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현질 전사
-4권 12화
"어서 오십시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이크 매장을 찾은 정대식은 슈퍼스포츠를 몇 대 구경했다.
1,000cc 이상의 최고급 오토바이도 슈퍼카에 비하자면 가격이 낮았다.
대략 5천에서 1억 정도면 최상급으로 구매할 수 있었기에 방금 전 수억대의 차를 구경하다 온 정대식의 입장에서는 저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잘 타는 것도 아니고, 던전에 마구잡이로 끌고 다니며 편하게 탈 용도로 슈퍼스포츠를 사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정대식은 적당한 선에서 4천만 원짜리 두카티로 낙찰을 보았다.
그리고 같이 다녀 준 유태훈과 소강두에게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샀다.
서울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최고급 한우 스테이크에 칼질을 하고 있으려니 인생의 질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유태훈이나 소강두에게는 별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곳에서 식사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정대식은 자신의 목표를 상기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그런 삶이지.'
오늘 그가 소비한 돈은 1억 8천만 원.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 정대식에게는 사치품을 사는 데 그만한 금액을 쓴 것이다.
전 같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쳤다고 할 만한 행동이었으나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돈 쓰는 일이라고 했던가?
정대식은 그 말에 동의했다.
'아직까진 1억 8천만 원도 내게는 큰돈이다. 언젠가는 그 정도쯤은 껌 값으로 여길 수 있도록...... 더 돈을 벌어야 해!'
여태까지의 정대식은 십 원짜리 한 장에도 손을 벌벌 떠는 수전노였다.
하지만 오늘 그는 돈을 쓰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전에 없는 물욕을 느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더 먹는다고, 막연하게 그려 오던 부자의 삶을 조금이나마 누려 보고 나니 돈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다.
'그래, 아직까지는 투자를 계속할 때다. 현질을 하며 돈을 쓰는 걸 아까워할 때가 아니야.'
가급적 빠른 시일 내, 더 많은 능력을 획득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정대식의 눈이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 * *
"저기요."
"예?"
뜬금없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정대식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학교 가는 대학생인지, 아니면 출근하는 직장인인지 젊은 여자가 이쪽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 깨닫지 못하는 새 실례라도 저질렀나 싶어서 정대식은 약간 긴장했다.
이런 고급스러워 보이는 커피 전문점은 처음이라서 무슨 실수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 괜찮으시면 연락하고 지내지 않을래요? 그쪽이 맘에 들어서요."
헐!
정대식은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태어나서 이런 일을 처음 당해 보는지라 그는 의심부터 하고 봤다.
어디서 이쪽을 쳐다보며 낄낄거리는 무리가 있다거나, 부대원들이 작정하고 저를 놀리려 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부라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없었고, 야외 테라스에 앉은 부대원들은 이 상황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다단계인가? 아냐, 종교인일 가능성이 높겠지. 어쩌면 장기 밀매인지도 몰라!'
정대식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여자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으니까 상큼한 미모가 확 피어났다.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뭐 팔아먹으려는 것도, 뜯어먹으려는 것도, 전파하려는 것도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요. 뭣 하면 제 연락처만 드리고 갈게요. 꼭 연락 주세요."
여자는 정대식이 귀엽다는 듯 피식거리며 가방을 뒤적여 볼펜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그걸로 정대식의 손바닥에 꾹꾹 눌러썼다.
여자애의 자그만 손에 잡힌 손이 몹시 낯부끄러웠다.
볼펜을 쥐고 있는 손이 어찌나 곱고 새하얀지, 마치 도자기로 빚은 것 같았다.
"꼭 연락 주셔야 해요!"
여자애는 당부 한마디를 남기고 제 몫의 커피를 든 채 사라졌다.
정대식은 멀거니 손바닥에 남은 전화번호를 쳐다보았다.
요즘 여자애들은 참 당돌하기도 하다.
자기가 누군지 알고 위험하게 연락처를 마구 넘기고.......
정대식은 혀를 쯧 차면서 손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과 캐러멜 시럽 추가하신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 나왔습니다!"
정대식은 커피를 받아 들고 동료들이 기다리는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강두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때 빼고 광낸 보람이 있어! 막 여자애가 번호도 물어보고 말이야. 이게 다 이 형님 덕인 줄 알아라. 밥 한 번 사!"
허미래는 샐쭉해 입술을 삐죽였다.
"그게 왜 강두 네 덕이야? 태훈이 덕이면 몰라도."
"어라라, 지금 이 녀석이 입고 있는 옷, 다 내가 골라 준 거야!"
"몰라, 피이!"
허미래는 툴툴거리며 고개를 팩 돌렸다.
대원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김시온은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낚아채 빨대로 쭉쭉 빨았다.
"팔용대 이 자식은 왜 안 와?"
그녀는 투덜거리며 정대식에게 시럽 병을 들고 오라고 턱짓했다.
