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19화 (1,113/1,132)

< -- 1119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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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뼈가 으스러지고 머리가 크게 찢어진 채 후방에 실려갔던 베아트릭스는 자신 몫까지 혼자 우군을 맡아 지휘하던 하지즈 장군까지 쓰러졌다는 보고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는 당장 의사에게 보여야 한다는 의무병에게 버럭 화를 냈다.

“젠장! 나까지 돌아가면 황비께서 나와서 지휘하셔야 한다는 거냐!!!”

베아트릭스는 임시로 댄 프레임을 대충 조이고 일단 말에 올랐다. 이젠 팔다리가 부러졌다면 기어서라도 전장에 나가야 할 만큼 절박한 타이밍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팔 안에서 뼛조각이 움직여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가 나서지 않고는 도리가 없었다.

그때, 막 말을 몰아 나아가려던 베아트릭스의 귀에 익숙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야, 이 낙타병 개새끼들아! 돌파 안 하고 뭐 해! 누가 그 구석에서 궁뎅이나 뭉개고 있으래!”

릴라크 특유의 듣기 싫은 가성이 이렇게 반가워보기도 처음이었다. 하지즈 장군의 부장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사령부가 있는 북쪽을 올려보았다. 망원경으로 보니 임시 사령관으로 사령부에서 명령만 내리고 있던 릴라크의 대장기가 제플린 산자락을 빙 돌아 이곳 서쪽 전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밑에서 달려오고 있는 건 분명 임시사령관이던 릴라크였다.

“에이, 씨발, 내 목소리 처음 들었냐! 기사단 놈들 너희 내가 없다고 그것밖에 못 할래?”

베아트릭스는 물론이고 부장들의 눈동자도 동시에 커졌다. 릴라크가 사령부를 떠나 오고 있다는 건 단순히 슈로 기사단과 낙타병단에 새 지휘관이 생겼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고통에 물들어있던 베아트릭스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고통에 일그러졌던 그의 눈가에 감격의 눈물이 번졌다.

“황상께서 깨셨나보다.”

우군 지휘부가 막 기뻐하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기쁨의 순간은 길지 못했다. 반대편, 북부군이 있는 좌군 쪽에서 급박한 연락이 들어왔다.

“북부보병대가 밀려나고 있습니다! 곧 근위대가 개입할 것 같습니다!”

베아트릭스가 입을 쩍 벌리고 북부군이 있는 좌군의 송풍로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누구나 인정하는 이번 전투의 ‘최대 승부처’였다.

“맙소사, 저기가 무너지면 끝인데.”

교단 바에자가 이끄는 3만의 근위대는 동쪽의 송풍로가 끝나는 지점 조금 밑에서 자신들이 들어갈 타이밍만 기다리며 초조함을 달래고 있었다.

“몇 분 안 남은 것 같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추워서도 못 견디겠네요.”

루토가 바에자의 등에 두툼한 모피망토를 덮어주며 걱정스레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적군이 아니고 차가운 강풍이었다. 철성에서 송풍로를 통해 보내주는 깨끗한 공기가 고지대에서 내려온 차가운 바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맑은 공기 선물은 고맙지만 거기에 심통을 덤으로 얹어서 보내고 있는 것 같군.”

바에자가 코맹맹이소리로 대답했다. 차고 거센 바람은 이곳에서 엉켜 싸우는 북부군과 칼데아군, 근위대원들을 꽁꽁 얼려놓은 후 분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나마 바람을 등진 북부군은 나은 편이지만 정면으로 안고 싸워야 하는 칼데아군과 근위대에겐 성가신 바람이었다. 바에자는 조금 전 받은 전문을 보며 낯을 찡그렸다.

“헤즈 놈이 흡기구에 빨려 들어갔다던데 이거 바람을 맞는 게 영 기분이 더러워.”

“그래도 좀 추울 뿐이지 작전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함께 있는 근위대 8군단장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타이밍은 칼데아군이 동맹군의 왼쪽 날개를 맡고 있는 북부군을 뒤로 밀어붙여 적 중앙에 있는 황실군 1, 3군단의 측면이 노출되는 때였다. 근위대는 그 틈새로 1. 3군단의 노출된 측면을 공격해 궤멸시킬 참이었다. 동맹군 보병대의 중심축인 1, 3군단을 무너뜨린다면 사실상 승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째 하임달 때와 대충 비슷하게 나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루토가 히죽거렸다.

