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현질 전사
-1권 20화
다급한 순간은 넘겼으니 이제 이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도로가 다 부서지고 온 사방이 몬스터 천지라 어떡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버스에서 잠들 때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는데.......'
정대식은 아연해 넋을 놓았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무슨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이야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게 정대식의 바람인지도 몰랐으나, 불행히도 이건 전부 현실이었다.
일상의 균형이 깨지고, 평범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참혹한 현실.
새삼스런 자각에 몸을 부르르 떨던 그때.
쐐애애애애애애액-.
"어엇!"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이 울렸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자 전투기 세 대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게 보였다.
그 전투기가 몬스터들이 꾸역꾸역 밀고 나오는 구멍을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꾸과과과과과과광!
전투기들이 지나가고 나자 이번엔 로켓이 날아왔다.
로켓 수십 발이 구멍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곧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쿠과아아아아아앙!
"으아악!"
이러다 폭발에 휘말려 죽겠다 싶어서 정대식은 황급히 버스의 차체를 끌어당겼다.
그걸로 도로에 누운 부상자들을 가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생존자들은 생각 안 하냐! 이 무식한 놈들아!"
군부대가 출동했는지 여기저기서 폭발음이 연이었다.
일반적인 무기의 효과가 미미하다 보니, 있는 대로 화력을 동원하는 모양이었다.
융단 폭격이라도 퍼부어 이 일대를 아예 소거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관계로, 정대식은 버스를 도로 밀쳤다.
그리고 운전기사와 젊은 여자를 양 어깨에 걸고 할머니를 목에 걸었다.
그런 뒤 양 옆구리에 나머지 두 사람을 꼈다.
그렇게 다섯 사람을 한꺼번에 들쳐 메고 도로를 내달렸다.
"으랴아아압!"
그야말로 초인적이었다.
체력 수치를 높여 둔 덕분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정대식은 이를 악물고 아수라장을 벗어나기 위해 도로를 벗어났다.
그리고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는데, 눈앞에 금속 쇠똥구리가 나타났다.
"치르르르르!"
놈은 쇠와 돌을 뭉쳐 만든 커다란 돌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그걸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굴릴 기세였다.
정대식은 이를 득득, 갈며 금속 쇠똥구리의 눈치를 살폈다.
녀석이 어느 쪽으로 돌덩어리를 집어던질지 가늠을 하고 있노라니, 금속 쇠똥구리가 그걸 있는 힘껏 내던졌다.
후우우웅-!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그 공을 피해 정대식은 몸을 날렸다.
"끄으윽!"
그 바람에 그가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 주변으로 다 나자빠졌다.
콰앙!
불행 중 다행으로 금속 쇠똥구리가 집어던진 공은 그를 비껴 났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도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땐 금속 쇠똥구리가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전신이 금속처럼 단단한 껍질로 뒤덮인 놈은 방어력이 특출 났다.
쉽사리 이길 수 없으리란 걸 예감하고 정대식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저항해 보려 자동 소총을 끄집어냈다.
'맘 같아선 강화 스킬의 레벨을 더 높이고 싶지만...... 그것도 10억이다.'
돈이 없는 관계로 정대식은 처참한 기분을 느끼며 자동 소총을 겨누었다.
'빌어먹을...... 돈이 필요해! 더 많은 돈이!'
정대식은 눈을 질끈 감고 자동 소총을 휘갈겼다.
"으아아아아!"
투다다다다!
마력탄이 발광하며 쏘아져 나갔으나 금속 쇠똥구리의 단단한 몸이 그걸 모조리 튕겨 냈다.
따다다다당!
금속에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금속 쇠똥구리가 치르르르, 울었다.
그리고 뾰족한 주둥이를 내밀고 이쪽으로 돌진해 오려고 했다.
바로 그 찰나.
"라이트닝!"
꽈르르르르르릉!
낭랑한 외침과 함께 귀청을 찢어 놓는 천둥이 울렸다.
곧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날카로운 빛줄기.......
천벌과도 같은 벼락이 내리꽂혔다.
빠지지지지지직!
거기에 직격당한 금속 쇠똥구리의 전신이 퍼르르 떨렸다.
금속이라 그런지 벼락이 거두어지고 나서도 온몸이 한참을 구워졌다.
완전히 뇌전이 가시고 나서 금속 쇠똥구리는 탄내를 풍기며 맥없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정대식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저편 하늘에서부터 시커멓게 몰려오는 먹구름을 보았다.
쿠르르르릉!
정확히는 그 먹구름을 몰고 나타난 인영을 주시했다.
몰아치는 폭풍 한가운데 선 인물은 놀랍게도 가냘프게 보이는 여인이었다.
눈처럼 희고 긴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리는 가운데, 그녀가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썬더 웨이브!"
그러자 검은 먹구름에서 마치 치맛자락처럼 수십 가닥의 번개가 뻗어 나왔다.
그것이 너울너울 춤추듯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는 지상에 닿기가 무섭게 그 벽력이 파도처럼 몬스터를 휩쓸었다.
콰과과과과과과----------!
장엄하고도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으나, 거기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죽는다!'
그 공격에 휘말려 지상에 있던 사람들까지 다 죽게 생겼다.
미처 피할 겨를이 없어, 정대식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하지만 아무런 충격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했던 게 무색한 기분이라 그는 살그머니 실눈을 떴다.
그러자 방어막과도 같은 게 자신들 주변으로 둘러쳐진 게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도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막 머리 위를 지나는 뇌전의 여신이 보였다.
그녀는 신화 속 인물처럼 거오(倨傲)하고도 차가운 표정으로 정대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니?'
