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현질 전사
-1권 12화
* * *
"강화!"
우우우웅-.
정대식에게서 뻗어 나온 마력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반투명한 기운이 다른 파티원에게로 흡수되자, 공격의 양상이 달라졌다.
"더 견딜 수 있어! 딜러들, 인정사정없이 퍼부어!"
"이제 마지막이다, 막 쏴!"
투두두두두!
투다다다다다다!
밀리는 것 같던 탱커가 정대식의 버프로 굳건히 버티고 섰다.
그걸 보고 지옥마견이 달려들까 봐 멈칫거리던 딜러들이 용기를 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숨 쉴 틈도 없이 집중 포화를 퍼붓자, 탱커에게 한눈팔려 있던 지옥마견의 뱃가죽이 뚫렸다.
퍼억!
주르르르!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내장과 함께 피가 왈칵 쏟아져 내리자, 그제야 지옥마견은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비틀거리며 입질을 몇 번 하더니만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곧 혀를 길게 빼고 헥헥거리다 단말마와 같은 긴 한숨을 내뱉고 절명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애를 먹이던 지옥마견이 마침내 쓰러지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렸다.
"됐어!"
"잡았다!"
"워후, 해냈다!"
다들 기뻐하는 가운데 파티원들이 정대식의 주변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정말 대단했어!"
"버프 실력이 훌륭한데, 막 핀치에 몰리다가도 힘이 나더라니까!"
"7등급이 아니고 더 높은 거 아냐? 덕분에 지옥마견을 다 잡아 봤네!"
일전에 정대식이 지옥개 레이드를 왔던 던전 S23.
지옥개가 출몰하는 지하 2층에서 한층 더 내려간 지하 3층.
여기에는 지옥개보다 더 강력한 지옥마견이라는 몬스터가 출몰했다.
지옥마견은 지옥개와 외양이나 크기, 불을 쏘는 능력이 거의 흡사하지만 단 하나 차이가 있었다.
그건 머리가 둘이라는 점이다.
머리가 둘이라 불도 두 배로 내쏘고 물어뜯는 공격도 두 배로 들어온다.
그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웠으므로 실력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섣불리 도전하지 않는 놈이었다.
그런 놈을 정대식 덕분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잡았으니, 다들 환호하는 게 당연했다.
특히 탱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덕분에 부상자도 없고 무사히 사냥을 마쳤어. 고마워, 네 덕분이야."
"아니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정대식은 뻔한 대답을 하면서 강력한 눈빛을 날렸다.
내가 이만치 활약을 했으니 당연히 더 많은 보상을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기색을 파티장인 탱커가 눈치채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몸을 낮춰 정대식에게 속삭였다.
"걱정 마,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당신은 내가 한몫 두둑하게 챙겨 줄 테니까."
그러고 나서야 몸을 돌리며 철수를 명령했다.
"짐꾼 불러서 이놈을 옮기고 우리도 나가자. 정대식 덕분에 일찍 마쳤으니 밖에서 회식이라도 하자고. 내가 쏜다!"
"오오!"
파티원들이 치킨에 맥주 생각으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짐꾼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지옥마견의 사체를 추슬러 상층으로 올라갔다.
파티장은 던전 1층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브로커를 찾았다.
브로커가 지옥마견의 가격을 적절히 쳐주었고, 보상을 받기가 무섭게 파티장이 누구보다 가장 먼저 정대식의 몫을 챙겨 주었다.
그 앞으로 떨어진 금액은 무려 1,200만 원!
애초에 1,0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200만 원을 더 번 셈이다.
그렇잖아도 파티장이 정대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말했다.
"거의 200만 원 가까이를 그쪽에 몰아줬어. 이건 다른 녀석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정대식은 목 안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 마,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가능하면 다음번에도 또 같이 사냥하자고. 그땐 가능한 더 많이 챙겨 줄 테니까."
막공에 참여만 했다 하면 다음을 약속받게 되는 정대식이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인 정대식은 꼭 특정한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정공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면전에 대놓고 그런 소릴 할 수는 없었으므로, 선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뒤 회식을 하러 가자고 붙잡는 손길들을 뿌리치고 귀갓길에 나섰다.
정확히 말해서 근처 은행으로 곧장 직행을 했다.
보수야 계좌 이체로 즉시 받을 수 있었고, 잔액도 온라인으로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통장을 고수하고 있는 정대식이었다.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전자 단말기로 보는 금액은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많은 돈을 갑자기 벌어들이게 된 탓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종이 통장을 들고 다니며 매일같이 통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통장에 찍혀 나오는 잔액을 보고서야 내가 이만큼 돈을 벌어 두었구나, 하고 안심하곤 했다.
정대식은 통장을 두 손으로 든 채 뚫어져라 기장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어린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통장을 가슴에 꼭 붙이고 벅찬 한숨을 내쉬었다.
'1억 3천!'
1억 3천.
정확히 일주일 간 벌어들인 금액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원딜에 버퍼 포지션까지 다 소화가 가능한 인재는 드물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정공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었으므로, 막공에서는 귀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파티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고, 7등급 헌터다운 실력 발휘로 남들보다 더 많은 보수를 챙길 수가 있었다.
그 결과, 일주일 만에 1억 3천이라는 큰돈을 모으게 되었던 것이다.
'히야...... 이게 진짜 내 재산이란 말이지?'
정대식은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눈을 빠르게 끔벅거리며 통장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정대식, 구질구질하던 인생이 드디어 피기 시작하는 건가?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더니만.......'
이제야 비로소 각성자가 되어 그토록 선망하던 헌터가 되었다는 게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탐욕과 재물 어쩌고의 신이 등장해 현질을 하라고 하니,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크게 느껴졌다.
