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75화 (75/297)

# 75

현질 전사

-3권 25화

발길이 느려지자 허미래가 뒤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정말로 괜찮을까요......."

몇 발짝을 더 걷는 동안에도 정적이 흘렀다.

허미래의 말에 대꾸한 것은 김시온이었다. 그녀는 발을 질질 끌며 걷다가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서 말했다.

"괜찮지 않을 거야."

허미래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유태훈은 침울해졌고, 박무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외인부대가 아닌 신채운과 황유미는 정도가 덜하다지만, 그들도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시온은 황유미의 부축을 거절하고 바로 서서 말했다.

"정대식은 이미 마력을 소진한 상태고, 이성을 잃은 소강두가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정대식은 본인이 마력 회복 포션을 여러 병 가지고 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그 둘만의 전력으로 수컷 와이번을 쓰러트리기는 무리야."

허미래는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은 표정이 됐다.

"그, 그럼 어떡하죠?"

김시온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일단은 정대식의 호언장담을 믿는 수밖에. 커맨드 모드였으니까 다들 느꼈겠지만, 정대식은 자신에게 그 상황을 돌파할 방법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무슨 수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 말만 믿고 태평해 있을 수도 없어. 정대식과 소강두를 구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와이번의 알을 수거하기 위해서라도 한시 바삐 천군만마 공격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러자 신채운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저 혼자라면 속도를 내 세이브 포인트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유태훈이 회의적인 기색을 드러냈다.

"혼자서 가겠다고? 자칫 잘못하다가 다른 몬스터라도 마주치면 큰일 날 텐데."

"경계를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여야지요.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재빨리 도망치는 수밖에요. 위험하기는 이쪽 인원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그랬다.

김시온 부대장은 부상당했고, 마력을 소진해 버린 허미래와 황유미는 비전투 인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태훈 역시도 네크로맨서라 마력과 시체가 없이는 싸우기 어려워 박무원 한 명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시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정도 깜냥 없이는 던전에서 못 굴러먹었지. 우리는 걱정 말고 가서 피터 장 씨에게 도움을 요청해! 구조 팀을 보내 줘."

"알겠습니다."

신채운은 우산을 펼쳐 들고 뒤집어 그 안에 올라탔다. 그러자 우산이 둥실 떠올라 낮게 뜬 상태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신채운을 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박무원이 간신히 봉합시켜 둔 김시온의 상처가 다시 터진 것이다.

"으윽......."

김시온은 창백한 낯빛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미 치료 포션은 전부 소진한 상태. 보다 못한 박무원이 힐을 쓰려고 했으나 김시온이 만류했다.

"지금은 힐을 쓸 때가 아니야. 몬스터가 나타날 때를 대비해 마력을 아껴 둬야 한다."

대신에 유태훈이 나서 그녀를 업었다.

박무원을 앞장세운 채 외인부대는 다시 걸었다.

그러나 굳이 커맨드 모드가 아니더라도, 김시온이 별말 하지 않아도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은 누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던전 한가운데 고립되었다 해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등 뒤에는 동료들을 놔두고 걷는 길이다.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앞장서 가던 박무원이 황급히 뒤쪽을 손짓하며 몸을 낮추었다.

대원들은 일시에 몸을 수그려 수풀 속에 주저앉았다.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기척을 죽이고 있노라니, 저쪽에서 수풀을 헤치며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파사삭! 파사삭!

수풀 속에서 나타난 것은 커다란 도마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드레이크도 아니고 샐러맨더도 아니었다.

그것은 웜으로, 와이번의 영역 경계에서 종종 나타나는 몬스터였다.

으레 와이번의 새끼가 아니냐고 짐작되는 놈들로, 출몰 확률은 상당히 낮았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하필 이런 순간에 딱 마주친 것이다.

"키르르르르르!"

목을 울리는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웜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이놈들은 날개가 없으므로 와이번보다는 상대하기가 쉬운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전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사람 하나쯤은 너끈히 삼킬 만한 크기에 와이번 못잖은 사나운 주둥이를 갖고 있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지극히 위협적이었다.

