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현질 전사
-2권 10화
정대식은 얼굴을 짓누르는 황미건의 거대한 가슴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덩치는 쪼그만데 가슴이 엄청나게 큰 것 같았다.
한 E컵쯤 되려나?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붙들어 매고, 정대식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여태껏 마력을 아끼고 있다가 한 번에 써서 그런 겁니다."
정대식은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헤치고 얼른 대열로 돌아갔다.
물론 그런다고 주목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정식 대원들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열렬히 쳐다보았고, 임시 대원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거렸다.
그게 적잖이 부담스러워, 정대식은 피를 닦는 척하면서 얼굴을 가렸다.
'강력권의 위력이 이토록 대단할 줄이야! 본의 아니게 나도 모르는 실력을 드러내 버렸어.'
나머지 사람들이 쓰러진 가시거미의 사체를 치우고 길을 텄다.
조만간 베이스캠프에 머무르는 처리반이 들어와 가시거미의 사체를 해체해 부산물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다시금 행렬이 움직이는 가운데, 기철민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캐물었다.
"정말로 버프만 걸어서 그렇게 된 거야? 아니지? 제아무리 버프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 공격력은 아니라고 보는데?"
"네가 알 바 아니지."
딱 잘라서 말하는 정대식의 옆에 붙어서 기철민이 정곡을 찔러 왔다.
"너,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지?"
"내가 뭘."
"흐음, 분명히 뭐가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기철민은 정대식의 첫 사냥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니, 이상할 수밖에 없을 테다.
아무리 짐꾼 출신이라 하더라도, 초보에 불과했던 그가 단기간에 갑자기 성장한 이유를 의문스러워할 만도 했다.
정대식은 내심 뜨끔 하는 기분이 됐으나 시치미를 뚝 뗐다.
누구에게도 자신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신을 받들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었다.
그 능력이 현질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밝히기가 어려웠다.
누구도 정대식과 같은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능력은 낯설고도, 기묘했다.
돈을 내면 강해질 수 있다니!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허구적인 일이었다.
당사자인 정대식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질 않았던가.
당연히 말을 해 봤자 다른 사람들이 믿을 리가 없었다.
엔트로피나 상점 따위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설령 믿는다고 해도 큰일이다.
누가 봐도 남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그의 능력이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난생 듣도 보도 못한 신의,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 보니 각성자 관리청이라든지, 이능력 연구소나 신천지 같은 곳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절대 이 사실을 밝혀선 안 되는 노릇이라고 다짐하며, 정대식은 입을 꾹 다물었다.
* * *
가시거미를 처치하고서도 여러 번 대형종 몬스터들이 출몰했다.
그놈들은 가시거미와는 다르게 크기만 크다 뿐이지 별 볼 일 없었다.
대부분이 8, 9등급짜리라 임시 대원들만으로도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렇게 별다른 문제없이 세이브 포인트를 발견해 휴식을 취했다.
정대식은 지급받은 간편식을 꺼내 먹으며 물티슈로 몸에 묻은 가시거미의 녹색 피를 닦아 냈다.
마치 캐러멜을 녹인 것처럼 끈끈한데다가 일부는 덩어리진 채로 굳어 있어 닦아 내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 광경을 보고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요?"
"예?"
고개를 들어 보니 보조인 해좌의 팀장이었다.
그녀는 온갖 주술적 장치가 깃들어 있는 로브를 걸치고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요란하게 화장한 얼굴이 한눈에 보기에도 마법사였다.
"그래 주면 고맙고요."
정대식의 말에 마법사는 간단히 손가락을 튕겼다.
무언가 시원한, 아마도 마력이라고 추측되는 기운이 몸을 훑고 지나가며 그에게 묻었던 녹색 피가 전부 씻겨 나갔다.
정대식은 순수하게 감탄을 담아서 말했다.
"신기하네요."
그녀는 윙크를 날렸다.
"사소한 재주에 불과할 뿐이죠."
그러더니 한쪽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해 왔다.
"전 설유란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아, 예. 반갑습니다. 전 정대식이라고 합니다."
통성명을 하기가 무섭게 설유란은 정대식의 곁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버퍼 능력은 언제부터 갖게 된 거죠?"
"아무래도 강화계 능력자이다 보니, 자연스레 타고난 거지요."
"보통은 강화계 능력자라고는 해도 자기 한 몸 추스르는 게 전부인데요? 타인에게 마력을 전송하는 건 또 다른 문제죠. 누구나 정대식 씨 같다면 대부분의 강화계 딜러가 버퍼 역할도 겸할 수가 있어야죠. 하지만 정대식 씨같이 두 가지 포지션을 소화해 내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단순히 그뿐만은 아니었으나, 정대식은 구구절절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현질 능력에 대해 철저히 감추기로 한 이상, 말을 길게 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정대식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노라니, 저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봐요, 설유란 씨. 벌써부터 낙점을 해 두려는 겁니까?"
"그보다 우리가 먼저예요."
그들은 아까 정대식보다 앞서 가시거미와 싸웠던 두 명의 탱커였다.