“그때도 중심축이었던 북부보병대의 측면을 맡은 민병대가 무너지고 그 사이로 근위대가 파고들면서 끝이 났죠.”

루토의 기막힌 분석에 근위대 지휘부에 잠시 웃음이 오갔다.

“북부군이 밀려납니다!”

그때, 망원경으로 전장을 유심히 살피던 근위대 군단장이 기쁨에 넘쳐서 소리쳤다. 마약까지 먹어 독할 대로 독해진 칼데아군 보병대의 끈질긴 공세를 견디다 못한 북부보병대가 결국 송풍로 밑단을 내어준 채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역시 옛날 그대로야.”

바에자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기수에게 깃발을 들라고 손짓했다. 이제 드디어 근위대가 이번 전투를 판가름 지을 대대적인 돌격을 개시할 타이밍이었다. 바에자가 지도를 내보이며 지휘관들에게 마지막으로 돌격 방향을 확인시켰다.

“놈들이 혹 사령부의 가디언군단이나 에키트 보병들을 투입하면 우린 경보병 5만을 먹이로 내어주고 황실군 측면을 치면 된다. 이미 끝난 싸움이야.”

“먹이라뇨?”

근위대를 돕기 위해 와 있던 경보병단장 하페즈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5만의 경보병대를 이끄는 그는 자신의 부대가 예비 기동부대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가디언을 상대하기 위한 희생양이라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바에자가 그를 슬쩍 흘겨보며 평소 말투대로 장난처럼 대꾸했다.

“그대는 그래서 명장이 될 수 없는 거요, 하페즈.”

루토는 바에자의 눈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바에자가 어딘지 변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알던 이전의 바에자는 도리를 따지거나 작은 희생에 일희일비하는 무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천 수만의 목숨을 일부러 적에게 먹이로 내어줄 만큼 잔혹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카히나 성 공략전 후, 민간인이 건너는 다리에 포탄을 쏘게 했던 사이르 경 수하들의 목을 모조리 쳐 버렸고, 군인들을 동원해 시체를 수습하고 복원까지 해 유가족에게 돌려주었었다.

하페즈가 고개를 저으며 호소했다.

“명장 따위는 되고픈 맘도 없소. 그러면 차라리 가디언 군단을 근위대가 맡고 우리 부대가 황실군을…….”

“이미 정해진 거라니까요.”

바에자는 붉으락푸르락해진 하페즈를 놔둔 채 근위대에 진격나팔을 불게 했다.

일단 뒷걸음치기 시작한 북부군은 산 쪽으로 계속 한 발 한 발 밀려나가고 있었다. 7만의 칼데아군은 그들이 숨 한 번 쉴 새를 주지 않고 계속 밀어붙여 송풍로 밑단에서 완전히 밀어냈다.

“근위대 전진!”

100명 단위의 견고한 방진을 이룬 바에자의 근위대는 요란한 나팔소리와 북소리, 큰 함성에 발맞춰 힘차게 전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차를 탄 고위급 가디언 지휘관들이 앞에서 줄줄이 그들을 이끌었다. 이들의 바퀴소리와 발소리는 동맹군에는 최악의 순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놈들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루토가 전방을 가리켰다. 동맹군의 축인 황실군 1, 3군단의 측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황실군 측면 부대들이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정면으로도 마누엘이 이끄는 보병대와 힘겨운 싸움이 붙어있는 그들로서는 옆을 지켜주던 북부군까지 물러나면서 순식간에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된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진! 저자들에게 진짜 신의 힘을 보여줘라!”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진줏빛 갑주를 차려입은 바에자는 붉은 준마에 올라 직접 근위대의 선봉에 섰다. 그는 창을 번쩍 쳐들고 근위대 장병들을 독려했다.

“여기서 산다면 승전의 영광을 만끽할 것이며, 여기서 죽는다면 저승에서 나의 무한한 축복을 받을 것이다!”

바에자의 손짓에 그를 열렬히 따르는 근위대들이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황실군의 포병대는 이들이 정확한 유효사정권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바에자의 곁에서 함께 전진하던 루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멈춘 것 같습니다만?”

“움?”

바에자도 그제야 고개를 들고 송풍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 맹렬히 강풍을 쏘아대던 송풍로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루토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빨려 들어간 놈들 때문에 구멍이 막혔나봅니다.”

