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24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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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냐? 돌파당했다니?”
코런덤의 역습과 친위군에서 날아오는 포탄에 가장 당황한 건 철성을 공격하는 3만의 보병대를 이끌고 있는 카나르였다. 당초 그는 직접 전장에 나가겠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제정신이 있는 참모라면 이런 상태의 황제를 전장에 내보낼 수는 없었다. 참모들은 사령선에서 내리려는 카나르를 가까스로 만류해 사령실 함교 꼭대기의 지휘소에 붙잡아두고 있는 참이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황제를 모시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는 눈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팔의 통증으로 1분에도 몇 번씩 혼자 자지러지곤 했다. 게다가 손상된 시력 때문에 옆의 참모들의 설명에 의존해 지시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우릴 공격하고 있다는 거냐!”
카나르가 호두만한 혹이 주렁주렁 매달린 손으로 지도를 더듬으며 호통을 치자 머뭇거리던 참모들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양쪽 다입니다.”
그 한 마디에 카나르의 흐려진 눈가가 더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을 야무지게 깨물며 신경질적으로 손을 저었다.
“상관없어. 그 정도는 이미 다 계산한 거니까. 밀어붙여. ……아윽.”
무심결에 팔을 휘두르던 카나르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꼬꾸라졌다. 보다 못한 군의관이 다시 다가와 그의 팔을 걷어보려 했지만 카나르가 버럭 화를 내며 그를 밀어냈다.
출발 이후, 카나르는 아랫사람들에게 팔을 보이지 않으려 손에까지 수건을 칭칭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군의관도, 참모들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차마 말을 못 하고 있지만 카나르에게선 지독한 악취까지도 풍겨 주변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발, 용서하십시오, 폐하!”
눈짓을 주고받은 참모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카나르의 팔을 붙들고 팔뚝을 드러냈다.
“으, 으악!”
카나르의 왼팔을 붙들었던 참모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카나르의 비명이나 호통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의 굵은 팔뚝이 마치 썩은 고기처럼 잡자마자 물컹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지레 놀란 참모가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짓을 한 거요!”
군의관이 급히 옷을 찢고 카나르의 팔뚝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역시 놀라 얼른 손을 떼고 말았다. 카나르의 팔뚝은 처음 가르시바에게 잡혔던 손목은 물론이고 손끝부터 어깨 아래까지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살갗은 두부처럼 변해 살짝만 잡아도 그대로 뭉크러졌다. 살갗에 흐르는 끈적한 진물 때문에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썩은 내가 주변에 진동을 했다.
“꺼지지 못해!”
카나르가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참모와 군의관들을 걷어차 쫓아냈다. 그렇지만 발광을 하는 것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왼손으로 참모의 뺨을 친 그는 지독한 고통에 자지러지고 바닥에서 몸부림을 쳤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황제가 절반 이성을 잃고 몸부림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참모들이 구석에 가져다놓은 가르시바의 시체를 한 번씩 곁눈질했다. 원래는 적당한 때에 교단군을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가져온 것이지만 지금 같아서는 교단군보다 카나르가 저 시체에 더 제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마구스를 죽여서 그런 거야.”
참모 하나가 혼자 웅얼거렸다가 동료의 눈짓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고통에 잠시 몸부림친 카나르는 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몸이 썩어가는 고통은 계속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잠시 풀어주었다가 다시 잊을만하면 그를 공격하며 몸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빨리, 계속 좀 붙들고 있어요.”
카나르가 축 처져 있는 동안 군의관이 급히 항생제 주사기를 가져갔다. 참모들이 황제의 몸을 조이는 것을 풀어내려 그의 신발을 벗겨낸 순간, 그들은 또다시 지독한 악취에 표정관리를 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이상한데?”
악취를 참고 황제의 발을 확인한 참모가 결국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팔과는 정반대편인 발끝까지 어느새 회색빛으로 변해있었다.
“이런 맙소사.”
