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현질 전사
-2권 23화
정대식은 국내에 활동하는 경우에 한해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세 가지 아이템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거기에는 분실에 대한 조건도 붙어 있었는데, 만약 대여한 아이템을 잃어버리거나 파손할 경우에는 정대식이 직접 보상해야 했다.
타인에게 또다시 대여를 하는 것도 금지였으며, 때가 되면 아이템의 정비를 위해 지정된 명장의 공방을 찾아가야 했다.
"조건이 꽤 까다롭네요."
계약서를 건네며 정대식이 하는 말에 장한나가 새치름한 투로 대꾸했다.
"이만한 아이템을 보유하는 조건이라면 당연한 일이죠!"
"애당초 저를 국내에 붙잡아 두기 위해 장한나 씨께서 제의한 일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정대식이 싱긋 웃으며 사실 관계를 분명히 하자, 장한나가 샐쭉해 입을 다물었다.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데다가 늘 정장 차림에 딱딱한 말투를 써서 몰랐는데, 화를 내니까 제법 귀여웠다.
어쩌면 만족스러운 아이템을 얻어서 기분이 좋은 탓에 그리 보이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아녜요. 저야말로 제 제안을 받아 주셔서 감사해요."
인사치레를 나누고 금고 밖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뒤통수가 당겼다.
여전히 그놈의 아다만티움 갑옷이 눈에 밟혔던 것이다.
정대식은 금고를 벗어나 다시금 통로를 지나며 물었다.
"......지금의 계약 조건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겠죠?"
장한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로 정대식 씨가 올인원이 된다면 그렇겠지요."
정대식은 앞장서 가는 장한나의 등 뒤에서 씩, 하니 웃었다.
* * *
"야,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어둔 여관 방 안에 희끄무레하게 떠오른 엔트로피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기껏해야 기호 몇 개로 이루어진 얼굴에 무슨 표정이 다채롭겠느냐마는, 지금은 누구라도 말할 상대가 필요했다.
국가 기물 금고에 들어갔던 일이나, 거기에서 획득한 아이템을 자랑하고 싶은데 딱히 연락할 만한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내 인간 관계도 참 빈곤하지.'
정대식은 입맛을 쩝 다셨다.
그래도 엔트로피라도 불러내고 나니까 조금쯤 기분이 나서, 정대식은 아이템을 늘어놓고 떠벌떠벌 자랑을 했다.
"야, 너 국가 기물 금고라고 알고 있냐?"
<해당 정보를 원하신다면 기술을 구입하십시오.>
"아니, 거기가 어딘지 궁금하다는 게 아냐. 오늘 내가 그곳에 다녀왔다고!"
<그렇습니까.>
"거긴 국고를 털어 국가가 구입한 A등급 이상의 아이템들이 즐비하단 말이야.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거기 못 들어가. 평범한 헌터들은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그런 데 들어갔다 왔다~ 이 말이지. 게다가 빈손으로 온 것도 아냐. 이거 좀 봐봐."
<.......>
"근사하지 않냐? 캬! A급 아이템이라 그런지 때깔부터 완전 다르지! 그저 그런 싸구려 무구하곤 달라, 완전 달라. 이 자동 소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반적인 자동 소총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성능을 지녔다고. 여기 옆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누르면 마력의 성질이 자동으로 변환되어서 별다른 보조 장비 없이도 특수탄이 발사되지. 빨간 버튼을 누르면 화염탄이, 푸른 버튼을 누르면 빙결탄이, 검은 버튼을 누르면 지연탄이 발사된다고! 최고지 않냐?"
<.......>
"야, 뭐라고 리액션 좀 해 봐라. 진짜 재미없네."
<지금 단계로서는 무리입니다. 지금보다 상점을 더 업그레이드하신다면 제 성능 또한 향상되는 고로.......>
"됐다, 됐어. 맨날 돈타령이야. 내가 너한테서 뭘 기대하겠냐!"
김이 빠져 버린 정대식은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나 손으로는 여전히 자동 소총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할까?"
<해당 정보를 원하신다면 기술을 구입.......>
"적절한 리액션이 안 되면 그냥 닥치고 듣기만 해. 혼잣말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정대식은 주절주절 자동 소총의 가격을 셈해 보았다.
"아무리 못해도 몇백억은 하겠지? SS급 무구가 몇천억 원이라 그랬으니까. 그래, 최소한 그 정도는 될 거야. 으햐! 내가 몇백억짜리 무기를 무려 세 개나 획득하다니! 역시 난 타고난 협상가란 말이야. 으흐흐."
장한나를 괴롭히며 버티길 잘했다.
덕분에 아이템 하나만 얻어 나올 상황에서 두 개를 더 얻었다.
성능이 뛰어나기는 탈로스 방어구 세트와 아다만트 너클 역시 마력 변환 자동 소총 못지않았다.
사실 너클은 일전에 돈을 주고 새로 마련한 걸 한 번 써 보지도 못한지라 괜히 가져왔나 조금쯤 후회가 됐다.
이미 강력권으로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굳이 좋은 아이템이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다만트라는 신비 금속은 아다만티움의 하위 버전이다.
아다만티움만은 못해도 그에 준하는 정도의 강도와 성능을 자랑했다.
아다만티움 갑옷에 대한 미련이 넘치다 보니, 아다만트로 만들어진 너클이라도 끼자고 집어 왔던 것이다.
'에이, 사 놨던 건 중고로 팔든가 하면 되지, 뭐.'
