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84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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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온의 병수발도 접은 채 허겁지겁 서부로 돌아온 하심은 아켐 4번 행성에 있는 서부 유전자은행에 도착해 있었다.
‘북부놈들이 코리온 대군마마의 목숨을 담보로 주페 태자의 세포를 달라고 한다’며 호들갑을 떨던 샤드니는 하심에게 세포 코드를 꽤나 집요하게 따져 물었지만 주페로부터 ‘누구에게도 밝히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들었던 하심으로서는 그걸 말해줘야 하는지 아닌지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곤란해진 하심은 그럴 바에는 코리온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결정을 받자고 말했지만 샤드니는 ‘대군마마께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시지 퍽이나 협조하시겠다’며 버럭 화를 냈을 따름이었다.
물론 조금 더 생각해본 하심의 결론 역시 샤드니와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하심은 그 코드를 알고있는 유일한 외부인이었고,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결국 그는 샤드니를 대신해 세포를 꺼내 가져오는 이 달갑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이 급하다며 하심을 닦달하던 샤드니는 정작 ‘개인 셔틀에 좀 태워달라’는 그에게 ‘다른 곳에 가 있어 곤란하다’며 공용여객선 3등석 왕복티켓만 달랑 내주었을 따름이었다. 부잣집 도련님 샤드니가 치사할 정도로 짜게 구는 데 하심도 내심 화가 났지만, 이름만 귀족인 가난뱅이 생도 하심으로서는 일단 그 정도 챙겨준 것으로 그냥 감지덕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569221-63307-847번 수정란 합성에 쓰였던 세포를 원합니다. 본인사망으로 수거를 원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료를 요구한 하심은 입술을 굳게 깨물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파예드 생도라는 믿음직한 신분에 암호코드까지 알고있는 하심에게 별 의심없이 ‘알았다’며 대답한 직원은 검색을 위해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태자저하......”
하심 역시 죽은 주페 태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어쨌든 산 사람은 살리고 볼 일이었다.
“여ㅤㄱㅣㅆ습니다.”
직원이 내민 건 중지 만한 자그만 은빛 캡슐이었다. 양호한 상태로 보관중이라는 푸른빛 표시가 선명한 이 캡슐은 주페 태자가 세상에 남긴 얼마 안되는 흔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이것 역시 저 망할 북부놈들의 손에 들어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비참한 물건일 따름이었다.
유전자은행을 나선 하심은 어둑어둑해지는 길을 가로질러 그다지 멀지 않은 공용 터미널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코리온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시바삐 황제령으로 돌아가 이 캡슐을 샤드니에게 넘겨줘야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침침한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걷던 하심은 좁은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누군가에게 깜짝 놀라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어르신, 저 안에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꽤나 큰 덩치의 남자는 검은 무명포 차림의 귀족 하심의 앞을 가로막으며 넙죽 엎드렸다. 하심이 들여다본 골목 안에는 정말로 웬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심은 반사적으로 골목 안으로 달려들어가 다친 사람 옆에 쭈그려 앉았다.
“맙소사, 이게 뭐예요? 칼에 찔린 거예요?”
더듬거리며 품속을 뒤진 하심은 급히 할룩스를 꺼내들었다.
“지금 구급대를 부를 테니.....”
할룩스를 작동시키려던 하심은 피를 흘리며 앞에 누워있는 사람이 갑자기 단검을 뽑아들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처절한 외침은 뒤에서 그의 입을 틀어막은 또 다른 사람---하심을 이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왔던---의 거친 손에 그대로 가로막혀 채 몇 발짝 너머로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하심이 미친 듯 버둥거리며 그의 팔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 괴력의 남자는 거칠게 저항하는 하심을 질질 끌고는 골목 조금 안쪽의 이상한 냄새가 풍기는 공장으로 들어섰다.
“가진 거 다 드릴게요, 제발,”
거의 들은 돈도 없는 지갑을 꺼내 보이려던 하심은 공장 안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에 숨이 막혀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핏자국 남기면 안돼. 깨끗하게 처리해야 한다구.”
공장 안에는 또 한 명의 괴한이 마스크와 방호복을 입은 채 큰 탱크를 휘젓고 있었다. 하심의 짐 속을 뒤진 남자는 방금 전 유전자은행에서 찾아온 은빛 캡슐을 꺼내들며 물었다.
“이게 방금 네놈이 찾아온 거냐?”
“그, 그건 안돼요, 안된다구요!”
대드는 하심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쥔 남자는 버둥거리는 그를 질질 끌고 ‘탱크’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 안에서 진동하는 ‘시큼한 냄새’의 정체를 깨달은 하심이 비명을 지르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안돼요! 제발! 제발!”
산이 가득 들어있는 거대한 탱크를 젓던 남자는 하심의 비명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은 듯한 태연한 발음으로 하심을 끌고 오는 남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안에 던지고 나면 빨리 물러나. 바로 안 죽고 버둥거리기라도 하면 튈지도 모르니까.”
