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현질 전사
-2권 8화
정대식은 녹초가 되어 막사로 기어 들어가 뻗는 임시 대원들을 보며, 자신의 체력 수준을 실감했다.
'역시, 이 정도로는 멀쩡하네. 가볍게 운동한 정도의 피로밖엔 없어.'
직접적인 공격력도 엄청나게 늘었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그냥 주먹으로 한 방 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즉사였다.
부상은 아예 입지 않았다.
강화 알루미늄 방어구 덕분인지, 아니면 체력 수준이 올라가면서 전체적인 방어력도 함께 상승한 덕분인지, 그 아수라장을 헤치고 왔음에도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반면, 다른 임시 대원들은 대다수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그들은 대형 공격대에 속해 있는 만큼, 그래도 베이스캠프에 당도하고 나면 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의료 팀이 제공하는 기본적인 치료와, 부상이 심한 자에 한해서 회복 가속 포션을 지급받았을 뿐이었다.
그 사실에 대해 금발을 비롯해 몇몇 헌터들은 불만을 토해 냈다.
그러나 기철민을 비롯해 몇 명은 응당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쓸데없는 기력을 소모하지 않았다.
그 외 대다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적응하고 있었다.
힘들기도 했거니와, 이미 계약한 바와 약속된 보수가 있으니 불평하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최대한 힘을 아끼고 가능한 효율적으로 싸워, 무사히 살아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휴식을 취하기에도 바빴다.
정대식 역시 잠깐 누워 눈을 붙였다.
하지만 혼자 힘이 남아돌아서 그런지 그리 오래 자지는 못했다.
몇 시간 안 되어 눈을 뜬 그는 변의를 느끼고 막사를 벗어났다.
그리고 화장실을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렇게나 노상 방뇨 등을 해도 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았다.
배설이라는 행위가 몬스터를 불러 모을 수도 있고, 혼자 으슥한 수풀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막사 중앙에 간이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간이 화장실이라고는 해도, 칸막이 안에서 휴대용 변기를 쓰는 수준이다.
휴대용 변기는 일종의 종이봉투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안에다 볼일을 보면 배설물이 자동으로 고체화되는 식이었다.
편리하지만 조준이 힘들어 잘못하면 손을 버리기에 딱 좋았다.
정대식은 간이 화장실 안에서 신중하게 휴대용 변기를 펼쳤다.
그리고 바지를 까고 앉아서 힘을 주고 있는데, 어디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황미건이었다.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오늘 딜러들 상태가 좋던데. 임시 대원 중에 사망자 없지?"
그 누군가의 질문에 황미건이 대답했다.
"응, 우리 팀에 쓸 만한 애가 하나 있더라고."
애라는 호칭을 듣고 정대식은 미간을 구겼다.
누가 봐도 황미건이 더 어려 보이는데 언제 봤다고 애야, 애는.
그렇게 구시렁거리고 있노라니 황미건이 계속 말을 이었다.
"6등급인데다가 강화계 버퍼라서. 다른 딜러들이 덕을 좀 봤지."
"이야, 6등급 딜러가 있었어?"
"별일이지?"
잠시 키득거린 두 사람은 멀어져 가며 대화를 계속했다.
"아무튼 버퍼가 끼어 있는 바람에 사망자가 안 나왔어."
"내일도 그러려나?"
"잘하면?"
"그럼 곤란한 거 아냐? 보급품이 부족할 수도 있지 않아? 보통은 임시 대원이 죽어 나갈 거 생각해서 빠듯하게 가져오잖아."
"그거야 담당 팀이 알아서 할 일이고."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대식은 애초에 이들이 임시 대원들의 생존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시되는 것은 바깥세상의 일일 뿐.
여기 던전에선 그보다 이익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획득하는 수입이 지나치게 큰 탓이다.
아니, 현실 세계에서도 한 인간의 목숨 같은 것보다는 돈이 더 가치 있었다.
다들 아닌 척해도 진실은 그런 거 아니겠느냐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정대식은 뒤처리를 했다.
그런 뒤 옷을 추스르고 간이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막사로 돌아가는 대신,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엔트로피를 불러냈다.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허공에 둥둥 뜬 말풍선을 쳐다보며 정대식은 질문을 던졌다.
"묻고 싶은 게 있다. 강력권이라는 스킬 말인데."
<말씀하십시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강화 스킬을 쓰는 것보다, 강력권 스킬을 한 번 쓰는 게 마력 소모가 적겠지?"
<강화 스킬과 강력권 스킬의 레벨이 같다면 그렇습니다.>
"흠, 역시 그렇지? 그럼 지금 바로 강력권 스킬을 구입하겠어."
<강력권 스킬을 구입하고 천만 원을 차감합니다.>
이제 억 단위로 수입과 지출이 뛰놀다 보니, 천만 단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1천만 원 정도는 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권 스킬을 구입하지 않고 그냥 놔둔 이유는, 정대식이 수전노인 탓이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단돈 십 원 한 장이라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강력권을 구입한 이유는, 순전히 마력의 효율적인 소비를 위해서였다.
오늘 하루 선발대에 있으면서 느낀 거지만, 다수를 대상으로 계속 강화 스킬을 쓰는 것은 낭비였다.
