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77화 (77/297)

# 77

현질 전사

-4권 2화

현재 정대식의 오감은 14밖에 안 됐다.

그나마 민첩은 사정이 좀 나았지만 그래 봤자 18에 불과했다.

그간 마력과 체력에 포인트를 몰빵하느라고 상대적으로 다른 상태 수치에는 신경을 못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주의 확장 스킬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젠장! 이래 가지고는 곤란해! 고작 반경 100m짜리 능력으로 어떻게 몬스터를 피하란 말이야?"

<오감이나 민첩 상태를 향상시키십시오.>

"제기랄...... 나도 맘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지금 상태 포인트 가격이 많이 오르지 않았어?"

<현재, 상태 포인트의 가격은 8억 4,300만 원입니다.>

8억 4,300만 원.

겨우 포인트 하나에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제부터는 억 단위로 금액이 오릅니다.>

"그러니까 내가 2포인트를 구입하려면 19억 8,600만 원이 든다, 이 말이군."

<그렇습니다.>

"미친...... 말도 안 돼!"

정대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멀지 않은 곳에 대원들이 있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는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역정을 냈다.

"무슨 포인트 2점에 가격이 그리 비싸? 억 단위로 오른다는 게 말이 되냐? 이미 포인트 금액이 엄청난데, 거기서 또 억으로 올려? 아주 끝 간 데가 없구만, 너무 심한 거 아냐?"

엔트로피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굳이 포인트를 구입하지 않고도 상태를 향상시키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뭔데!"

<수련을 하시면 됩니다.>

"누가 그걸 모르냐!"

정대식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엔트로피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정대식 님께서는 데모크리토스 님의 선택을 받았기에 돈이라는 대가를 바치고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보통 신들의 선택을 받은 각성자들의 경우, 순전히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능력을 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정대식 님처럼 새로운 계열의 능력을 획득하거나, 스킬을 갖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오로지 수련으로 몸을 단련하여 상태를 향상시키고, 그로 인한 능력의 개선을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뭐야, 그래서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게 투정이라 이거야? 난 딴 사람들에 비해 복 받았으니 입 닥치란 소리냐고!"

정대식은 대답 없는 엔트로피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평소라면 네 말에 수긍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봐! 대원들은 다 죽어 가고 있고,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한참 시간이 걸려! 믿을 거라고는 내 현질 능력뿐인데 겨우 포인트 한 점에 어처구니없는 가격이라는 게 말이 돼?"

<정대식 님께서는 아직 19억 가량의 자금을 갖고 계십니다.>

정대식은 멈칫했다.

"9억 8천 정도가 있던 거 아녔어?"

<타이탄 공격대로부터 계약금 10억이 입금되었습니다.>

그럼 19억 8천 몇백 정도가 있다는 말이다.

잘하면 오감을 2포인트 구입할 수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대식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래? 그래 봤자 겨우 2포인트를 구입할 수 있을 뿐이잖아! 그거 가지고 되겠어?"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엔트로피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정대식은 분노를 느꼈다.

엔트로피를 주먹으로 후려치기라도 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으나 말 그대로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정대식은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좋아. 오감과 민첩, 둘 중 어느 것을 높이는 게 더 효과가 좋지?"

<주의 확장 스킬에 미치는 효과는 오감 쪽이 더 큽니다.>

"그럼 오감을 2포인트 구입하겠어."

<오감을 2포인트 구입하고 19억 8,600만 원을 차감합니다.>

정대식은 줄어든 잔고를 보고 입맛이 쓴 걸 느꼈다.

이로써 그가 가진 잔액은 고작 100만 원 정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통장에 20억 가까이 잔고가 찍혀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그 돈이 몽땅 사라져 버린 것이다.

'포인트 가격 상승이 심상찮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소용없겠어.'

정대식은 자신이 항시 떠안고 있는 딜레마를 자각했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 모순된 굴레 속에 갇혀 쳇바퀴를 돌리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기분이 엿 같아. 하지만 지금은 짜증이나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정대식은 손을 휘저어 엔트로피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새로 획득한 패시브 스킬, 주의 확장을 시험해 보았다.

정대식은 잠시 제자리에 선 채로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엔트로피의 설명대로 초점을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자 그의 감각이 확장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오감을 2포인트 올렸다고 주의 확장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최소한 1,000m는 넘어가는 것 같았다.

'좋아, 1km 정도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

정대식은 주의 확장을 사용한 즉시 북서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는 몬스터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게 웜인지 와이번인지, 아니면 그랜드 몰인지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몬스터인 것만은 확실했으므로 정대식은 퍼뜩 몸을 돌리고 외쳤다.

