났을 뿐, 아직 중앙이 패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었다.
“낙타병들이 곧 돌아서서 칠 것 같은데?”
네코는 1차 돌격을 끝낸 후, 다시 돌아서서 2차 돌격을 준비하는 낙타병 쪽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선두에서 극을 번쩍 치켜들며 부하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낙타병단 돌격! 이번엔 제대로 짓밟는다!”
하지즈 장군은 도끼날이 달린 극을 쥐고 1만 낙타병단의 선두에서 1만 5천 남짓의 칼데아 기병대 중앙을 향해 돌진했다. 칼데아군 기병들은 이미 한 번 돌파를 허용하며 잠시 휘청했지만 숫자의 우세는 여전했다.
“저 둔해터진 평민 놈들에게 질 거냐!”
그새 대오를 조금이나마 두껍게 재정비한 칼데아군의 귀족 기병들도 이번에는 절대 질 수 없다는 오기로 무장하고 평민 낙타병들과 정면에서 맞섰다. 양군이 두 번째로 충돌하면서 드디어 창과 칼, 방패와 1대 1 싸움이 난무하는 근접전이 전개되었다.
“저놈이 하지즈 장군이군.”
네코는 하지즈 장군이 낙타병의 선두에서 돌진해 순식간에 칼데아군 연대장 한 명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광경을 보고는 투구의 턱끈을 꽉 조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부장들의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저놈은 일기투를 거부하는 법이 없다지?”
부장들이 기겁을 했다. 하지즈 장군은 명실상부 제국 최강이었던 히르직스가 33년 전 전사한 이후 일기투로는 단연 최강의 무장이었다. 딱히 검증된 일기투 경험도 없는 네코가 함부로 덤빌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황상께서도 중상을 입고 후송되셨는데 장군님께서 일대일 대결을 벌이시는 건 너무 위험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부디 재고를…….”
네코가 눈을 흘겼다. 그의 곁은 바유 교단 헤네티 출신의 기병과 칼데아군 근위기병까지 거의 2백의 정예 기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지만 일단 일기투에 들어가면 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일기투? 난 그 따위 건 한 적도 없다.”
부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네코는 뺨받이나 턱 가리개도 없는 헐렁한 모자 모양 투구를 쓴 채로 하지즈 장군을 향해 돌연 말에 속도를 붙였다. 당황한 2백여 근위병과 부장들도 허둥지둥 그를 따라 말에 속도를 붙였다. 근위병들은 행여 그에게 또다시 저격이 날아들지나 않을지 바싹 긴장하며 그의 앞을 몸으로 막아섰다.
“저어, 장군님, 투구라도 바꿔 쓰시고…….”
“비켜! 어딜 감히 내 앞을 막느냐!”
네코는 말에 속도를 더 붙이며 근위병들을 앞질러 치고나갔다. 이런 그의 황당한 행동을 호승심 탓이라 생각한 근위병과 부장들이 기가 막혀하며 뒤에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손짓을 했지만 네코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장기를 앞세우고 하지즈 장군을 향해 돌진했다. 누가 봐도 일기투를 청하는 모습이었다.
“좋아, 날 보고 있네.”
네코가 히죽거렸다.
서부 근위기병대를 이끌고 사냥을 다니던 하지즈 장군은 칼데아군의 기병 대장기를 앞세우고 근위병들 선두에서 달려오는 네코의 모습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 상황에서 대장기가 접근해 올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하지즈 장군은 바로 네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하아, 저 샌님이 감히 날 쓰러뜨리겠다니!”
하지즈 장군이 대뜸 조롱을 퍼부었다. 그로서는 이 샌님의 일기투 신청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도끼날이 간만에 제대로 피 맛을 보겠구나!”
하지즈 장군은 이미 피로 얼룩진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네코를 향해 맞받아 돌진해왔다. 양쪽의 대장기가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는 모습에 이미 접전을 시작한 양쪽 부대원들도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양쪽의 원 지휘관들이 다 쓰러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교체 지휘관인 이들 중 누구 하나가 무너진다면 그쪽에는 목에 밧줄이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너희가 주변 놈들을 맡아라!”
지시가 따로 없어도 하지즈 장군의 근위병들은 일찌감치 상관의 의도를 예상하고 적당히 분산해 네코의 근위병들을 견제하며 전진했다. 양쪽 대장들은 순식간에 1스타디아 이내로 접근해 서로의 얼굴까지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이제 양쪽 근위병들이 앞장서 나아가 대장들이 싸울 자리를 마련할 차례였다. 하지즈 장군의 근위병들은 U자로 나아가며 대장을 위한 멍석을 깔려 했다.