군의관은 부상을 입은 카나르의 오른팔에 감아놓은 붕대도 풀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오른손도 끝부분부터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팔의 상처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저 염병할 잡신 놈들!”
자신의 사지가 조금씩 썩어가고 있는 것을 깨달은 카나르는 가르시바의 시체를 가리키며 미쳐 울부짖었다.
“저, 저 썩을 년 시체를 당장 찢어발겨서 내버리지 못해!”
카나르의 지시에 경비병들이 마지못해 시체에 다가갔지만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선뜻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머뭇대는 놈들은 팔다리를 끊어내 줄 테다! 당장!”
황제의 위협에 겁을 먹은 경비병들은 하는 수 없이 손에 장갑을 단단히 끼고 가르시바의 시체를 조심조심 사령실에서 내갔다. 병사 중 하나가 ‘제발 용서하소서’라고 중얼거렸지만 모두 못 들은 척했다.
점점 썩어가는 자신의 사지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카나르가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사령실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러댔다.
“대신관이건 황제건 무슨 잡놈이건 싹 다 태워 죽여 버려! 씨발!”
“제발, 진정하시고…….”
미쳐 날뛰는 황제에게 진정제 주사를 놓아주려던 군의관은 카나르가 휘두른 철퇴에 머리를 얻어맞고 그대로 쭉 뻗고 말았다.
“씨발! 공격하라니까!!!”
황제의 발광에 파랗게 질린 참모들이 허겁지겁 창가로 달려가 철성을 공격중인 가문 부대에 [총공격]을 전달했다. 코런덤들에게 돌파당하고 잠시 우왕좌왕하던 3만의 플라칼 가 보병대는 다시 전열을 재정비해 철성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참모들이 전장에 지시를 전달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황제 카나르의 발광과 신음, 고통에 젖은 비명은 계속 이어졌다. 이젠 아무도 그를 말릴 수도, 그의 고통을 덜어 줄 수도 없었다. 참모들은 하나 둘 그의 곁에서 거리를 두었다. 심지어 가르시바의 시체를 가지고 나갔던 경비병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공명심이라면 구제불능인 베흔이 한참 승기를 잡아가는 전장을 막판에 빠져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세상 누구에게도 승장의 명예를 양보한 일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3천여 명의 가디언들과 함께 셔틀에서 뛰어내린 베흔은 판지셰르 분지의 전장을 뒤돌아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저기 계속 있으면 같은 곳에서 또 한 번 승전폭죽을 울리는 건 맞는데.”
근위대가 무너지면서 무게추가 확 기울어버린 분지의 대회전은 이제 지루한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전세가 기울었다고는 해도 워낙에 적의 숫자가 많고, 남부 특유의 견고함이 있는 이상,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며 멋지게 승전보를 울리는 타이밍까지는 지겹게 오래 기다려야 할 듯했다.
1만의 가디언군단을 이끌고 적 황제 카나르를 사로잡고 적 사령부를 유린하는 야무진 꿈을 꾸었던 베흔도 카나르가 산 위의 고원으로 가버리면서 졸지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뒤처리 따위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멋지게 큰 거 한 방 끝내고 술 한 잔 빨면서 아랫것들이 마무리하는 걸 구경하는 게 낫지.”
카나르를 놓친 베흔은 적 사령부 ‘자리’를 청소하는 임무를 베레트라에게 맡겨놓은 채 어렵사리 긁어모은 3천의 친위군 가디언들과 함께 몇 대의 수송셔틀에 나눠 타고 분지 동쪽의 산 중턱에 내려선 참이었다. 원래는 칼데아군을 쫓아 철성으로 가려 했었지만 그들이 셔틀을 준비하는 동안 적이 재빨리 방공망을 깔아 접근이 어려워졌고, 철성은 워낙 지대가 높아 그간 어렵게 훈련받은 행글라이더로 착륙하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이도저도 못 하고 고심하던 차에 황제의 전문을 받고 이곳에 와 있었다.
