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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 전사-27화 (27/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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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 전사

-2권 2화

실제로 체력을 키우고 났더니 한나절을 던전 안에 있으면서 케르베로스를 세 마리나 사냥했어도 지치지 않았다.

전 같았으면 몬스터 처리소에서 그렇게 유난을 떨지도 못했을 테다.

아마도 피곤해서 빨리 정산하고 집으로 돌아가 뻗어야겠다는 생각만 굴뚝같았을 게 분명하다.

실제로 그곳에서 다른 파티원들은 맥을 추지 못했었다.

다들 정산이 끝나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며 사무실 소파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오로지 정대식만이 팔팔해 처리소 직원들을 죽어라고 괴롭혔다.

그런데 지금은 체력을 40으로 훌쩍 끌어올려 놓았으니, 아마 3박 4일 잠 한숨 안 자고 일한다 하더라도 멀쩡할 수 있을 테다.

'좋았어. 이 체력을 바탕으로 소처럼 일하는 거다. 개같이 벌어야지!'

돈에 대한 욕구를 활활 불태우며 정대식은 엔트로피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내 잔액이 얼마야?"

<정대식 님의 잔액은 353,634,429원입니다.>

"3억 5,300 정도가 남았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일단 이건 킵해 두고......."

좀 쉬려고 했는데 체력을 올리는 바람에 기운이 넘쳐흘렀다.

지금 당장 또 사냥을 가도 될 지경이었으나, 해가 진 상태라 바로 던전에 들어가기는 무리였다.

'내일 해가 뜨자마자 사냥 갈 수 있게 미리 파티를 모집해 둬야겠다. 어제 같이 일한 애들이 오늘 또 가려고 하진 않을 테니까 새로 구해야겠지? 아까 했던 것처럼 굳이 능력을 다 밝히지 말고 적당히 말해서 모아야겠어.'

정대식은 덜덜거리는 노트북을 켰다.

윈도우가 열리는 데도 한세월이었다.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나 돈을 벌었으면 노트북 정도는 새로 살까 싶었다.

정대식은 느려 터진 노트북이 시동되길 기다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노트북이 요새 얼마나 하나......."

그걸 질문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아직까지 머물러 있던 엔트로피가 대답했다.

<현재 노트북의 시세를 알 수 없습니다.>

정대식은 움찔했다.

"아, 깜짝이야...... 너, 아직 안 없어졌어?"

엔트로피는 허공에 둥둥 떠 있으면서 말했다.

<정대식 님의 체력이 향상됨에 따라 제가 구동되는 시간이 길어진 겁니다. 대기 모드 전환 설정을 새로 하시겠습니까?>

"그런 것도 돼?"

무심코 질문한 정대식은 퍼뜩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너, 현재 노트북 시세를 알 수 없다 그랬지? 그럼 그걸 알 방법도 있다는 말이야?"

<상점을 업그레이드함에 따라, 저 역시도 진화합니다. 상점이 4레벨에 이를 시 온라인 네트워크 접속이 가능해집니다.>

"뭐? 그럼 검색이나 막...... 이런 것도 된다고?"

<그렇습니다.>

"노트북처럼 인터넷 창도 볼 수 있고 그래?"

<설정하기에 따라 가능합니다.>

"아니, 그런 게 되면 진즉 말을 좀 하지! 하마터면 노트북 사느라고 헛돈 쓸 뻔했잖아!"

괜한 역정을 내며 정대식은 엔트로피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어딘지 모르게 시건방진 듯 보이는 놈이 마음에 안 들어서 무관심했던 게 화근이었다.

알고 보니 엔트로피가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았다.

지금은 상점 수준이 낮아서 한계가 있다지만, Lv3인 지금도 오프라인 상태의 노트북 정도 기능이 가능했다.

맘 같아서는 당장 상점 업그레이드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열 배로 뛰는 탓에 불가능했다.

그건 다음에 하기로 하고, 정대식은 간신히 켜진 노트북을 붙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헌터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곧장 구인 카테고리를 열어 보려는데, 메인 화면에 뜬 베스트 게시글이 보였다.

[로또 맞음. 인증한다.]

로또라는 말에 눈이 번쩍했다.

어느 놈이 재수 좋게 로또에 당첨이 됐단 말인가?

부러워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역시 헌터들도 로또를 사는구나 싶었다.

몇억씩, 한 번에 거금을 턱턱 벌어들이는 헌터는 흔치 않다.

9, 10등급 되는 하수라면 제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월급쟁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설령 대기업에 다니는 정도로 번다고 하더라도, 부대 비용이 많이 드는 탓에 순이익은 형편없다.

그런 관계로 썰자팟만 죽자고 돌아다니는 별 볼 일 없는 헌터들 같은 경우, 보통 사람들처럼 로또 당첨을 바라기도 하는 것이다.

정대식은 호기심으로 무심결에 그 게시글을 클릭해 보았다.

그러자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이미지가 느릿느릿하게 떠올랐다.

"아이씨, 크기 좀 줄여서 올리지......."

투덜거리며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으나 그마저도 느렸다.

정대식은 욕설을 지껄이며 화면이 다 뜨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주민번호와 계좌번호와 같은 개인 정보를 가린 인증샷이 떠올랐다.

헌터들이 흔히 이용하는 스테이터스 출력물과 함께 찍힌 온라인 뱅킹의 입금 내역이었다.

스테이터스라는 것은 이른바 인바디라는 기계와 비슷하다.

손잡이에 마력을 흘려 넣어 몸 상태를 점검해 주는 것인데, 생명력, 공격력, 방어력, 순발력 같은 것들을 대략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헌터들이 몇 등급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이 스테이터스의 등급 기준을 놓고 하는 소리였다.