“흐읍,”
네코에게 접근하던 하지즈 장군의 근위병들 중 네코의 얼굴을 본 몇이 돌연 멈칫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진하다 말고 갑자기 고삐를 당기더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건 하지즈 장군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 저놈들 근위병들을 잡아놓으라니까!”
하늘같은 장군의 엄명에도 그들은 네코를 향해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코와 눈길과 마주친 근위병들 몇은 마치 괴물이나 환각이라도 본 것처럼 파랗게 질려서는 아예 비명을 지르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자신을 보고 달아나는 자들의 모습에 네코의 입가에도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고 투구를 쓰지 않고 나온 이유였다. 근위병 열 명 중 하나에서 둘로, 셋으로, 나중에는 절반 이상이 위치를 이탈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당황한 하지즈 장군도 돌격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대장의 곁을 지키던 충성스런 부하들이 돌연 대장을 놓아둔 채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 사이, 네코의 무리는 몇 발짝이면 하지즈 장군과 몇 안 남은 부하들을 휩쓸 수 있는 자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하지즈 장군으로서는 계속 돌격할지, 아니면 한 발 물러날지를 결정해야 했다.
“장군님! 조심하십시오, 저자는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을 지녔을 겁니다! 차라리 지금 물러나시는 편이…….”
크테시폰에서 교단을 경험했던 자말이 하지즈 장군에게 바싹 달라붙으며 주의를 주려 했지만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는 하지즈 장군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대체 무슨 잡기를 쓰고 있는 거냐!”
그는 자신의 극을 번쩍 쳐들고 네코의 정면을 향해 돌진했다. 이 와중에도 자신에게 정면으로 공격해오는 하지즈 장군의 모습에 네코가 마지못해 창을 뽑아들었다. 하지즈 장군은 악 소리로 스스로 기운을 북돋우며 우두커니 서 있는 네코를 향해 창을 내지르려 했다.
“으, 윽.”
몸이 굳어버린 하지즈 장군은 네코의 고작 십여 척 앞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두 손으로 창을 쥔 채 말 위에서 마치 병자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코가 히죽거리며 한 손으로 창을 쓰윽 내밀어 하지즈 장군의 창을 옆으로 툭 쳐냈다.
“이 정도면 꽤 독한 놈이구나?”
하지즈 장군은 그대로 창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놀란 건 하지즈 장군의 휘하 기병들뿐만이 아니었다. 네코를 따라온 칼데아군 기병들까지도 눈앞의 광경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하지즈 장군은 네코 앞에서 고개를 절반 떨군 채 인형처럼 굳어있었다.
네코는 싸움다운 싸움 한 번 할 필요 없이 말을 몰아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지즈 장군의 근위병들은 이미 도망갔거나, 옆에서 네코의 근위병들에게 제압당해가고 있었다.
“너희 인간의 실력으로 감히 내게 맞서려 했느냐?”
네코가 하지즈 장군의 턱을 덥석 붙들고는 투구를 확 벗기고 고개를 억지로 쳐들게 했다. 하지즈 장군의 눈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네코는 단검을 뽑아 그의 턱 밑에 들이댔다.
“데려다 써먹을만은 하겠다.”
적의 사령관을 사로잡았다는 데 자신만만해진 네코는 하지즈 장군의 망토를 확 벗겨 창 끝에 꽂아 높이 쳐들었다. 적 사령관을 끝장냈다는 전통적인 상징이었다. 사령관의 망토가 공중에서 펄럭이는 모습이 낙타병단은 물론이고 슈로 기사단의 눈에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그 사이, 네코는 적 사령관을 잡는 데 너무 넋을 팔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사이, 누군가가 붉은 말에 박차를 가해 근위병들 사이를 돌파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잡신 놈아! 크테시폰이 홀랑 타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근위병 일행의 제일 후미에서 달려온 자말은 앞을 막는 네코 근위기병의 목을 단숨에 북 찢어내고 삽시간에 포위망을 돌파해 달려왔다. 그는 창을 치켜들고 있는 네코의 얼굴을 향해 지난 크테시폰 작전에 썼던 석궁을 꺼내 당겼다.
“어떤 놈이 뚫린 거냐!!!”
네코 근위병들의 비명이 울렸다. 이런 작은 석궁은 정규군의 중장갑에는 별 효과가 없어 쓰지도 않지만 일부러 투구를 안 쓰고 있는 네코에게는 경우가 달랐다. 네코는 코앞으로 날아드는 볼트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볼트는 급소인 귀 밑을 살짝 벗어나 그의 새하얀 뺨을 그대로 찢고 들어가 반대편 뺨으로 쑥 빠져나왔다.
