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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 전사-38화 (38/297)

# 38

현질 전사

-2권 13화

당황한 정대식이 대답이 없자 그는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건 전에 없던 조건입니다. 저로서는 크게 양보를 한 셈이지요."

정대식은 지나치게 좋은 조건에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봤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저를 영입하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정대식의 의문에 박무식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여러 포지션을 한 번에 소화 가능한 인재는 매우 찾기 힘듭니다. 무려 트리플 포지션은 저 역시도 처음 보는 거니까요. 그러니만큼 그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서라도 정대식 씨를 영입하는 게 더 이익일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흐음......."

입에 발린 말에 정대식이 미덥지 않은 기색을 드러내자, 박무식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로소 본심을 꺼내 놓았다.

"실은, 조디악 공격대 내부에 알력이 있는 상탭니다."

"알력이라고요?"

"아시다시피 조디악 공격대의 소유주인 공대장은 현업에서 은퇴한 상황이나 다름없습니다. 실질적인 권력은 부대장이 쥐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실무자이면서 후계자로 낙점되어 있었던 부대장이, 최근 심각한 부상으로 복귀를 못할 지경이 됐습니다. 자연히 다음 부대장을 선출할 상황이 되었는데......."

"부대장이 되기 위하여 각 팀의 팀장들이 혈안이 되어 있다는 말이로군요."

"까놓고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박무식은 정대식의 적나라한 말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었으나 순순히 인정했다.

정대식 입장에서도 이렇게 솔직한 편이 더 나았다.

박무식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이번 사냥에서 얼마나 큰 결과를 얻어 내느냐가 부대장을 선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거기에는 정대식 씨, 당신 같은 인재를 영입하는 것 역시도 포함이 되겠지요."

그제야 팀장들이 자신을 포섭하려고 안달인 게 이해가 갔다.

정대식을 영입하게 된다면 팀의 전력도 늘어날 뿐만 아니라, 본인의 영향력과 인재 풀을 넓힐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여기 들어올 마음이 없는 정대식 입장에선 남의 집안싸움일 뿐이었다.

거기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다.

정대식은 가계약서를 내려놓고 말했다.

"과분한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역시 제 생각은 바뀌질 않네요. 죄송합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박무식이 날카로운 어조로 내뱉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팀에도 들어가지 않는 거겠죠?"

정대식이 뒤를 돌아보자 박무식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얼굴로 씩 웃었다.

웃는 표정이 마치 뱀같이 간교해 보였다.

"이만한 제안을 걷어찰 정도라면, 다른 어떤 제안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남자가 조디악 공격대의 팀장일 리가 없다.

겉보기엔 두드러져 보이지 않아도 박무식 역시 대단한 능력자라는 사실을 일변한 눈빛 하나에서 실감할 수가 있었다.

정대식은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해 보이고 그의 막사를 나왔다.

마지막에 박무식이 한 말은 일종의 경고였다.

자신이 내건 조건도 마다했으니, 다른 조건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소리였다.

만약 그리될 경우, 정대식을 어찌할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싸우는 것만으로도 피곤해 죽겠는데 사람들이 날 가만 놔두질 않네.'

이게 바로 강한 자의 고충인가, 하고 정대식은 잠시 자아도취에 빠졌다.

그렇게 잠시 강자다운 고뇌에 휩싸여 있다가, 혼자서 머쓱해진 정대식은 다시금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또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대식."

'아, 씨.......'

이제 그만 가서 쉬고 싶은데.

정대식은 짜증 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순간, 등 뒤에 소리도 없이 서 있던 거한을 보고 놀랐다.

그는 다름 아닌 광필두였다.

그가 시커먼 어둠 속에 두 눈을 번쩍번쩍 밝힌 채로 정대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정대식은 그가 자신에게 덤벼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숲 속에 도사린 야수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

묘한 위기감이 찾아들어 등골이 쭈뼛 곤두섰던 것이다.

광필두는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저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우리 팀장이 찾는다. 막사로 가 봐."

황미건이 부른다는 소리였다.

별말 아닌데도 정대식은 무슨 명령이라도 들은 것처럼 자동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발길을 옮겼다.

광필두 앞을 지나쳐서 가는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위압감으로 따지자면 그 어떤 팀장보다 저 광필두라는 자가 최고였다.

황소좌의 근거리 딜러.

타오르는 불꽃 검을 쓰는 남자.

지금이야 일개 대원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크게 될 인물이라는 예감 속에서 정대식은 잰걸음을 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황미건의 막사 앞이었다.

정대식은 아마도 박무식에게서 들었던 것과 엇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 예감했다.

어쩌면 황미건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밤, 모든 팀장들이 번갈아 가며 자신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상황을 자각하고 실소를 뱉었다.

'잠깐만, 지금 내가 조디악 공격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귀찮아하고 있는 건가?'

전 같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다.

짐꾼으로 조디악 공격대에 들어왔어도 환호성을 질렀을 테다.

이제 팔자 폈다고 설레서 밤에 잠도 못 잤을 일인데.

정식 대원 제의를 받고도 시큰둥하다 못해 성가셔하고 있다니.