그리고는 정대식이 보기에는 이미 무지하게 달아 보이는 커피에 그가 가져온 시럽을 콸콸 쏟아 부었다.
김시온은 생긴 것답지 않게 단 음식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커피숍 앞에 차 한 대가 서더니 그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내렸다.
"늦어서 미안!"
겸연쩍은 듯, 혀를 빼물며 나타난 사람은 외눈박이부대장 팔용대였다.
온몸에 돌덩이 같은 근육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스킨헤드의 외눈박이가 그딴 짓거리를 하니 눈이 썩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김시온은 질겁했다.
"크아악! 눈 썩으니까 제발 그러지 좀 마."
"히잉, 내가 뭘 했다고."
입술을 씰룩거리며 팔용대는 뒤따라 차에서 내린 기철민과 또 다른 여자를 손짓했다.
"이리 와 앉아!"
정대식은 기철민과 짧게 눈인사를 했다.
또 다른 여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데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보아하니 외눈박이부대원인 것 같아, 오다가나 마주쳤었나 보다고 정대식은 관심을 거두었다.
곧, 모여야 할 사람이 다 모이자 김시온이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외인부대원과 외눈박이부대원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새로 받은 의뢰의 사전 답사를 위해서다."
그 말을 팔용대가 이었다.
"알다시피, 외인부대원의 뉴비인 정대식이 지난 파견에서 활약을 잘해 준 덕분에 몬스터 조사 팀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몬스터 조사 팀과의 일은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지속적으로 1년 여 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김시온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국민안전처 산하 괴수대책반과 대한헌터협회와 각성자연맹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몬스터 도감 편찬 사업의 일환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참여를 하고 있는 만큼, 우리 타이탄 공격대의 주력 임무가 될 예정이다. 하지만 아직 맡아 놓은 의뢰도 남아 있고, 여러 진행 중인 일들이 있기에 당장에 많은 인원을 할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목표 던전의 사전 답사는 여기 있는 이 인원만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아, 저기 민머리는 빼고."
"민머리라고 부르지 마아~!"
팔용대가 앙탈을 부리는 데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정대식은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가까스로 참았는데, 그건 기철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정대식은 진심으로 그를 동정했다.
만약 팔용대가 자신의 상관이었으면 타이탄 공격대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내 지휘 아래 정대식, 소강두, 허미래, 기철민, 최선. 이 다섯 사람이 TE15D에 사전 답사를 가게 될 것이다. 기철민과 최선 두 사람이 맵핑과 정보 수집을 하고, 우리 외인부대는 그들의 일을 거드는 한편으로 몬스터의 종류에 대해 파악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김시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부대원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팔용대를 찌리릿, 째려보았다.
"겨우 이 말하는데 굳이 여기서 보자는 이유가 뭐야? 그냥 회의실에서 간단히 끝내도 되잖아!"
김시온의 윽박지르는 말에 팔용대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치만 여기 커피가 맛있다고 들었는 걸? 본사 근처에 있는데도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단 말이야. 여기서 꼭 시온이 너랑 커피 한 잔......."
김시온의 눈이 사람이라도 찔러 죽일 것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가엾게도 팔용대는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끝까지 말을 잇지도 못했다.
아무튼 간에 그날의 미팅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본격적인 임무는 다음 날부터였다.
Chapter 22. 실종
다음 날 아침, 김시온을 필두로 한 여섯 사람은 본사 앞에 모여 지프 두 대에 나눠 타고 목적지로 출발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충남 태안.
세 시간 가까이를 달려 TW15 던전 앞에 당도했다.
"여기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장비를 점검한 뒤 진입한다."
그들은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맵핑을 하는 데 필요한 드론과 정보 입력을 위한 탭, 카메라와 통신 장비 등등을 점검했다.
그런 뒤 곧장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 몬스터 브레이크 때 새로 발견된 태안군의 열다섯 번째 던전은 뻘밭과 유사한 환경의 필드형 던전이었다.
정부 의뢰로 어떤 헌터가 한 번 공략을 끝마쳤다고는 하는데, 던전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었다.
다만 던전 공략 당시 나온 마정석이 상당히 값어치 있었다고 하니, 앞으로 헌터의 발길이 자주 닿을 곳이었다.
던전 안으로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서해 바다에 온 것 같은 짠내와 정체 모를 구린내가 뒤섞여 났다.
공기는 습했고, 사방이 해무와 비슷한 안개로 둘러싸여 있어 시야가 짧았다.
김시온은 쾌적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환경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뭔가 예감이 안 좋은 곳이네. 소강두, 라이트 켜라."
몬스터를 불러들일 위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시야를 확보해야 걸어갈 수도 있는 관계로 소강두가 불을 밝혔다.
보아하니 발밑은 거의 진흙이었고, 군데군데 돌과 자갈 무더기와 바위 같은 것들이 길을 이루고 있었다.
지프가 진입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였으므로, 그들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