“우우우웁!”
평소 화장품 외에는 닿아본 것이 없던 고운 뺨에 손가락만한 굵은 볼트가 박힌 네코는 입을 제대로 벌리지도, 비명도 못 지르고 말 위에서 부르르 떨며 창을 떨어뜨렸다. 가까스로 그에게서 풀려난 하지즈 장군의 머리 위로 그의 창에서 떨어진 망토가 털썩 걸렸다.
“하지즈 장군을 죽여! 저놈 더 못 다가가게 해!”
네코의 근위기병들이 하지즈 장군을 향해 달려가는 자말의 좌우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자말은 친아버지 히르직스가 썼던 긴 창을 좌우로 번개처럼 휘두르며 하지즈 장군에게 다가가 그의 고삐를 덥석 낚아챘다. 순간 네코의 부장이 내지른 창이 자말의 겨드랑이 옆을 휙 스치며 피가 솟았지만 자말도 질세라 창자루를 밑으로 휘둘러 그자의 창을 확 쳐냈다.
“장군님! 가만히 계십시오!”
네코가 쓰러지면서 비로소 제정신을 차린 하지즈 장군의 근위병들이 독기가 잔뜩 올라 상관에게로 되돌아왔다. 그 와중에도 자말은 하지즈 장군을 죽이겠다며 몰려드는 칼데아 기병들의 창을 혼자서 몸으로 결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적의 창에 찔린 자말의 배와 목, 팔은 눈 깜짝할 새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네코에게 완전히 당한 하지즈 장군은 절반 정신을 잃은 채 축 처져 움직이지 못했다.
“아악!”
또다시 허벅지를 찔린 자말이 비명을 지르며 괴력을 내어 적의 창을 내리쳤다. 아버지가 물려준 이 단순하고 예리한 창은 적의 창자루를 단번에 뚝 잘라냈지만 피를 많이 흘린 자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부 근위병들이 하지즈 장군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드는 모습이 그의 눈가에 희미하게 보였다.
“이봐! 이봐!”
자말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되돌아온 서부 근위병들은 탈진해 의식을 잃어가는 자말과 하지즈 장군을 허겁지겁 후방으로 옮겼다. 적군에서도 뺨에 볼트가 관통당한 네코가 생전 처음 다쳐 본 사람처럼 울고불고 날뛰며 실려 가고 있었다.
“장군님은요? 무사하신가요?”
들것에 눕혀진 자말은 의식이 희미해가는 와중에도 하지즈 장군 쪽을 돌아보았다. 심한 충격을 받은 하지즈 장군은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리고 투구를 벗기가 무섭게 신물을 게워내며 바닥에 축 늘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두 번째 지휘관까지 잃은 서부 근위병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도 승부처가 되리라 생각 못 했던 이곳이 졸지에 상상하기도 싫은 소모전에 휘말려 말 그대로 지휘관의 무덤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적도 마찬가지지만 이젠 동맹군에는 이 대군을 지휘할 만한 사람이 남아있지를 않았다. 항상 앞장서던 하지즈 장군이 쓰러졌다는 것을 안 서부 낙타병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임달의 서쪽 평원은 어느새 양쪽 기병 모두에게 구렁텅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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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은 연재에 당황하셨나요?
지난번 공지(?)한 대로 오늘 제 신작 1편 [콜로니]가 공개된 관계로 자축 의미로 좀 일찍 올립니다. ㅋㅋㅋ 월/수/금 연재로 10편 정도까지는 무료로 갈 예정입니다. 앞의 몇 편까지는 매일 연재할까 합니다.
http://estory.yes24.com/author/eserial?serialno=114
예스24메인페이지의 오른쪽 위의 [e연재]에 들어가시면 판타지란에 있을 겁니다.
제 원칙은 글을 그때그때 쓰며 공개하는 게 아니고 완성 후에 올리는 겁니다. 이미 2년 이상 손을 본 작품이고, 이미 100편 이상 분량은 탈고까지 되어 있으니 한동안은 이 템포로 나가려 합니다.. 프롤로그 3회까지는 연대기로 시작하는 좀 특이한(?) 구성이라 솔직히 걱정은 좀 됩니다만.... 잘 되리라 믿어보고요;;;
혈맥을 보아오신 분이라면 앞으로도 익숙한 고유명사(?)가 종종 등장할지도 모릅니다.....하지만 별개의 스토리고요...^^;;
(어쩌면) 첫 클릭과 첫 댓글, 첫 추천이든....뭐든 첫 번째 주인공이 되실지도....ㅋㅋ
아참, 혈맥 완결 출판본은 다음주 정도에 배송 예정입니다.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세요~~~(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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