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42화 (42/297)

# 42

현질 전사

-2권 17화

소란과 관심이 충분히 멀어질 쯤이 되어서야 자리를 잡은 그는 뒤늦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연유를 깨달았다.

'그래. 보통 헌터들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진 않지. 그 기철민조차도 택시를 타고 돌아갔잖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짐이 많으니까 대부분은 자차를 가지고 있지. 그렇다 보니 일반 시민들은 헌터를 볼 일이 별로 없는 거야.'

정대식은 잠시 자신도 차를 사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자연히 은퇴 쪽으로 흘러갔다.

'그래. 이번 정산을 받고 나면 굳이 헌터 노릇을 계속할 필요가 없지. 건물도 사고, 아파트도 사고, 차도 사고. 이제부터 편하게 사는 거야. 강남 한복판에라면 몇십억으로는 무리겠지만, 서울 바깥으로 나가면 내 한 몸쯤이야 그 정도로도 얼마든지 건사할 수 있을 테니까.'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계속 헌터 짓을 한다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이번 사냥으로 확실히 느낀 거지만, 나 지금 수준으로도 실력이 상당하지 않나? 그 대단한 조디악 공격대의 팀장들이 앞 다투어 나를 영입하려 했을 정도니까. 굳이 능력에 돈을 더 투자하지 않더라도, 몇 번만 사냥을 하면 더 큰돈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몰라. 사실 이번 사냥이 제법 위험하기는 했지만, 딱히 다친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할 만했잖아? 눈 딱 감고 몇 달만 더 일하면...... 몇십억이 아니라 몇백억을 벌지도 모른다고!'

몇십억과 몇백억의 차이는 크다.

몇십억으로 서울에서 부자로 살기는 무리다.

기껏해야 중산층 정도?

하지만 몇백억이면 서울에서도 부자로 살아갈 수 있다.

'이왕 한 번 사는 인생...... 멋지게 살아 봐야지. 평생을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늘 시궁쥐나 다름없었다고. 쪽방, 반지하방, 고시원, 여관방...... 그런 곳을 전전하는 건 지긋지긋해.'

정대식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했다.

전단이나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강 주변의 근사한 집들을 수없이 보았다.

어둔 밤에도 보석 상자처럼 화려하게 불을 밝힌 창문들.

그곳을 보며 세상엔 이리도 부자가 많은데 왜 자신은 이렇게나 가난한 것일까, 한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대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강하다. 그리고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어! 내겐 현질의 능력이 있으니까......!'

그는 차창 밖에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도시, 서울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여기서 그만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돈을 더 벌어야겠다. 가능한 한 많이 벌어서.......'

하늘을 뚫어 버릴 듯 높은 마천루를 바라보는 정대식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 * *

던전 공략을 끝내고 다음 날.

정대식은 방어구 수리 공장을 찾았다.

기껏 큰맘 먹고 샀던 강화 알루미늄 방어구가 엉망이 된 탓이었다.

"기본적으로 구겨진 것 펴고, 칠 다시 하고, 광택 입히는 데 한 300만 원쯤 듭니다."

공장장의 말에 정대식은 질겁했다.

"아니 무슨...... 겨우 그거 수리하는 데 뭐가 300만 원이나 들어요?"

정대식이 하는 소리를 듣고 공장장은 손사래를 쳤다.

"원래 방어구는 구입 가격도 가격이지만, 수리, 유지 비용도 만만찮게 들어요. 말이 강화 알루미늄이지, 이게 다루기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정대식은 짐짓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리 가격이 좀 싸면 옵션 좀 먹이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요."

공장장은 솔깃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뭐, 어떤 옵션 먹이시려고?"

"그야, 기본적인 거 있잖아요."

"총체적으로 방어력을 올리는 옵션이 있기는 한데. 이건 방어구를 사면 기본적으로 추가하는 구성이죠. 방탄도 되고 절삭에도 내구성이 생기거든. 어지간한 공격은 다 흘려버려. 강화 알루미늄 최대의 약점인 찌그러지는 정도도 덜하고. 웬만하면 그 정도 옵션은 넣는 게 좋아요."

