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31 회: 그간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신작 콜로니로 찾아뵙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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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를 악물고 있던 카렐이 갑자기 옆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렐! 어디 있어! 대답 좀 해!”
카렐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곳에 제일 먼저 도착한 건 예민한 X 가디언들도,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R도 아니었다. 카렐은 등과 어깨의 고통을 기를 쓰고 견디며 최대한 큰 소리로 외쳤다.
“페로! 페로!”
카렐의 대답이 뒤집어진 트라이크 밑 좁은 틈으로 새어나갔다.
카렐의 대답은 거의 쥐어짜는 신음에 가까웠다. 사방에서 파편이 불타고 있는 와중에 페로에게까지 들릴지 확신이 없었다. 숨이 막혀 괴로워하는 이디나도, 무게를 받치는 데 온 힘이 쏠린 카렐도 제대로 큰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페로, 여기라고…….”
카렐의 목소리는 기운이 빠지며 그나마 점점 더 가늘어졌다. 마지막으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던 카렐은 그의 걸음소리가 가까워지자 입술을 멈추었다. 그의 작은 목소리가 페로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했다.
“카렐? 여기 있어? 여기 있는 거야?”
카렐이 마지막으로 팔에 힘을 꽉 주며 옆을 돌아보았다. 머리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남자의 얼굴이 뒤집어진 트라이크 밑에서 불쑥 나타났다.
“떨어져 있어. 페로, 위험해.”
입으로는 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페로의 놀란 얼굴이 가슴 저리도록 반가웠다. 바닥에 엎드린 페로가 경악을 하며 주변에 큰 소리로 외쳤다.
“황상께서 여기 계시다! 북서쪽 포탄구멍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카렐의 모습에 놀란 페로가 다짜고짜 트라이크를 들어보려 했지만 그의 힘으로 들릴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힘이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어주어서인지, 아니면 그가 와 주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인지 카렐의 팔에 가해지던 끔찍한 무게가 조금은 덜어진 느낌이었다. 사령선 동체 파편에 깔린 트라이크의 차축이 끼익 하고 다시 죽는 소리를 냈다.
“페로, 제발 떨어져. 위험해.”
카렐이 쥐어짜듯 말했지만 페로는 트라이크를 받치는 허리에 더 힘을 주며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렇게 느려! 이 굼벵이들아! 당장 오지 못해!”
“어, 여기에요?”
두 번째로 들려온 건 자이납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네피와 다룬의 굵고 거친 목소리가, 심지어 사카와 쿠마르가 이디나를 찾는 목소리까지 뒤이어 들려왔다. 그리고 이렌느의 창에 가슴과 목을 크게 다친 코리온이 말을 타고 마지막에 힘겹게 모습을 나타냈다. 어찌할지 모른 채 주변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가디언들을 본 코리온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가디언들이 둘러서서 트라이크를 받치고 자이납 네가 트라이크로 파편을 당겨서 끌어내!”
코리온의 일사불란한 지시에 친위군 가디언과 코런덤 헤네티들 수십이 트라이크에 우르르 달려들어 일단 최대한 위로 받쳐 올렸다. 그 사이 자이납이 이제 딱 한 대 남은 온전한 트라이크에 황제를 짓누르고 있는 동체 파편을 연결해 당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편이 워낙 크고 무거워 육중한 트라이크로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지 말고 너희도 함께 당겨!”
사카의 외침에 주변에서 지켜보던 나머지 가디언과 코런덤들까지 달려들어 함께 줄을 당겼다. 이 X들과 잠시 힘 싸움을 벌이던 육중한 파편은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귀를 찢는 소리를 내며 트라이크의 위에서 밀려나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굴렀다.
“트라이크를 들어!”
페로의 구령에 가디언과 헤네티들은 짓눌려 고철이 되어버린 카렐의 트라이크를 온 힘을 다해 들어올렸다. 뒤집어진 차체가 떨어진 곳이 무른 모래땅이라 바닥을 제대로 디디기도 쉽지 않았지만 X의 피를 받은 거한들 수십의 힘에 결국 이디나가 있던 쪽이 먼저 천천히 위로 끌려 올라왔다.
차체가 들린 순간, 긴장이 풀린 카렐은 그대로 모래바닥에 이마를 대며 털썩 무너지고 말았다. 트라이크에 짓눌린 그의 등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괜찮으십니까?”
조그만 소년 체구의 쿠마르가 목숨을 걸고 좁은 틈새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바깥쪽에 있던 이디나부터 조심조심 밖으로 끌어냈다.