"배틀 엑스!"

파아아앗!

자신의 무기를 배틀 엑스로 바꿔 든 박무원은 웜 앞을 가로막고 서서 비장하게 말했다.

"이놈은 제가 막겠습니다. 부대장님은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피하십시오!"

"멍청한! 너도 정대식 흉내를 내는 거냐?"

김시온은 헐떡이는 숨을 억누르고 어느새 블랙 스캘럽을 풀어냈다.

직접 전투를 즐기지 않는 유태훈도 쌍괴를 꺼내 들었고, 허미래와 황유미도 각자 호신용으로 소지하고 있는 자동 소총을 빼 들었다.

이런 자동 소총은 실탄을 사용할 수도 있었으므로 몬스터에게 타격은 못 입힌다 하더라도 접근을 막는 정도는 가능했다.

다들 싸울 각오를 한 것을 보고 박무원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배틀 엑스를 두 손으로 붕붕 휘돌리다 앞으로 뛰쳐나갔다.

파아앗!

그가 휘두르는 배틀 엑스의 기세에 풀이 사방으로 누웠다.

웜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긴 목을 쉭쉭 흔들어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사나운 입을 쩍 벌려 박무원을 깨물어 보려고 애를 썼다.

박무원이 웜의 눈앞에서 어그로를 끌 동안 김시온이 블랙 스캘럽을 휘둘렀다.

"하앗!"

블랙 스캘럽이 웜의 굵직한 앞다리를 휘감아 붙잡았고, 그 틈을 타 옆으로 돌아간 유태훈이 쌍괴로 놈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투두둥!

그러나 마력이 제대로 주입되지 못한 유태훈의 쌍괴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북 치는 것 같은 둔중한 소리만이 울리며 웜의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가죽은 그의 공격을 쉽게 튕겨 냈다.

블랙 스캘럽 역시도 웜을 제자리에 붙들어 놓는 정도의 역할밖에는 하질 못했다.

그게 바로 마력이 부재된 공격의 한계였다.

몬스터 브레이크로 인해 던전이 출현하고, 인류는 전에 없던 공포를 맞이했다.

전설 속에나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을 한 가공의 생물들이 인간을 맛 좋은 먹잇감 정도로 취급한 것이다.

게다가 그런 괴물들에게는 통상적인 공격이 통하지가 않았다.

몬스터의 외피는 총포의 공격을 쉽게 튕겨 내었다.

강력한 화력은 통할 때도 있었으나 전혀 소용없을 때도 있었다.

불 속성을 가진 몬스터들에게 화력을 퍼부으면 놈들은 더 강해졌다.

전자 무기의 효과 역시도 신통찮았고, 핵무기는 몬스터보다 인간에게 더 큰 피해가 갔다.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체불명의 신들이 부여한 신비로운 능력뿐!

이 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인간 본연이 내재하고 있는 힘이 필요했다.

기, 또는 차크라, 혹은 마력이라고 불리는 이 힘을 바탕으로 신들이 부여한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반인들 또한 이러한 마력을 어느 정도는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격이다.

제아무리 마력량이 많아도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신의 선택을 받은 각성자들만이 마력을 바탕으로 신의 능력을 쓸 수가 있었다.

이 마력은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경향을 띄는데, 타고나는 부분이 강했다.

물론, 개발의 여지가 있기는 했다.

신의 능력을 쓰면 쓸수록 마력을 운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어 보다 효율적으로, 낭비 없이 마력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총 마력량이나 그 마력이 타고나는 속성은 본인의 의지로 확장하거나 변경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력의 발현하는 형태 자체가 신이 부여하는 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반인을 각성자로 만드는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는 하나, 걸음마 단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인류를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존재는 여전히 헌터들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 헌터들도 무적은 아니었다.

마력을 소진해 버린 이상, 그들 손에 들린 아이템 또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낱 대형 도마뱀 한 마리도 상대하기 힘든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카가가강!

"크윽!"

