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현질 전사
- 5권 12화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제 부대를 꾸릴 생각을 하다 보니까 제가 부족한 면이 적지 않게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무구 면에 있어서 말입니다."
장한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는 A급 아이템으로도 부족한가 보죠?"
"탈로스 방어구와 아다만트 너클, 그리고 마력 변환 자동 소총이 그동안 제 역할을 잘해 주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부족함이 있을 거라고 여겨지네요. 어차피 대여한 물건이니 다른 아이템으로 바꿔서 대여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지난번, 기철민과 인챈트를 하러 가서 확실히 느꼈다.
자신의 것도 아닌 아이템에 자가 수복 기능까지 입히기가 아까웠다.
자가 수복 기능을 입히면 AA급 아이템이 되는 셈인데, 뭐하러 공짜로 그런 짓을 해 준다는 말인가?
무구의 수준이 올라가 봤자 랭킹에 반영되지도 않는데.
차라리 AA급 아이템으로 바꿔서 대여하고 인챈트 스크롤은 팔아 치우는 게 더 남는 장사였다.
"제 수준이 올라갔으니 그만큼 무구의 수준도 올라가야겠죠? 국가 기물 금고에 다시 들어가고 싶습니다."
장한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는 정대식을 보고 뻔뻔하다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 자리에 그를 만나러 나와 준 것을 보면 정대식이 어떤 요구를 할지도 짐작하고 있었고, 그 요구를 들어줄 생각도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한나는 생각보다 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번처럼 정대식이 막무가내로 떼쓰는 데 당할 생각은 없는지 미리 협상을 시도했다.
"알겠어요. 지금 가진 A급 무기를 전부 반납한다면 AAA급 무기를 하나 대여해 드리죠."
"A급 무기 세 개를 반납하고 AAA급 하나를 받는 거면 그게 그거 아닙니까? 이왕이면 S급으로 빌려주시죠?"
"S급은 제 선에서 내어 드릴 수가 없는 물건이에요. S급 이상의 아이템을 대여하는 데는 심사가 따로 필요해요. 미리 말해 두지만 그 심사를 통과하기란 상당히 까다로워요. 집행자가 된다면 또 모를까......."
집행자라는 말에 정대식은 퍼뜩 떠오르는 바를 물었다.
"잠깐만요. 그럼 역시, 최희의 무기는 국가 기물 금고에서 대여한 겁니까?"
장한나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래요. 정확히는 기간 한정이었어요."
본디 최희는 집행자가 되기 전에는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었다.
그녀는 천둥 번개를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그 무렵, 최희의 광대한 마력은 재능이라기보다는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데 집행자가 되어 나타나면서 그녀는 완전히 탈바꿈을 했다.
최희가 새로이 갖게 된 무기, 호라갈레스를 통해 능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를 저지르는 대신 목표한 대상만을 정확히 타격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써 헌터 살인마를 처치해 냈다.
그 후, 최희와 호라갈레스는 거의 한 쌍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무기의 출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다.
국가 기물 금고의 존재에 대한 의혹이 본격적으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이만한 무기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를 의아해했고, 최희는 호라갈레스의 출처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장한나는 거기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최희가 집행자가 되면서 국가에서 그녀에게 호라갈레스를 내어 준 것은 맞아요. 집행자가 되면 가능한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는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도 최희는 호라갈레스를 돌려주지 않았어요.
그걸 되돌려 받으려면 또 다른 집행자를 임명해야 할 판인데, 그러기에는 최희가 지나치게 강하죠. 뭐, 그녀가 호라갈레스를 사리사욕을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제일가는 헌터답게 여러 가지 요구에도 잘 응해 주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그냥 묵인하고 있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정대식을 보고 장한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그렇다고 행여 최희처럼 행동할 생각은 말아요. 어차피 지금 수준으로는 호라갈레스와 같이 SSS급의 아이템을 가져갈 수는 없을 테니까. 최희의 일로 국가 기물 금고 관리 기관에서도 느낀 바가 많거든요. 앞으로는 두 번 다시 SSS급 이상의 아이템이 반출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차피 정대식은 최희와 같이 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빌릴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해 봤자 잘해도 S급이고, 일단 빌린 건 반영구 대여이기 때문이다.
정대식은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럼 국가 기물 금고에 호라갈레스 말고도 SSS급의 아이템이 더 있다는 말이네요? 혹시 M이나 L, G급 무기도 있는 겁니까?"
장한나는 실수했다고 느꼈는지 낯빛을 굳히고 말했다.
"그건 노코멘트예요."
"그런 걸 빌려 달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냥 의아해서요. 그만한 위력의 아이템을 처박아 놓기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장한나는 정색을 했다.
"불측정 등급의 무구들은 정대식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해요. 그건 핵폭탄 수십 개를 동시에 터트리는 것과 같은 위력을 가졌단 말입니다. 엄중히 관리하는 게 당연하죠."
"그렇게 위험하면 그냥 없애지 그래요?"
"그럴 순 없어요. 각성자, 당신들이 말하는 신이 그 아이템을 괜히 내려 보낸 것은 아닐 테니까. 게다가 그건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하긴, 그렇겠네요."
대화를 잇던 정대식은 문득 생각나는 바를 물었다.
"근데 광필두는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겁니까?"
