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2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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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에서 빠져나온 코리온이 처음 도착한 곳은 지하 4층이었다.
테라스가 별궁 뒤쪽 절벽에 걸쳐있다 보니 주출입구가 있는 1층까지는 한참을 더 올라가야 했지만 지금 그의 몸으로 가능할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무리가 되더라도 일단 1층으로 올라가 별궁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제일 먼저 통화한 하심은 1층과 바깥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으니 절대 나오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이도저도 못할 지경에 처한 그는 일단 응급처치 도구라도 구할 수 있는 경비병 숙소에서 도움을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을 바꿔야 했다.
별궁 안에 직할군 경비병들이 거의 없다는 건 코리온에게는 저주일수도, 다행일수도 있었다. 그가 숙소까지 오는 중간에 만난 사람은 혼비백산 도망치는 이곳 종사원들 서너 명이 전부였다. 물론 그래 봤자 건물 안이니 먼 거리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의 코리온에게는 고작 층 하나를 이동하는 것도 저승과 이승을 오가듯 먼 거리로 느껴졌다.
“카토와 하심에게 행선지를 알렸으니 곧 구하러 올 거다. 그러니 지원군이 들어올 때까지 일단 안전한 의무실에…….”
코리온은 갑자기 조용해진 뒤쪽을 휙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 질질 끌려오던 샤드니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제발, 다 왔으니 힘내라, 샤드니, 제발.”
“……처음입니다……제 앞에서 ‘제발’이라는 단어를 쓰시는 건…….”
샤드니가 지독한 고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그와 꽉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져왔다. 망토로 그의 몸을 둘둘 말은 건 당초 바닥에 핏자국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었지만 조금씩 체온을 잃으며 떨고 있는 샤드니에게는 온기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다 기억했더냐.”
코리온의 퉁명스런 대꾸에 샤드니가 그 고통의 와중에도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한 마디겠지만 코리온 딴에는 나름대로 약혼자를 ‘웃겨주려고’ 한 말임에 틀림없었다. 코리온은 자꾸 휘청거리는 다리에 잔뜩 힘을 주며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경비병들의 숙소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겨드랑이는 괜찮으십니까…….”
샤드니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이려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의 코리온은 전같이 글귀에나 빠져있는 학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보다는 낫다.”
그는 샤드니를 바닥에 잠시 놔둔 채 숙소 문을 몸으로 힘껏 들이받았다.
“젠장.”
누워 있던 샤드니는 코리온의 입에서 나오는 욕에 또다시 별 이유 없는 웃음을 지었다. 비록 다치긴 했어도 워낙 장신인 코리온의 체구 덕분인지 경비병 숙소의 오래된 나무문은 그새 한쪽이 움푹 찌그러들어 있었다. 또 한 번 몸으로 문을 힘껏 들이받았던 코리온은 확 열리는 문 뒤로 맥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잠깐만 있으면 사람들이 올 테니.”
코리온이 다시 비틀비틀 일어나 샤드니를 숙소 안쪽으로 잡아당겨 구석에 앉혔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조금만…….”
경비병 숙소는 넓었지만 시설은 다른 직할군 병영과 마찬가지로 열악했다. 경비병들이 교대로 잠을 청하는 30여 개 정도의 허름한 2층 침상이 줄줄이 놓여 있었고 중간중간 개인 사물함과 무기함이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싸구려 페인트로 대강 칠해진 벽에서는 음산한 기운마저도 새나오는 것 같았고, 절벽 쪽으로 난 문 반대편의 창에는 쇠창살이 쳐져 마치 감방 같은 느낌이었다.
급히 문을 닫은 코리온은 너덜너덜해지고 비틀어진 문고리를 대강 자리로 되돌려 어설프게나마 다시 잠갔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대편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만일의 경우 도망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 너머, 철썩이는 물소리가 들리는 아래쪽으로는 절벽 아래로 마잔다란 오아시스가 있는 듯 보였다.
안을 대강 확인한 코리온은 다시 샤드니에게 돌아왔다.
“가슴에 내출혈이 있는 것 같으니 눕지 마라, 숨 쉬기 더 힘들어질 테니.”
코리온은 병사들의 사물함과 장을 다급히 뒤졌지만 안에 있는 작은 구급함을 풀어 나온 물건들은 고작해야 약간의 거즈와 기초적인 약품, 쓸데없는 진통제 주사기 뿐이었다. 코리온 역시 의학박사였지만 흉곽이 부서지고 폐에 피가 들어찬 중환자에게 이런 것들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젠장.”
코리온은 거칠어진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조금씩 몸이 식어가는 샤드니를 가슴에 안았다. 그는 반쯤 벌어진 샤드니의 입을 크게 벌려주며 간곡하게 말했다.
