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현질 전사
-1권 2화
확신을 못하는 정대식을 보고 홍만기도 덩달아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구했다.
"각성한 거 아냐? 각성한 것처럼 보였는데, 안 그래요?"
그의 질문을 받고 정대식을 때리려던 여자 헌터가 움찔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당혹해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몹시 놀란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때였다.
홍만기 뒤쪽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을 헤치며 누군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그는 정대식을 고용한 공격대의 공대장이었다.
그는 약간 피로한 표정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훑어보다, 정대식을 향해서 물었다.
"각성이라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 말에 홍만기가 대신 대답했다.
"아이고! 공대장님, 그동안 말로만 들었지 이런 광경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광경을 말하는 거야?"
"누가 각성하는 것 말이에요! 갑자기 사람 몸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거요! 그게 바로 각성하는 거 맞죠? 방금 전에 이 녀석, 그러니까 정대식의 몸에서 빛이 나왔단 말입니다!"
홍만기가 완전히 흥분해 떠드는 소리를 듣고 공대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정대식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공격대 대원인 여자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녀가 엉겁결에 입을 열어 말했다.
"마, 맞아요. 저자 몸에서 빛이 났어요."
그 말을 듣고 공대장이 물었다.
"그래? 각성 현상이 확실한가?"
여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겉보기로는 그래 보였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비로소 자신이 각성했다는 사실이 조금씩 와 닿았다.
그러나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았다.
아마도 각성을 했다면 얻었을 초능력.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탓이다.
"짐꾼이 던전 안에서 각성을 하다니, 신기한 일이군."
공대장은 얼떨떨한 채 서 있는 정대식을 쳐다봤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찌 되었든 간에 각성자가 된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축하하네."
축하한다는 말에 정대식은 어설프게 고개를 숙였다.
"아, 예. 고맙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홍만기가 난리가 났다.
"이야! 축하한다, 정대식! 네가 각성자가 되다니! 이게 웬일이야!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야아, 부럽다!"
동시에 다른 짐꾼들까지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들은 정대식 주변에서 흥분해 떠들어 댔다.
"이제 팔자 폈네! 각성자가 되다니!"
"앞으로 짐꾼 일은 안 해도 되겠구먼, 좋겠어!"
"헌터가 되면 잘 부탁한다고! 일거리 좀 팍팍 나눠 줘!"
다들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 진짜 각성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자신을 할 수가 없어서 더 그랬다.
정대식은 각성자가 됐다는 기쁨보다는 당혹을 먼저 느꼈다.
그러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노라니 공대장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직까지는 믿기지가 않겠지. 그건 차차 실감이 날 거야. 지금은 하던 일부터 마무리해 주면 좋겠는데. 여기서 계속 꾸물거리고 있다간 또 어떤 놈들이 찾아올지 모르니까 말이야. 기껏 각성자가 되었는데 몬스터와 맞닥뜨려 죽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그제야 다른 짐꾼들도 아직 여기가 던전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축하는 일단 밖으로 나가서 마저 하자면서, 각기 하던 일을 찾아서 흩어졌다.
정대식도 수레에 싣던 슬라임을 마저 끌어올렸다.
여자가 그런 정대식을 힐끗 보고 저만치로 가 버렸다.
갑자기 각성자가 된 탓인지, 더 이상 방어구가 더럽혀진 걸로 시비 걸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일단은 다행이다 싶어서 정대식은 수레를 끌고 던전 밖으로 향했다.
Chapter 1. 첫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일당을 받기 위해 찾아간 곳.
던전 앞에 있는 인력 사무소로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건네 왔던 것이다.
"정대식! 너 각성했다며?"
"그거 진짜야?"
"신의 공간에 갔었어?"
"어땠는데, 초능력은 어떤 게 생겼냐?"
먼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있던 짐꾼들이 정대식에게 우르르 모여들어 질문을 쏟아 냈다.
정대식은 그 질문들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게...... 나도 아직 잘 몰라."
뒤통수만 하릴 없이 긁적이고 있자니, 소장이 나서서 말했다.
"그만들 해! 정대식이 각성한 거랑 너희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자 누군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하긴, 진짜로 각성했으면 이제 우리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지."
그 말에 위화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정대식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 부러움과 안타까움이 반반씩 섞인 기색으로 물러났다.
"좋겠다...... 인마! 헌터가 되어도 가끔 찾아 달라고."
"그래, 일거리나 팍팍 떠안겨 줘."
몇 명이 아쉬워하며 덧붙이는 말에 정대식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소장이 별말 없이 내미는 일당을 받아 들어 품속에 구겨 넣었다.
평소 같았으면 금액이 맞는지, 악착같이 확인해 봤겠지만 오늘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얼른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인력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털털거리는 스쿠터에 올라타 '던전 구역'을 벗어났다.
높은 철책이 둘러쳐진 던전 구역을 빠져나와 개천을 건너자 시가지가 나왔다.
정대식은 붐비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늘 가는 은행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ATM기에 오늘 받은 일당을 모조리 집어넣었다.
이로써 계좌의 잔액이 6,533,210원이 되었다.
예금으로 묶어 둔 60,000,000원까지 합치면, 약 6,650만 원가량의 돈이 있는 셈이었다.
지난 4년 간, 정대식이 아득바득 이를 갈며 모아 온 전 재산이었다.
그 금액을 보니까 줄곧 멍하던 정신이 확 들었다.
'......각성을 했든 어쨌든, 이게 현재 내 상황이지.'
6,650만 원 정도라고 해 봤자, 정대식의 꿈인 건물은커녕 전셋집 하나도 구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필사적으로 모았는데도 이 정도밖에는 안 됐다.
