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126화 (1,120/1,132)

< -- 1126 회: 파트16. 신들의 전쟁 (완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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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붙여!”

적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베흔과 가디언들은 싸울 기운을 잃고 물러나는 칼데아 보병들에게 무자비하게 양손검을 휘둘러대며 철성 바깥쪽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적 후방에서는 일선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 보병들이 황금덩이를 주우러 거칠게 밀어붙이며 몸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퇴각! 퇴각하니까 좀 비켜!”

가디언들에 쫓겨 전방에서 퇴각하는 보병들이 황금에 넋이 팔려있는 동료들을 밀치며 울부짖었다. 그렇지만 쏟아지는 황금을 줍고 있는 병사들은 자리를 비켜 줄 마음이 없었다.

“오지 마! 위에서 물러나지 말랬잖아!”

후방의 부대들은 전방의 동료들이 가디언들의 칼날을 받아주는 동안 한 개의 황금이라도 더 주우려는 마음에 도망쳐오는 전방 부대원들에게 칼까지 휘두르며 오지 말라고 악을 썼다. 물러나려는 병사들과, 자리를 버티려는 병사들이 뒤엉켜 거친 몸싸움과 욕설이 오가더니 급기야 방패를 붙이고 서로를 몰아붙이는 상황까지 되었다. 굳이 가디언들이 도살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비키라니까!”

정확히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절반 이성을 잃은 전방의 병사들이 후방의 병사들을 짓밟고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황금을 두고 회랑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던 병사들이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황금을 끌어안고 있던 병사의 위로 다른 병사가, 그 뒤로 또 다른 병사가 쌓이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갔다. 황금을 줍기 위해 한 곳에 몰린 병사들, 도망치다 넘어진 병사들이 3층, 4층으로 겹겹이 깔렸다.

“오지 마! 좀 비켜!!!”

깔린 병사들의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비명처럼 울려퍼졌다. 퇴각하던 전방의 병사들은 황금더미 위에 쌓인 동료의 등을 밟고 뛰어가고, 밑에 깔린 병사들은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퇴각하는 병사들이 도망친 후, 이번엔 가디언 군단의 무지막지한 발이 쓰러진 자들을 짓밟았다.

“멈추지 마라! 계속 몰아붙여!”

카렐이 철성 입구를 가리키며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가디언들은 이미 넘어진 자들을 죽이느라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대로 짓밟으며 순식간에 철성의 회랑을 수복해 나아갔다.

베흔의 가디언들이 휩쓸고 나간 그 자리에 카렐 황제가 지친 크바르나와 분견대 병사들을 이끌고 느릿느릿 나타났다. 몇 시간 동안 혈전을 치르며 석궁은 이미 볼트가 다 떨어졌고, 방패는 부서졌고, 칼날은 이가 빠져 쇠막대가 되어있었다. 대신 그들 손에는 다른 것들이 들려있었다.

“내 너희에게 동정 따위 없다고 했다.”

빨갛게 달은 총구를 내려놓은 카렐은 금덩이를 줍다가 압사당하거나 그 사이에 켜켜이 깔려 신음하고 있는 적병들을 보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금덩이를 쥔 놈들은 무조건 죽여라. 빈손인 놈들은 발목을 잘라 포로로 거둬라.”

카렐이 창과 도끼, 삽과 곡괭이를 든 분견대와 크바르나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회랑 바닥에 쓰러진 적병들에 달려들어 창으로 쑤시고 곡괭이와 삽을 내리찍었다. 한바탕 큰 전투가 휩쓴 철성 안은 살려달라는 애원과 비명이 끔찍하게 메아리치는 지옥으로 변했다. 철성의 넓고 거대한 회랑은 거의 1만 구에 가까운 시체와 부상 포로가 가득 찬 도살장이 되어갔다.

카렐은 마지막 실탄까지 다 써버린 기관총을 내려놓고 시체구덩이 사이를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 사이, 철성 출구까지 수복한 가디언 군단에서 와아 하는 우렁찬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3천이나 되는 가디언들이 도착했으니 이제 승기를 완전히 잡은 듯했다.

그때, 카렐은 낡은 할룩스가 다시 울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번엔 바로 할룩스를 꺼내보았다. 이번엔 목소리가 아니고 짧은 전문이 들어와 있었다.

