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현질 전사
-1권 19화
"으으윽......."
고개를 들어 올리자 완전히 뒤집혀 다 찌그러진 버스에 쓰레기처럼 처박힌 상태였다.
그건 다른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와이어로 묶어 둔 할머니는 거꾸로 매달린 채 기절해 있었고, 다른 승객들은 버스 천장에 떨어지거나 부서진 의자 사이에 끼인 상태였다.
죄다 의식이 없어 보여 정대식은 매타작이라도 당한 것처럼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완전히 아수라장이로군.'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뒤엉켜 자기네들끼리 물고 뜯고 싸우는 중이었다.
그 틈바구니에 도로를 달리고 있던 차와, 그 차 안에 타 있던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마치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참혹한 광경.
'도대체 이 몬스터들이 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전방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거대한 야수가 발톱으로 찢어발긴 듯, 아스팔트가 다 부서져 일어난 도로 한가운데 웬 시커먼 구멍이 돋아나 있었다.
던전의 입구와도 유사해 보이는 구멍.
뜬금없이 나타난 그 틈을 보자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몬스터 브레이크?'
차원의 균열 사이로 몬스터들이 줄줄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이 이 사태가 혹, 몬스터 브레이크가 아닌가 하는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왜 갑자기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진 거지?'
몬스터 브레이크는 약 10여 년 전 발생한 적이 있었다.
확장 현실 세계가 시작된 후, 세계 곳곳에 솟아오른 구멍으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때 희생당한 인류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거의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과 맞먹는 수의 인간이 죽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자 구멍들은 던전으로 자리를 잡았고, 어느 정도 안정된 패턴을 보였다.
하지만 던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핵이라는 걸 주기적으로 파괴해 주어야 했다.
그러면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뛰쳐나오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핵을 파괴한다고 하더라도 던전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핵은 던전마다 다른 주기로 다시 재생되었다.
그 전에 던전을 공략해 핵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 헌터들의 사명이자 임무였다.
그런데 지금의 현상은 단순히 기존의 던전에서 벌어지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새로운 던전의 출몰.
10년 전 대참사가 터졌을 때의 현상과 같았다.
"으으으으......."
바깥의 상황을 살피며 이 상황을 판단하려 애쓰던 정대식은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거꾸로 처박힌 운전기사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정대식은 얼른 그를 버스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승객들도 밖으로 빼내어 바로 눕혔다.
그러고 나니까 중상자와 경상자가 판가름되었다.
운전기사와 젊은 여자 한 명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운전기사는 밖에서 날아온 파편에 맞아 등과 옆구리에 부상을 크게 입었고, 젊은 여자는 얼핏 보기엔 외상이 없어 보였으나 내상이 있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폐색증이 일어나는 것 같아 상황이 급했다.
'어떡하지?'
정대식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모조리 총동원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즉각 나타난 엔트로피에게 정대식은 빠르게 질문했다.
"치유 능력은 변화계 쪽이었던가?"
<그렇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을 치료하려면 변화계 능력을 개화해야겠군?"
<그렇겠지요.>
"금액은 당연히 천만 원일 테고."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천만 원 가지고 우물쭈물 댈 때가 아니었다.
정대식은 즉시 말했다.
"변화계 능력을 개화한다!"
<변화계 능력을 개화하고 천만 원을 차감합니다.>
"그리고 치유 스킬을 구매하겠어!"
<어떤 스킬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엔트로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점 창이 나타났다.
급히 그걸 들여다본 정대식은 신음을 흘렸다.
"......왜 이렇게 후진 거야?"
변화계에서 획득할 수 있는 치유 스킬은 총 네 개.
해독, 각성, 냉찜질, 온찜질.
현 상황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스킬이었다.
"형편없잖아!"
고함을 치는 정대식을 보고 엔트로피는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상점을 업그레이드할 경우 더 많은 스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추가 결제를 해야 할 거 아냐?"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하긴 개뿔......."
그때였다.
바닥에 누운 사람들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거인 풍뎅이가 다가왔다.
거대한 뿔을 치켜들고 우다다, 달려오는 그것을 향해 정대식은 곧장 자동 소총을 휘갈겼다.
투다다다다!
파바바바박!
마력탄이 날아가 부딪칠 때마다 거인 풍뎅이의 뿔에 불똥이 튀었다.
그런데 뿔이 워낙에 튼튼한 탓인지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전신이 단단한 갑피로 둘러싸여 있어 강화를 한 자동 소총으로도 소용이 없는 듯했다.
그 바람에 몹시 마음이 급해졌다.
"망할, 망할, 망할, 망할!"
정대식은 욕설을 쏟아 내놓으며 말했다.
"상점을 업그레이드한다!"
<상점을 Lv3으로 업그레이드하고 1억 원을 차감합니다.>
순식간에 1억이 공중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정대식은 큰 뿔을 겨누고 달려드는 거인 풍뎅이를 맞았다.
까라랑!
놈의 뿔을 막을 방법이 없어, 정대식은 급한 대로 강화된 자동 소총을 이용했다.
그걸 두 팔로 움켜쥐고 뿔을 가로막자,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끄으으윽!"
거인 풍뎅이는 길이만도 거의 2미터에 가깝고 그 덩치 또한 소 세 마리를 합친 것 같아서 힘이 무지막지하게 셌다.
근력이 21밖에 안 되는 정대식으로선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정대식은 놈에게 밀려 공중으로 번쩍 들렸다.