어금니를 꽉 물고 배틀 엑스를 휘두르던 박무원은 멈칫해 동작을 그쳤다.

웜이 놀랍게도 그 흉악한 주둥이를 쫙 벌려 배틀 엑스를 통째로 물어 버린 것이다.

웜의 이빨이 도끼날에 갈리며 섬뜩한 소리가 울리고, 아구창이 찢어진 웜의 입에서 녹색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웜은 입이 찢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구는 박무원을 치워 버리기로 결심한 게 틀림없었다.

파악!

웜은 사납게 고개를 뒤흔들어 배틀 엑스를 저만치 날려 버렸다.

동시에 앞발로 배틀 엑스를 놓쳐 버린 박무원을 세차게 후려쳤다.

"안 돼!"

김시온이 악다구니를 쓰며 블랙 스캘럽으로 웜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오히려 김시온이 앞으로 확 딸려 가며 쓰러졌고, 웜의 앞발에 맞은 박무원이 저만치 날아가 처박혔다.

곧 긴 목을 돌려 박무원을 씹으려고 했다.

그 앞을 유태훈이 반사적으로 가로막았다.

카가가강!

쌍괴가 사나운 웜의 이빨을 한 번은 막아 주었으나, 두 번은 막아 주지 못했다.

"크아아악!"

웜의 주둥이에 팔을 물린 유태훈이 비명을 올렸고, 웜은 그를 깨문 채로 집어던졌다.

허미래와 황유미가 울부짖으며 자동 소총을 휘갈겼으나 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그로를 끌지 못하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배틀 엑스를 주우러 달려가는 박무원을 등 뒤에서 덮쳐들었다.

"아아악!"

박무원이 통째로 집어삼켜지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고 허미래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녀는 자동 소총을 떨어트리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웅크리고만 싶었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으나 아까 정대식에게 들었던 질책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몬스터에게 겁을 집어먹고 얼어 버리진 말았어야지!'

그 말을 상기하며 허미래는 울음을 삼키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보였다.

누군가, 등을 보인 채로 서 있었다. 그 등은 아직 낯설었다. 그러나 꽤 익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는 김시온이 바닥으로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붙잡고 있던 블랙 스캘럽의 손잡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걸 힘껏 잡아채, 박무원을 습격하던 웜을 움직이지 못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허미래는 안도와 경탄 속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정대식!"

기쁨에 찬 외침 소리.

정대식은 그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며 멋지게 '내가 너무 늦었지?'라든가 '오래 기다리게 했지?'라고 해야 하나 싶은 기분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손발이 오그라들어 전투 능력을 상실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실룩이는 입술을 꽉 다물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끄그그그그......" 하고 이쪽을 돌아보는 웜과 눈이 마주치자 쓸데없는 생각이 싹 날아갔다.

정대식은 곳곳이 찢기고 구겨진 탈로스 방어구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제아무리 A급 아이템이라 하더라도 순전히 몸으로 때우는 식의 싸움에서 멀쩡하지 못했다.

강철 신체가 아니었더라면 정대식 역시도 멀쩡히 두 발로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 회복 포션으로는 그의 능력을 채 다 발휘할 수 없었다.

정대식은 마력을 아끼기 위해 강화 강력권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강력권으로만 수컷 와이번을 상대했고, 그 바람에 싸움이 길어졌다.

일격에 놈을 죽이는 대신, 악다구니를 써 가며 주먹다짐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컷 와이번에게 물리고 뜯기고 씹힌 게 수십 차례였다.

결과적으로 수컷 와이번을 죽이고 소강두를 구해 올 수 있었으나, 또다시 웜을 상대하기에는 만만찮은 상황이었다. 강력권조차 한 번 쓸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태.

하지만 웜을 노려보는 정대식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한 상태였다.

이미 수컷 와이번을 주먹 하나로 때려죽이고 온 참이다.

와이번조차 되지 못한 이깟 도마뱀쯤이야.......

정대식은 씩 웃으며 블랙 스캘럽을 확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반동을 써서 앞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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