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83화 (83/297)

# 83

현질 전사

-4권 8화

정대식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이보다 더 좋은 계약 조건이 필요했다면 응당 제가 먼저 제시를 했을 겁니다. 무슨 혜택을 보자고 굳이 오디션을 치러 가며 이 공격대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저는 아직 올인원이 아닙니다. 트리플리스트가 맞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강영후가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세금 면제 혜택을 받는 이유는......?"

"그것은 제 가능성에 대한 혜택입니다."

"지금은 트리플리스트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올인원이 될 수 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정대식은 자신이 능력을 차츰차츰 늘려 나갔다는 사실을 적당히 각색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다들 정대식이 앞으로 더 많은 계열의 능력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동의를 했다.

"그러니 계약 사항 조정이라면 다음번 계약 때 해도 상관없습니다."

정대식의 말에 강영후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새삼 궁금해지는군. 왜 우리 공격대에 들어온 거지? 더 좋은 기회가 많았을 텐데."

강영후의 질문을 받고 정대식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전 제 공격대를 창설하고 싶습니다."

딱히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헌터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는 일이 아니던가?

강영후도 정대식의 대답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물은 것 같았다.

"타이탄 공격대의 운영 방식이 제가 생각하는 바와 유사하다고 판단되어 이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군...... 그럼 계약 사항을 조정하는 대신, 다른 제안을 하나 하지."

"무슨 제안 말입니까?"

정대식의 반문에 강영후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가 공격대를 창설할 때, 내가...... 아니, 정확히는 타이탄 공격대가 투자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정대식은 약간 당황했다.

"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먼 미래의 일이라서요."

"당장 계약서를 쓰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구두로라도 약속해 두고 싶어서 그렇지. 선점을 해 두는 셈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투자를 하는 만큼 공격대 창설이나 운영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겠네."

이건 정대식에게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유리한 이야기였다.

아무 바탕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보다야, 타이탄 공격대와 같이 내실 있는 공격대에 기댈 수만 있다면 훨씬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정대식이 구상하고 있는 소규모의 레이드 전문 공격대라면 타이탄 공격대와 같은 본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물론, 그 핑계로 정대식의 공격대를 좌지우지하려고 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정대식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다.

당장 투자를 받을 것도 아니니, 약속해 두는 것은 상관없겠다 싶어서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분한 제안 감사합니다. 만약 제가 공격대를 창설하게 된다면 타이탄 공격대에 많은 부분을 신세지겠습니다."

"우리야말로, 자네가 올인원이 되었을 때 많은 것을 신세지겠네."

정대식은 강영후와 악수를 나누고 사무실을 나왔다.

김시온은 그와 의논할 게 있다고 해, 혼자서 연회장으로 향했다.

* * *

아침에 서둘러 나와 입대식을 치렀더니 적잖이 배가 고팠다.

얼른 연회장에 가서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서두르는데, 갑자기 누가 등 뒤에서 팔을 확 낚아챘다.

"어억!"

정대식은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맥없이 복도 모퉁이로 끌려갔다.

그늘이 드리워 어두컴컴한 비상계단 입구에서, 정대식은 뜻밖에 벽치기를 당했다.

"너!"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라 정대식은 사나운 기세에 밀려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정대식을 낚아채 여기까지 끌고 온 인물, 최희가 얼굴을 바싹 붙이고 이를 드러냈다.

"네가 정말 올인원이 될 자란 말이야?"

최희는 어느샌가 정대식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최희는 타이탄 공격대의 실세라고 할 만했고, 정대식보다 나이도 한 살 많았고, 헌터로서의 경력도 훨씬 긴데다가, 등급도 그보다 높았다.

그렇다고 그게 정대식에게 따박따박 말을 놓을 이유는 못 되었다.

강영후야 공격대 책임자고 공대장이니 일반 대원에겐 말을 놓는 게 당연하다지만, 최희는 엄밀히 말해 정대식의 상관은 아닌 것이다.

정대식은 미간을 찡그리고 말했다.

"아직은 트리플리스트에 불과해서 뭐라고 장담할 순 없지."

정대식의 말투를 듣고 최희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신 너도 말 놨으니 된 거 아니냐는 식으로 계속해 반말을 이어 나갔다.

"일찌감치 신의 선택을 받아 각성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너 같은 자가 그렇게 당당히 올인원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그렇게 당당히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널 선택한 신이 무언가를 약속했나? 네가 올인원이 될 거라고?"

정대식은 약간 놀랐다.

최희가 말하는 뉘앙스가 범상치 않았다.

억측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녀도 보통의 신이 아닌, 정대식의 신처럼 특별한 신의 선택을 받은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 여자도 나와 같이 데모크리토스의 선택을 받았나?'

정대식은 그 짐작을 금방 철회했다.