강화 스킬을 쓰면 전체적으로 딜러들의 공격력이 올라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다들 실력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강화를 먹인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오늘이야 그저 그런 몬스터가 나와서 잘 버텼다지만, 내일부터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오기 시작하면 강화 버프를 받아도 별 볼 일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스스로 나서는 편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정대식은 강화를 자신에게 거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강했다.
당연히 강력권에다가 버퍼를 먹인다면 더 강해질 터였다.
그럼 최소한의 마력 소비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 낼 수가 있었다.
괜히 딴 사람에게 강화 스킬을 쓴다고 마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더불어 왜 버프를 안 하냐는 둥, 농땡이를 피운다는 둥의 눈총도 피할 수 있을 테다.
내일은 이 방법으로 싸워 봐야겠다고 결심하며, 정대식은 막사로 돌아갔다.
* * *
과연, 황미건이 경고한 대로 임의 지정된 A구역을 벗어나 B구역으로 진입하자 몬스터의 수준이 확 높아졌다.
종류는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이 거미, 애벌레, 지네, 잠자리 등등이었는데 일단 크기가 두 배로 커졌다.
특히 어른 팔뚝만 한 잠자리를 상대하는 게 상당히 성가셨다.
떼로 나타나는데다가 날개 끄트머리가 커터처럼 날카로워 가까이 접근했다가는 상처를 입기 십상이었다.
사수좌의 임시 대원들이 보급받은 화염 방사기로 조지고는 있었으나,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놈들이다 보니 처치가 쉽지 않았다.
그 바람에 겨우 몇 시간 만에 임시 대원들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지쳐 빠진 표정으로 헐떡대다가, 정대식을 향해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왜 어제처럼 버프를 안 주는 거야?"
"치사하게 혼자서 마력을 아끼겠다, 이거냐?"
정대식은 차갑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어제 너희들을 보조하느라 마력을 지나치게 많이 썼어. 오늘은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만큼 마력을 아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벌써부터 버프를 했다간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해!"
임시 대원들은 입을 다물었으나 다들 눈으로 정대식을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정대식은 자신이 버퍼라는 사실을 밝힌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인센티브라면 6등급인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다.
버퍼라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말을 했다가 애꿎은 원망만 듣고 있었다.
황미건은 임시 대원과 정대식 간의 불화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쪽을 흘깃 볼 뿐, 별말 하지 않았다.
정대식이 버프를 쓰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팀장인 그녀가 명령하면 어제처럼 버프를 할 수밖에 없겠지만 아무 말이 없었으므로, 정대식은 쏟아지는 눈총에도 꿋꿋이 마력을 아꼈다.
한 차례, 세이브 포인트가 지났다.
짧은 휴식을 끝마치고 선발대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발길이 무거운 건 임시 대원들이었다.
아직 단 한 번도 전투라고 할 만한 걸 치르지 않은 정식 대원들은 느린 진행에 무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에 핵이 있는지, 아직 위치가 파악이 되지 않은 관계로 가능한 힘을 아껴 두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선 단순히 행군을 하고 있을 뿐이니 지루할 만도 했다.
반면, 죽상을 하고 있는 임시 대원들은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그때, 딴에는 탱커라고 앞서 가던 백양좌가 멈춰 섰다.
덩달아 뒤따르던 선발대가 전부 제자리에 섰다.
그 이유인즉, 저 앞에 먼저 갔어야 할 정찰 팀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진행이 멈춘 것을 보고 정찰 팀을 비롯해 각 팀의 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옆에서 기철민이 한마디를 했다.
"위험한 놈이 길을 막고 있는 모양인데."
"아직 이쪽 구역에는 6, 7등급 몬스터만 나오는 거 아니었어?"
기철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구역의 몬스터가 넘어왔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B구역이 좁아서 벌써 C구역에 도착했을 수도 있지. 알다시피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올수록 구역이 좁아지잖아. 영역이라고 해야 하나?"
보통 던전의 구역은 몬스터의 등급으로 나뉘었다.
그것은 몬스터에게 영역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약한 몬스터일수록 그 수가 많고 더불어 영역도 넓었다.
그러나 수에 한계가 있는 만큼, 영역은 넓어도 구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초대형종일 경우라면 몰라도 보편적으로는 그랬다.
기철민의 짐작이 맞았는지, 각 팀장들이 다시 팀원들에게로 돌아와 상황 설명을 했다.
"앞서 가던 정찰조가 대형종의 가시거미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놈은 대략 5, 6등급 정도로 판단되며 소규모 던전의 준보스몹 정도 되는 수준이라고 하는군요. 일단 정찰조만으로 돌파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어, 그들은 후방으로 빠질 겁니다. 지금부터 선발대가 전투 대형으로 가시거미에게 접근하겠습니다."
탱커인 백양좌가 앞장서고 원딜인 사수좌와 버퍼, 힐인 해좌가 양옆으로 벌려 섰다.
그 뒤를 황소좌와 사자좌가 뒤따랐다.
정찰조가 제일 마지막에 붙었고, 긴장 속에서 다시금 이동이 시작됐다.
얼마 가지 못해 수풀 저편에서 무언가 거대한 게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