"으악!"
자동 소총째로 허공에 날아간 정대식은 저만치 깨진 도로 파편 위로 내던져졌다.
퍼억!
"으으윽!"
부딪친 등이 통째로 갈라지는 것 같았으나 의외로 이렇다 할 부상은 입지 않았다.
아마도 체력을 높여 둔 탓에 방어력이 오른 모양이다.
내동댕이쳐진 것치고는 멀쩡한지라, 정대식은 바닥에 누운 사람들에게로 달려드는 거인 풍뎅이에게로 달려갔다.
"이 자식아! 부상자들은 가만둬! 네 상대는 이쪽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정대식은 놈의 등짝 위로 뛰어올랐다.
거인 풍뎅이의 등은 철갑처럼 단단한 날개에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갈라진 틈이 있었으므로, 정대식은 그 사이로 총구를 쑤셔 넣고 마력탄을 쏟아 넣었다.
"으아아아아!"
쿠구구구구구!
겉 날개 틈바구니 속, 속 날개로 마력탄을 퍼붓자 거인 풍뎅이가 아픈지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진 정대식은 어쩌다 보니 거인 풍뎅이의 냄새 나는 궁둥이를 마주하게 됐다.
그 궁둥이에 뚫린 구멍으로 진액이 왈칵 쏟아져 내려 정대식은 식겁했다.
몹시 끈적하고 뜨거워 살갗이 화끈거렸으나, 진액이 쏟아지는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총구를 찔러 넣고 정대식은 마력탄을 휘갈겼다.
"죽어라아앗!"
퍼버버벙!
곧 거인 풍뎅이의 뱃속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만 놈의 아랫배가 시커멓게 변했다.
"뀌이이이잇!"
거인 풍뎅이가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고 정대식은 몸을 굴려 놈 밑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주춤거리던 거인 풍뎅이가 여섯 다리에 힘을 잃은 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곧 배가 터지며 안에서 내장과 체액이 쏟아져 나왔다.
퍼어억! 주르르르!
무럭무럭 김이 나는 내장 위에 거꾸러진 채 거인 풍뎅이가 미동이 없었다.
죽은 것이다.
"어휴."
한숨을 내뱉은 정대식은 곧장 업그레이드된 상점을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스킬 목록이 늘어나 쓸 만한 치유 스킬이 생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지혈을 구매하겠어!"
<지혈 스킬을 구매하고 천만 원을 차감합니다.>
"각성, 각성도 구입해!"
<각성 스킬을 구매하고 천만 원을 차감합니다.>
두 가지 스킬을 획득한 정대식은 구르다시피 해 부상자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량 출혈로 안색이 안 좋은 운전기사에게 지혈 스킬을 썼다.
"지혈!"
파아아아아-.
은은한 마력이 운전기사에게 흘러 들어가 찢어진 살갗과 혈관이 아물었다.
다음으로 호흡이 완전히 정지해 버린 젊은 여자에게 각성 스킬을 썼다.
"각성!"
"허억!"
마치 심장 마사지라도 받은 것처럼 젊은 여자가 가슴을 크게 들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고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쉬었다.
그러나 다시금 축 처지며 호흡이 가늘어지려고 들었다.
일단 소생을 시키긴 했으되,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온 사방이 아수라장이었으므로 구급차를 부른다고 한들, 제때 도착할 리가 없었다.
정대식은 기껏 살린 여자가 도로 죽겠다 싶어서 엔트로피를 붙잡고 소리쳤다.
"이 여잔 도대체 어디가 문제야? 왜 다시 죽으려고 그러는 거지?"
그 말에 엔트로피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진단 스킬을 구매하십시오.>
"진단 스킬? 그게 있으면 어디를 어떻게 다친 건지 알 수 있어?"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그것도 사겠어."
<진단 스킬 구매를 위해서는 상점을 업그레이드하셔야 합니다.>
"또?"
<상점을 Lv4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10억 원의 추가 결제가 필요합니다.>
"10억!"
10억은 너무 비쌌다.
말도 안 되게 비쌌다.
그동안 정대식이 열심히 돈을 모으긴 했어도 그만큼을 모으지는 못했다.
더구나 상점을 레벨 3으로 업그레이드하느라 이미 1억을 써 버렸다.
돈이 턱도 없이 모자랐으므로 진단 스킬을 구입하는 건 무리였다.
"그럼 어떡해? 방법을 좀 찾아봐!"
정대식이 억지를 쓰며 소리 지르는 걸 듣고 엔트로피가 말했다.
<치료 스킬을 구매하는 게 어떠신지요?>
"치료 스킬? 그거면 되나?"
<치료 스킬은 모든 종류의 부상에 적용됩니다. 다만 일정 레벨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 효과가 미미합니다.>
"그럼 기껏 스킬을 사서 써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 아냐?"
<이 여성은 일반인이고 겉보기로는 부상이 그리 심각치 않으니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이잇, 알았어. 치료 스킬도 구매해!"
<치료 스킬을 구매하고 천만 원을 차감합니다.>
정대식은 엔트로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치료 스킬을 시전했다.
"치료!"
겉보기로는 마력이 흘러들어 갔다는 것 외에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애당초 외상이 없었으니까 치료 스킬을 썼다 해도 별 티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호흡이 안정되면서 안색이 되돌아오는 걸로 봐서는 한 고비 넘긴 것 같았다.
그제야 정대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다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