"그렇지만 수리 비용만 300이 나와서야, 옵션까지 넣는 건 무립니다."

정대식이 울상을 하고 우는 소리를 하자 공장장이 마지못한 기색으로 말했다.

"정 그럼 광택을 빼고 옵션을 넣는 게 어때요? 그럼 내가 500으로 맞춰 볼 테니까."

"광택 넣고, 안 넣고의 차이가 큽니까?"

"강화 알루미늄은 아무래도 광택 없이는 폼이 안 나지. 광택이 사라지면 그냥 고철 같아 보이거든요. 하지만 방어력에는 아무 지장 없어요. 광택이 있음 번쩍번쩍하니까 방어력이 더 높아진다고 헛소리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야 순전히 기분 문제고."

"흐음...... 광택이야 빼도 상관없는데. 역시 300만 원도 부담스러워서요."

"에그, 이 사람! 헌터가 방어구에 돈을 아끼면 못 써! 생명이랑 직결되는 부분인데 그렇게 짜게 굴어서야 쓰나. 다른 데 돈을 아끼더라도 이 옵션은 꼭 넣어요. 내가 진짜 신경 써서 해 줄 테니까."

정대식은 한참 고민하는 척하다가 500만 원에 수리를 하고 옵션까지 넣기로 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흥정은 아니었으나 손해를 봤다고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가격을 깎으려다가 마감이 허술하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그쯤해서 타협을 봤다.

방어구 수리와 옵션 추가에는 사흘가량의 시간이 걸렸으므로, 그동안엔 별수 없이 사냥을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정대식은 방어구 수리 공장을 나와서 이번엔 무기 상점을 찾았다.

지난번, 강력권이라는 스킬을 획득한 만큼 좀 더 그럴싸한 무기를 갖추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고, 왔습니까?"

정대식이 으레 가는 무기 상점으로 발길하자, 주인장이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단골의 존재는 어느 업종에나 귀한 법이라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더 그랬다.

워낙에 죽어 나가는 사람이 흔하다 보니, 왔던 손님이 또 오면 아직도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더해져 적잖이 반가운 것이다.

또한 헌터들은 방문 횟수가 거듭될수록 쓰는 돈의 단위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은 살아남는 시간에 비례해 더 강해지고, 강해지는 만큼 더 많은 돈을 벌고, 또 그 돈을 무기나 방어구 구입에 쓰기 마련이니까.

응당 첫 사냥 때부터 줄곧 같은 무기 상점을 이용하고 있는 정대식은, 주인 입장에서는 소중한 단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대식을 마주하는 주인의 얼굴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가 흥정에 능수능란하다 못해, 덤이란 덤은 모조리 쓸어 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넋을 놓았다가는 본전치기도 못하는 수가 있었으므로, 정대식을 안으로 들이는 주인의 얼굴에는 일종의 전운마저 감돌았다.

오늘은 반드시 이문을 남기고 말겠다는 각오로,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정대식에게 용건을 물었다.

"무기 바꿔 간 지 얼마 안 됐는데. 무슨 문제라도?"

"그건 아니고요."

"아, 그럼 새 무기를 사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지난번 사냥이 꽤 쏠쏠했나 보죠? 그사이 새 무기를 사러 온 걸 보면. 그래, 그럼 오늘은 어떤 걸 보시겠습니까? 또 자동 소총을 바꾸시려고요? 아니면 업그레이드를 하려고요?"

"자동 소총은 괜찮고요. 너클을 좀 사려고요."

"아하! 너클, 괜찮죠. 최저한의 가격으로 최대한의 공격력을 끌어낼 수 있는 무기 아니겠습니까?"

주인은 가게 깊숙한 곳에서 큰 상자를 하나 꺼내 가지고 왔다.

칸칸으로 나뉜 그 상자 안에는 온갖 종류의 너클이 들어 있었다.