자신이 당할 끔찍한 죽음에 전율한 하심은 머리채를 쥔 남자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끄떡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여간, 그 망할 새끼, 내 이럴 줄 알았지. 에이, 썅, 진짜 독한 놈이네.”
갑자기 한쪽에서 들려온 빈정거리는 듯한 여자목소리에 하심을 끌고 가던 남자가 멈춰 서서 옆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하심은 여전히 버둥거리며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아가씨, 흔들리면 잘못 맞을 수도 있으니 잠깐만 가만히 좀 있으쇼.”
위엄까지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서 묘한 힘을 느낀 하심은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바싹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리채를 쥐고있던 남자의 눈을 어딘가에서 날아온 단검이 그대로 꿰뚫고 들어갔다.
“아, 악!”
괴한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하심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등뒤에서 칼과 칼이 부딪히는, 귀를 찢는 고음역의 울림이 이 공장을 뒤흔들었다. 뒤를 휙 돌아본 하심은 검은 망토를 쓴 웬 사람의 카타나에 환자 행세를 했던 그 ‘강도’의 머리가 단번에 위아래로 두 토막 나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싸움은 전혀 할 줄 모르는 하심이었지만 숨어있던 기계 위에서 뛰어내리는 그 날렵한 몸놀림만으로도 실력이 대단한 무사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순간 다리가 굳어버린 하심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놈!”
탱크를 젓고있던 괴한이 산이 잔뜩 묻은 막대기를 치켜들고 검은 망토의 그 무사에게 거칠게 달려들었다. 카타나를 단단히 움켜쥔 그는 얼굴을 급히 망토로 가리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스치기만 해도, 아니 막대와 칼이 부딪혀 묻어있는 강한 산성 용액이 튀어 올라 몇 방울 맞기만 해도 무사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괴한은 막대에 묻어있던 산을 무사를 향해 공중에 흩뿌렸다.
“썅, 저 새끼!”
뒤로 휙 돌아선 무사의 망토를 덮친 그 치명적인 액체들이 연기를 뿜으며 치밀한 섬유조직을 뚫고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재빨리 뽑아든 단검을 녀석을 향해 힘껏 내던진 무사는 양손에 카타나를 다시 움켜쥐고 매섭게 돌진해 들어갔다. 공중을 돌며 날아간 단검은 괴한의 방호복을 뚫고 뺨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단검에 얼굴이 명중해버린 녀석이 막대를 움켜쥔 채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 저질스러운 놈 같으니!”
녀석이 쓰러지며 휘두른 긴 막대를 날렵하게 뛰어넘은 무사는 공중에서 몸을 뒤로 돌리며 넘어져있던 적의 가슴에 칼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한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는, 그 끔찍한 순간에도 하심은 그 무사의 유연하고 날랜 몸놀림에 ‘아름답다’는 황당한 생각을 떠올렸다.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던 그 괴한은 가슴을 뚫고 들어온 칼날이 90도로 힘껏 비틀어지면서 결국 막대를 떨구며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괴한들을 모두 처치한 무사는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공장 안에 뒹구는 세 구의 시체를 확인이라도 하듯 한번씩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제기랄, 옷 또 버렸네.”
무사는 구멍 투성이가 되어버린 망토를 벗어 칼에 잔뜩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왼쪽 팔뚝을 바라보았다.
“젠장! 물, 물!”
타 들어가고 있는 소매를 본 무사가 순간 기겁을 하며 공장 한쪽의 수도로 달려갔다.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든 하심은 연신 욕을 연신 늘어놓으며 물로 팔뚝을 정신없이 닦아내고 있는 그 검은 비단튜닉 차림의 무사를 멍 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자신의 ‘임무’를 떠올린 그는 급히 공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캐, 캡슐, 캡슐,”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간 하심은 눈에 단검이 박혀있는 그 끔찍한 시체의 손 옆 떨어져있던 은빛 캡슐을 잽싸게 주워 공장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괴한들과 싸운 사람이 생명의 은인인지, 적인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알 도리가 없으니 무조건 달아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굳어버린 다리로 바닥을 애써 기어가는 그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하심 예킨터스 생도?”
화상을 입은 왼팔을 움켜쥔 무사는 덜덜 떨고있는 하심을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눈앞의 사람이 도대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던 하심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번득이는 회색빛 눈동자와 강인한 인상에 순간 압도당하고 있었다.
“나가는 게 좋겠군.”
“제발, 죽이지 마세요, 전......”
“내가 자네를 왜 죽이겠나. 따라오게. 일단 여길 피하는 게 좋을 테니.”
딱딱한 북부 억양의 이 다부지고 큰 키의 여자 귀밑에는 선명한 상급귀족문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캡슐을 꼭 껴안은 하심은 그의 손에 팔이 붙들린 채 어디론가를 향해 바삐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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