“카렐! 카렐! 괜찮아? 말 좀 해!”
이디나가 나오면서 더 안쪽의 카렐이 드러나자 이번엔 페로가 안으로 직접 기어들어갔다. 그는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탈진해 쓰러진 카렐의 양 어깨를 덥석 잡았다.
페로의 손이 닿은 순간, 카렐이 눈동자를 움직여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R도 아니면서 날 어떻게 찾았어?”
“그런 거 없어도 전부터 다 알았어.”
페로가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카렐을 힘껏 밖으로 끌어냈다. 그의 머리가, 어깨가, 마지막으로 두 발이 뒤집어진 트라이크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던 코리온이 자신의 붕대를 허겁지겁 풀어 그의 어깨에 난 깊은 상처에 서둘러 감아주었다.
“이겼다!!!”
상태야 어떻건, 일단 무사히 빠져나온 황제의 모습을 본 가디언들이 얼싸안고 환호성을 올렸고, 산토스는 양쪽 어깨에 분견대와 코런덤의 군기를 나란히 메고 코런덤 사관의 어깨 위에서 혼자 어깨춤을 추었다.
“이게 빠지면 섭하지!”
네피의 등에 목마를 타고 오른 자이납은 언제 준비했는지 폭죽을 마구 공중에 쏘아 올렸다. 산 아래 분지에서 쏘아올리고 있는 폭죽과 함께 이번엔 산에서 쏜 폭죽이 함께 어우러져 잿빛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빛을 그렸다. 카렐은 망가진 어깨에 붕대를 감으며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승전 소식이 실시간으로 제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그의 할룩스도 황제를 찾는 수많은 목소리를 싣고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눈에 확 띄는 이름 둘을 본 카렐이 웃으며 할룩스를 켰다.
“거기도 이렇겠지요? 그런데 여긴 낮이네요.”
아메스, 솔과 함께 선 카이가 화창한 아케메니아와 하늘 밑, 황궁의 옥상에 서서 직접 수십 개의 폭죽에 불을 붙였다. 형형색색의 수많은 폭죽이 아들의 웃음 띤 얼굴 위에 환한 빛을 더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카렐의 표정에도 덩달아 웃음이 번졌다.
“어, 여기 비엔은 저녁이라 아주 때깔 제대로 나는데.”
옆에 함께 연결된 비엔의 엘룬이 활짝 벌린 두 팔에 폭죽을 들고 어둠이 드리운 플라칼 종가 옥상을 망아지처럼 깔깔대며 뛰어다녔다. 자리에 함께 있던 제네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수십 개의 폭죽에 동시에 불을 붙여 하늘로 날려 그 주변의 남부인들에게 황실의 승리를 알렸다.
“잠깐.”
카렐이 갑자기 칼을 덥석 잡았다. 그의 어깨에 매듭을 매어주던 코리온이 움찔 놀라며 손을 떼었다.
“왜 그러십니까?”
카렐은 코리온과 페로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칼을 쥐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리고는 축제 분위기에 환호성과 기쁨의 도가니에 사로잡힌 부하들을 뒤로 하고 포탄구멍을 혼자서 느릿느릿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야푸르의 검을 지팡이삼아 사령선의 큰 파편 실루엣을 향해 비틀비틀 나아갔다.
함선에 탔던 사람이 없다보니 지상에서 운 없이 날벼락을 맞은 세닉 가의 장병들을 빼면 심하게 타거나 훼손된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왔다.
카렐이 다가간 곳에는 천장이 완전히 날아간 함교의 거대한 세그먼트가 통째로 떨어져 나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불탄 계기판과 조종간, 부서진 좌석들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뒹굴고 있었다.
그 중 유독 큰 좌석 하나가 빔에 짓눌려 우그러져 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체불명의 덩어리 하나가 보였다. 카렐은 그 ‘덩어리’ 앞에 우뚝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생각 없이 지나갔다면 죽은 나무둥치 정도로 알았을 모양새였다.
“제발.”
형체는 알아볼 수 없이 변해버렸지만 목소리는 이전 그대로였다. 팔 하나만 남은 카나르는 온통 각질과 혹으로 둘러싸인 몸을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절 죽음의 신께 보내주십시오.”
추락할 때의 화재로 시커멓게 그슬리고 수많은 파편에 긁힌 각질 속에서 그의 흐려진 눈과 우그러진 입이 어렵사리 분간이 되었다. 머리와 몸통, 팔만 구분이 될 뿐 이전에 사람이었다는 것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괴물의 형상이었다.