농담인지, 나름의 분석인지 루토가 한 마디 꺼냈지만 웃음 많은 바에자에게도 썩 웃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근위대는 바람 따위에는 별반 신경쓰지 않고 조금 전 북부군이 쫓겨난 송풍로 밑단에 접어들었다. 길게 잡아 늘인 나팔 모양인 송풍로가 마지막으로 입을 크게 벌리며 끝나는 지점이었다. 까마득히 깊은 송풍로는 이곳에 와서 점점 깊이가 얕아지고 옆으로 넓게 벌어지며 광장만 하게 크게 벌어지며 분지의 지면과 하나로 스며들었다.

근위대는 그 나팔의 끝자락에 위풍당당하게 발을 들여놓았다. 양군 포병대의 포격을 집중적으로 맞은 곳이라 바닥은 온통 곰보 투성이였다.

“왜 포를 안 쏘지?”

바에자가 의심에 찬 눈길로 적진을 노려보았다. 근위대는 이제 황실군 포병대의 사정권에 들어섰고, 근위대는 여차하면 분산해서 돌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송풍로부터 시작해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때, 이들의 앞을 눈처럼 흰 말 한 필이 막아섰다. 그를 뒤따라오는 대장군기를 본 근위대원들은 적 장군의 일기투 신청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멈칫거리며 바에자를 돌아보았다.

“이익.”

교단 바에자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백마 위에는 그와 똑같은 진줏빛 갑옷을 입은 또 한 명의 바에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겨드랑이에 투구를 낀 채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근위대원들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루토도, 8군단장도, 근위대의 지휘관들까지 또 다른 바에자의 출현에 일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밤새 송풍로 출구 옆에 숨어있던 우베는 자신의 어깨에 얹힌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작 33살 청년에게 맡기기는 너무 위험한 것 아니냐고 했지만 황제는 수술에 들어가기 몇 시간 전, 지난 전쟁 마지막 날 숨을 거둔 우베의 아들에게 이 임무를 마지막으로 명하고 의식을 잃었다. 우베는 황제가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땅히 추위를 피할 곳도 없는 이곳에서 그는 보호복과 위장포, 혼자 앉으면 꽉 찰 크기의 비트에 의지해 송풍로에서 뿜어 나오는 강풍과 추위를 버텨내야 했다. 타르서스인 아버지에 ㅤㅋㅞㄹ크 출신 어머니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는 추운 날씨가 죽도록 싫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은 동상으로 손발을 잃는 한이 있어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철성 앞에서, 그리고 분지 아래에서의 전투가 한참 무르익어갈 무렵, 그는 숨어있던 흙구덩이를 슬며시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지금껏 양쪽 전투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며 한편으로 송풍로의 바람소리에서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철성에서는 교단군이 1차 진격을 마치고 친위군의 마지막 방어선에 바싹 달라붙었다는 연락이고, 분지의 전장은 상황이 훨씬 복잡했다. 기병들끼리 맞붙은 우군 쪽에서는 양쪽 지휘관들이 줄줄이 쓰러져나가며 거의 막싸움 비슷해진 꼴이지만 그곳은 우베에겐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근위대의 움직임이었다. 송풍로의 바람이 잠시 꺼진 것을 확인한 그는 이제 자신이 나가야 할 때임을 실감하며 목에 건 부모님 사진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사과 모양 덩어리를 목에 주렁주렁 매달고 비트 밖으로 기어나갔다. 이 덩어리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좁은 비트에서 품에 껴안고 잘 만한 물건이 절대 아니었다.

“어후, 추워.”

우베가 몸을 움츠렸다. 바로 지금 쓰라고 받아놓은 묵직한 보호복은 비트 안에 일부러 벗어놓은 상태였다. 무거운 방염 보호복으로 뒤뚱거리며 움직이는 것보다는 맨몸으로 실수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조용해진 송풍로 옆에 바싹 다가가 미리 로프로 몸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바람이 뿜어 나오기를 기다리며 목에 건 사과 모양 기화탄을 꼭 쥐었다.

“4분 30초, ……40초, ……50초.”

우베는 시계를 보며 침을 삼켰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생존해 있는 그 누구도 1번 터빈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눈으로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순간의 증인이 되어야 했다. 송풍로가 조용해진 지금은 1번 터빈이 흡기구로 빨아들인 공기를 탱크 안에 잔뜩 삼키며 최대의 압력을 얻는 시간이었다.

