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현질 전사
-1권 23화
평소 최희를 TV에서 계속 봐 오긴 했어도 딱히 그녀의 팬인 건 아니었다.
그러니 사인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인을 해 달라고 한 것은, 소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해서였다.
'최희의 사인이 귀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사인을 안 해 주는 성미였나? 그래서 사인이 비싼 거였어?'
사인이 왜 비싼지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정대식은 곧 엄청나게 억울한 기분이 됐다.
"그것도 고작 1억에 내 사인을 갖다 팔아요? 10억을 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내 사인이 그렇게 싸구려인 줄 알았어요?"
"뭐, 뭐라고요? 10억? 그게 그렇게 비싼 거였어요?"
"난 절대로 사인 따위 안 해 준단 말이야!"
"이럴 수가...... 그럼 9억이나 손해 본 셈이잖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9억을 까먹은 셈인데, 그게 문제가 아니면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배 아파 죽으려 하는 정대식을 보고 최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화르르 불태우며 정대식을 노려보다 정대식이 보는 앞에서 그 아까운 사인지를 북북 찢었다.
"으악! 그걸 왜 찢어요?"
"내가 준 거니까 내 맘이다, 왜!"
꽥 소리를 친 최희는 종이 쪼가리가 된 사인지를 정대식에게 집어던지고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도블록을 깨부수며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남은 건 사방에 흩날리는 종잇조각과 망가진 인도뿐이었다.
망가진 보도블록과 공중분해 되어 버린 9억을 바라보며 정대식은 혀를 쯧쯧, 찼다.
"본인은 억만장자라 이거지. 사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보도블록은 왜 부수는 건데? 이게 다 국민이 낸 세금이라고!"
애꿎은 보도블록을 걷어찬 정대식은 넌더리를 내며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시장 입구 멸치 쌈밥 집에 앉아 휴대폰으로 막공 모집 글을 썼다.
-'케르베로스 막공 구합니다. 탱커, 버퍼, 힐러, 원딜 완비.'
* * *
정대식의 구인 글은 그야말로 박 터졌다.
탱커, 버퍼, 힐러가 다 있는데 딜러만 구하는 자리라고 하니 다들 혈안이 되어 달려들었다.
덕분에 막공 모집에는 채 1분이 다 걸리지 않았다.
쪽지함이 터지려고 해서 낡아 빠진 휴대폰이 버벅거린 것만 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정대식은 그간 일꾼으로 일한 경험과 막공에 다녀 본 경험을 살려 트럭과 짐꾼, 이런저런 장비를 구해 놓고, 서울역에서 오전 7시에 파티원들과 만났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전동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10분가량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미 서로를 알아보았는지 그와 동행하기로 한 딜러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정대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정대식은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케르베로스 잡으러 가는 분들이죠? 반갑습니다. 제가 글 올렸던 정대식입니다."
그러자 딜러들이 차례대로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해 왔다.
"예에, 반갑습니다."
정대식이 모집한 딜러들은 총 네 명이었다.
근딜이 셋, 원딜이 하나였다.
그들과 대강 안면을 익힌 정대식은 대기하고 있던 트럭을 부르며 말했다.
"그럼 슬슬 출발할까요? 아침 식사는 던전 앞으로 가서 합시다."
그 말에 딜러들이 당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인원이 이게 답니까?"
"힐러랑 버퍼는 어디 있죠?"
"분명히 힐러에 버퍼가 있는 막공이라 본 거 같은데."
혹, 정대식이 거짓말이라도 한 게 아닌가 다들 의혹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그제야 정대식은 자신이 중요한 말을 빠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설명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말한다는 걸 깜박했네요. 실은 그 힐러와 버퍼가 접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다면 난 사냥 안 갈 겁니다."
"힐러랑 버퍼도 없이 어떻게 케르베로스를 잡아요?"
숨 가쁘게 늘어놓는 불평을 가로막으며 정대식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닙니다. 정말로 제가 탱커일 뿐만 아니라 힐러와 버퍼, 거기다 원딜의 역할까지 소화가 가능합니다."
그 말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도 안 돼!"
"그럼 듀얼 능력자라도 된단 말예요?"
"진짜일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세 가지 포지션...... 아니지, 네 가지 포지션을 한 번에 소화 가능해?"
정대식은 답답함에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이라니까요. 뭣 하면, 지금 이 자리서 보여 드릴까요?"
장담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딜러들은 사실을 믿지 못했다.
증거를 원한다고 해 정대식은 서울역 앞 광장에서 뜬금없이 스킬 자랑을 하게 됐다.
그가 강화로 딜러와 버퍼, 탱커 역할뿐만 아니라, 치료 능력으로 힐러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말이 정말이었어? 듀얼 능력자라고요?"
"세상에! 난 듀얼리스트는 태어나서 첨 봐요!"
"어떡하다가 하나도 타고나기 힘든 능력을 여러 개나......."
"아니, 그래도 난 못 믿겠어!"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까다롭게 생긴 원딜 하나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당신이 듀얼리스트라면 소문이 안 났을 리가 없어. 내가 이래 봬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데다 귀가 밝아서 어지간히 유명한 헌터들은 모조리 알고 있는데, 정대식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고요. 사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요!"
"아니, 내 능력을 실제로 확인까지 해 놓고도 못 믿겠다 이겁니까? 그럼 뭐, 도대체 어떡해야 믿을 겁니까?"