- 가디언을 최대한 많이 이끌고 흡기구 앞으로 올 것. -
베흔은 황제가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흡기구 앞에 부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언뜻 생각하면 철성을 포기하고 흡기구로 도망치기 위해 그 부근에 있는 적병들을 쓸어달라는 것도 같았지만 그가 아는 황제는 절대 철성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상황은 베흔에게는 썩 달갑지 않았다.
그때, 하늘에서 번쩍 하는 번개에 뒤이어 긴 천둥소리까지 우르르 들려오자 베흔이 몸서리를 쳤다.
“또 천둥번개가 치네? 비라도 오는 것 아냐? 여기서 비는 처음 보는데?”
베흔이 돌아본 남쪽 하늘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남쪽 하늘은 검은 재 때문에 원래부터 노상 검은색이었다보니 먹구름인지 검은 재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길안내를 맡은 산토스가 별것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마른벼락이에요. 처음엔 저희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는데 여지껏 비가 온 날은 거의 없었어요. 와 봤자 가랑비 조금 내리고 끝났죠. 아, 저 앞이 흡기구입니다.”
산토스의 손짓이 아니어도 그저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도 흡기구의 존재를 느끼기는 충분했다. 비탈진 지면에 뚫린 구멍으로 맹렬히 몰아쳐 들어가고 있는 기류는 한 번 휩쓸리면 끝장이 날 듯했다.
흡기구 주변에는 이미 몇 시간 전 빨려 들어간 헤즈의 흔적에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듯 플라칼 가 병사들 백여 명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공격!”
3천의 가디언들로서는 여기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무려 3천이나 되는 가디언들이 무기를 쳐들고 악 소리를 내면서 돌격해오는 모습에 놀란 플라칼 가 병사들은 싸움 한 번 해 볼 엄두도 못 내고 파랗게 질려 도망을 쳐버렸다. 산토스가 굉음을 내며 지하로 빨려들어가는 맹렬한 기류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안으로 들어간 헤즈 놈은 어떻게 됐을까요?”
“생각 않는 편이 나은 것도 있어.”
베흔이 퉁명스레 대답하며 할룩스를 켰다. 그리고 철성 위에 있는 황제에게 전문을 보냈다.
- 흡기구 앞에 도착했습니다. -
그에 대한 대답은 할룩스보다 눈앞의 풍경에서 먼저 확인되었다. 흡기구로 맹렬히 들어가던 기류가 갑자기 잦아들면서 가디언들의 예민한 귀를 괴롭히던 바람소리도 함께 사그라졌다. 베흔이 고개를 쑥 내밀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씨발.”
웬만해서는 험한 단어를 잘 쓰지 않던 베흔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욕이 나왔다. 황제는 이 흡기구를 타고 철성으로 오라는 것이 분명했지만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선뜻 이 밑에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베흔이 툴툴거렸다.
“여길 타고 철성에 지원군으로 가려면 한 시간은 걸릴 텐데 그새 철성이 적군에 넘어가면 어찌되는 거지?”
“놈들이 터빈을 켜겠죠. ……생각하지 말라면서요?”
산토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베흔은 무심결에 제플린 산 위를 올려보았다. 지금까지 전달받은 전황으로 보아선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황제가 철성을 지켜낼 가망은 거의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이곳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산토스에게는 아니었다.
“뭐 하세요? 서둘러야지.”
베흔이 내려가기를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산토스는 그가 시키기도 전에 냉큼 줄을 걸고 앞장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반 야전군 사관이 앞장서서 수직굴에 들어가는 모습에 가디언들도 앞 다투어 그 뒤를 따라 흡기구에 케이블을 걸고 내려갔다. 이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건 베흔 하나뿐이었다.
“염병할.”
베흔은 주머니에 있던 쪽지 하나를 꺼내보았다. 조금 전, 경보병대와 싸우고 있을 때 항복한 적 사관이 가지고 있던 서한이었다.