놀랄 노자였다.

'사람의 입장이란 게 이렇게나 쉽게 바뀌는 거였다니.'

기철민의 지적대로 정말이지 배부른 고민이다.

어쩌면 귀찮아만 할 게 아니라,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즐겨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 살면서 내가 언제 또 이래 보겠어. 조디악 공격대를 상대로 갑질이라~.'

정대식은 히죽거리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은 왜인지 어두컴컴했다.

향초인지 뭔지, 촛불 몇 개만 밝혀져 있어 분위기가 야릇했다.

'뭐지?'

어리둥절해진 정대식은 황미건은 어디에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막사 중앙에 놓인 침상의 시트가 확 걷혔다.

놀랍게도, 거기에 황미건이 나체로 누워 있는 게 아닌가!

"헉!"

정대식이 깜짝 놀라 헛숨을 삼키자, 황미건이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리 와서 누워요."

"뭐? 지, 지금 뭐, 뭐 하는......."

정대식은 질겁해 뒷걸음질을 쳤다.

예상대로 황미건은 가슴이 매우 컸다.

E컵이 아니라 한 F컵쯤 되어 보였다.

몸집은 작고 아담한데 가슴만 젖소처럼 커서 무슨 AV를 보는 것 같았다.

약간 징그럽다고 여겨질 정도라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찾아들어, 정대식은 몸을 홱 돌렸다.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만......."

그렇게 막사 밖으로 나가려는데 황미건이 후닥닥 달려와 등 뒤에 매달렸다.

뭉클, 하는 묵직한 감촉이 팔꿈치에 닿아 오고, 그를 붙잡은 황미건이 끈끈이처럼 전신에 엉겨 왔다.

"아이, 그러지 말고...... 내가 즐겁게 해 줄 테니까."

자그만 손이 바지 안으로 쑥 들어와 앞섶을 더듬기 시작해 정대식은 식겁했다.

그럴 기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황미건이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정대식은 그녀의 손을 끄집어내고 역정을 냈다.

"지금 절 영입하려고 이러시는 거라면, 됐습니다! 생각 없으니까요."

"정말이야? 내가 매일 밤 봉사하겠다는데도, 생각이 없어?"

아무리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몸으로 저를 어찌해 보겠다는 발상이 기가 막혔다.

살면서 이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상대가 황미건이라니!

외모는 귀엽고 몸매도 글래머러스한지는 몰라도, 정대식은 임시 대원들을 윽박지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이 지하 여장군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눈곱만큼도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지금 이런 상황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정대식은 서둘러 그녀를 밀쳤다.

"비키세요. 필요 없습니다."

정대식은 후닥닥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황미건도 차마 벌거벗은 채 바깥까지 쫓아 나오지는 못했다.

정대식은 솟구쳐 오른 식은땀을 쓸어내리며 서둘러 자신의 막사로 발길을 향했다.

갑질이고 뭐고,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데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뭐야?"

임시 대원의 숙소로 돌아갔더니 희한하게도 정대식의 자리가 사라져 있었다.

금발이 몹시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아해하는 그에게 말했다.

"네 짐이라면 다른 곳에 있다. 내일도 사냥을 떠나는 사람들은 정식 대원의 막사에서 묶는다던데?"

그러고 보니 기철민도 보이지 않았다.

정대식은 그러려니 하고 임시 대원의 막사를 나왔다.

그리고 정식 대원들이 묶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

정식 대원의 숙소는 대형 천막 아래 칸막이가 쳐진 식이었다.

임시 대원의 숙소와는 달리 대강이나마 사생활을 지킬 수가 있다는 말이다.

정대식은 어렵사리 새 잠자리를 찾았다.

마침내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외투를 벗고 손발을 닦은 뒤, 침상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렇게 눈을 감기가 무섭게 인기척이 들렸다.

또 뭔가 싶어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막사 입구에 로브를 둘러 입은 설유란이 보였다.

"또 뭔데요?"

정대식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청순하게 화장을 고친 설유란이 은근한 미소를 띤 채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정대식의 허락도 없이 그의 침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괜찮으면, 나중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우리 팀에 들어오지 않을래?"

"벌써 그 이야기라면 여러 번 거절했습니다. 설령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조디악 공격대에는 들어올 마음이 없어요. 괜한 수고 마시고 이만 돌아가시는 게......."

"우리 팀으로 들어오면 내가 각별히 아껴 줄게. 응?"

설유란은 로브를 스르르 끌어내렸다.

어둠 속에 희끄무레하게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황미건보다 가슴은 좀 작았지만 이쪽이 더 날씬하고 가냘파 보였다.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는 정대식을 보고 설유란이 후후, 웃으며 손을 뻗쳐 왔다.

"우리 팀은 보조라서 임무가 그리 위험하거나 힘들지 않아. 하지만 괜찮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탱커나 딜러보단 훨씬 더 실속 있을 걸?"

"......아뇨, 그래도 생각 없어요. 이만 나가 주세요."

단칼에 자르는 말에도 설유란은 바싹 다가들었다.

"진짜? 아무 관심 없어?"

"그런데요."

"그래? 아쉽지만 별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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