'각성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맨몸뚱이 신세였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앞으로 부자가 되리란 보장도 없지. 각성자의 처지도 어떤 초능력을 타고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니까.'
정대식은 짐꾼을 하면서 여러 각성자들을 보아 왔다.
덕분에 초능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팔자가 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변변찮은 능력으로 헌터랍시고 거들먹거리다간, 하루아침에 죽어 나자빠질 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각성자가 된다 한들, 죽어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대식은 자신에게 몬스터와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배짱이 있는지 의문했다.
그렇게 각성자가 되기를 바라 놓고, 막상 각성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겁부터 더럭 났던 것이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린 정대식은 은행을 돌아 나왔다.
그런 뒤 편의점에 들러 간단히 저녁거리를 사고 집으로 향했다.
최대한 돈을 아끼기 위해, 그는 허름한 여관의 월방에서 살고 있었다.
말이 여관이지 사실상 쪽방이나 다름없었다.
욕실과 화장실은 공용이고, 부엌은 아예 없었다.
방 안에 있는 전자레인지 한 대가 조리 기구의 전부였다.
정대식은 전자레인지 안에 삼각 김밥을 뜯어서 집어넣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전자레인지에서 땡! 소리가 나기 무섭게 거의 반사적으로 삼각 김밥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걸 꿀꺽 삼키고 우유 한 팩을 마시고 나자, 비로소 자신의 초능력이 무엇인지 확인해 볼 맘이 생겼다.
'각성을 했다면 무엇이든 간에 초능력이 생기긴 했을 테니까.'
그는 약간 긴장한 맘으로 어수선하게 널린 쓰레기며 잡동사니를 방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서 기대를 가져 보았다.
'혹시 알아? 엄청난 초능력이 생겨서 갑부가 될지도.'
그러다 곧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내 주제에 무슨 갑부야. 그냥 자그만 건물 한 채 마련할 정도의 능력만 되어도 좋겠는데.'
한 달에 월세 300...... 아니, 200만 나와도 괜찮다.
시장 한구석에 그만한 건물 한 채만 장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하찮은 능력이라도 초능력은 초능력.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정대식은 혼자서 머리를 끄덕거리며 미래 계획을 세웠다.
'그래, 무리하지 말고 딱 건물 한 채만 장만하는 거야. 그러고 나면 헌터 노릇 따위는 관둬야지. 괜한 겉멋 들어서 위험한 데 사냥 다니고 그럴 필요 없잖아?'
막 각성자가 된 사람치고는 참으로 빈궁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대식이 생각하기에는 그게 가장 현실적이었다.
짐꾼으로 헌터 뒤를 따라다니며, 항상 이해가 안 갔던 게 그거였다.
각성자라고 해서 목숨이 두 개인 것도 아니고.
그만한 능력에, 그만한 수입이면 먹고살기 충분할 테다.
한데도 다들 죽어라고 던전을 쫓아다니며 위험을 자초했다.
자신만큼은 절대로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며 정대식은 심호흡을 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초능력을 펼쳐 보았다.
......정확히는 펼쳐 보려고 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갑자기 각성을 했다고 해도 말이지, 초능력을 어떻게 쓰는 건지 알아야.......'
탐욕과 대가의 신인지 뭔지.
일일이 붙잡고 가르쳐 주진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설명 정도는 해 줘야 할 게 아닌가.
돈을 바치면 힘을 얻는다는 이상한 소리만 툭 던져 놓았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다른 각성자들은 어떻게 초능력을 깨우친 거지?'
사례를 찾아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어쩐지 손이 뜨끈뜨끈했다.
'왜 이래? 열이라도 나나?'
유독 손바닥만 뜨거운 게 이상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오른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게 됐다.
자연히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고, 정대식은 곧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
오른 손바닥에 희미한 빛이 어리고 있었다.
의식을 집중하면 할수록, 빛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게 뭐야? 아! 혹시 말로만 듣던 마력이라는 것인가?'
각성자가 되고 나서의 가장 큰 특징은 이능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형태의 힘은 체내에서 생성되는 마력을 통해 발현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이제 어떡하면 되지?'
그러나 손에서 빛 좀 난다고 금세 방법을 깨우칠 리가 없다.
어떡하면 되나 허둥거리던 정대식은 손바닥에 모인 빛이 덩어리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으와!"
그게 매우 뜨거워 저도 모르게 손을 털었다.
그러자 손에 고였던 빛이 허공으로 둥실, 떴다.
그리고 곧 어떠한 모양을 이루었다.
"으잉?"
그건 꼭, 커서처럼 보였다.
컴퓨터 창의 마우스 커서.
옆으로 누운 세모꼴이 꼭 그와 같았다.
'도대체 이게 뭐야?'
황망해하던 정대식은 조심스레 그걸 손끝으로 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커서가 옆으로 화르륵 펼쳐지며 어떤 창이 나타났다.
그 창에는 말풍선과 같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 웬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정확히 66,533,210.
그 숫자는 낯이 익었다.
다름 아닌 정대식의 전 재산이었다.
'이게 왜 여기 떠 있는 거지?'
정대식은 몹시 미심쩍은 시선으로 눈앞에 보이는 화면이랄지, 광경이랄지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신의 공간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돈을 바치면 힘을 얻으리라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혹시, 이거...... 신종 보이스 피싱이라든가, 그런 사기 수법인 건 아니겠지?'
요새 워낙 세상이 종잡을 수 없다 보니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환각 같은 걸 만들어 내는 각성자가 작정하고 자신을 털어먹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고작 돈 6,650만 원을 가져서 뭘 하겠나 싶기도 했다.
'에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