장한나는 정대식의 지적에 근심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그가 세븐 스타를 모으고 있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장은 어떻게 제지할 방법이 없네요. 아직까지는 두 개의 무구를 모았을 뿐이고, 나머지를 다 모으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요."
장한나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정대식이 듣기에는 만약 그걸 다 모으면 큰일 난다는 소리로 들렸다.
아무튼 간에 장한나의 지적처럼 7개 무구를 다 모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세 개는 랭킹 10위권에 들어 있는 강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개는 아예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대식은 그 두 개가, 아니 적어도 하나 정도는 국가 기물 금고에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최희 일로 아이템을 대여하는 일이 더 까다로워졌어요. S급 아이템을 빌리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거예요. 제 생각엔 그렇게까지 해서 S급 아이템을 빌려야 하나 싶네요. AAA급 아이템으로도 충분히 정대식 씨 성에 찰 거예요."
"그럼 AAA급 아이템을 세 개 빌리는 걸로 하죠."
"그건 안 돼요!"
둘은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이번에는 장한나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지난번, A급 아이템을 세 개나 뜯긴 일로 상부에서 곤욕을 치렀던 모양이다.
하도 죽는 소리를 해 대기에 결국에는 타협해 AAA급 아이템 두 개를 빌리기로 합의했다.
정대식은 질렸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장한나에게 짐짓 너그러이 말했다.
"제가 한 발 양보했으니, 제게 빚진 셈입니다."
장한나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그녀는 정대식의 그런 뻔뻔함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곧 표정을 무너트리며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했다.
"정말이지 못 말리겠군요! 저 역시도 한 발 양보한 셈이라고요!"
"그도 그러네요."
정대식이 선선히 인정하며 따라 웃자 장한나가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가 서둘러 그 기색을 지우고 말했다.
"하지만 알아 두세요. 제가 정대식 씨의 편의를 이렇게나 봐주는 건, 어디까지나 정대식 씨가 올인원이 되어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하루라도 빨리 올인원이 되기를 바란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맞아요."
"왜 그렇죠? 제가 올인원이 되면 뭐, 생체 실험 같은 거라도 할 건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런 짓을 얌전히 당하고 있을 정대식 씨도 아니고, 무엇보다 각성자 협회에서 가만있지 않을 걸요? 제가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이 정대식 씨 한 명만인 것도 아니고요."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했다.
"헌터들이 지금보다 더 강해질 필요가 있나요? 몬스터 사냥이라면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장한나는 문득 얼굴을 흐렸다.
그녀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이 되었으나 속내를 꺼내 놓지는 않았다.
그저 당부하듯이 한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든 대비하는 게 좋으니까요."
* * *
정대식은 국가 기물 금고에 있는 SS급 아이템인 아다만티움 전신 갑옷에 군침을 흘렸으나 S급 아이템도 대여하지 못하는 판국에 그걸 노릴 수는 없었다.
장한나와 협상하여 AAA급 아이템을 두 개 받게 된 정대식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저번보다 가짓수가 하나 줄어든 만큼 모든 요건을 다 맞출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대식이 선택한 것은 방어구와 근접 무기였다.
맘 같아서는 마력 자동 소총 같은 원거리 무기가 하나 더 있었으면 싶었으나, 근래 들어서는 원딜로 활약하는 일이 줄어들었기에 과감하게 포기를 했다.
무엇보다 총기류는 다른 무구에 비해 대중적이라 무기 상가에서 구하기도 쉬웠다.
정 아쉬우면 돈을 주고 살 수도 있을 거라고 판단해, 배틀 슈트와 너클 글러브로 결정했다.
배틀 슈트는 탈로스 전신 방어구보다 묵직한 맛은 떨어지지만 좀 더 실용적으로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점프 슈트처럼 간편하게 껴입는 형식의 방어복인데 AAA급이니만큼 기능이 기가 막혔다.
이 배틀 슈트는 마력에 반응하여 그 크기가 자유자재로 변했다.
소강두와 같이 변신을 통해 체격이 변한다 하더라도 같이 커지기 때문에 찢어지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어느 환경에서도 손상되지 않는 강력한 내구성을 자랑했다.
겉보기에는 얄팍한 천 쪼가리에 불과해 보이지만 불에도 타지 않고 얼어서 굳지 않으며 열과 땀을 배출하고 체온을 보호하는 데도 탁월했다.
무엇보다 이 배틀 슈트의 놀라운 장점은 위장 기능이 있다는 점이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주위 풍경에 맞춰 색과 무늬가 변하기에 따로 스킬을 써서 몸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또 다르게는 야광 기능이 있어서 어둠 속에서 빛을 내기도 했다.
물론 이 정도의 장점이라면 방어구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배틀 슈트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배틀 슈트에는 어깨와 가슴, 등, 팔과 허벅지를 감싸는 보호대가 붙어 있었는데 어지간한 타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치는 공격은 물론이거니와 찌르기와 베기에도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자가 수복 기능이 있었다.
복원력이 있어서 어떤 공격으로 인해 보호대가 손상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복구가 됐다.
마력을 쓰면 더 빨리 복구가 되었고, 의복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불사 거미의 거미줄로 뽑아낸 천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설령 찢어진다고 하더라도 마력을 이어 주는 것만으로도 금세 복구가 됐다.
과연 AAA급 아이템이라고 해야 하나? 배틀 슈트와 함께 선택한 또 다른 아이템, 너클 글러브는 팔목까지 이르는 장갑 형태의 근접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