- 아이를 부탁합니다. -

불길함을 느낀 카렐은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철성 앞에서는 베흔이 이끄는 3천의 가디언들이 아직 철성에 들지 않은 플라칼 가 보병들과 막 충돌한 듯 요란한 굉음과 비명,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카렐의 할룩스로 이번엔 베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할, 분지에서 놈들 수송선이 또 이륙하고 있답니다! 이판사판인가 봅니다!”

“또?”

다리가 휘청 할뻔한 카렐은 이를 악물며 철성 밖으로 향했다. 이디나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사진이 얼마 전 에스더의 뱃속에서 죽은 아들 메네스의 모습과 뒤엉켜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더는 안 돼.”

수술로, 몇 시간의 싸움으로 이미 기진맥진한 그의 다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카나르가 고원으로 떠난 후, 분지의 싸움을 사실상 지휘하고 있던 마누엘은 자신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버림받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갔다. 4만의 보병대를 이끌고 산 위로 올라간 카나르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후방에 있던 5만의 사역병들에게까지 모조리 무기를 들려 분지에서 가디언과 에키트 보병대를 상대하는 자살에 가까운 임무에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분지에 남은 20만이 넘는 보병대와 기병대에는 ‘죽을 때까지 버텨라’는 지시만 남겨두었다.

카나르는 여기서 주력군이 시간을 끄는 동안 산 위에서 카렐 황제를 죽여 결판을 짓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올라갔지만 그때부터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황제가 죽었다는 연락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쪽에서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아무 정보도 주지 않고 있었다.

“염병할, 이게 뭐야, 우린 다 죽으란 거야?”

카나르가 이번엔 기병과 포병대까지 모아들이고 있다는 말에 당황한 마누엘은 가문 근위병들을 데리고 사령선이 있던 자리로 허둥지둥 달려왔지만 35만의 연합군 사령부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쓰레기와 버려진 막사들만 가득했다. 카나르가 집결시킨 3만의 기병대와 포병대는 후방에서 플라칼 가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송선에 차례대로 올라타고 있는 중이었다.

카나르가 두 번에 걸쳐 온전한 수송선을 모두 걷어가면서, 이제 남은 수송선 중 다시 뜰 수 있는 건 자신의 델루지 가에서 직접 끌고 온 서너 척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상륙 첫날 크게 파손되어 아직 수리 중에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수송선에 아무리 꾸역꾸역 쑤셔 넣어도 지금 분지에 있는 보병대의 채 3분의 1도 태울 수가 없었다.

“마구스들과 모두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남아있던 근위병들을 붙들고 이것저것 추궁한 클리멘트가 걱정스런 얼굴로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구스들과 연락을 해 보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전장에서 죽은 바에자를 뺀 나머지 5명의 마구스 모두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신관과의 연락은 사령부 통신부대 쪽에서 교단과의 연락 자체를 보안을 빌미로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트위야 현신은 어제부터 계속 통신두절 상태이고요.”

“그렇다 해도 연합군 지휘관인 나머지 세 분은 연락이 되어야지?”

마누엘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는 단순하고 정치 계산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바보는 아니었다. 똘똘한 딸이 직접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어도, 그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기병대는 그럼 누가 지휘하는 중이고?”

“기병대는 네코 현신이 아니고 카나르의 둘째아들 바실리가 이끌고 있답니다. 네코 현신과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마누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씨발, 완전히 우릴 버렸어.”

마누엘이 주먹을 움켜쥐고 파르르 떨었다.

“여기 전투를 아예 포기하고 보병대가 전멸당하는 동안 제플린 산 위에 2전선을 구축하겠다는 속셈일 겁니다. 방공부대를 모조리 데려간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클리멘트가 기병대와 포병대를 싣고 이륙하는 마지막 수송선을 보며 이를 갈았다. 분지에 남은 보병대의 절반 이상은 어차피 신병들이고, 어차피 남부에는 돈만 있으면 언제든 보병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충분했다. 경험 짧은 보병 20만 정도를 버리는 건 존립을 위협할 만큼의 치명타도 아니었다.

“황제만 죽이면 어차피 황실군이나 동맹군 모두 분열할 테니 저 위에서 버티기를 하겠다는 심산이겠죠.”

“교단은?”

아버지의 물음에 클리멘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무래도……그쪽도 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테번 숙부가 그랬던 것처럼요.”