그렇게 아쉬움을 달래고 정대식은 거의 빼앗다시피 가져온 탈로스 방어구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탈로스 방어구 세트는 아다만티움 갑옷 정도는 아니더라도 뛰어난 내구력과 복원력을 자랑했다.
갖은 속성의 공격에 강할 뿐만 아니라 각종 독과 저주, 주술에도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탈로스라는 몬스터 가죽으로 만들어져 착용감 또한 매우 좋았다.
옷 한 장 걸친 것보다 더 가벼운 무게감에, 소지하기도 편했다.
방어구 주제에 침낭처럼 돌돌 말려서 작은 공간에도 집어넣을 수가 있었다.
어차피 아공간이 있으니 휴대성을 따질 필요야 없겠지만, 남들 눈을 의식하면 아공간을 맘대로 쓸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뭐가 튀어나오는 격이니 보통 사람...... 그러니까 설령 각성자라 하더라도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바람에 여태껏 아공간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만간 능력치를 올려서 특수한 아이템을 획득했다고 구라라도 쳐야겠어. 유용한 능력을 남 눈치 보느라 못 쓰다니, 말도 안 돼."
그렇게 중얼거린 정대식은 문득 떠오른 바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엔트로피, 다른 계통의 능력을 획득하는 데 제한은 없는 거지?"
<그렇습니다.>
"모든 능력을 다 개화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그렇습니다. 데모크리토스 님으로부터 선택받으신 분의 경우, 그 능력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습니다. 마땅한 대가를 치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슨 능력이든 맘대로 살 수 있다, 이거구만."
<그렇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생전 안 궁금하던 게 묻고 싶어졌다.
정대식은 몸을 뒤집어 엔트로피를 쳐다보고 말했다.
"예전에도 나와 같은 현질 능력을 획득한 자가 있었나?"
<그것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가 인지할 수 있는 내용의 정보가 아닙니다.>
"평소와 하는 말이 다른 걸 보니, 돈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내용인가 보네?"
<재물과 탐욕, 대가의 신 데모크리토스 님에 대한 사항은 일체가 비밀에 부쳐져 있습니다.>
"그래?"
비밀이라는 말을 듣자 문득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바가 있었다.
정대식은 질문을 연이었다.
"비밀에 부쳐져 있다면...... 어디까지가 비밀인 건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데모 어쩌고 하는 그 신에 대해서나, 내 현질 능력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수가 있냐는 말이지."
올인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이미 밑밥을 충분히 깔아 두었다.
실제로 그가 다른 계열의 능력을 하나씩 획득하고 있었으므로, 타고난 자질이 그렇다는 식으로 둘러 댈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질을 통해 정대식이 획득할 능력은 앞으로 무궁무진하다.
엔트로피의 말마따나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면, 단순히 올인원의 가능성을 타고났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도의 능력을 획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기라도 한다면?
하루아침에 거액의 재산이 사라지고, 그때마다 그 대가로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그럼 현질에 대해서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때를 가정해 묻는 말에 엔트로피가 딱 잘라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해?"
<정대식 님을 선택한 신, 재물과 탐욕, 대가의 신 데모크리토스 님에 대한 사항은 일체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정대식은 미간을 모았다.
"안 된다는 것도 아니고, 불가능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엔트로피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재물과 탐욕, 대가의 신 데모크리토스 님께서는 이 지구에 강림해 있는 여타의 신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뭐가 어떻게 다른데?"
<설명해 봤자 이해 못하실 것입니다. 단지 데모크리토스 님께서 존재하는 차원은 다른 신들이 존재하는 차원과는 다르다는 사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차원이 다른 존재다, 이거냐? 그래서 본론이 뭐야?"
<그러므로 데모크리토스 님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정대식 님은 데모크리토스 님에 대한 사항은 물론이거니와 데모크리토스 님께서 부여해 주신 능력에 대해서도 발설해선 안 됩니다.>
정대식은 콧방귀를 꼈다.
"발설하면 어떻게 되는데?"
엔트로피는 즉각 답했다.
<정대식 님의 존재가 지워집니다.>
정대식은 화들짝 놀랐다.
"뭐? 지워진다니? 그거, 죽는다는 소리 아냐?"
<엄밀히 말해서 다릅니다. 정대식 님의 존재 자체가 아예 삭제된다는 뜻입니다.>
"뭐어어?"
<정대식 님이 존재했다는 모든 흔적이 사라집니다. 정대식 님에 대한 기록, 타인의 기억 등, 연관된 모든 사항이 애초에 없던 것처럼 지워진다는 말입니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정대식은 충격 속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엔트로피에게 소리쳤다.
"너!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말을 하면 어떡해? 내가 잘못하다가 그걸 입 밖에 내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럼 난 영문도 모르고 죽는...... 아니, 지워지는 거잖아!"
엔트로피는 뻔뻔스레 답했다.
<정대식 님이 묻지 않아서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꼭 물어봐야 말을 하냐!"
<만약 정대식 님께서 그걸 입 밖에 낼 상황이었다면 제가 경고를 했을 겁니다.>
"그게 다야?"
정대식은 한참을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러자 갑자기 기대앉은 벽에서 쿵, 소리가 났다.
옆방에 있는 사람이 그가 시끄럽게 굴자 벽을 친 모양이었다.
정대식은 열이 뻗친 김에 옆방 쪽을 향해서 욕을 한 바가지 날려 주었다.
그런 뒤 지레 지쳐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