"몬스터가 온다! 피해야 해!"

그 말을 듣고 김시온이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유태훈도 신음을 흘리며 일어섰고, 박무원이 아예 그를 업었다.

정대식 역시 소강두를 둘러메었고, 서둘러 일행을 앞장서 가며 말했다.

"지금부턴 내가 인도하겠습니다."

엄밀히 말해 앞장을 서야 할 사람은 커맨더이자 부대장인 김시온이었다.

그러나 부상당해 상태가 말이 아닌 그녀는 아무런 이의를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대원들도 마땅히 정대식이 부대원을 이끌어야 한다는 듯 무언으로 동의를 보냈다.

정대식은 즉각 발길을 옮겼다.

"그럼 이동하죠."

* * *

정대식은 주의 확장 능력으로 몬스터들을 피해 걸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이 따라서 걸어야 하는 길, 즉 경계를 벗어나게 되었다.

김시온은 맵을 통해 그들이 경계를 벗어나서 어느 몬스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정대식을 멈춰 세웠다.

"잠깐! 지금 어디로 들어가는 거지?"

정대식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몬스터를 피해서 걷고 있는 겁니다."

김시온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대로라면 몬스터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또한 우리를 구조하러 오고 있을 팀과도 엇갈리기 쉬워. 경계를 따라가야지만이......."

"경계에도 몬스터는 나옵니다. 웜의 습격을 받은 데가 어디였습니까? 경계였잖아요? 몬스터의 영역과 영역 사이라고 해서 반드시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몬스터의 영역이라고 해서 위험하리란 법도 없고요. 전투 인력이 없는 이상은 몬스터를 피해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몬스터와 싸워선 안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한낱 웜이라도 마주친다면 참사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김시온은 정대식의 말에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못했다.

정대식은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씨익 웃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제게는 몬스터를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전 정신계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잖아요? 구조 팀 역시도 발견할 수 있으니 걱정 말고 따라오세요."

김시온은 그런 능력이 있으면 왜 진즉 사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하진 않았다.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물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부상을 입은 이상 자신이 지휘 능력을 잃었다는 것도 자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정대식이 대원들을 이끌고 있었고, 김시온은 거기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됐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정대식의 지휘를 받아들여야지만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알겠다. 너만 믿지."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앞장서 갔다.

그리고 김시온은 아예 맵을 집어넣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쳐서 따라오는 대원들은 못 느꼈겠지만, 그들은 상당히 어지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방이 몬스터였고, 놈들을 일일이 피해 가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길을 잘못 선택한다면 피치 못하게 몬스터와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정대식은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느라고 사실은 말도 못하게 지쳐 버렸다.

주의 확장을 사용하느라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다가, 모두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다는 부담감에.

사소하게는 등에 업고 있는 소강두에 이르기까지.

힘들지 않는 게 없었다.

혼자라면 얼마든지 몸을 빼낼 수 있었겠지만.......

정대식은 대원들의 존재가 자신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자신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 역시도 알았다.

그냥 막공으로 만난 사이, 즉 얼굴 한 번 보고 두 번은 안 볼 사이였다면 이렇게까지 애를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대식은 이제 혼자 몸이 아니었다.

그는 엄연히 타이탄 공격대에 속해 있었고, 그들은 현재 정대식의 책임이었다.

긴 시간이 지났다.

느끼기엔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시간 동안 그들은 걸었다.

간혹 쉬기도 했으나, 결코 누워서 자거나 넋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정대식이 그렇게 놔두질 않았고, 계속 지쳐서 뒤처지는 대원들을 독려해 가며 걷고 또 걸었다.

대략 12시간, 한나절 가량을 그들은 몬스터들 사이에서 걸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아득한 어둠이 내렸다.

던전은 수천, 수만 가지 모습을 하고 있었고 개중엔 계속 해가 떠 밝은 곳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휩싸인 곳도 있었다.

달이 두 개 뜨거나 주먹만 한 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거나 하기도 했고, 지구와는 다른 시간 단위로 해가 뜨고 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던전에서도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이 던전은 낮이 보다 길었다.

그러므로 던전 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맞이하는 밤이었다.

밤이 되자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졌고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정대식의 주의력도 급속도로 떨어졌다.

몬스터를 불러모을 수 있기에 그들은 불을 켤 수 없었다.

다행히 곳곳에 박혀 있는 에메랄드 빛 돌들이 밤이 되자 환한 빛을 내뿜었다.

거기에 의지해서 대원들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재촉해 걸었다.

대화가 사라진 지는 오래 되었다.

정대식은 입에서 군내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혼잣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마침내 자신이 찾아 헤매던 것을 발견해 내고는 중얼거렸던 것이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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