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현질 전사
-2권 22화
"들어가시지요."
정대식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담당자를 따라 안으로 발을 옮겼다.
산 같은 금은보화, 눈부신 금괴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대신 박물관처럼 정갈하고 조용한 공간이 보였다.
안쪽으로 전시실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기물이 한 점 한 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담당자는 그것을 따라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이 오랜만인지라...... 마음 같아서는 일일이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겠지요. 무엇이 보고 싶으십니까? 선호하는 무구가 있으십니까?"
정대식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떤 걸 달라고 해야 가장 남는 장사일까?
제일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방어구였다.
진정한 방어는 공격이고, 훌륭한 무기가 있으면 방어구가 달리 필요가 없다지만, 역시 비싼 건 방어구였다.
단순하게 부피가 무기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재료의 양 자체가 많은 관계로, 미스릴이나 아다만티움 따위로 이름 붙여진 신비 금속으로 제작된 경우, 가격이 천문학적이었다.
그런 물건은 일반적인 상점에는 전시되지도 않았다.
아주 간혹 헌터만을 대상으로 하는 경매 시장에나 나오곤 했는데, 그조차도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들었다.
그만큼 성능은 보통의 방어구와는 비교 불가능!
정대식은 재깍 입을 열었다.
"방어구, 신비 금속으로 제작된 방어구를 보여 주십시오."
담당자는 씩 웃었다.
"좋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담당자는 끝도 없는 전시실 한쪽에 자리한 무빙워크를 가동시켰다.
소음 하나 없이 무빙워크가 미끄러져 정대식을 방어구가 늘어선 전시실 앞으로 데려가 주었다.
담당자는 개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코너로 안내했다.
"방어구는 여기에서도 보유한 종목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정대식은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가장 값비싼 걸로 보여 주시죠."
담당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를 별도로 마련된 전시실로 데려갔다.
돔 형태의 안은 깜깜했으나 안으로 발을 들이자 자동으로 불이 켜졌다.
동시에 방어구를 비추고 있는 조명 역시도 켜져서, 절로 경탄이 흘러나왔다.
"허억!"
아니, 경탄이라기보다는 신음에 가까웠다.
정대식은 공중에 장식되어 있는 갑옷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저건...... 아다만티움입니까?"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체가 아다만티움으로 제작된 물건으로, 본디 태평양의 한 던전에서 발견된 아이템을 명장이 재가공한 것이지요."
"허어...... 저건 가격이 얼마쯤 하나요?"
옆에 있던 장한나는 금액을 묻는 정대식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정대식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고, 담당자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정확한 감정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값을 매긴다면 몇천억은 너끈히......."
"몇천억!"
저도 모르게 소리친 정대식은 장한나를 휙 돌아봤다.
저 방어구를 가져도 되느냐, 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그러자 장한나가 왠지 얄미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됐지만 저건 정대식 씨가 고를 수 있는 품목이 아니에요."
"뭐라고요? 아깐 그런 말 없었잖아요!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골라 가질 수 있다 하지 않았나요?"
"저기 입구에 표시된 거 보이시죠?"
그들이 들어와 있는 전시실 입구에는 붉은 등이 켜져 있었다.
거기에는 SS라고 새겨져 있었다.
"SS?"
"정대식 씨가 고를 수 있는 건 A급까지예요. S급 이상의 아이템을 원하신다면 다른 조항에 동의하셔야 해요."
"그게 뭐죠?"
"평생 대한민국에 귀속된다는 사항에 동의하신다면, S급 이상의 아이템도 고르실 수 있어요."
눈앞의 무구에 눈이 먼 나머지, 정대식은 섣불리 그러마 하고 말을 할 뻔했다.
그러나 금세 멈칫해 입을 다물었다.
이건 아무래도 잘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잠깐만, 침착하자.'
정대식은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굴렸다.
'한국은 뛰어난 헌터를 보유한 나라로 유명하지만, 아이템은 그렇지가 못해. 해외에 비해서 명장이 부족하다. 유럽 쪽에 비하면 한참이나 딸리는 수준이지. 그렇다면 유럽 쪽의 국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면? 거기에도 분명 이와 흡사한 금고가 있을 거야. 나를 스카우트하는 조건으로 그곳의 아이템을 골라 가지라고 말할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여기 있는 것들을 능가하는 아이템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덥석 평생 동안 국가에 귀속되겠다고 약속해 버리면 나중을 생각할 수가 없잖아?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오면 어떡해?'
정대식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쉬운 표정으로 아다만티움 갑옷을 바라보았다.
말이 갑옷이지, 그것은 슈트와 흡사한 모양새였다.
새카만 장갑으로 구성된 아다만티움 갑옷은 개간지 그 자체였다.
실로 탐이 났으나 정대식은 가까스로 충동을 달랬다.
"......죄송하지만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장한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SS급 아이템을 보신 뒤라서...... A급 아이템이 눈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A급 아이템 또한 훌륭합니다. 단번에 등급을 몇 단계나 추월할 수 있는 수준의 성능이죠."
정대식은 뚝뚝 떨어지는 미련을 남기고 아다만티움 갑옷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담당자의 안내로 A급 방어구를 구경했다.
비록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강화 알루미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물건이 많았다.
전신 갑옷은 물론이거니와 투구, 방패, 망토 등등.
하나같이 눈이 돌아갔다.
"굉장하군요."