5분을 찍은 순간, 우베는 머리를 감싸고 귀를 막으며 바닥에 납작 달라붙었다. 순간 거의 지진 같은 진동이 그의 배와 맞닿은 지면을 우르르 울렸다. 진동은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귀청을 찢을 것 같은 굉음을 내며 송풍로의 좁은 틈 위로 폭발해 올라왔다.

“우이익!!!”

우베는 강풍에 뒤로 주르르 밀려나 하마터면 산 밑으로 구를 뻔했다. 눈도 뜨기 힘들고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첫 충격파가 가시면서 바람이 송풍로를 타고 밑으로 돌진하는 듯했다. 우베는 급히 고글을 꺼내 쓰고는 다시 송풍로에 다가갔다. 거의 600년 만에 드디어 1번 터빈이 돌면서 송풍로의 12개 토출구 모두가 맹렬하게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젠장! 골로 가겠네!”

우베가 몸에 맨 밧줄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송풍로 밑을 몰아치는 바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바깥에서 빨려 들어가는 바람까지 있어 자칫 손을 놓치기라도 했다가는 저승행 티켓 예약 완료였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좀 더 고개를 디밀어 보았다. 그런데 지금 송풍로를 흐르는 공기는 먹물을 뿌린 듯 시커먼 것이 어제부터 뿜어나와 이곳 주변 공기를 맑게 해 준 차고 신선한 공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거였구나.”

타리프의 일지에서 본 내용을 떠올린 우베가 치를 떨었다. 동쪽 산의 흡기구 끝에 저장되어 있던 검은 재가 1번 터빈의 강력한 기류를 타고 빨려와 이곳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플라칼 가의 장태자 헤즈의 목숨을 빨아들였던 바로 그 검은 바람이었다. 파이로매니악 우베는 자신에게 이 임무를 맡겨 준 황제에게 또 한 번 고마움을 절감하며 목에 건 사과 모양 기화탄의 타이머를 맞췄다. 그리고는 맹렬한 기류 안에 확 던져 넣었다.

“하나, 둘, 셋…….”

우베는 당장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타죽는 한이 있어도 이 광경을 눈앞에서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초시계를 보며 절정의 순간을 기다렸다. 몇 초 후, 그는 눈앞의 소름끼치는 빛과 엄청난 열기에 용기를 잃고 후다닥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등에 끔찍한 열기를 느낀 그는 조금 전 기어 나온 비트 안에 몸을 휙 던져 넣고 위장포로 위를 덮었다. 눈앞이 온통 오렌지빛으로 변해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차라리 멀리서 보는 편이 훨씬 근사했을 것이라 후회했다.

잠시 멈추었던 송풍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근위대 앞에서는 2명의 바에자가 눈싸움을 벌이던 차였다. 바에자의 지휘를 받으며 전진하는 근위대 앞에 나타난 또 다른 바에자는 창끝으로 교단 측 바에자를 똑바로 가리켰다.

- 너희 근위대가 나를 정말로 따랐다면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루토 너도. -

이번 목소리는 입이 아니고 머릿속으로 바로 전해졌다. 당황한 루토의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을 본 교단 바에자도 질세라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 황제가 내 가짜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으니 흔들리지 마라. -

바에자는 즉시 마우저를 빼들었고 상대방도 질세라 동시에 뽑아 서로를 겨누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말에 탄 데다가 거리가 멀어 제아무리 명사수라도 맞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에자는 옆에서 파랗게 질려 있는 루토를 사납게 돌아보았다.

“뭘 그리 빤히 쳐다보느냐!”

바에자의 호통에 루토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 루토, 네 옆에 있는 그 여자가 정말로 나라고 믿는 거냐! -

바에자의 분노에 찬 알림이 다시 루토의 머릿속을 울렸다. 루토는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는 바에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황제 측 바에자의 뜻이 다시 근위대 지휘관들을 흔들었다.

- 황궁 지하에서 날 공격하고 내 자리를 차지한 저 가짜가 내 팔찌를 끼는 걸 보았느냐? -

- 저년 하는 말을 듣지 말라니까! -

교단 바에자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루토의 얼굴을 거칠게 떠밀었다. 궁지에 몰린 바에자는 기수의 깃발을 빼앗아들고 앞을 가리켰다. 그로서는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

“저 여자는 무시해라! 당장 공격해!”

