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9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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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찾아도 안보입니다."
스캐너를 들고 호수변을 뒤져 내려가는 베아트릭스의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들어가고 있었다. 남쪽 호수변을 따라 꽤 많이 내려왔지만 카렐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코리온 걱정에 내내 안절부절하는 하심을 계속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제네르가 곱지 않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놈의 충성 하나는 대단하시군."
제네르의 핀잔에 하심 역시 질세라 언성을 높였다.
"훗, 기껏 키워준 학장님을 먼저 등진 게 누군데 큰소리군요. 하크로딘 교수님."
"영 거북살스럽군, 공석도 아닌데 그냥 전같이 부르지 그래? 하심."
제네르를 가볍게 째려본 하심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그래,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천하의 거렁뱅이를 장학생으로 받아주고 돌보아준 게 누구였지? 제네르? 인정할 건 인정하라구."
생각지도 못한 둘의 말싸움에 자이납과 시로가 중간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제네르가 즉시 대꾸했다.
"2년 반이나 날 프락치로 이용해먹은 사람한테 내가 뭘 고마워해야 되는데? 그리고, 말은 바로 하라고. 난 장태자전하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내 뜻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어. 자기를 철석같이 믿던 주페 태자를 먼저 배신한 건 그 잘난 학장이야. 알았어?"
"오호, 그러셔? 똥오줌 못 가리는 천하의 바람둥이에 비열하기까지 한 그 인간이 황제가 되어야 했다고? 알아? 세나우스 2세 폐하가 진짜 원하셨던 후계자는 주페 태자저하셨어. 학장님 선택은 옳았어. 누가 뭐래도 그분이 황제가 되셨어야 돼."
하심의 대꾸에 발끈 한 제네르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래, 나도 주페 태자저하가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지 잘 알아. 너희만 가만히 있었다면 주페 태자저하가 새 황제를 보필해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너희가 설쳐댄 결과가 뭐냐고! 다 죽어버리고 누가 황제가 됐지?"
"너희 동부 놈들이 설치지만 않았으면 주페 태자저하가 황제가 되셔서 제국을 태평성대로 만들었겠지! 그런데, 로노 장태자가 황제가 되었어야 한다는 녀석이 이제 와서 오넬론 태자 딸을 황제로 미는 심보는 또 뭐냐!"
흥분한 하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네르가 질세라 맞받아 언성을 높였다.
"그럼, 이제와서 뭘 어쩌자고? 장태자 전하건 주페 저하건 후손은 한 명도 남기지 못하셨는데! 그래서, 너흰 리쿠 학장을 새 황제로 밀자는 거냐? 장태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살아남은 S-7세대 중에 순위가 제일 높은 학장님이 제위에 오르시는 게 당연한 것 아냐?"
"카렐 전하는 왜 니 맘대로 빼놓냐! 그분 순위가 더 위라구!"
"가디언이 황제는 무슨 얼어죽을 황제야!"
흥분한 두 사람의 언성이 계속 높아지자 스캐너만을 살피던 베아트릭스가 얼굴을 조금 찡그리며 쏘아붙였다.
"이제 그만들 하시죠. 어차피 이 자리에서 결론이 날 싸움도 아닌데 애들처럼 무슨 말싸움이십니까.."
그제서야 민망한 듯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하심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 사람......형편없는 인물은 아니더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하심의 눈시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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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묶이고 두 눈이 가려진 채 어딘가에 실려가던 제네르는 잔뜩 공포에 질려있었다. 평소처럼 수업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제네르는 옆에 세워져있던 차에서 몰려나온 낯선 괴한 세 명에게 납치되어 어디론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제네르는 자신을 끌고 가는 괴한들에게 몇 번이나 정체와 행선지를 물었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북부 첩자들에게 납치당했다 단정지어버린 제네르는 결국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체념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내리시오."
셔틀이 착륙하는 진동과 함께 누군가 제네르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두 팔을 붙들린 채 끌려나오던 제네르는 발에 무언가가 걸리면서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하고 말았다. 그 묘한 느낌에서 시체임을 직감한 제네르는 두 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날 죽일 거요?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계단에서 또 한번 넘어질 뻔했던 제네르는 자신이 '실내'로 들어섰음을 느꼈다. 죽음의 공포로 부들부들 떨던 제네르의 귓가에 뜻밖에 따뜻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언제 묶어서 데려오랬나?"
"한때 군인이었던 자입니다. 만일을 대비해서......"
제네르를 끌고 온 괴한의 목소리였다. 적의 '수괴'를 만났다고 생각한 제네르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당신! 누구야! 죽일 테면 죽여라! 내가 너희 반역도당에게 굴복할 것 같나!"
"이 무엄한 놈!"