“그분께 절 받아달라고 해 주십시오, 제발.”
죽음의 문에서조차 거부당한 카나르의 울음이 처량하게 파편들 사이를 맴돌았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렐은 야푸르의 검을 죽 빼들었다. 다하카르 가문의 큰 풍파를 예언했던 그 피의 칼은 원래의 붉은 색은 사라지고 이제 새파란 사파이어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위대한 현신께서 보내셨다고 전해라.”
왼손의 붕대를 풀어낸 카렐은 야푸르의 검을 양손으로 쥐고는 카나르의 가슴을 힘껏 내리찍었다. 쩍 소리를 내며 카나르의 몸을 강철처럼 감싸고 있던 각질이 쪼개어지고 청색 칼날이 심장을 찢었다.
“으읍!”
카렐을 올려보며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카나르는 엷은 웃음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코를 찌르던 악취도 그의 죽음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졌다.
카나르의 가슴에 꽂힌 새파란 칼은 끝부분부터 조금씩 색이 엷어지더니 다이아몬드 같은 맑고 투명한 광택으로 바뀌어갔다.
“후우.”
완전히 탈진한 카렐은 카나르의 가슴에 칼을 꽂아둔 채 주춤주춤 몇 발짝을 물러나 칼데아 제국의 부서진 옥좌 파편에 털썩 기대어 앉았다. 피를 많이 흘린 그의 몸에서 조금씩 기운이 빠져갔다. 하늘에서 또다시 번쩍 하며 번개가 치더니 우르르 하는 천둥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검은 철성 안쪽, 황금탑의 문이 안에서 스르르 열리더니 주페가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철성의 회랑을 따라 수북이 쌓인 칼데아군의 어마어마한 시체 무더기를 본 주페는 카렐의 가방을 메고 엉금엉금 뒤따라 나오는 동생 마리안을 얼른 품에 안고 주변을 못 보게 했다.
“여기 무서운 거 있어. 오빠가 업어줄게.”
“오빠, 무서운 냄새 나.”
바깥의 소름끼치는 피비린내에 마리안이 몸서리를 치며 오빠의 등을 꼭 안았다. 뒤이어 마하가 창백해진 얼굴로 회랑의 끔찍한 전장을 둘러보며 구멍에서 기어 나왔다. 철성 밖의 전장에서 아군 전사들이 외치는 승리의 함성과, 분지에서 올라온 아군 수송선과 셔틀들이 철성 앞에 착륙하는 육중한 엔진음이 이 깊숙한 안쪽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황금탑 앞의 회랑은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크바르나, 분견대 장병 수백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여 응급처치를 받는 중이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배가 찢긴 그들도 밖에서 들려온 동료들의 승리의 함성에 손뼉을 치고 휘파람을 불며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다.
두 팔 걷어붙이고 그들의 간호를 돕고 있던 에스더는 주페와 마하를 한 번씩 품에 꼭 안아주었다.
“황태후 폐하?”
주페는 세네피스가 누워있던 병실을 제일 먼저 돌아보았다. 유독 시체가 많이 쌓인 병실 입구 안쪽에서는 니사가 호흡장치를 낀 세네피스의 귀에 무어라 속삭여주고 있는 중이었다. 전투 결과를 전해 듣고 있는지, 세네피스는 입과 코에 파이프를 낀 와중에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혼자 웃고 있었다. 그는 황궁의 편안한 처소에 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 몇 배는 더 행복해 보였다. 물론 황제가 돌아와 안아준다면 그 몇 배는 더 행복해하겠지만.
“저어……친위군 의무요원들도 곧 온다고 하니 전 제 주인께…….”
한 팔이 부러진 채 부상병들 사이를 오가며 응급처치를 조언하고 있던 야투 박사가 눈치를 몇 번이나 보며 에스더에게 더듬더듬 물었다.
“그분께서 허락하신다면.”
에스더가 부상병들의 피와 체액으로 더러워진 앞치마를 벗고는 황자들을 데리고 철성 밖으로 향했다. 그도 차마 표현은 못했지만 빨리 카렐을 만나보고 싶어 몸이 달아있던 참이었다.
야투 박사도 그들 뒤를 허겁지겁 따라나섰다.