- 내 네가 황실 놈들의 뒤를 쳐 준다면 차후 일리안과 페스트를 네 땅으로 주마. -
“훗. 고작 그 정도로?”
베흔은 쪽지를 꽉 구겨서 잘근잘근 씹어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부하들을 따라 줄을 잡고 흡기구에 뛰어내렸다.
철성 앞을 지키던 친위군의 아나콘다에서 하나 둘 불길이 솟기 시작했다. 포탄이 바닥나면서 친위군 포병들은 옆에 뒹굴던 모래주머니, 오래된 벽돌, 보도블럭까지 단단한 것들을 되는대로 담아 적에게 날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플라칼 가와 호지 가가 섞인 3만의 칼데아군에서 이미 수천이 포격에 쓰러지거나 고지대에 낙오해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지만 이 정도가 한계였다.
포탄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친위군 포병들은 더 이상 포격이 불가능해진 포대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른 후 후방으로 도망쳤다.
“사격! 놈들의 전차 사이로 볼트를 날려!”
화단을 사이에 둔 마지막 전투는 당초 예상했던 코런덤이 아니고 그보다 수십 배의 칼데아군 보병대와의 싸움이 되었다. 칼데아군은 사격을 막기 위해 여러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전진해왔지만 아나콘다의 포격에 이젠 절반 이상 파편이 되어 오는 길에 버려졌고, 이젠 친위군의 맹사격을 방패와 두꺼운 갑옷만으로 가까스로 버티며 끈질기게 접근해왔다.
하지만 친위군들 역시 강화석궁의 볼트가 거의 떨어져 그들에게 볼트 세례를 쏟아 부을 수가 없었다.
“놈들은 얼마 안 남았다!”
화단 밑에 점점 가까워진 칼데아군 보병들이 와아 하며 함성을 올렸다. 아직 포탄이 남은 아나콘다에서 산발적으로 포탄이 날아올랐지만 상대의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아는 칼데아군들은 점점 기세를 올리며 화단에 가까워졌다. 그들의 눈에 철성 앞 가파른 화단과 그 위에서 볼트를 쏘아대고 있는 1천 조금 넘는 친위군들이 들어왔다.
“먼저 온 코런덤들이 저놈들 진을 다 빼 놔서 다행이야.”
칼데아군 지휘관들은 가파른 화단에 거의 익은 채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코런덤들의 시체를 보며 몸서리를 쳤다. 이들에겐 퍽이나 다행히도, 화단에서 코런덤들에게 고열을 뿜어내던 파이프는 거의 녹아 이젠 군데군데 산발적으로 김이 솟고 있을 뿐이었다.
이젠 그들에겐 아무 문제도 없어보였다. 딱 하나, 아니 한 사람만 빼면 그랬다.
“이익.”
몇몇 베테랑 장병들이 마약기운에도 그의 위세에 지레 눌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철성 출입문이 있는 계단 꼭대기엔 그들 눈에도 익숙한 검은 수트와 망토 차림의 한 사람이 보란 듯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뒤에 세워진 황제기 [다라프시 카비아니]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지난 제위전쟁 마지막 순간, 황제가 [불가사의한 능력]을 발휘해 수백의 사람들을 순식간에 저세상으로 보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다가가도 되는 거야?”
“닥치고 전진해!”
지휘관과 사관들이 위축된 장병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들 모두에게 카나르 황제가 있는 사령선에서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 자칭 황제 카렐을 죽이는 자에게 100만 골드의 공신 연금과 귀족으로의 신분 상승을 부여한다. -
마약 기운과 공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장병의 의식은 상금이라는 것이 더해지면서 무게가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그들의 눈에 화단 위의 표적이 갑자기 만만하게 보였다.
“저놈만 잡으면 끝이야.”
황제는 한 팔에 붕대를 칭칭 감아 못 쓰는 듯했고, 평소 쓰던 그 무서운 카타나 대신 처음 보는 낯선 검은색 기계를 오른손에 쥐고 서 있었다.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이 얼굴이 뒤덮여 눈도 한쪽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몸 반쪽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공격! 저자만 돌파하면 철성 안이다!”
