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현질 전사
- 5권 8화
'설마 그런 짓을 하려고 세븐 스타를 모으는 건 아닐 테고. 뭐, 나랑은 상관없나?'
최희처럼 그냥 모으고 싶으니까 모으는 걸 수도 있다 생각하고 정대식은 날씨나 알려 달라고 말했다.
내일부터 곧장 새로운 임무에 투입되기에 맑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누가 등 뒤에서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저......."
정대식은 의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는 듯 모르는 듯, 낯익은 듯한 낯선 인물이 서 있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소년이라 무슨 볼일인지 어리둥절했다.
그러는 정대식을 마주 보고 소년이 별안간 환한 웃음을 만면에 띠었다.
"역시! 정대식...... 정대식 씨 맞죠?"
정대식은 이런 일반인들도 자신을 알아보나 싶어서 적잖이 당혹했다.
그가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있는데 상대가 본인을 손가락질해 보이며 말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예?"
"저요! 전에도 지하철에서 마주쳤잖아요!"
"어...... 아!"
정대식은 한 박자 뒤늦게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남자애는 헌터 마니아라고 스스로를 밝혔던 아이였다.
예전에 조디악 공격대에 임시 대원으로 갔다가 거기서 지급받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을 걸어왔었던 것이다.
남자애는 몹시 반가운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정대식 씨가 타이탄 공격대의 대원이라고 TV에 나오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긴가민가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때 그 형이더라고요!"
"그래? 용케도 알아봤구나."
"잊을 리가 없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는데요? 분명히 대단한 헌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러냐?"
남자애는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흥분해서 한참을 떠들다가 사인과 사진을 요청했다.
정대식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러기가 적잖이 창피했으나, 이 애가 워낙에 기대를 하는 눈치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 남자애에게 한 번 서비스를 해 주자 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주위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고 심지어는 옆 칸에서까지 우르르 찾아왔다.
정대식은 군중에 둘러싸여 난감한 나머지 내려야 할 역 전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 버스로 갈아타든지 택시를 타든지 해야겠다고 황급히 발길을 옮기는데, 뒤에서 남자애가 그를 쫓아왔다.
"형, 형!"
정대식은 미간을 찡그리고 말했다.
"왜 쫓아오는 거야?"
"헉, 헉...... 죄, 죄송해서요. 제가 소란을 떠는 바람에 내리신 거죠? 타이탄 공격대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몇 정거장 더 가야 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네 탓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너도 그만 네 갈 길 가."
"그, 그게......."
"왜? 할 말이라도 있어?"
"예."
남자애는 별안간 고개를 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파, 파이팅하시라고요!"
정대식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
남자애는 얼굴이 벌게져 말했다.
"제가 형 1호 팬이잖아요. 1호 팬으로서 항상 응원할게요!"
이제 중학생? 고등학생쯤 되었을까.
어린애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어라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정대식은 미소를 띤 채로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고맙다."
"괘, 괜찮으시면 토, 톡 아이디라도......."
"연락처 달란 소리야?"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남한테 알려 주지도 않을 거고요. 저만의 비밀로 할게요. 그냥 저 말고도 형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래요. 진짜예요."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없었을 일이지만, 변덕이 일어 정대식은 그 소년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남자애의 이름은 윤현민으로, 갓 중2를 벗어난 중3이었다.
"고맙습니다!"
"고마울 것 없어. 연락이 잘 되지는 않을 테니까."
"제 연락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는...... 랭킹 순위에 신경 써 주세요!"
정대식은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랭킹 순위라고?"
정대식이 반문하는 말에 윤현민은 좀 우물쭈물했다.
"그것이...... 형은 트리플리스트에 초대형종을 쓰러트릴 만한 능력자잖아요? 그것 때문에 올인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듣고 있고요. 그런데 그런 거에 비해서는 랭킹이 낮아서...... 사람들이 부풀려진 게 아니냐고 멋대로 말을 하거든요."
"그래? 지금 내 랭킹이 몇인데?"
"......."
왜인지 윤현민은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정대식이 재촉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말했다.
"아직 100위권 밖이라서......."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놀랐다.
랭킹에 신경을 안 쓰고 살기는 했지만, 순위권에도 못 들어갈 만큼 낮은 줄은 몰랐다.
윤현민은 그를 대신해 열심히 항변했다.
"랭킹은 어차피 누적 순위로 집계가 되는 거라서 오랫동안 헌터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그에 비해 형은 헌터가 된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요. 조만간 100위권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래. 아무튼 알겠다. 고마워."
정대식은 윤현민과 헤어져 걸으며 엔트로피를 불러냈다.
'야, 엔트로피. 내 랭킹 순위가 왜 그렇게 낮아?'
어느새 사라졌던 엔트로피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곤 말했다.
<저 소년이 말한 바가 맞습니다. 랭킹 순위를 높이기에는 정대식 님이 헌터로 활동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정대식 님의 활동 사항이 공식적으로 집계가 다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역시, 변장수를 통해 불법 정산을 하기 때문인가?'
<그 영향도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정대식이 몇십억 대의 수입을 올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금액은 변장수로부터 나왔다.