“코런덤들이 알면 어쩌라고?”

마누엘이 발을 동동 굴렀다.

가디언이 섞인 황실군을 상대로 분지의 칼데아군이 이만큼이나 버틸 수 있는 건 마약의 효과도 있지만 교단에서 보내 준 2천의 코런덤 기병들의 힘이 컸다. 그들은 자신의 원형과 만나는 일이 없도록 일부러 칼데아군의 할룩스를 지급했으니 자신들의 윗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마누엘로서는 그들에게 사실을 알려줄 수도,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 하고 있기도 꺼림칙한 난감한 처지였다. 카나르가 정말로 교단을 배신했다면 그들이 이탈하는 순간 분지의 칼데아군은 끝장이었다.

“카나르 그 새끼, 완전히 날 코 꿰어놓고 갔어. 대신관님하고 아트위야 현신님이 날 믿고 빌려준 건데.”

마누엘이 발을 동동 굴렀다. 교단에서 그에게 2천의 코런덤들을 빌려준 건 마누엘의 ‘사심이 약간은 섞인’ 아트위야에 대한 신뢰 덕분이었다. 마누엘은 딱히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배신을 밥 먹듯이 한 형 테번과는 달리 선한 의도로 일을 벌였건, 나쁜 의도로 일을 벌였건 최소한 같은 편을 배신한 일은 없는 남자였다.

“썩을 플라칼 가 놈들!”

마누엘이 울부짖었다. 카나르가 교단과 절친한 자신의 가문과 신참 보병들을 희생양으로 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달리 택할 길도 없었다.

그때, 사령선이 정박해 있던 자리에서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했다. ‘장군이 쓰러져 있다’라는 말을 들은 마누엘은 다짜고짜 그쪽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이냐!”

“상자들이 무너져 있길래 몇 개를 치워봤더니 사람 손이 나와서……. 함부로 옮기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의무병을 불렀습니다.”

근위병들은 수북한 나무상자 파편 밑에 절반 파묻혀 있는 무장을 가리켰다. 갑옷을 보아선 장군급이 틀림없지만 망토에 가문 문장이나 계급 표시도 없는데다가 헝클어진 긴 머리칼이 피투성이 얼굴을 온통 덮고 있어 언뜻 누군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 갑옷이 익숙한데?”

가까이 다가가 본 마누엘은 기겁을 하고 놀라 한 발 물러났다. 그는 근위병들에게 얼른 주변을 가리라고 눈짓하고는 딸과 함께 파편을 직접 치웠다.

“하페즈 현신님?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뜬 하페즈는 칼데아군의 갑옷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지만 마누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목을 얕게 베었고, 추락의 충격에 어깨와 다리가 부러지고 의식도 오락가락하는 듯 보였지만 아직 생명에 지장은 없어보였다.

마누엘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하페즈에게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물었다.

“어찌되신 겁니까? 가르시바 현신과 네코 현신과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카, 카나르 그놈이 미쳤어.”

하페즈가 고개를 저었다. 마누엘과 클리멘트는 지금껏 걱정하고 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직감했다. 하페즈가 이를 드러내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그놈도 오래 못 가. 가르시바의 마지막 저주를 받았어.”

마누엘은 ‘가르시바의 저주’가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가르시바가 카나르의 손에 죽었다는 것만은 대충 넘겨짚을 수 있었다.

“카나르 황제가 곧 죽을 거라고요?”

“죽음의 신이 그런 자를 편하게 품에 맞아주겠나?”

마누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비록 엉뚱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카나르가 정말로 죽을 게 확실하다면 대체 무얼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장군님! 장군님!”

마누엘은 스캐너를 든 부관이 사색이 다 되어 달려오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관은 그에게 외계에 있는 연락 셔틀이 보낸 전문을 내밀었다. 내용을 확인한 마누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체불명의 수송선이 5척이라고?”

분지의 전장을 정리하고 제플린 산 위에 보낼 3만의 기병대를 편성하는 일은 좌군에서 부장으로 임전했던 카나르의 둘째아들 바실리가 맡고 있었다. 아버지 카나르가 저격에 쓰러지고, 마구스 네코까지 얼굴에 볼트를 맞고 후송되면서 그는 혼자 제수 릴라크를 상대하느라 애를 먹고 있던 참이었다.