- 다시 묻겠다, 저 가짜가 내 팔찌를 끼고 빛을 내는 것을 봤냐는 말이다! -

황실 편에 선 바에자는 장갑을 벗고 한 손을 공중에 번쩍 쳐들었다. 그가 장군 신분으로 나섰던 마지막 전투였던 타르서스 공방전 당시, 오르마즈와 함께 군벌 헤크마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다가 얻은 상처였다. 그는 이 흉터를 수백 년 동안 간직하며 자신의 상징으로 과시해 왔었다.

- 저 여자에게 옛날 타르서스에서 당한 이 흉터는 있냐는 말이다! -

바에자가 루토와 근위대의 지휘관들 모두에게 핏대를 세우며 강조했다. 눈 좋은 가디언 지휘관이나 스코프를 낀 몇몇 장병들은 바에자의 손등에 선명히 드러난 긴 흉터를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지만 이 자리에서 바로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8군단장은 바로 옆에 있는 교단 바에자의 손등을 슬쩍 곁눈질했다. 바에자의 흉터는 갑옷에 가려 볼 수가 없고, 마구스 팔찌는 목에 걸려있었다. 황제 측 바에자가 근위대를 몰아붙였다.

- 내 너희를 사랑하기에 여기까지 나왔다. 마지막 기회다. 저년이 내 팔찌를 끼고 너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마라. -

루토와 군단장이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어, 전군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팔찌를 끼어 보이심이…….”

“당장 전진하지 않고 뭐 해!”

교단 바에자는 그들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말채찍으로 기수와 나팔수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빨리 나가!”

바에자가 대뜸 칼을 빼들고 기수의 목을 향해 쳐들었다. 당황한 기수가 급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근위대가 결국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루토는 여전히 바에자의 목에 걸려있는 마구스 팔찌를 불안하게 곁눈질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가 탄 건 맞은편의 황제 측 바에자였다. 한때 그를 그토록 따랐던 3만의 장병들이 이젠 그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함께 나와 있던 타크마가 그를 말리려 했다.

“안되겠습니다! 더 이상은 어렵습니다!”

황실 측 바에자는 만류하는 타크마를 거칠게 밀쳐내고 이번엔 진짜 자신의 목소리로 찢어져라 절규했다.

“더 이상 움직이면 신의 노여움이 무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제발 오지 말라고!”

바에자의 피를 토하는 절규에 연대 하나가 멈칫거리며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바로 호드르 산의 발전소에서 바에자와 동고동락했고, 그가 중상을 입어가며 남아 퇴로를 지켜 준 덕분에 무사히 퇴각해 전멸을 면했던 바로 1연대였다. 연대장은 앞장서는 교단 바에자에게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제발, 팔찌를 끼시어 현신의 위엄을 보여주십시오!”

“닥치지 못할까! 당장 따라오지 않으면 목을 벨 테다!”

바에자는 기수와 나팔수의 등을 다시 치며 속도를 붙이라고 재촉했다. 3만의 근위대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꾸물거리며 황제 측 바에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제발, 제발! 오지 마!”

자신의 명을 따르는 근위대원이 거의 없다는 데 당혹스러워진 황제 측 바에자가 절반 절망감에, 절반 분노에 마지막으로 울부짖었지만 이젠 그를 지키는 타크마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안 가겠다고 버티는 바에자를 거칠게 끌고 후방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위험합니다! 이젠 물러나셔야 합니다!”

- 내 마지막 자비를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

바에자의 마지막 한 마디는 타크마의 완력에 가로막혀버렸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피 맺힌 절규가 완전히 의미가 없던 건 아니었다. 조금씩 속도를 늦추던 3천의 1연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고, 그 옆에서 함께 전진하던 7연대장도 대대장들의 저항에 멈칫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나머지 2만 5천여는 계속 전진해 송풍로의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저 새끼들은 뭐냐!”

교단 바에자가 뒤처져서 안 움직이고 있는 두 부대를 돌아보며 이를 드러냈다.

“당장 돌아가서 저 두 부대 연대장들의 키를 회수해! 후임은…….”

교단 바에자는 옆을 호위하는 루토와 호위가디언들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지만 미처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갑자기 지휘부 장병들이 웅성대며 제플린 산 정상 쪽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뭐냐!”

바에자는 감히 자신의 말에도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무장들에게 더더욱 화가 솟구쳐 언성을 높이며 뒤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 역시 눈앞의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플린 산의 꼭대기 가까운 곳, 송풍로가 시작하는 곳에서 시뻘건 빛이 공중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저게……뭐냐?”