중군에 자리한 플라칼 가 보병대가 악 소리를 지르며 선봉으로 철성 계단에 달려들었다. 카렐은 둔한 왼손을 움직여 목에 걸고 있던 금빛 줄을 자신의 키만 한 이 육중한 기계에 걸고 뚜껑을 탁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미안하지만 너희를 전혀 동정하지 않는다.”
뒤이어 카렐의 손에 들린 긴 기계, 한때 카히나가 코메트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것보다 훨씬 큰 괴물이 칼데아 보병대를 향했다. 그리고는 상대의 무기도 제대로 모른 채 악을 쓰며 돌진해오는 그들을 향해 천둥 같은 굉음과 불꽃을 뿜기 시작했다.
“끄아악!”
죽어가는 병사들의 찢어지는 비명은 귀청을 찢을 것 같은 기계의 굉음에 가려 들리지도 않았다. 초당 거의 10발 꼴로 기계에서 날아온 노란 불꽃은 방패건, 갑옷이건 닿는 것마다 폭발해 그 주변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때까지도 황제가 손에 든 것의 정체를 모르고 있던 칼데아 보병들은 앞서가던 전우의 방패가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투구가 깨져 골과 함께 공중에 튀어오르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피해!”
방패도, 갑옷도 전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은 계단으로 오를 생각도 못 한 채 사방으로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운 없이 목에 맞은 병사의 머리가 뚝 잘려나가 몸통에 매달려 너덜거리고, 살점에 매달린 팔다리를 질질 끌며 반쯤 미쳐 여기저기 기어다녔다.
“감히 황제 앞에 허락도 없이 몰려들다니!”
카렐의 오른팔은 보통 사람의 팔로는 엄두도 못 낼 기계의 어마어마한 반동을 그대로 버텨내며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계단 아래에 몰려들었던 칼데아군 보병들은 거의 10스타디아(1.5㎞) 밖까지 우르르 쓸려나가며 거대한 피와 살점의 부채꼴을 그렸다.
“제엔장! 저걸 어떻게 돌파해!”
바닥에 엎드린 사관들이 울부짖었다. 이 사격만으로 칼데아군 3만을 모두 죽일 수는 없겠지만 약 기운에 이성을 절반 내버리고 미쳐 날뛰던 그들의 발끝을 얼어붙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그 어느 때도 진형을 무너뜨리지 않던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포격구멍이나 작은 엄폐물, 심지어 부러진 발리스타 조각 뒤에까지 기를 쓰며 몸을 숨겼다.
“돌파는 고사하고 숨을 곳도 없잖아!”
비명을 지르던 병사가 머리에 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친위군은 쓰던 참호를 무너뜨리고 물러났고, 그들이 숨을만한 곳도 남겨두지 않은 상태였다. 완전히 노출된 칼데아군 병사들은 죽을 순서만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행운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씨!”
카렐은 손잡이를 비틀어 시뻘겋게 달아오른 총열을 빼냈다. 완전히 노출되어 거의 죽을 순서만 기다리고 있던 칼데아군 병사들은 카렐이 서투르게 총열을 교체하는 동안 여기저기로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흩어졌다.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삶의 희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틈새였다.
“전차를 겹쳐서 대! 전차를 동원하라고!”
“저놈 둔해서 못 움직인다! 아무나 다가가서 투창을 맞추는 놈한테 10만 골드를 준다는 황상의 말씀이시다!”
후방에 있던 지휘관과 참모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아나콘다의 포격에 이미 고철덩이가 되어 후방에 있던 버려져 있던 전차를 악을 쓰고 밀고 오기 시작했다.
“전진! 전진!”
카렐의 목에 걸린 어마어마한 상금에 눈이 뒤집어졌거나, 혹은 약기운에 반쯤 제정신을 잃은 병사들 수십이 보병용 투창을 들고 카렐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얕은 모래주머니 벽 뒤에 서 있는 카렐을 향해 목숨을 걸고 투창을 던졌다.