무언가에 등을 얻어맞은 제네르가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방금 전 여자의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멋대로 폭력을 가하라고 그랬나! 당장 눈과 손을 풀어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안대가 벗겨진 제네르의 눈앞에는 밝은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선명한 이목구비의 전형적인 서부 여인이 상석에 앉아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대단한 미모를 띤 그 자그만 체구의 여인은 뜻밖에도 뺨과 턱에 칼에 베인 흔적이 선명했고, 입고있는 드레스와 비단포 역시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 제네르는 자신이 와 있는 조그만 홀의 대리석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피를 발견하고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자네가 파예드 아카데미의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생도인가?"
그 여인이 약간의 미소를 띤 채 질문을 던졌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네르는 급히 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그, 그러하옵니다, 최고제후님. 제 무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눈앞의 사람이 북부패거리가 아닌, 주페 태자의 동지인 네페티 부인이라는 사실에 그제서야 조금 안도한 제네르가 얼른 자리에 꿇어앉았다.
네페티 부인이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내 듣기로 자네가 코리온 리쿠 대군의 가장 신임하는 수족이라던데, 사실인가?"
"소인은 로노 장태자전하를 위해 그분을 돕고있을 따름입니다."
"뭐라고?"
네페티 부인이 제네르의 황당한 대답에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제네르의 짧은 설명을 들은 네페티 부인은 그만 허탈함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코리온 리쿠 그자가 그리 말하던가?"
"예?......물론......입니다......전 그래서 지금까지 그분을 위해 태자저하를 거역하려는 세력들의 정보나......동부 쪽에서 넘어오는 정보들을 그분께......정말입니다. 전 제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군가와 내통한 일도 없고......전 아무 죄가 없습니다."
"내 사촌동생인 샤드니 누라프 플레렌이란 녀석을 아는가?"
"대군마마와 함께 계신 것을 몇 번 본 일 있습니다."
"지금 이곳의 몰골이 그 천하의 몹쓸 녀석의 짓이라네."
네페티 부인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피범벅이 된 영빈관의 대리석 바닥과 아직까지 시체가 즐비한 바로 앞의 마당을 돌아보며 제네르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무언가를 떠올린 제네르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움직이며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서, 설마......그럼......"
"내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샤드니가 이곳에서 혼자 도망쳤으니 반드시 코리온 대군을 찾아갈 게야. 녀석을 반드시 찾아 내게 연락해주게. 은혜도 모르는 그 개망나니 녀석을 물고를 내 버릴 테니......"
이를 악문 네페티 부인의 눈가에 그답지 않은 매서운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야음을 틈타 파예드 아카데미에 찾아온 샤드니는 언제나처럼 코리온의 숙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그의 온몸은 자잘한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고통 역시 코리온을 만나고싶은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하고 있었다. 샤드니가 그의 방 문을 두들기며 쥐어짜듯 말했다.
"저, 접니다, 샤드니입니다."
"들어오게."
코리온의 조금은 냉랭한 말투에서 덜컥 불안감을 느낀 샤드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항상 단정한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던 코리온이 무슨 일인지 교수복도 벗어놓은 채 가벼운 속옷에 반바지 차림의, 그답지 않은 흐뜨러진 모습으로 구석의 침대에 말없이 누워있었다.
핏기가 사라진 코리온의 얼굴에서는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떠돌고 있었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코리온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샤드니를 힐끗 바라보았다.
"죄......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알아."
코리온이 힘없이 대답했다.
"태자저하께서 우리 계획을 이미 다 알고 계시네."
"아마도 오르마즈 그자가......"
샤드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코리온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일단 돌아가게."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머지 제후군들만 다 동원해도......"
"태자저하는 장태자와 손잡고 계획대로 황궁을 기습공격하실 걸세, 나로서도 이젠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다른 모든 걸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태자저하를 잃을 수는 없어......"
침통하게 고개를 숙인 코리온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내 그분의 뒤를 따를 것이니......나와 함께 있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나. 플레렌 가에서 자넬 쫓고있을 게야."
"안됩니다!"
샤드니의 큰 고함소리에 코리온이 그를 휙 돌아보았다. 샤드니가 코리온의 앞에 무릎꿇고 앉으며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만약 공격에 실패하신다면......선봉장인 주페 태자저하는 물론이고 대군마마까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분께서도 목숨을 내놓기를 자처하셨는데 내 어찌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낮은 한숨을 내쉰 코리온이 어두컴컴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간 샤드니가 코리온의 발목을 붙들며 처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가문 내에 저를 지지하는 원로세력이 아직 남아있으니 제가 다시 시도하겠습니다! 태자저하께서 반대하신다면 그분을 억류하고라도 반드시 일을 추진시켜야 합니다!"