“피는 모두 토해라. 삼키지 말고.”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는군요. ……오늘은…….”
샤드니는 코리온의 손바닥에 뺨을 기대고 짧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코리온의 가슴 옷깃 사이에 코를 대고 얕으나마 숨을 들이켰다. 코리온의 긴 머리칼이 피로 젖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제가 말입니다…….”
샤드니가 자꾸 목구멍을 막는 피를 뱉어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학장님에게서 처음으로 매력을 느꼈던 곳이 이 머리칼하고……가슴이었다는 걸 아십니까?”
코리온은 누군가 쓰던 방패를 찾아 앞에 세우고, 입고 있던 무명포를 벗어 샤드니에게 감아 주고 혼자 부산을 떨며 짐짓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그때, 그는 힘을 잃은 샤드니의 고개가 조금씩 밑으로 처지는 것을 느꼈다.
“제발, 제발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니까.”
코리온이 떨어지는 그의 고개를 치켜올리며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그는 손가락을 샤드니의 입 안에 넣어 고인 피를 모두 손으로 긁어냈지만 폐에 피가 가득 차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코와 입을 타고 계속 흘러내리는 피는 코리온으로서도 손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너까지 보내지는 않을 테니.”
코리온이 이를 꽉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며 샤드니의 아름다운 푸른빛 눈동자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입 안에 덩어리피를 문 채 더듬더듬 말했다.
“전……죄 많은……사람입니다…….”
“닥치라니까.”
코리온이 이를 드러내며 쏘아붙였다.
“절……용서해 주세요.……제발.”
샤드니가 코리온의 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꽉 잡았다.
“전…….”
“알아.”
코리온의 퉁명스런 대답에 샤드니가 입술을 딱 멈추었다. 하지만 코리온은 무얼 안다는 것인지, 어디까지 안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 안다고. 나도 다 안다고.”
샤드니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코리온을 멍하니 올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리온 역시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샤드니의 피로 젖은 얼굴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리고 샤드니에게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의 몸을 감싼 코리온의 무명포를 또다시 적셨다.
“날 두 번 울릴 셈이냐.”
코리온의 거친 물음에 샤드니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코리온은 지원군을 재촉하려 다시 할룩스를 꺼내들었다.
“여기 문이 이상해!”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큰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설프게 잠가놓은 문짝을 누군가 거칠게 밀어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샤드니를 안고 벽 구석으로 바싹 물러난 코리온은 할룩스를 급히 끄고는 품에 감춰두었던 카렐의 단검을 대신 꺼내 손에 단단히 쥐었다. 역시 볼트가 박혀 있는 그의 왼팔은 거의 쓸 수가 없었지만 그는 당장이라도 기꺼이 싸울 기세였다.
샤드니는 그를 말리려 더듬더듬 손을 붙들었지만 코리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이를 꽉 악물었다. 하지만 검술은 고사하고 싸움조차 할 줄 모르는 그가 적에게 들킨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됐다!”
꽝 소리가 울리며 이미 한 번 부서졌던 문고리가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각각 칼과 석궁을 든 헤네티 2명이 안으로 거칠게 들이닥쳤다. 코리온은 숨을 바싹 죽이며 어두운 구석에 몸을 더 깊이 숨겼다.
“놈의 눈은 절대 보지 마라. 지체 말고 무조건 방아쇠부터 당겨라.”
선임자인 듯한 한 명이 다른 헤네티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누구든 눈이 마주친다면 동료든 누구든 그놈을 먼저 쏘라는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2명의 헤네티는 각자 한쪽씩을 맡아 침대들 사이를 조심조심 살폈다. 코리온과 샤드니는 방패 뒤에 최대한 몸을 숨겼지만 워낙에 두 사람 모두 키가 큰지라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코리온은 자신의 가슴에 기대 앉아있는 샤드니의 흐려진 눈빛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샤드니가 무어라 속삭이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이미 피로 가득 찬 목구멍으로는 더 이상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여기!”
그때, 침대 사이를 뒤지던 헤네티와 코리온의 눈이 딱 마주쳤다.
“씨이!”
코리온은 샤드니를 그대로 놔둔 채 방패를 앞세우고 헤네티에게 힘껏 몸을 던졌다. 석궁의 방아쇠를 막 당기려던 그 헤네티는 생각지도 않았던 그의 기습에 가슴을 받히며 중심을 잃고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코리온이 단검을 치켜들어 그자의 옆구리를 힘껏 찌르려 했지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상대의 손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붙들리고 말았다. 자신의 무력함을 느낀 코리온의 표정에 짧은 절망감이 스쳤다.