"뭣보다 듀얼 능력자가 왜 막공엘 나옵니까? 벌써 대형 정공이 채가도 채갔지. 됐어요, 증명할 필요도 없고 난 오늘 사냥에서 빠질 겁니다."
"이봐요, 이제 와 이렇게 파토를 내면 어떡합니까?"
"서울역 앞에 널린 게 딜러잖아요. 당신이 듀얼리스트란 걸 믿어 주는 사람이랑 같이 가든지 해요."
그 원딜은 일행을 남겨 두고 힁허케 가 버렸다.
그러자 남은 사람들도 서로의 눈치를 봤다.
다들 정대식이 듀얼 능력자라는 사실에 의구심을 느끼나 보았다.
떠나간 원딜이 한 말이 요모조모 옳은데다가, 어떤 의혹을 안고 사냥을 가기에는 케르베로스가 지나치게 위험했다.
잘못 하다가는 그냥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관계로, 하나둘씩 발을 뺐다.
"......나도 이런 찜찜한 기분으로 사냥은 못 가겠어요."
"지옥마수 정도면 모를까. 케르베로스는 위험하잖아요. 나도 빠질래요."
"그럼 나도 가야겠네?"
그런 식으로 기껏 모은 딜러들이 모조리 가 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정대식은 이를 갈았다.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못 믿을 놈들이네!"
즉석에서 다른 딜러들을 구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과 같은 일이 또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사실 정대식이 생각키에도 뜬금없이 튀어나온 듀얼 능력자가 의심쩍을 만도 했다.
그가 짐꾼으로 일할 때도 본인의 능력을 뻥튀기하거나 과신하는 헌터들이 동료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꼴을 여러 번 봤다.
그러니 만큼 정대식 역시도 이런 상황에서는 주저하게 될 터였다.
목숨이 걸린 문제이니 만큼 신중한 것을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젠장...... 목표를 낮춰? 지옥마수 정도면 딜러들을 도로 데려올 수 있을 텐데.'
그때였다.
"정대식?"
* * *
정대식은 뜬금없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용대형.
정대식이 헌터가 되어 처음으로 사냥을 떠났을 때, 함께 썰자팟을 구성했던 인물이었다.
"용대형? 여긴 어쩐 일로......."
정대식이 묻는 말에 용대형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야 당연히 사냥 가러 나온 거지!"
우리라는 말을 듣고 뒷전을 살피자, 예전 용대형과 함께하던 인물들이 그대로였다.
근딜인 김준석과 기철민, 원딜인 강민혁과 신금주, 이 네 사람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표정으로 정대식을 보고 있었다.
특히 전에도 내내 시비였던 기철민은 대놓고 떨떠름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정대식을 외면한 채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정대식은 그를 모르는 척하고 말을 이었다.
"누구 픽업이라도 하러 왔나 봐?"
용대형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우리 파티 고정 멤버 중에 한 명이 아예 그만둬 버려서. 전부터 다른 파티랑 양다리를 걸치더니만, 정식 공격대를 창설한다는 말에 홀랑 넘어가 버렸지 뭐냐."
"그래?"
"아무래도 우리 다섯 사람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지 싶어, 한 사람 더 모집했는데 펑크를 냈어. 그래서 부랴부랴 인원 채우는 중이야."
그렇게 상황 설명을 한 용대형은 정대식에게 함께 사냥을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갈래?"
"어딜 갈 생각인데?"
"지옥견이나 잡아 볼까 하고."
공교롭게도 그들이 목표로 하는 던전은 정대식이 가려는 S23D였다.
단, 목표로 하는 층수가 다르기는 했다.
정대식은 지하 5층의 케르베로스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지하 2층의 하수를 잡으려는 것이다.
보아하니 그 멤버에 그 수준이라, 계속 어울려 다니면서도 썰자팟을 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들과 첫 사냥을 한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 제자리라 해서 나무랄 게 아니야. 내가 지나치게 빨리 성장한 거다.'
이게 바로 현질의 힘.
새삼스레 그 사실을 자각하며 정대식은 고개를 저었다.
"난 따로 사냥감이 있어서."
용대형이 그리 말하는 정대식을 보고 경박한 소리를 냈다.
"오올~ 이제 사냥 좀 제법 다녔다고 말하는 게 그럴싸한데? 그새 초보 티 다 벗은 거야? 도대체 뭘 잡으러 가려고 그러는데?"
정대식은 알 바 아니라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퍼뜩, 눈앞의 파티를 놔두고 굳이 다른 딜러들을 구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정대식은 용대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용대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래?"
쳐다보는 이유를 몰라 하는 그에게 정대식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나랑 같이 사냥 갈 생각 없어?"
용대형은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 제의는 내가 먼저 한 것 같은데?"
"아니, 내 말은...... 내가 너희 파티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너희가 날 따라오라는 거지."
정대식이 하는 말을 듣고 모르는 척 서 있던 기철민이 콧방귀를 꼈다.
"하! 각성한 지 몇 개월 된 초짜배기가...... 아주 간덩이가 부어터졌네."
빈정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정대식은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내가 모집한 파티가 깨져서, 새로 딜러들을 구하려던 참이야. 너희는 제법 구성이 괜찮으니까. 내가 가담하면 케르베로스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걸?"
케르베로스라는 말에 용대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케르베로스?"
"그래."
"진담으로 하는 말이야?"
못 믿어 하는 용대형을 보고 정대식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이런 농담이나 할 만큼 한가해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