"자네 지금 뭐라 했나?"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 코리온이 샤드니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순간 실언을 깨달은 샤드니가 벌벌 떨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네놈이 감히 누굴 억류해?"
"저......저는......"
"이 발칙한 놈 같으니!"
발끈 한 코리온이 샤드니를 힘껏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흥분한 그의 이마에 어느새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샤드니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처지를 원망하여 솟구치는 울분과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지금껏 날 위해 애써준 공로를 생각해서......이번 한번만 용서할 테니.....당장 나가라. 당장!"
코리온의 단호한 말에 결국 고개를 떨군 샤드니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가문에게서 버림받은 그는 결국 코리온에게서도 버림받은 비참한 자신의 운명을 처절하리만큼 저주할 뿐이었다. 그리고 코리온의 이번 '배신' 조차도 그와 주페의 그 견고한 믿음을 깰 수 없었다는 사실에 절망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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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분간 남쪽을 향해 헤엄쳐간 카렐은 호수를 맞대고 있는 절벽과, 그 옆의 조그만 숲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갔다. 절벽 너머로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기왕 물에 뛰어든 김에 쿠엘스크 시에서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카렐은 무슨 이유엔지 꽤 서둘러 물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헉, 헉,"
비틀거리며 물 밖으로 기어나온 카렐은 손발이 휘청거리면서 자리에 뻗어버리고 말았다. 엎드려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몸에서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자이납은 상황대처가 빠른 녀석이니......쉽게 잡히지는 않을 겁니다."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카렐이 코리온의 몸에서 필름을 벗겨내고는 가슴속에 손을 넣어 아직 따뜻한 체온을 확인했다. 망토를 두 겹이나 입고, 물과 닿지도 않은 코리온의 몸은 아직은 꽤 따뜻했다. 코리온은 그제서야 카렐의 왼쪽 날갯죽지 부근이 피로 젖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코리온에게 큰 문제가 없자 그나마 안도한 카렐이 큰 바위에 기대앉아 잠시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수색정 지나갈 때 그 밑에서 피하다가 추진장치에 찢긴 것 같습니다. 별수 없었죠. 물 밖으로 피했다가는 들켰을 테니. 크지 않으니 움직이는데는 별 지장 없습니다."
씁쓸하게 웃음지은 카렐은 코리온의 얼굴과 머리에서 물기를 대강 닦아주고는 자기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는 쓰고 난 무명수건으로 피가 흐르는 날갯죽지를 단단하게 동여매고는 튜닉과 망토를 챙겨 입으며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적당한 차를 훔쳐올 테니."
마을로 사라지는 카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코리온이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 제대로 거동조차 못하는 자신을 돌보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기가 막히게도 저 철천지원수 한 놈뿐이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 그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샤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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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을 기습점거하자는 주페의 제안을 놓고 고민에 빠져있던 로노 장태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베흔은 참으로 뜻밖의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저 꼴보기 싫은 근위대장이 그에게는 갈갈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존재임에 틀림없었지만 로노도 베흔의 비위를 거슬러 당장은 좋을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베흔은 한때 자신이 배신했던 장태자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장태자전하."
"허, 장태자라고 했나? 지금 나한테?"
로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베흔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생각 깊으신 장태자전하께서 이런 일로 흥분하시면 쓰겠습니까. 소인 덕택에 장태자전하께서도 '강력한 황제'가 되실 좋은 기회를 얻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쓸데없는 궤변으로 날 농락할 생각이면 당장 집어치도록 해."
로노가 무성의하게 대꾸하며 들고있던 술잔을 기울였다.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셔야 한다는 제 생각엔 여전히 변함이 없사옵니다."
"그러신가? 그럼 2년 반 전에 내 뒤통수를 친 건 유령이라도 와서 해놓은 짓인가?"
"그 모두가 장기적으로 보면 전하에 대한 충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갈수록 태산이군! 내게 충성을 해서 날 황궁에서 몰아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전하의 등극 이후에 황권을 위협할 나머지 태자들을 어떻게 제거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거'라는 말에 깜짝 놀란 로노가 베흔을 휙 돌아보았다.
"뭐라고? 동생들을 제거한다고? 내가?"
"그럼 그들을 살려두실 생각이셨습니까?"
베흔이 짐짓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노를 바라보았다.
"위선의 탈을 쓰고있는 천재 주페 태자나 강력한 북부를 등진 오넬론 태자 모두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주페 태자를 지원하는 타니토는요? 선대폐하께서 내심 주페 태자를 새 장태자로 삼고싶어 하셨던 건 전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페는......"
빈 술잔에 로노가 마시던 술을 조금 부은 베흔은 그의 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말했다.