“저 귀찮은 것들이!”
그 사이, 가까스로 총열을 바꾼 카렐이 자이납에게서 새 탄창을 받아 옆에 끼우고 다시 쏘아대기 시작했다. 또다시 수십의 적병들이 폭발하는 실탄에 핏덩이가 되어 흩어졌지만 이번엔 한쪽에서 육중한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이납이 방패를 들고 카렐의 앞으로 날아드는 투창을 기를 쓰고 쳐내며 소리를 질렀다.
“왼쪽에 전차에요!”
카렐이 즉시 총구를 왼쪽으로 돌리고 적이 급조한 전차에 대고 실탄을 퍼부었다. 하지만 무려 3대의 전차 장갑을 덧댄 전차의 정면은 철갑탄에도 바로 뚫리지 않았다. 그들은 카렐이 있는 계단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염병할! 저걸 쏘지 않고 뭐 해!”
아직 포탄이 남아있던 아나콘다에 달려든 페로가 조준이고 뭐고 없이 바로 방향을 돌려 그쪽에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포탄을 날렸다. 아나콘다의 육중한 포탄에 정면으로 얻어맞은 3중 장갑과 그 바로 뒤에 숨어서 다가오던 십여 명이 산산조각이 나 공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뒤엔 그보다 훨씬 많은 보병들이 있었다. 부서진 전차 뒤에서는 마치 벌집을 건드린 듯 백여 명 가까운 병사들이 투창을 들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엄마야! 뭐가 저리 많아!”
놀란 자이납이 방패로 카렐의 왼쪽을 막아섰지만 그 순간을 노리고 숨어있던 또 다른 적병들이 이번엔 오른쪽에서 우르르 튀어나왔다.
“폐하! 피하십시오!”
카렐은 평소의 곱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거의 찢어지는 듯한 코리온의 절규에 오른쪽을 휙 돌아보았다. 구석의 참호에서 포격 계산을 하고 있던 코리온이 죽은 병사의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지고 카렐의 오른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우읍!”
카렐의 얼굴로 제일 먼저 날아들던 투창 2발이 그가 진 방패에 쿵쿵 하며 명중했다.
“학장?”
카렐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건 코리온이 자신의 생명을 구한 기쁨 때문이 아니었다. 투창에 맞은 코리온의 낡은 방패가 쩍 소리를 내고 갈라졌고, 완전히 드러난 코리온의 등 뒤로 수십 발의 보병용 투창이 동시에 우르르 날아오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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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단신공 죄송합니다;;;; 그 앞에서 자르자니 너무 짧고.....계속 이어쓰려니 분량이 너무 기네요;; (절대~~네버 에버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슬퍼요~~~( ̄∇ ̄)ブ~~★
잠시 연중했던 출판본이 7월1일(월요일)부터 프리미엄에서 연재 재개합니다. 지금 7권 후반까지 올라있는데 하루 네댓편씩 올려 최대한 빨리 9권 엔딩까지 올리겠습니다. 7/8/9권은 연재본에 빠진 부분이 많아 출판본이 연재본보다 분량이 훨씬 많아 서둘러야 할듯하네요.
옆동네 예스24 연재 중인 콜로니-사르코시스트는 충격과 공포의(?) 20회에 이어 오늘 21화가 올라오는 날입니다. 와서 아는 척이라도 해 주시고 흔적이라도 남겨주시면 매우 감사합니다. ㅋㅋㅋ
http://estory.yes24.com/author/eserial?serialno=114
예스24에서도 오픈 초기라 이머니 수천원어치 공짜로 받는 이벤트를 하고 있네요. (e연재 홈에서 찾으시면 됩니다.) 설사 제 연재를 안 보시더라도(쿨럭;;) 전자책 사는데도 쓸 수 있다니 챙길 건 챙겨가세요.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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