"가장 가격이 저렴한 건 특수강으로 만들어진 호신용 너클입니다만...... 솔직히 헌터가 쓰기에는 걸맞지 않죠. 헌터들이 주로 찾는 건 보통 크롬 다이아로 만들어진 너클입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모양도 있고, 가시가 튀어나온 것도 있고, 보호대가 부착된 것도 있죠."

"이런 건 보통 얼마나 하죠?"

"크롬 다이아가 신소재라 너클치고는 가격이 좀 있습니다. 그래 봤자 몇십만 원대죠. 자금에 여유가 있으시면, 솔직히 이거보다는 요걸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주인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꺼내 든 너클은 손등 뼈를 보호하게 디자인된 물건이었다.

모양 자체는 별스럽지 않았는데, 소재가 특이한 것인지 이상한 광이 났다.

"이건 무지개소뼈로 만들어진 겁니다."

"무지개소요?"

"몸이 약간 슬라임처럼 투명하고, 뼈와 장기가 겉으로 비쳐 보이는 몬스터라는데...... 저도 실물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기 부산 쪽 어느 던전에서 자주 출몰한다더군요. 아무튼 이놈들의 부산물이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최근엔 무지개소뼈로 만든 타격용 무기가 꽤나 인기 있습니다. 아직까지 물량이 딸려 저도 힘들게 구한 거죠."

"특이한 성질이라니, 뭐죠?"

정대식의 질문에 주인은 씩 웃어 보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직접 보여 드릴 테니까."

주인은 운동이라곤 안 해서 통통하게 살찐 손에다가 그 너클을 꼈다.

그리고 다른 손에다가는 평범한 너클을 끼고, 서로 주먹을 부딪쳤다.

꽝!

번쩍!

너클끼리 부딪치기가 무섭게, 순간적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발광하는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대식이 움찔해 눈꺼풀을 찡그리자 주인이 껄껄 웃어 보였다.

"보다시피 이건 충격이 가해지면 발광합니다. 그래서 이 너클로 적의 안면을 후려치거나 하면, 빛이 번쩍해서 시야를 혼란시키지요. 야행성이거나 지하에서 서식하는 몬스터의 경우, 시력이 약하니까 한동안 앞을 못 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때요? 근접전에서 큰 도움이 되겠지요?"

정대식은 잠시 고민했다.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 탱커들에게는 유용한 아이템이겠군요. 그런데 딜러가 잘못 썼다가는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어그로 흐트러지면 어떡하려고요."

"물론 딜러보다는 탱커가 선호하는 아이템이기는 합니다만. 시야를 교란시키는 무기이다 보니 당장에 딜러가 공격받지는 않아요. 게다가 이게 복원력이나 내구성도 상당하거든요."

"복원력이라고요?"

"예에, 아까 보여 드린 크롬 다이아 같은 경우, 매우 단단해서 어지간하면 망가지는 일이 없기는 합니다만. 그 동네가 어디 보통 동넵니까? 워낙에 별의별 몬스터가 다 나오다 보니 망가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죠. 그런데 크롬 다이아는 찌그러지지도 않고 그냥 깨져 버리거든요. 한창 전투 중에 그래 버리면 답이 없죠.

무기란 게 소재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지 않습니까? 강화 알루미늄은 우그러져 버리고, 강화 플라스틱은...... 뭐, 말을 맙시다. 요새는 뉴 세라믹 소재로 만들어진 것도 꽤 나오는데, 그건 방어구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무기로는 별로예요. 내구성이 뛰어난 대신에 충격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공격력이 약하거든요.

그런데 이 무지개소의 뼈 같은 경우, 양쪽의 강점을 다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크롬 다이아처럼 깨지는 대신에 강화 알루미늄처럼 찌그러지는데, 복원력이 우수해서 차츰 제 모양으로 돌아가거든요. 제대로 만들어 놓은 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어요. 수리비 걱정은 안 해도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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