1만 명 가까운 칼데아군들이 죽거나 사로잡힌 철성의 회랑은 마치 거대한 도살장을 연상케 했다. 바닥엔 가디언들이 반격을 하며 사살한 무수한 시체들이 한 겹, 두 겹, 때로는 그 이상 쌓여 누군가 성의 없이 던져놓은 고깃덩이처럼 산을 이루고 있었다.
운 좋게 포로로 잡혀 다리에 철사를 엮은 칼데아군 병사들은 분견대 병사들과 크바르나의 감시를 받으며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소속 제대별로 한 곳에 산처럼 쌓아놓는 중이었다.
에스더와 황자들은 기쁨에 넘친 분견대원과 크바르나들의 인사와 경례를 받으며 회랑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 중간을 지나는 마리안이 회랑을 꽉 채운 지독한 피와 시체냄새에 벌벌 떨며 울기 시작했다.
“오빠, 여기 냄새 너무 싫어, 빨리 나가자.”
“괜찮아, 오빠 있잖아.”
“나 황상께 갈래, 그분 보고 싶어. 나 정말로 무서워.”
주페는 겁에 질려 엉엉 우는 어린 동생을 달래며 시체들 사이를 서둘러 걸었다. 시체로 가득한 회랑은 끔찍하리만큼 길었고, 겁먹은 마리안의 울음도 커졌다. 회랑이 끝나고, 한쪽이 부서져 기우뚱하게 걸린 철성의 대문 너머로 잔뜩 찌푸린 하늘이 보였다.
“세상에.”
전투 이후 처음 철성을 나선 에스더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철성 앞 풍경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포격 자국으로 온통 곰보가 진 황량한 고원 일대엔 수천 구가 넘는 시체와 부상병들이 널려 있고, 부서진 전차와 백여 문의 야포들이 사방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거무죽죽한 하늘은 음산한 분위기를 더 차갑게 만들었다.
“저기 보세요.”
주페가 손으로 가리킨 고원 서쪽의 상황은 더했다. 그곳엔 사령선이 추락하며 생긴 긴 구덩이가 고원의 동서를 가로질러 마치 긴 운하처럼 움푹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고, 그 끝에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나버린 함선의 조각조각이 일대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때마침 철성 앞에 막 착륙한 수송셔틀에서는 초조한 표정의 네페티와 베아트릭스가 말을 타고 서둘러 내려서는 중이었다.
“마하! 마하!”
딸의 무사한 모습을 본 네페티가 급히 말을 몰아 계단 밑으로 달려왔다. 마하가 일행과 함께 계단 밑으로 뛰어 내려가 얼른 엄마의 품에 와락 안겼다.
네페티가 딸의 더러워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황상께선?”
그때, 고원에 웬 낮은 음조가 흐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소리에 고원의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는 목관악기를 울리는 것 같은 차갑고 섬세한 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고원 전체를 덮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비빈들도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 기이한 소리는 사람들의 공포와 흥분을 지워버리고 머릿속을 순식간에 비게 만들었다. 갈 곳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던 패잔병들이 두려움을 잊고 자리에 멈춰 섰고, 포로를 잡으러 뛰어다니던 가디언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위를 올려보았다. 심지어 쓰러져 죽음만을 기다리던 중상자들까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가누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흐린 하늘과 땅 대체 어디에서 이 소리가 나는 것인지 아무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마리안도 울음을 뚝 멈추었다.
“저쪽에 계세요.”
마하가 돌연 앞장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비빈들도 산소가 희박해 숨이 차는 것도 아랑곳없이 고원 서쪽으로 황급히 말을 달렸다. 이 순간은 주변을 뒤덮은 지독한 연기도, 끔찍한 전장의 풍경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힘든 것도 모른 채 앞장서는 마하와 사령선 파편의 흔적을 따라 고원을 가로질러 서쪽 끝까지 뛰어갔다.
“폐하?”
비빈과 황자들이 도착한 곳에서는 카렐이 함선 파편에 홀로 기대앉아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이 기이한 소리는 다름 아닌 황제의 가슴과 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희 왔…….”
황제에게 먼저 다가가려는 마하를 주페가 얼른 붙들었다. 비빈들이 기운을 잃은 황제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흙먼지와 검댕. 피로 더러워진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카렐이 그제야 노래를 멈추고 그들에게 수술이 끝난 왼쪽 손목을 보여주었다.
“33년이나 기다려 줘서 고맙소.”
카렐은 품에 기대어오는 네페티와 베아트릭스, 에스더를 한 번씩 꼭 안고 입을 맞춰주었다. 종전 후, 첫 입맞춤을 받은 그들의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이젠 황제가 언제 발작을 할지 걱정할 일도, 그의 장례에 서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도 더 이상 없었다.