“뭐냐!”
그때, 조금 떨어진 곳을 살피던 이자의 선임자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왔다. 이미 손목까지 붙들린 코리온은 자신의 힘으로는 이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순간 기지를 발휘한 그는 넘어져 있던 헤네티의 턱을 치켜 올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보지 말라니까!”
선임자는 코리온이 상대의 정신을 지배하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 따위는 알지 못했다. 적이 이쪽을 겨누는 것을 느낀 코리온은 쓰러진 헤네티를 팽개치고 급히 몸을 뒤로 뺐다.
“씨이!”
순간 당황한 선임자가 겨눈 곳은 조금 전 자신이 말한 대로, 코리온이 아닌 동료의 목이었다.
“악!”
급소인 옆 목에 볼트가 명중당한 헤네티는 무조건 시위부터 당긴 선임자를 원망스런 얼굴로 노려보았지만 그것도 길지 않았다.
동료를 쏘아죽인 그 헤네티는 침대 사이로 몸을 감춘 코리온을 쫓아 급히 달려왔다. 그는 방향을 틀기가 무섭게 검은 형체를 보자마자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던 코리온의 방패에 딱 소리를 내며 박히고 말았다.
“이놈이!”
격분한 헤네티가 석궁 대신 칼을 치켜들고 뒤로 계속 물러나려는 코리온을 힘껏 덮쳤다.
“아압!”
코리온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그의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지만 출혈로 힘을 반쯤 잃은 몸은 상대의 괴력에 그대로 짓눌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는 급한 대로 단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상대는 코리온의 오른손에 쥔 단검을 무릎으로 꽉 눌러버렸다.
“머리, 머리를…….”
뒤로 밀려나 바닥으로 넘어지던 그 짧은 순간, 코리온은 구석에서 샤드니가 피를 짜내듯 중얼거리는 가는 목소리를 느꼈다. 그의 말대로, 이 헤네티는 코리온의 무서운 시선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코리온의 눈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방패에 얼굴을 붙인 채 상대를 보지 않고 있었다. 적의 움직임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싸움의 원칙에서 틀림없이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널 지킬 테니…….”
코리온은 이미 차단당한 단검 대신 바닥을 뒹굴던 진통제 주사기를 덥석 움켜쥐었다. 같은 순간, 적 역시 방검복에 가려지지 않고, 얼굴을 볼 일도 없는 가장 쉬운 급소인 코리온의 허벅지 안쪽을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제발!”
코리온은 태어나 질러 본 가장 큰 포효를 내지르며 이 무서운 적의 정수리를 주사기로 힘껏 찍었다. 그의 허벅지 안쪽을 향해 꽂히던 칼날이 일순간 힘을 잃으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끄, 으으윽…….”
머리에 주사기가 박힌 헤네티가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낸 코리온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검을 다시 덥석 집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뚫린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 헤네티의 목을 향해 모든 체중을 다 실어서 칼을 내리찍었다.
“버티기만 하라고!”
코리온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쓰러진 헤네티의 가슴을 깔고 앉아 그의 목과 가슴을 내리찍고 또 찍었다. 그의 얼굴과 가슴이 죽은 적의 피로 온통 범벅이 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 벽 구석에 기댄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샤드니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열려 있던 그의 푸르고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코리온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품은 그는 코리온의 무명포를 몸에 감은 채 바닥에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샤드니?”
그제야 칼놀림을 멈춘 코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쓰러진 샤드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나와 바닥에 번졌다.
“샤드니, 샤드니.”
코리온은 칼을 내버리고는 쓰러진 샤드니에게 힘없이 기어갔다. 샤드니의 눈동자도, 거칠어진 숨으로 들썩이던 그의 가슴도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멍하니 벌어진 코리온의 입술을 타고 짜디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내가 버티라고 그랬잖나!”
코리온이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샤드니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코리온은 미친 사람처럼 샤드니의 가슴을 내리쳤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가늘게 뜬 푸른 눈은 여전히 그를 응시했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코리온의 곱던 목소리가 쩌렁쩌렁 갈라지며 이 차가운 경비병 숙소를 울렸다.
“버티라고 했는데! 왜 가냐고! 왜! 왜 너까지 내 말을 안 듣고 가 버리냐고! 왜 모두 내 말을 안 듣냐고!”
한참을 울부짖던 코리온은 결국 샤드니의 부서진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힘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것이 집착이었건 사랑이었건, 그 시작이 순수했건 아니었건, 이 아름다운 남자는 가장 오랜 동안 코리온의 곁을 묵묵히 지켜 온 기둥이었다. 하지만 이 불운한 천재는 이제 그마저도 자신의 눈앞에서 이렇게 떠나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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