공식적인 처리소를 통해 계산되어 정식 수집으로 집계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욱이 랭킹 순위 100위권에는 첫 번째 몬스터 브레이크가 일어났던 때부터 활동했던 헌터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이 현재 대부분의 굵직한 공격대를 도맡고도 있었고, 지난 10년 간 쌓아 온 공적을 한순간에 앞지르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 순위가 정확히 몇 위야?'
<687위입니다.>
'컥.'
정대식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그래도 한 2, 300위권은 될 줄 알았더니.
100위권에서 까마득히 멀었다.
'그렇게 낮아?'
정대식이 하는 말을 듣고 엔트로피가 냉정하게 답했다.
<이 세계에는 수많은 헌터가 존재합니다. 그들 가운데 상위 1,000명 안에 드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정대식 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0위권 밖이었고요. 최근에야 600위권으로 상승한 것입니다.>
'왜? 어떻게 오른 거지?'
<지난번 키클로페스를 처치하여 퍼플 스톤을 획득한 일과, 실종자를 수색하여 찾아낸 일로 인해서입니다.>
'퍼플 스톤의 가격이라고 해 봤자 몇십억밖에는 안 됐는데. 랭킹 순위가 정산을 바탕으로 하는 건 아닌가 보지?'
<아닙니다. 미디어의 노출 정도,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적, 등급 수준과 이능의 희귀성, 보유한 아이템의 가치 등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여 결정이 됩니다.>
'그렇군.......'
여태까진 돈이 최고라 랭킹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살았는데, 막상 제 수준을 숫자로 확인하고 나니 충격은 충격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600위권도 충분히 대단한 거지만, 그가 국내 유일의 트리플리스트라는 사실과, 앞으로 올인원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로 점쳐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참은 뒤떨어지는 거였다.
'으음, 은근히 이거 자존심 상하는데.'
차라리 순위 같은 거 확인해 보지 말 걸 그랬다고 정대식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발길을 옮겼다.
Chapter 27. 승진
하룻밤 휴식을 가진 정대식은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다른 던전으로 가서 동료들과 합류했다.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각, 자가용을 몰아 나타난 정대식을 미리 와 있던 외인부대원들이 반겨 맞았다.
"왔나?"
무뚝뚝하게 고개를 까닥여 보이는 김시온.
"여어!" 하고 손을 번쩍 들어 보이는 소강두.
환하게 미소를 짓는 유태훈.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히 눈짓하는 박무원.
수줍은 얼굴로 꾸벅 인사하는 허미래에 이르기까지.
보름 동안이나 혼자 언데드가 우글거리는 던전에 있다 와서 그런지 그들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반갑게 느껴졌다.
정대식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김시온이 한마디를 했다.
"던전에 처박혀 수련한 보람이 좀 있던가?"
김시온의 질문에 정대식은 씩 하니 웃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그러자 소강두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며 말했다.
"훈련을 갈 거면 우리랑 같이 가지. 치사하게 혼자 가기냐!"
"미안. 다음에는 한번 생각해 보지."
"뭐, 얼마나 강해졌나 두고 보겠어."
소강두가 짐짓 으름장을 놓는 가운데 김시온이 간략하게 임무를 설명했다.
이번에 그들이 할 일은 정부로부터 의뢰받은 던전 공략이었다.
여기저기 공략해야 할 던전이 하도 많다 보니, 한계 시간이 임박하면 국민안전처에서 정부 산하의 모든 공격대에 공문을 보냈다.
이런 던전을 공략하고 나면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고, 이 임무에 한해서 세금도 면제를 받았다.
각 공격대는 자유롭게 여기에 임할 수가 있었는데, 실패가 거듭되어 공략이 다급한 경우, 지원하는 사람이 없는 던전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특별히 의뢰를 하기도 했다.
이럴 때는 공격대와 의뢰비를 직접 협상했다.
"우리가 오늘 들어갈 CC9던전은 트롤이 버글거리는 장소다. 알다시피 트롤은 재생력이 매우 뛰어나고, 지능이 있어 무기를 쓸 줄 알며, 몇몇은 주술을 사용하는 관계로 사냥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특히 우리가 잡아야 할 보스몹인 트롤 소서러는 디버프에 특화되어 있어 상대하는 것이 엄청나게 골치 아프다. 그런 관계로 이번 임무는 우리 외인부대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의 인원을 좀 빌리기로 했다."
그렇게 말한 김시온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고,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리기 무섭게 저쪽에서 자동차 엔진음이 들렸다.
곧 지프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와 섰고, 거기에서 내린 두 사람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들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다름 아닌 기철민과 최선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안개가 심해서......."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는 둘을 보고 김시온이 차갑게 말했다.
"외눈박이 부대는 눈알이 아니고 정신머리가 빠졌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시온은 눈을 부라리며 화를 냈고 두 사람은 묵묵히 깨졌다.
그들을 충분히 나무란 김시온은 곧 설명을 이었다.
"잘 알고 있겠지만 기철민은 근딜이고, 최선은 버퍼다. 우리 부대의 부족함을 보완해 줄 테니까 이번 임무 동안에는 한 팀이다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김시온은 그들 두 사람과도 커맨드 모드가 가능하도록 마킹을 했다.
그러고 나서 장비를 점검한 뒤 지원 팀과 함께 던전으로 들어갔다.
"출발!"
잠시 후, 그들은 던전 안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