33년 전, 아버지가 가장 아꼈던 장녀 미노아가 죽었고, 이번 전쟁에서 헤즈와 본가에 있던 두 딸들까지 죽으면서 이제 카나르에게 남은 적생자는 둘째인 그와 막내 루시도프 둘뿐이었다. 동생 루시도프는 며느리 릴라크 때문에 말 그대로 내놓은 자식이 되어버렸으니 이제 장태자가 된 그가 사실상 외아들로 가문을 짊어져야 했다.

바실리는 잔혹함으로 가문을 휘어잡았던 형 헤즈보다는 외모도, 행동도 신사적인 남자이지만 형 헤즈와의 차별을 도모하기 위한 정치적인 치장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역시 언제든 가문을 이을 준비가 되어 있는 노련한 군인 정치가였다.

3제후 헬리노스 경과 함께 2천의 기병 선발대를 서둘러 분지로 올려 보낸 바실리는 아버지에게서 따로 지시를 받은 ‘다른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좌군 후방의 야전병원에 서둘러 달려와 있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이번 일은 꼭 그의 손으로 수행해야 했다.

“상황이 이런데 고작 얼굴이나 꿰매고 있다고?”

바실리는 병원용 가건물 주변을 둘러보며 낯을 찡그렸다. 병원 앞에는 배가 터져서, 몸이 뚫리고 팔다리가 잘려 당장 죽기 일보 직전의 부상병들 수백이 제발 살려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고작 뺨이 찢긴 네코의 상처는 원칙대로라면 수술 대기명단에도 못 들어갈 정도이고, 태어났을 때부터 군인으로 키워진 바실리가 보기엔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지금 수술 중입니다만…….”

바실리는 수술실 앞을 지키는 의무병을 거칠게 밀치고 안에 들어섰다.

“움?”

네코의 찢긴 뺨을 봉합하고 있던 군의관은 바실리의 갑작스런 등장에 얼른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술을 받고 있던 네코는 바실리의 손에 들린 칼에 놀라 반사적으로 옆에 놓인 칼을 집으려 했지만 수술대에 턱이 고정되어 있어 손이 닿지 않았다.

“이익!”

다급해진 네코는 바실리의 눈을 노려보려 했지만 이미 전장에서 그의 능력을 목격했던 바실리는 그가 채 능력을 발휘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수술대에 서슴없이 칼을 내리찍었다. 네코의 짧은 비명이 울렸다.

“으, 으…….”

얼굴에 환자의 피를 뒤집어쓴 외과의사가 파랗게 질려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바실리는 눈에 칼이 박혀 즉사한 네코 마구스의 손목에서 팔찌를 뜯어내 품에 챙겼다. 바에자, 가르시바에 이어 세 번째 마구스의 죽음이었다.

“당장 여기를 폐쇄해라. 여기 일을 발설하는 놈은 사지를 찢어 죽일 줄 알아라.”

또 다른 마구스 한 명을 끝장낸 바실리는 근위병들을 남겨둔 채 야전병원을 성큼성큼 나섰다. 멀리 제플린 산 위를 올려보니 선발대로 출발한 1천의 기병대가 탄 소형 수송선이 막 착륙하고 있었다. 그는 선발대를 이끄는 3제후 헬리노스 경을 할룩스로 불러냈다.

“그쪽 전황은 괜찮습니까? 적 방공망은 없고요?”

“친위군 방공망은 교단군이 고맙게도 박살내 줘서 괜찮아. 완전 무혈입성이야. 그보다는 공기가 희박한 게 더 문제지.”

“사람이나 말이나 여기서 지난 며칠 적응했으니 나아졌기를 바랄 수밖에요.”

“그나저나 날씨가 점점 이상해지는데?”

막 수송선에서 내려선 3제후 헬리노스 호지 경이 점점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터빈도 돌아가고 있고, 검은 재도 대충 가라앉아 이젠 하늘이 다시 검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침까지는 쨍쨍하더니 말입니다.”

바실리도 하늘을 올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쪽부터 점점 어두워지면서 아침의 좋았던 날씨는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하늘은 어느새 잔뜩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날씨에 신경을 쓰고 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나저나 철성 앞의 싸움은 거의 끝나가는 모양인데?”