단, 그 정확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신체 상태를 측정해 주는 인바디가 사람에 따라 나뉘듯이, 이 스테이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컨디션이나 보유하고 있는 마력량에 따라 결과가 수시로 바뀐다.

그래서 이 스테이터스 기기를 이용할 때는 최대한 같은 조건에서 측정을 해야 했다.

그런고로 그렇게까지 신뢰할 만한 자료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거 말고는 헌터들의 능력을 나눌 만한 기준이 딱히 없는 탓에 애용되고 있었다.

화면에 찍힌 인증샷의 스테이터스 출력표는 9등급.

보통이 8~9등급 정도니까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썰자팟이나 막공에 널리고 널린 수준이었다.

그런데 온라인 뱅킹에 찍힌 입금 액수가 상당했다.

대략 7억 가까이의 금액이 한 번에 들어와 있었다.

9등급짜리 헌터가 벌 수 있을 만한 액수가 아니었다.

"호오......."

감탄하며 화면을 들여다보던 정대식은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잠깐만, 이거 설마......?'

그는 스크롤을 내려 인증샷 밑에 적힌 글을 확인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나 오늘 대박 쳤다. 빚쟁이한테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심정으로 레이드 뛰었는데, 재수가 좋아서 빚 한 번에 갚을 수 있게 됐음. 이제 헌터 생활은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건실하게 살 생각.]

글의 내용 역시도 낯익었다.

빚이 많아서 그거부터 갚아야 한다고 말을 하던 딜러가 생각이 났다.

유난히 죽다 산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자식이 쓴 게 확실했다.

정대식은 마우스를 드륵드륵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 개씹......."

그는 정대식에게 거짓말을 했다.

정대식이 알기로 케르베로스 사냥에 참가한 딜러들은 전부 8등급이었다.

원래는 이 개놈이 찍어 올린 인증샷과 같이 스테이터스 측정 결과를 확인해야 했지만, 이미 한 번 파티가 깨진데다가 귀찮아서 생략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실력이 처지는 놈이 끼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메울 수 있을 테니 신경을 안 쓴 탓도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속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살하는 심정으로 레이드를 뛴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이건 죽으려고 음주운전을 하거나 과속 운전을 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라고?

정대식은 연신 욕설을 지껄이면서 밑에 댓글들을 확인했다.

대부분이 부럽다, 좋겠다는 말들이었다.

간혹 헛소리나 다름없는 악플이 달려 있기도 했고, 자작이 아니냐 의심하는 댓글도 있었으나 그건 무슨 글이든 다 똑같은 거고.

개중엔 오늘 정대식의 파티가 케르베로스를 세 마리나 잡아들인 것을 언급하는 내용도 있었다.

[나 이거 어딘지 알 거 같음. 아까 S23D에서 막공이 케르베로스를 세 마리나 잡아갔음.]

그 밑에 목격담들이 줄줄이 이어지며 이런저런 추측들이 난무했다.

[S23D면 석우원 파티 아닌가?]

[ㄴㄴ 그 팀 더 이상 막공 아님. 최근 정공으로 바뀌었음.]

[케르베로스 세 마리 잡느니 지옥용 한 마리를 잡겠다~~~~.]

[개랑 용이랑 같냐?]

[그 파티장 내가 아는 사람임. 예전에 짐꾼이었다가 갑자기 각성했다던데.]

[짐꾼 출신 헌터라면 석우원 파티 맞음. 같이 사냥 다니는 거 몇 번이나 목격함.]

[누가 그 사람 듀얼리스트라던데. 아닌가?]

[듀얼리스트가 왜 막공에 있어...... 아님.......]

[그러고 보니 오늘 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지가 듀얼리스트라고 우기는 놈 봤는데.]

실시간으로 댓글이 계속 올라오는 가운데, 정대식이 처음 모집한 파티를 깨트린 딜러들 중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몇 번 댓글을 달다가 다른 사람들의 설명에 상황 파악을 했나 보았다.

곧 우는 표시를 줄줄이 달면서 아쉬워 죽으려고 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그거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듀얼리스트에 지 혼자 포지션 네 개나 가능하다고 해서 쫑 냈음.......]

[헐...... 왜 그럼......?]

[지 복을 지 발로 찼네.......]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재수 지지리도 없음 ㅋ]

[암만 듀얼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네 개 포지션은 불가능하지 않나? 설마 힐러는 아닐 테고.]

[탱커, 버퍼...... 근딜, 원딜 나눠서 네 가지가 된다는 소리 아님?]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정대식은 그 댓글을 보며 킬킬댔다.

"그러니까 사람 말을 믿었어야지. 꼴좋다!"

고소해하며 그 게시글에서 빠져나온 정대식은 쪽지함에 쪽지가 99개 들어찬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말 그대로 쪽지함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몇몇 발 빠른 사람들이 벌써 어제 정대식이 작성한 모집 글을 찾아보고 그에게 쪽지를 보낸 것이다.

"히야...... 이게 다 뭐야......?"

일일이 열어 볼 엄두가 안 나서 제목만 대강 훑어보았는데 7, 8등급 헌터들이 대거 쪽지를 보내 놓았다.

꼭 함께하고 싶다는 둥, 다음번에는 같이 사냥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둥, 항시 대기 중이라는 둥.......

간혹 9, 10등급짜리도 있었는데,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정대식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쪽지함을 다 비우고 당분간 모든 쪽지를 수신 거부해 두었다.

그런 뒤 자신이 작성한 게시글을 찾아서 지우고, 인증샷을 올린 그 개자식한테 쪽지를 보냈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글 내려라. 9등급인 게 뭐 자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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