설유란은 그쪽을 쳐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각자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배웅일이라고 합니다."
"전 이계원입니다."
"예에, 전 정대식입니다."
배웅일이라는 남자는 선뜻 정대식의 손을 붙잡아 흔들었다.
그러나 이계원이라는 남자는 정대식을 조금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아까 정대식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업신여겼던 일이 후회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고 겸연쩍은 기색을 드러내 말했다.
"당신이 혼자서 그 가시거미를 처치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요. 이만한 실력자면서 어째서 여태껏 아무 공격대에도 안 들어가고 있었던 거예요?"
정대식이 대답을 않고 있자 배웅일이 이계원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눈치를 줬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 그렇지."
이계원은 곧 정대식을 보고 본론을 꺼냈다.
"아까 우리가 탱킹하고 있을 때, 당신이 공격하기 전에 말이에요. 그때 어그로가 흩어진 거 맞죠?"
"그래서 우리를 무시하고 그쪽으로 덤벼들었던 것 같은데?"
배웅일이 덧붙이는 말에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랬는데요."
그 말에 배웅일이 놀라는 기색을 드러냈다.
"계원이랑 저는 5등급인데요. 당신 6등급이라면서요? 그런데 당신 때문에 어그로가 풀렸다고요? 그거, 말이 안 되지 않아요?"
그의 질문에 정대식은 대강 대답했다.
"강화가 되어 순간적으로 제 공격력이 올라간 탓이겠죠."
그때 설유란이 끼어들었다.
"때마침 우리가 버프도 거두어들였고 말이야."
"이거 참, 전투 중에 어그로가 풀리다니 체면이 말이 아닌데."
배웅일은 뒤통수를 벅벅 긁고 재차 물었다.
"그럼 아직 한 번도 탱킹을 해 본 적 없어요?"
"막공 다닐 때 레이드 뛰느라 해 본 적은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탱커 역할도 충분히 하겠네. 포지션만 무려 세 가지!"
감탄을 삼키는 배웅일의 말을 자르고 이계원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탱커가 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딜이나 버프보다는 탱킹이 더 잘 맞는 것 같은데."
정대식이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설유란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항변을 했다.
"잠깐만, 이거 뭐 하는 수작이에요? 설마, 백양좌로 이 사람 데려가겠다는 심보는 아니겠죠?"
설유란이 하는 말에 배웅일과 이계원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거야 우리 팀장님이 결정하실 일이라."
"방금 황미건 씨하고 저쪽에서 이야기하는 건 봤는데."
"뭐라고요?"
설유란은 화를 내며 이계원이 턱짓한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녀가 사라지고 정대식은 상황 파악이 안 돼 물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립니까?"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배웅일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연히, 당신을 데려가려고 팀장들이 경쟁 중이라는 거죠."
"황미건 씨야 당연히 본인 팀에 넣을 거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보아하니 설유란 씨가 단단히 눈독을 들인 모양인데요?"
"예?"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는 정대식을 보고 배웅일이 당연한 듯이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리 공격대 정식 대원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요."
정대식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요. 난 아직 그런 제의를 받은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계원이 그런 정대식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설명했다.
"6등급이나 되면서 우리 공격대에 임시 대원으로 들어온 것은, 정식 대원이 될 기회를 잡으려고 그런 거 아닙니까?"
"물론, 6등급 딜러 정도는 흔하지만 몇 가지 포지션을 한 번에 소화 가능한 사람은 드무니까요. 여기서 나가기가 무섭게 정식 공격 대원 제의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팀장들이 다 난리인 거예요. 다재다능한 대원을 데리고 있으면 다른 팀한테 구걸할 필요가 적어지니까 말이에요."
배웅일과 이계원은 탱커 팀이나 딜러 팀의 경우, 보조 팀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고 떠들었다.
버퍼나 힐러한테 밉보였다가는 은근히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버프가 가능한 정대식을 데리고 있으면 그런 부담에서 자유로울 터였다.
그것은 해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버퍼나 힐러가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전투 능력이 부족했다.
결정적일 때 자신들의 목숨을 다른 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전투 능력 또한 뛰어난 정대식이 있다면 만사 걱정 붙들어 매 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 정식 영입 이야기가 구체화되지 않은 지금에서부터 정대식을 데려가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라는 말이었다.
조디악 공격대에는 얼결에 들어온 정대식으로선 다소 어리둥절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저는 조디악 공격대에 들어오려고 이번 사냥에 자원한 게 아닙니다."
"어? 그래요?"
"왜요? 우리 공격대 좋은데?"
배웅일과 이계원은 정대식의 반응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보통의 경우를 보자면 그들의 짐작이 옳았다.
조디악 공격대는 정식 대원들을 공개 채용하지 않았다.
전부 추천제로만 대원들을 구성했기에, 공격대 내부에의 연줄과 검증이 없으면 입대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조디악 공격대에 임시 지원했다는 건, 공격대 분위기를 살피고 자신의 능력을 어필해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데 그게 아니라니, 조디악 공격대의 정식 대원으로 적잖은 자부심이 있는 그들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