그렇다면 올인원의 가능성에 대해서 지금과 같이 질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질 능력이 있다면 돈만으로도 충분히 올인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정대식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래. 나의 신께서 내게 올인원을 약속하셨다."

데모크리토스가 그런 소릴 한 적은 없지만, 그의 현질 능력은 얼마든지 올인원을 가능케 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모든 계열의 능력을 획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신에게 약속을 받았다는 말이 100퍼센트 거짓말인 건 아니었다.

그러자 최희가 몹시 낙담하는 표정이 됐다.

"그래...... 그렇군...... 신께서 선택하셨단 말이지......."

최희는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아까까지 사납던 표정이 누그러지자 잊혔던 미모가 살아났다.

정대식은 무심코 그 얼굴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우와, 피부가 엄청 곱네! 도자기 같은 피부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그녀는 매우 가까이에 서 있었고, 덕분에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입구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살에 뺨에 돋아난 솜털까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발그레한 게 마치 아기 같은 뺨이었다.

풍겨 나는 체취도 향기로웠다.

성인 여성에게서 풍길 법한 화장품 냄새가 아닌, 옅은 로션 냄새가 풍겼다.

그러자 갑자기 이 상황이 새삼스러워졌다.

'잠깐만, 이거 너무 가까운 거 아냐?'

그녀가 팔로 벽을 짚은 채 정대식을 가로막고 서 있어, 남들이 보면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최희가 정대식을 덮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최희 정도 되는 인물이 일개 대원인 정대식을 덮칠 이유가 없었다.

등급도 그녀가 더 높으니 헌터들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속설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정대식은 그런 사실들을 곱씹으며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쓸데없는 생각을 쫓아냈다.

'내가 지금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그러나 시선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대식은 스리슬쩍 눈을 내리고, 목깃이 헐렁한 티셔츠 아래로 드러나 보이는 앙가슴을 훔쳐보았다.

'......생각보다 가슴은 작은지도.'

실망인지 설렘인지 모를 기분을 맛보고 있는데, 최희가 스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몹시 힘없는 태도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더 강해지는 것은 무리란 말인가......?"

최희는 그대로 입구를 나가 정대식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가 버린 자리를 쳐다보며 정대식은 좀 어이없어했다.

'아니, 저기서 더 강해져서 어쩌려고?'

* * *

"야, 이거 가져가라!"

정대식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기철민이 냅다 던진 꽃다발에 맞고 정신을 차렸다.

"혼자 앉아서 뭔 생각을 그리 하는 거야?"

얼을 빼놓고 있는 모습이 이상스러웠는지 기철민이 옆에 앉아 말을 붙였다.

사실 입대식의 뒤풀이를 겸한 연회였으므로 주인공은 정대식과 기철민, 그들 두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대원들의 관심이 모이는 사람은 정대식이었다.

그와 접할 기회가 없던 다른 부대의 대원들이 그에게 한 번 말이나 붙여 볼까 얼쩡거리고 있었지만, 정대식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으니 다들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기철민이 나서서 그에게 말을 건 상황이었다.

그가 속한 외눈박이부대원들이 옆구리를 찔러 대기도 해, 꽃다발을 핑계로 말을 붙인 것이다.

기철민의 질문에 정대식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불쑥 기철민조차도 잊고 있었던 말을 꺼냈다.

"넌 오로지 강해지는 것만이 목표라 그랬지?"

"엉? 아...... 어. 그렇지. 헌터라면 누구나 다 그렇지 않겠어?"

기철민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에 정대식은 미간을 찡그렸다.

"네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대도? 5등급...... 4등급...... 아니, 이 세상에서 널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강해진대도 그런 생각을 할까?"

"글쎄?"

정대식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나 같으면 안 할 거 같거든."

"그래?"

"응, 더 강해져서 대체 뭘 하게? 대한민국 최고라는 말은 세계 최고라는 말 아냐? 그런데도 더 강해지고 싶을 수가 있나? 그쯤 되면 강해지는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인생을 즐겨야 하는 거 아냐?"

정대식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묻는 말에 기철민은 의아해했다.

"너 지금 누구 이야길 하는 거야?"

차마 최희와의 일을 털어놓을 수가 없어 정대식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기철민이 "흠!" 하는 소리를 내뱉고 말했다.

"제아무리 강한 헌터라도 당해 내지 못할 만한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잖아? 지난 몬스터 브레이크 때 나타났던 거신이라든지."

"그 거신이 다시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고. 나타난다고 해서 당해 내지 못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닥치지도 않은 미래야. 가상의 적이라고. 그런데 그런 경우를 상정하고 더 강해지고 싶어 한단 말이야?"

"아니면 강해지는 거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고."

"엉?"

정대식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강해진다는 것은 수단이다.

그것 자체가 목적일 수가 있나?

강해져서 부자가 된다, 강해져서 거신을 퇴치한다, 강해져서 만인의 영웅이 된다는 식인 게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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