바에자는 물론이고 근위대원들의 입에서 동시에 놀라움의 탄성이 새어나왔다. 마치 용의 머리처럼 공중으로 솟구쳤던 붉은 화염은 송풍로를 타고 맹렬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1번 터빈이라는 괴물의 뱃속에서 검은 재와 산소, 불꽃과 강풍이 뒤섞여 탄생한 붉은 용은 산 밑으로 내려올수록, 송풍로가 얕아지고 옆으로 폭이 넓어지며 점점 위력을 붙이며 크기가 커져갔다. 순간, 바에자의 입에서 언젠가 보았던 이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불타는 용이 산꼭대기에서 내려와……우리를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송풍로가 끝나는 지점에 있던 근위대원들의 놀라움이 공포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루토의 공포서린 목소리가 지휘부를 울렸다.

“우리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껏 자신만만하게 진군하던 근위대원들이 비로소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에자까지도 파랗게 질려 말을 돌렸지만 그들이 이제와 피하기는 불꽃의 속도는 너무 빨랐다. 가디언 한 명이 스코프에 나타난 숫자를 보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시속 2천 스타디아(300㎞/h)가 훨씬 넘습니다!!!”

2만 5천의 근위대원들은 이 어마어마한 불꽃의 용의 피해 혼비백산해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두 발, 심지어 말을 타고도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도망가! 도망가!”

지금껏 그 누구 앞에서도, 그 어떤 적에게도 등을 보이지 않던 막강한 근위대였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오건 뭐건 모조리 무너뜨리고 일제히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그들은 절반 이상은 후방으로, 일부는 황실군 쪽으로, 나머지는 아예 방향감조차 잃은 채 그저 불꽃이 안 보이는 곳으로 비명을 지르며 뛰었다.

“현신님! 현신님!”

루토는 그 와중에 가디언들 사이에 파묻혀 사라진 바에자를 찾아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저지대에 가까워진 용은 크게 날개를 펼치며 땅을 뒤덮은 거대한 불꽃의 해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날개를 편 불꽃의 용은 3만 가까운 근위대의 머리 위에 순식간에 저주의 불꽃을 내리꽂았다.

“맙소사! 못 피해!”

날개를 크게 펼친 불꽃은 송풍로에 가장 가깝게 전진하던 대대부터 그 밑에 집어삼켰다. 불꽃 속에서 수천, 수만 장병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궁지에 몰린 병사들은 불꽃을 피해 방패를 덮고 바닥에 엎드리고, 일부는 포격으로 난 구멍에 몸을 던졌지만 대부분은 그리 운이 좋지 못했다. 검은 재가 일으킨 어마어마한 고온의 불꽃은 내화 처리된 그들의 갑옷을 태우고, 스코프를 박살내고, 눈을 태워 들어갔다. 끔찍한 살 타는 냄새와 찢어지는 비명, 살려달라는 죽음의 외침이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동맹군의 숨통을 끊으러 전진하던 근위대를 뒤덮었다.

어마어마한 참상에 칼데아군, 동맹군까지도 충격을 받아 잠시간 싸움을 멈추고 전선의 동쪽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근위대의 대군을 날개 안에 품어 단숨에 태워버린 거대한 용은 하늘로 휙 솟구쳐 올라 마치 환영처럼 흩어지며 사라져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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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편은 화끈하게(?) 올립니다. ㅋㅋㅋ

출판본 엔딩본 책이 나와 어제 발송했고 오늘쯤 거의 받아보셨을 겁니다. 제 책과 함께 즐거운 주말이 되면 좋겠네요. ^^;; 휴식기간도 길었고 출판본 완간 기념차.... 이번편은 좀 길고 화끈하게 올립니다.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세요~~~( ̄∇ ̄)ブ~~★

7/8/9권 전자책은 오늘부터 주말까지 작업해 승인신청 예정입니다. 전자책 원하시는 분들은 주말 이후면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

예스24에 올리는 콜로니-사르코시스트도 오늘이 6회 연재일이네요. 여기도 발자국이나 덧글로 흔적 남겨주시면 복받으실 겁니다. ㅎㅎㅎ ^^ 무료로 보시려면 연재당일 보셔야 하니 월/수/금엔 서두르시고요 ㅎㅎㅎ (덧 : 엥;; 7회부터 다음날 유료로 해달라고 했는데 6회부터 다음날 유료가 되어버렸네요;;;)

http://estory.yes24.com/author/eserial?serialno=114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인터파크, T스토어, 올레eBook, 리디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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