"절 바보로 아십니까. 근위대와 저 베흔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북부가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꼴을 제가 지원할 것이라 믿으십니까? 아니면 너무너무 똑똑하시고 도덕적이다 못해 답답하기까지 한 주페 태자를 밀 것 같습니까? 제 입장을 생각해보시죠. 전 결국은 장태자전하의 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근위대를 절대 믿지 말라'는 주페의 신신당부를 그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로노는 어느새 베흔의 말에 조금씩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베흔이 처음부터 자신을 강력한 황제로 만들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는 황당무계한 말은 그 역시도 그냥 듣기 좋은 립서비스 정도로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장태자이고 큰 무리없는 후보인 자신을 새 황제로 지지하는 것이 베흔에게도 가장 쉽고 편한 길이라는 건 로노도 익히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어쩌면 더 큰 몫을 노리고 후계구도를 일부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베흔이 이제 슬슬 지지할 곳을 저울질하고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흔들리고 있는 로노의 눈빛을 힐끔 살핀 베흔이 입을 열었다.
"혹시......주페 태자가 황궁을 기습공격하자고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베흔의 지적에 화들짝 놀란 로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며 베흔에게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주페가 그렇게 대담한 놈으로 보이는가?"
로노의 대답에 베흔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뭐, 아니면 됐구요......혹시 주페 태자가 황궁을 공격하는 선봉에 서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제안이라도 했을까 했죠......황궁을 접수하는 즉시 장태자전하 대신 자기가 즉위식을 올려버릴 것이 뻔하죠. 아시다시피 즉위식은 유학자들이 주관하도록 되어있지 않습니까."
베흔의 이간질에 귀가 솔깃해진 로노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들고 있었다. 로노의 변심을 내심 즐기듯 술 한 모금을 더 들이킨 베흔이 갑자기 목소리를 잔뜩 깔며 말했다.
"장태자전하께서 단독으로 황궁을 접수하신다면 저와 충성스런 근위대가 기꺼이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저, 정말로?"
로노의 두 눈이 반짝 하고 빛을 뿜어냈다. 무려 20만에 달하는 근위대가 로노를 정말로 돕는다면 북부건 주페 태자건 그로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지는 셈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로노를 향해 베흔이 짧게 한마디 덧붙였다.
"다만.......한가지 조건만 지켜주신다면."
"조건?"
로노가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주페 태자를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전하의 치세에도 두고두고 화근이 될 테니. 주페 태자를 살려둔다면 앞으로도 서부가 전하께 좀 걸르적거리겠습니까?"
로노는 저 간사한 근위대장을 가볍게 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근위대가 새 황제의 가장 강력한 지원세력이 될 지도 모를 주페를 미리 거세해버리려 한다는 것을 로노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로노가 황제가 되고 난 후의 문제였다. 당장 즉위 자체가 다급한 상황에서 로노에게는 그 이후까지 따질 여유는 없었다.
"당장 대답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찬찬히 생각해보시고 알려주십시오. 주페 태자만 넘겨주신다면 장태자전하께선 새 황제가 되실 수 있습니다."
술잔을 내려놓은 베흔은 로노에게 공손하게 경례를 올리고는 그의 막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막사에 혼자 남은 로노는 근위대의 이 뜻밖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셔틀에 오른 베흔은 상석에 몸을 쭉 뻗으며 안도감에 몸을 내맡겼다. 그는 하마터면 저 잘난 주페 태자와 그 무시무시한 오르마즈 녀석의 손에 황궁과 근위대가 작살이 날 뻔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이제 이렇게 언질을 주었으니 녀석이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면 황궁을 노리는 바보짓을 할 턱이 없었다. 베흔이 탄 셔틀은 동부의 초원을 박차고 떠올라 다시 황제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베흔은 옆에 서 있던 쿠베를 손짓해 불렀다.
"지금 이 정보를 북부에도 흘리라 했지?"
"예. 지금쯤 카파키 가에서도 우리와 장태자가 만난 것을 알고있을 겁니다."
쿠베의 대답에 베흔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 잘 풀려가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베흔은 이 모든 판단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젊은 청년을 휙 돌아보았다.
"이제 큰 포상을 받게 될 거야."
베흔이 킬킬대고 웃으며 청년에게 말했다.
"제게 포상은 단 하나 뿐입니다."
셔틀 한쪽, 어두운 구석에 서 있던 샤드니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베흔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대군 그놈은 살려주고 대신 주페 녀석 모가지를 선물로 줄 테니까."
꽉 깨문 샤드니의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주페의 기습진공계획을 베흔에게 밀고하면서 그가 약속받은 것은 간단했다. 한때 그가 황제로 지지했고, 이제는 그의 가장 큰 걸림돌인 태자 주페의 목숨이 바로 그의 일생을 건 이번 배신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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