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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 전사-114화 (114/297)

# 114

현질 전사

- 5권 14화

무구를 시험하러 갔던 것이기에 수익을 신경 쓰지 않고 마구 때려잡았더니 몬스터 사체의 훼손이 심해서 죽인 몬스터의 숫자에 비해서는 적은 금액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마정석으로 뜻밖의 수입을 올렸으니 결과적으로는 남는 장사였다.

그만한 소규모 던전에서 88억을 벌었으면 바닥까지 싹싹 핥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흐흥~ 흐흐흥~."

정대식은 잔고를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느긋하게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금액은 무려 184억 4,600만 원!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만하면 지금 당장 헌터를 은퇴해도 떵떵거리며 먹고살 수 있었다.

'흐흐,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건물부터 한 채 계약할까? 아냐. 얼마 동안은 이 돈을 즐겨야지. 맨날 현질 하느라 통장이 텅텅 비어 있었잖아.'

정대식은 이런저런 즐거운 상상 속에서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 거기서 내리는데 현관에 누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으음?"

정대식은 의아해 발길을 멈춰 세웠다.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설마 최희인가?'

또 같이 살자는 타령을 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정대식은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전혀 뜻밖의 인물이 거기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니?'

놀랍게도 정대식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최선이었다.

최희도 아니고 최선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정대식은 어리둥절해 입을 열었다.

"최선 씨? 여긴 어쩐 일로......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각에......."

국가 기물 금고에 갔다가 곧장 던전으로 들어가 한나절을 노닥거렸으니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최선이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나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도 민망한 듯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했다.

"죄, 죄송해요. 느닷없이 찾아와서.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아...... 던전에 들어가 있었거든요. 이제 막 나온 참이라.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시죠."

정대식은 최선을 거실 소파에 앉혀 놓고 어김없이 물 한 잔을 내밀었다.

매번 냉수만 주려니 좀 민망하기는 했다.

커피든 뭐든 사다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정대식은 용건을 물었다.

"최희 씨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최희의 이름이 나오지 최선은 어깨를 움츠렸다.

"저, 저 혼자 오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의외라서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보아하니 급한 일인 것 같은데."

"그......."

최선은 무릎에 놓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말했다.

"기철민 씨에게 들었어요. 인챈트 스크롤을 파실 거라고 하셨다면서요?"

"아."

정대식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것이 제가 가진 무구에는 인챈트를 하기가 좀 그래서요."

"아깝다고 하셨다면서요?"

"예에, 뭐."

선물로 받은 걸 팔려고 했다는 사실을 들켰으니, 민망한 꼴이 됐다.

그 바람에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되었다.

국가 기물 금고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해서,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오늘 새 아이템을 얻어서요. 그런데 여기엔 이미 자가 수복 기능이 있거든요. 당장 인챈트 스크롤을 팔 생각은 아니고...... 어쩔까 고민하던 참입니다."

정대식이 사정을 말하자 최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철민 씨도 원래 갖고 계신 철검이 볼품없어 인챈트를 할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정대식 씨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아서...... 이거......."

그녀는 디멘션 포켓을 꺼냈다.

최희에게 빌려 온 건지 원래 갖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클러치 형태의 그 포켓을 열자 안에서 웬 상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게 뭐죠?"

정대식의 질문에 최선이 말했다.

"이건 마기전이라는 물건이에요."

"마기전이라고요?"

"방어구와 근거리, 원거리 무기를 전부 겸하는 아이템이죠."

그것은 팔에 착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 어깨서부터 팔꿈치, 손목, 손바닥을 감싸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손바닥 부위에 빛나는 돌이 끼워져 있었다.

구슬처럼 반들반들하게 연마된 돌 안에는 신묘한 빛이 감돌아 보통 물건이 아닌 듯했다.

정대식은 그것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걸 가져온 이유가......?"

최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정대식 씨가 이걸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정대식은 어안이 벙벙해 말했다.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보아하니 대단한 물건 같은데."

"네, 마기전은 등급을 측정할 수가 없는 아이템이에요. 정확히는 SSS급 이상...... M급으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겠죠."

정대식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최선의 설명은 계속됐다.

"이것은 최초의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졌을 때 발견된 아이템이에요. 그동안 여러 사람의 손에 떠돌다가 우연한 기회로 제가 갖게 되었어요. 하지만 제가 다루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뒤따르는 물건이더군요. 마기전은 M급으로 분류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등급을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M급이라고 말씀을 드렸을 뿐...... 이것 자체의 기능만을 놓고 봤을 땐 별 볼 일 없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정대식의 반문에 최선이 눈을 들고 말했다.

"A급 이상의 뛰어난 아이템들은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가 있지요. 타고난 여러 가지 기능이 있으니까요. 소유주의 마력이 어느 정도 관계하지만, 거기에 상관없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지요."

세상엔 헌터는 템빨, 이라는 말이 있다.

설령 실력이 대단치 않아도 아이템으로 어느 정도는 보완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모 재벌가 3세는 9등급이라는 형편없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전신을 처발라 7등급에 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헌터들이 돈을 버는 족족 아이템을 사는 데 투자했다.