덕분에 도리어 모아 두었던 재산을 탕진하기에 이르렀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두 배 가까운 금액으로 원상 복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속도라면 정대식이 목표로 하는 건물주도 그리 먼 꿈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정대식은 통장을 집어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헌터 일이 할 만하잖아? 몬스터 사냥도 그리 위험하지 않고.'
짐꾼으로 하도 여러 경우를 많이 봐 왔더니만, 처음에는 적잖이 걱정이 됐었다.
괜히 헌터가 되었답시고 몬스터 잡느라 설치다가 부자가 되어 보기도 전에 죽는 게 아닌지 걱정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각성자들의 실력이 형편없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갖게 된 현질 능력이 월등한 것인지, 마력 몇 포인트 채운 것만으로도 손쉽게 사냥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처음에 가졌던 경각심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굳이 현질을 더 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지금 수준만으로도 일주일에 억을 벌어들이잖아? 그냥 이대로 적당히 사냥하며 돈을 모을까?'
당연히, 능력을 키워서 더 강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 수입의 규모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느라고 버는 돈을 족족 다 써 버린다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지금 정도로 충분한 것 같다고 정대식은 생각했다.
'그래, 더 이상의 현질은 하지 말자. 지금처럼 S23던전의 막공이나 돌면서 저금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서너 날이면 10억 정도는 우습게 벌 텐데 굳이 현질을 할 필요가 있겠어?'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여태까진 암만 돈을 벌어도 제 돈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재물을 바쳐 능력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줄곧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을 떨치고 나니 비로소 수중의 1억 3천이 제 돈 같이 느껴졌다.
'탐욕과 재물의 신인지 뭔지...... 엿이나 먹어라!'
정대식은 속으로 퍽큐를 날리며 오늘은 오랜만에 포식을 하기로 맘먹었다.
그리고 늘 가던 국밥집 대신 고깃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지옥마견을 잡으러 갈 때 동행했던 파티장은 석우원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대식의 능력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거의 강탈하다시피 정대식의 전화번호를 가져가더니만,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게 연락을 해 왔다.
또 같이 일하자는 권유가 대부분이었다.
처음엔 무시를 했지만 계속 다른 막공을 구하기가 적잖이 귀찮았다.
어차피 S23D를 벗어날 마음도 없었으므로, 석우원의 청을 걷어찰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제의하는 조건이 좋기도 해서, 결국 정대식은 그러마 하고 응했다.
"여어!"
S23D 1층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석우원이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아는 체를 해 왔다.
거기에 고개를 대충 끄덕여 보인 정대식은 모인 파티원이 전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아하니 다들 석우원과 인연이 있는 기색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석우원은 자신만의 공격대를 만들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막공을 다니며 괜찮다 싶은 인물들을 점찍어 두는 듯했다.
정대식 역시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잘 왔어. 다들 안면은 익혔을 테니 자기소개는 생략하지. 사냥감도 전과 똑같이 지옥마견이니까 새삼 설명할 것도 없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전만큼만 해 주면 될 것 같아."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석우원이 손가락을 곧추세워 보였다.
"단! 저번보다 딱 한 마리만 더 잡고 가자고."
그 말인즉, 두 마리를 잡자는 뜻이었다.
일전에 지옥마견을 사냥할 때에도 사실은 한 마리를 더 잡을 여력이 있었다.
정대식의 활약으로 사냥이 훨씬 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석우원은 막공을 데리고 모험을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애당초 계획대로 지옥마견 한 마리만 잡고 철수했다.
그게 적잖이 아쉬웠던지 오늘은 두 마리를 목표로 하는 듯했다.
그래서 정대식을 꼭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버퍼가 우리와 함께하니까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고!"
다들 정대식에게 한마디씩 말을 건네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
정대식에게 스스럼없이 구는 모양새가 꼭 한 식구를 대하는 듯했다.
아마도 정대식을 공격대원으로 맞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다들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몇 개월만 더, 막공을 구르다 돈만 모으고 나면 이 바닥을 뜰 작정이었으까 말이다.
공격대에는 들어갈 일이 없을 터였다.
정대식은 선웃음으로 상황을 때우고 석우원을 따라 다른 파티원들과 함께 지하로 향했다.
이미 와 본 적이 있기에 통로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이 익숙했다.
통로를 지나쳐 곧 지옥마견이 출몰하는 구역에 이르렀다.
그러자 어김없이 놈이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크워어어어엉!"
곧 시커먼 그림자가 파티원들을 덮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었으나 다들 침착하게 대처했다.
"어딜 덤벼!"
석우원이 호쾌하게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발을 크게 내딛었다.
그리고 지옥마견이 파티원들을 덮치기 전에 주먹으로 놈의 콧잔등을 후려갈겼다.
권법을 쓰는 그의 주먹은 말 그대로 철퇴였다.
지옥마견이 "캥!" 소리를 내뱉으며 주춤했다. 그 틈을 타 원딜들이 맹공을 퍼부었다.
투다다다다!
파바바바밧!
퓨부부북!
크고 자잘한 파공음과 폭발음이 터지는 가운데 석우원이 지옥마견의 안면을 두드리며 탱커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해내고 있었다.
그사이 근딜 둘이 양옆에서 지옥마견의 옆구리를 공략했다.
놈의 가죽을 찢으려 근딜들이 싸우는 동안 원딜들이 지원 사격을 했고, 정대식도 때를 봐서 버퍼를 썼다.
"강화!"
덕분에 근딜들의 공격력이 강해져 지옥마견이 신음을 내뱉었다.
옆구리에 달라붙은 헌터들을 깨닫고 놈이 뒷발질로 그들을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나 석우원이 숨 쉴 틈 없는 공세로 지옥마견이 한눈을 팔게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