카렐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오빠의 등에서 후다닥 뛰어내린 마리안이 울먹이며 제일 먼저 달려와 황제의 팔을 와락 껴안고 얼굴을 부볐다.
“왜 이런 데 있어요? 이젠 어디 가지 마요. 저 무서웠어요.”
전장의 끔찍한 피냄새에 몸서리를 치던 마리안은 카렐의 옷깃에 얼굴을 묻으며 비로소 울음을 멈추었다. 숨이 넘어갈 듯 빠르게 뛰던 아이의 심장박동이 카렐의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 여기 피나요. 호오~”
아이는 카렐의 다친 팔을 보고는 대뜸 껴안고 입김을 불었다. 아이의 숨결에 그의 아픔도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무거운 건 왜 들고 다니니.”
카렐은 마리안이 이 와중에도 보물처럼 메고 있던 [투아렉 상사] 가방을 벗겨 옆에 내려놓았다.
“내가 계속 안 갖고 있으면 마하 언니가 자꾸 가져가려고 해요.”
아이가 퉁퉁 부은 눈에 그제야 웃음을 짓고는 당당하게 가방을 열어보였다.
“여기서 저랑 꽃이랑 나무 심기로 했잖아요.”
카렐이 모종 도매상 행세를 했을 때 썼던 가방 안에는 갖은 꽃씨며 모종이 작은 주머니들에 가득 들어있었다. 그 한쪽엔 언젠가 그가 교단의 광산에 들어갔을 때 훔쳐내 왔던 조그만 기침약 병도 함께 들어있었다.
“이것도 멀고 먼 길을 돌아왔구나.”
카렐은 수백 년 된 기침약병 안에 가득 든 새파란 빛의 흙을 손바닥에 부어보았다. 타리프 신관이 오래 전 바로 이곳에서 가져왔던 흙은 남쪽에서 휙 몰아쳐 온 거센 바람에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그때, 바람과 함께 카렐의 코끝에 무언가 차가운 느낌이 전해졌다.
“움?”
문득 하늘을 올려본 카렐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의 코끝을 적신 차가운 느낌은 뺨으로, 이마로, 점점 넓고 강해지며 그의 얼굴을 차례대로 때렸다. 잿빛 구름 사이에서 번쩍 하는 빛이 스치고 주변이 눈부시게 밝아지더니 바닥이 흔들릴 만큼 우렁찬 번개와 천둥이 제플린 산과 분지를 흔들었다. 마하가 얼른 카렐의 망토 안으로 파고들었고, 깜짝 놀란 마리안도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
“무서워하지 마라. 우리의 수호신이란다.”
카렐은 겁에 질린 딸들을 망토로 감싸고 꼭 안아주었다. 강한 바람을 타고 점점 굵어진 빗방울이 어느새 얼굴이 따가울 만큼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백 년만의 폭우는 고원을 흠뻑 적신 핏자국을 씻어내며 산 아래로 흘러내렸다.
“비다! 큰 비가 온다!”
산토스의 환호성과 아프라스 야투 박사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카렐은 맹렬한 빗줄기를 얼굴 가득 느끼며 고개를 천천히 뒤로 젖히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비를 잔뜩 머금은 두꺼운 구름은 하늘 끝부터 반대편 끝까지를 모두 덮고 말라붙은 땅에 축복을 내려주고 있었다.
“뇌우의 신 다하카르께서 강림하셨도다!”
“카렐 카파키 리쿠 대제의 은총이다!”
황실 장병들은 비가 오건 천둥이 치건, 계속 폭죽을 쏘아 올리며 고원을 뛰어다녔다. 코런덤들은 천둥이 내려치는 사나운 하늘을 경외에 찬 눈길로 올려보았고, 아프라스 야투 박사와 산토스는 비바람 속에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카렐은 얼굴 가득 비를 그대로 맞으며 일생에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같이 꽃씨 심으러 가자꾸나.”
몰아치는 거친 바람에 마리안의 가방에 들어있던 꽃씨와 모종들이 우르르 쓸려 날아가 승전의 폭죽과 환호성으로 가득한 고원 곳곳으로 흩어졌다. 카렐은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두 딸들을 양팔에 꼭 안고 보듬어주었다. 제국 황제로서, 천여 년 만의 통일 대신관으로서, 제국과 새 생명이 막 움트는 이 새로운 행성에 그러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