고원에 도착해 해치에서 막 내려선 헬리노스의 앞에는 검은 철성 앞에서 불타고 있는 수십 문의 친위군 아나콘다와 이미 철성 문 안쪽까지 새카맣게 채우고 있는 가문 보병들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그가 확인한 철성 앞에서는 이미 승리의 함성이 솟구치고 있었다. 보병대는 이미 카렐 황제를 철성 안쪽으로 몰아넣고 끝장내는 것만 앞둔 듯했다.

“저쪽도 멀지 않은 것 같고?”

헬리노스 경이 이번엔 철성 반대편의 고원 남쪽 귀퉁이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세닉 가 보병 1만이 거의 부상병들밖에 보이지 않는 코런덤 헤네티들과 유리상자를 새카맣게 포위한 모양새가 머지않아 도살장의 풍경이 펼쳐질 듯했다.

“과정은 어땠는지 몰라도……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역시 관록은 못 속인다고 카나르 그 양반도 대단해.”

바실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지에서 바에자의 근위대가 전멸하며 그 역시 패한 게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교단과 황실 모두의 뒤통수를 친 카나르의 ‘결단’이 놀라운 결과를 빚은 듯했다.

“그럼 그쪽 전장을 부탁드립니다.”

바실리는 헬리노스와의 연락을 끊고 고원의 사령선에 있을 카나르와 통신을 연결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버지 카나르는 이미 몇 번째 그의 직접 연락을 거부하고 있었다. 조금 전 연결 때도 참모들은 ‘황상께서 상태가 안 좋으시다’며 그와 연결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역시나 한참동안 연결이 되지 않았다.

1, 2분의 기다림 후, 아버지 카나르의 비서관 하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냐? 아버지는 어디 계시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눈치를 살핀 비서관은 바실리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사령실 안쪽을 비춰주었다. 순간 바실리는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잠시 넋을 잃었던 그는 ‘아버지 맞으세요?’라는 말을 목구멍 뒤로 꿀꺽 삼켜버렸다.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어느 놈이냐!!! 누가 연결하랬어!!!”

바실리는 화면 속 아버지가 집어던진 철퇴에 지레 기겁을 하며 한 발 물러났다. 위협으로 던진 것도 아니고 정말로 할룩스에서 나타난 아들의 영상에 대고 것이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바실리의 머리가 박살이 났을 터였다.

“으으윽.”

카나르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휘소의 황제 의자 밑에는 그를 치료하려다가 머리를 맞아 죽은 군의관들의 시체 3구와 그의 발작을 말리려다가 마찬가지로 얼굴이 짓이겨져 죽은 참모의 시체 5구가 거둬지지도 않은 채 뒹굴고 있었다.

“저……바실리입니다.”

바실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웃통을 벗고 의자에 앉은 아버지 카나르는 잘생기고 강건했던 이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사람의 몰골도 아니었다. 팔다리는 온통 검게 변해 진물로 번들거렸고, 몸통과 얼굴에는 나무껍질 같은 단단한 각질과 혹이 가득 덮여 마치 탈피하다가 만 흉측한 벌레처럼 보였다. 각질 틈새로 난 갈색빛 눈동자는 빛을 잃어 혼탁했고, 아래쪽의 큰 구멍 사이로는 혀가 들락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어고 있었다. 열 손가락 중 절반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바실리는 지휘소의 참모들 표정부터 살폈다. 시체무더기 지휘소에서 파랗게 질린 참모들은 그저 자리에 인형처럼 서 있기만 할 뿐 아버지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마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그들은 괴물에게 잡아먹힐 때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카나르는 가려움을 견디지 못해 팔다리를 살점이 떨어져나갈 만큼 긁어댔고, 상처에서 검은 진물이 흘러나와 굳으며 단단한 각질이 되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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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죽은 익살꾼 가르시바야말로 '알고보면 제일 무서운(?)' 마구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고 가시면 슬퍼요~~~( ̄∇ ̄)ブ~~★

옆동네 예스24의 e연재에 올리고 있는 콜로니-사르코시스트도 오늘 27회 연재가 올랐습니다. (거기선 절세미녀 알마가 자꾸 자이납틱(?)해져가서 큰일입니다. ㅎㅎㅎ 알마의 후손(?)이 이 소리를 들으면 펄쩍 뛸지도 모르겠네요.....혈맥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앞으로 몇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http://estory.yes24.com/author/eserial?serialno=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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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프리미엄에도 출판본이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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