하지만 어떤 아이템들은 소유한 자가 누구냐에 따라 성능이 천차만별이기도 했다.

보통 뛰어난 아이템일수록 마력을 소모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어떤 아이템들은 자체적으로 마력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고, 혹은 마력을 충전하는 게 가능하기도 했으며, 간혹 사용자의 마력을 보충해 주기도 했다.

그런 식이 아닌, 마기전과 같이 이런 식의 아이템들은 사용자의 마력을 엄청나게 필요로 했다.

자신의 능력을 쓰는 데만도 마력량이 달려 하는 헌터들은 꿈도 못 꿀 물건이다.

그러나 이런 아이템을 막대한 마력량의 소유주가 사용하면 막강한 성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최선이 가져온 이 마기전이라는 물건도 그와 같은가 보았다.

"듣기에 정대식 씨는 마력량만을 놓고 보면 무려 4등급에 준한다고 하더군요. 그만한 실력이라면 충분히 이 마기전을 다룰 수 있겠지요. 그래서 드리려는 거예요. 걸맞지 않은 사람이 갖고 있기보다는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가지는 게 맞다고 생각하니까."

"어, 하지만 팔아도 상당한 가격일 텐데. 염치없이 이런 걸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심 은근 탐이 났지만 정대식은 일단 사양했다.

경험상 이 자매에게 뭔가를 받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희가 찾아와서 또 귀찮게 할지도 모르고, 배틀 슈트와 너클 글러브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또 다른 무구가 필요하다 여기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최선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 정도라면 인챈트 스크롤을 사용해도 아깝지는 않을 거예요. 지난번, 제 목숨을 구해 주신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거라면 인챈트 스크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저희 언니가 드린 거였어요. 제가 구입한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제 것이 맞아요. 제가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 꼭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최선은 고집스레 말했다.

안경 너머 눈빛을 보니 순순히 가지고 돌아갈 것 같지 않았다.

정대식이 난감해 턱을 긁적이자 최선이 고개를 모로 돌리며 말했다.

"언니는 그때의 일로 우리 자매가 목숨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구해진 건 제 목숨이죠. 언니는 그 사건의 피해자일 뿐이에요. 그러니 감사를 해도 제가 해야 하고, 보답을 해도 제가 해야 하죠."

"암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이미 보답을 받았는데요? 이것까지 받을 순 없어요."

뭔가, 최선은 최희가 나서서 모든 일을 해결해 버린 데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정대식은 최선이 최희에게 어떤 열등감이랄까, 경쟁심이랄까, 그런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와 저는 별개예요. 언니의 보답을 제가 한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제게는 쓸모없는 물건이에요. 정대식 씨가 쓰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거예요."

끝까지 안 받겠다고 말하면 왠지 모르게 최선이 상처 입을 것 같았다.

정대식은 입맛을 쩝, 다시고는 마기전이 들어 있는 상자를 자신의 앞으로 당겨 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만약, 언제든 마음이 바뀌어 돌려받고 싶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즉시 돌려 드릴 테니까."

최선은 문득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가슴이 두근댔다.

두꺼운 안경과 칙칙한 머리카락에 가려 있기는 하지만, 최선은 청순한 얼굴이었다.

최희와 자매는 자매라고, 이목구비가 매우 흡사했다.

단지 서로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서, 최희의 당당하고 화려한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품고 있었다.

최선은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지, 금방 무표정으로 돌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어,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차를 안 가져 오신 것 같은데."

집 앞에 주차된 차가 없어서 정대식은 그녀가 맨몸으로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선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에요. 제 스쿠터를 가지고 왔어요."

"스쿠터라고요?"

최선은 정대식의 집 옆쪽에 갖다 붙여 놓았던 스쿠터를 끌고 나왔다.

최희도 안 어울리게 앙증맞은 미니카를 타고 다니더니만, 최선의 스쿠터도 장난감처럼 자그마했다.

정대식은 이런 게 굴러가기는 하나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야심한 밤에 타고 가기에는 위험해 보이는데요?"

"괜찮아요. 이래 보여도 저 역시 헌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최선이 그리 말하는데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최선은 스쿠터에 올라타 헬멧을 머리에 썼다.

그리고 시동을 걸려다가 말고 느닷없이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정대식 씨는 우리 언니와 사귀는 건가요?"

정대식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 결단코 아닙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닌데 결혼할 사이라는 말은 아니죠?"

"당연하죠. 최희 씨는 제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올인원이 될 거라 보고 그 방법을 알고 싶은 것뿐이죠."

그렇게 대꾸하는 정대식을 보고 최선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던데......."

"예?"

"아니에요."

고개를 돌린 최선은 왜인지 다시 웃었다.

그리고 "그럼 이만......"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긴 뒤 시동을 걸고는 유유히 떠나갔다.

최선이 길을 따라 사라지고 난 뒤에도 정대식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최선이 남긴 미소의 여운이 남아 계속 가슴을 간지럽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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