정대식은 감탄했으나 머릿속엔 여전히 아다만티움 갑옷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장한나의 말대로, 최상급 물건을 먼저 봐 버린 탓에 어지간한 건 눈에 차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당최 뭘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스릴 갑옷이 그나마 괜찮긴 한데, 모양이 좀...... 지나치게 고전적이라 무슨 성기사나 백마 탄 왕자님 같아 보이잖아. 나랑은 안 어울려. 현실적으로는 은신 기능이 있는 페이드 슈트나, 비행이 가능한 이카루스 망토가 적절하겠지.'
그래도 왠지 미련이 생겨서 정대식은 방어구뿐만 아니라 무기도 구경했다.
여러 종류의 호화찬란한 마력총과 검, 장창, 곤봉, 단검, 폭약 등등.
장비까지 낱낱이 들여다봤다.
당연히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여자들 못지않았다.
이미 야심한 시각이었으므로 장한나는 피곤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나중에는 억지로 쇼핑에 끌려온 남편들처럼 짜증을 냈다.
"이제 볼 만한 건 다 보셨습니다만. 슬슬 결정하시죠."
"인생에 또 올까 말까 한 기회다 보니 섣불리 결정하기가 힘드네요."
정대식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다음에 다시 와서 고르면 안 되겠습니까?"
장한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안 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에요. 원래대로라면 정대식 씨는 이곳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단 말입니다. 정대식 씨가 올인원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에, 전에 없던 혜택을 드리는 거예요. 평생 귀속 계약을 한다면 모를까, 또 들어오는 건 무리에요."
"으으으음...... 하지만 달랑 하나 고르라니 너무 갈등이 되네요. 하나만 더 가질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진 않을 텐데."
정대식이 하는 말에 장한나는 코웃음을 쳤다.
"욕심이 지나치시네요."
"어차피 제 것도 아니고, 대여일 뿐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아 봤자 제 것도 아닌데요, 뭐. 게다가 기회도 이번 한 번뿐이고...... 망설이는 게 당연하죠. 정말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정대식은 선택을 못하겠다는 핑계로 계속 미적거렸다.
아예 머리를 싸매고 누울 지경인 것처럼 끙끙댔다.
사실 그건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언제까지 정대식이 여기서 미적거리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버틴다면 협상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정대식은 지지부진하게 굴었다.
결국, 금고에 들어온 지 8시간이 넘어가자 장한나가 진저리를 쳤다.
"좋아요! 정 그렇다면...... 다시 협의를 해 보죠. 하지만 AAA급 아이템을 두 개씩이나 들고 가는 건 안 됩니다. 제가 가능하리라고 보는 범위는 A급 아이템 세 개예요. 거기까지예요. 그 이상은 승인이 날 리도 없고, 어찌 보면 AAA급 아이템을 하나 갖는 것보다 A급 아이템을 세 개 갖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어요.
정대식 씨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는 있다지만, 아직까진 6등급일 뿐이잖아요? 6등급 정도로는 A급 아이템 세 개 정도로도 차고도 넘치죠.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아이템을 골라 봤자, 제대로 운용하지 못할 거라고요."
장한나가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정대식은 A급 아이템을 세 개 가지기로 했고, 장한나는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아이템 반출에 대한 권한은 그녀에게 없는 모양이었다.
더 상급자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서 한참 동안이나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예, 죄송합니다. 아뇨...... 네네. 그렇습니다. 네. 네. 제 불찰입니다. 면목 없습니다."
장한나는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한참이나 사죄했다.
그러고 난 끝에야 간신히 전화를 끊었다.
"후우...... 승인이 났어요. A급 아이템 세 개로 하지요."
지금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더 했다가는 장한나가 역정이 난 나머지 모든 걸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봐, 정대식은 얼른 말했다.
"그렇다면 마력 변환 자동 소총 한 정과 탈로스로 만들어진 방어구 세트, 그리고 아다만트 너클을 갖겠습니다."
당장에 장한나가 눈을 부라렸다.
"탈로스 방어구 세트 말인가요? 그건 엄밀히 말해 A급 방어구가 여섯 개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다른 걸 고르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 총 여섯 개의 방어구가 모여 하나의 세트인 거 아닙니까? 엄밀히 말해 갑옷이잖아요? 갑옷이 가슴받이 따로, 어깨 보호대 따로인 식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건 하나로 쳐야죠."
"그럼 탈로스 방어구를 가지고 다른 걸 포기하세요. 아다만트 너클도 따지고 보면 A급 아이템이 두 개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너클은 당연히 한 쌍으로 묶어 봐야죠!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애초에 A급 아이템 세 가지라고 하지 말고, A급 단품이라고 하던가요."
"세 가지나 고르라고 하는 건 당연히 단품이라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정대식은 장한나와 한참 동안 입씨름을 했다.
결국 담당자가 중재에 나섰다.
"마력 변환 자동 소총과 탈로스 방어구 세트, 아다만트 너클, 이 세 개를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여태껏 한사람이 이렇게 많은 아이템을 한꺼번에 가져간 적이 없었어요!"
"이분이 하시는 말마따나, 대여일 뿐이잖아요? 영영 내주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금고로 돌아올 아이템인데, 세 가지라고 승인이 떨어진 이상 위에서도 뭐라고 못할 겁니다."
"하지만......!"
장한나는 씩씩거렸으나 결국에는 승복하고 말았다.
"어휴, 어쩔 수 없죠. 정대식 씨 원하는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정대식이 싱글벙글하자 장한나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계약서에 사인을 해 주셔야겠어요. A급 아이템을, 그것도 세트로! 세 가지나 가져가는 조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