뜻밖의 윙크에 가슴이 저 밑으로 쿵, 떨어졌다.
정대식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뇌우를 몰고 몬스터들을 휩쓸어 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정체는 정대식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은 최희.
대한민국에 단 하나뿐인 3등급의 헌터.
독보적인 SS급...... 일명 슈퍼스타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최희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그간 숱하게 들어왔다.
TV에서도 그 얼굴을 얼마나 자주 봐 왔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물을 마주 대하는 기분은 전혀 달랐다.
압도적이다.
오로지 그 말밖에는 떠오르질 않아, 정대식은 한참 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 *
이용-! 이용-!
구급차와 소방차,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정대식은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붙잡는 응급 구조 요원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러니까, 난 괜찮다고요."
"안 괜찮아 보입니다! 당장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기저기 던져지고 구르는 바람에 이곳저곳 생채기를 입기는 했다.
하지만 스스로 지혈과 치료를 이용해서 응급 처치를 마친 상태였다.
타박상 말고는 이렇다 할 부상이 없었으나, 계속 자신을 붙들고 늘어지는 응급 구조 요원이 귀찮아서 정대식은 모포로 몸을 감싸고 소독을 받았다.
그리고 따끔따끔한 걸 참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저와 같이 버스에 타고 있었던 승객들은 괜찮습니까?"
그러자 응급 구조 요원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잠깐만 여기 계세요."
응급 구조 요원이 자리를 비운 새, 정대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희의 활약으로 몬스터들이 소탕되자 즉시 각성자들이 나타나 사태를 정리했다.
엉망이 된 도로를 대충이나마 복구해 구조 차량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초능력을 써서 위급한 부상자들을 신속하게 옮겼다.
그 광경을 보자니 한시름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뭔지 모를 불안감, 일종의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여태껏 몸 안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떨치려 몸을 부르르, 떠는데 웬 공무원들이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혹시 각성자 되십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만."
"버스에 타고 계셨던 각성자 맞으시죠?"
"예, 무슨 일이십니까?"
"아, 저희는 국민안전처의 괴수 대책반에서 나온 조사원입니다. 이번 일에 관해서 몇 가지 질문 사항이 있어서요."
"그러시군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셔야 할 테니까 지금 당장은 그렇고, 괜찮으시면 나중에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정대식은 알겠다고 이름과 연락처를 넘겨준 뒤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조사원들이 떠나는 걸 보고 그 명함을 아무렇게나 구겨 넣는데, 저쪽으로 눈길이 확 끌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최희가 나타난 것이다.
'TV에서 질리도록 봐 온 얼굴이지만 실물이 훨씬 더 예쁘네.'
그녀는 전신에 딱 달라붙는 검은 슈트 차림이었다.
미래의 섹시 여전사나 입을 법한 방어구였으나 그 복장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아마도 전성기의 케이트 베킨세일 뺨치는 몸매 덕분일 것이다.
거기다 자칫 잘못하다간 할머니 같아 보이는 흰 머리도 늙어 보이기는커녕, 신비로움에 한몫을 더하고 있었다.
'백발이라기보다는...... 은발이라고 해야 하나?'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정대식은 곧 화들짝 놀랐다.
'설마 지금 이쪽으로 다가오는 건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최희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곧장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딱 마주쳤을 땐 그 생각을 단지 기분 탓이라 여기기도 힘들게 되었다.
'이쪽으로 온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정대식은 이윽고 최희를 코앞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정대식은 시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으나 최희의 얼굴에서 어떤 흠집도 찾아낼 수 없었다.
점이나 주근깨는커녕 모공 한 알도 안 보였다.
'진짜 사람 맞아?'
비현실적인 미모가 마치 등신대 크기의 피규어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덕분에 아무런 반응을 못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버스에 타고 있었다던 그 헌터인가요?"
최희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굉장히 허스키했다.
방송에서 볼 때도 그렇다고 여겼는데 실제로 들으니까 더 그랬다.
하지만 전파로는 느낄 수 없는 낭랑함과 쾌활함이 느껴졌다.
"아, 그...... 쿨럭, 쿨럭. 예, 옙. 음. 흠흠."
정대식은 서둘러 대답하다가 그만 사레가 들려 기침을 토했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입술을 들어 올린 최희가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찾으셨어요."
"예?"
"자길 구해 준 젊은 헌터가 어떻게 됐냐고 연신 물으시더라고요."
"그, 그렇습니까. 그분은 어떻죠?"
"몹시 놀란 것 같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어요. 무사히 병원까지 모셔다 드렸으니 괜찮으실 거예요."
"직접 모셔다 드린 겁니까?"
"아무래도 고령자니까...... 그 외에도 여러 명."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최희는 곧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그 할머니가 당신의 안부를 꼭 확인해 달라고 해서 부러 되돌아 온 거예요."
"아, 예에."
"보아하니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저야 뭐어......."
정대식이 눈만 끔벅거리고 있자 최희는 곧 훗, 하고 웃었다.
그녀가 웃으니 어디서 박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던 정대식은 곧 주먹으로 손바닥을 딱 쳤다.
그리고 퍼뜩 몸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그런 그를 보고 최희가 의아해하자 정대식은 말했다.
"사인 좀."
최희는 그 말에 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뜻밖이라고 해야 할까, 허를 찔린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미묘한 기색을 드러내다가, 갑자기 허공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이름이 뭐죠?"
"정대식...... 정대식입니다."
"정대식이라."
일필휘지로 사인한 최희는 곧 그걸 정대식에게 건네주었다.
"자."
"고맙습니다."
정대식이 냉큼 그것을 받아 들자 최희는 이걸로 됐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침착하고 도도한 걸음걸이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