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현질 전사
- 5권 18화
마력이 터지면서 발생하는 섬광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백열하고 관전하고 있던 부대장들의 고막이 터져 올랐다.
부대장들은 신음을 내지르며 귀를 싸안고 주저앉았으며 여수희도 이를 악문 채 버티다가 기어코 비명을 내뱉으며 나가떨어졌다.
"아악!"
촤아아아아악!
그녀의 마력이 일시에 사라지며 사방팔방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흡사 장대비가 온 것처럼 한순간에 훈련장이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어느새 여수희에게서 고스트를 거두어들인 강영후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만에 하나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힐러를 손짓해 부르고 훈련장 중앙을 바라보며 말했다.
"승부는 끝난 것 같군."
승자는 정대식이었다.
팔용대는 기절해서 훈련장 저편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는 코가 터져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서로의 마력이 상쇄된 것은 첫 번째 대결 때와 마찬가지였으나, 정대식의 공격력이 더 높았다.
팔용대의 공격에도 정대식의 주먹만은 멀쩡하여, 그의 주먹과 스쳐 간 정대식의 주먹이 팔용대의 얼굴을 후려쳤던 것이다.
"아이고, 주먹이야."
정대식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 뻐근한 손을 주물렀다.
그리고 코피를 흘리며 기절한 팔용대를 걱정스레 살펴보았다.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코피도 부상은 부상이니까.
곧 힐러가 다가와 팔용대를 일으켰고, 그는 패배를 시인했다.
반대하는 부대장을 전원 이기고, 원하는 대원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수희가 물바다가 된 훈련장을 치웠고, 상황이 정리되자 강영후가 선언했다.
"그럼 서지원, 고덕화, 김송근, 이재우, 박솔지, 허미래. 이 여섯 사람을 정대식의 휘하로 보내겠다. 정대식."
"예."
부름에 대답한 정대식은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고 좀 당황했다.
"네 부대 이름은 뭘로 할 건가?"
아직 생각해 둔 바가 없어 그는 잠시 어물거렸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펜리르, 펜리르로 하겠습니다."
"좋아. 부대원들이 생겼으니 부대장도 있어야 하겠지. 정대식, 이 시간부로 널 펜리르 부대의 부대장으로 임명하겠다."
정대식은 힘차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Chapter 29. 부대원 선발전
다음 날, 정대식은 공식 발표를 앞두고 펜리르 부대원으로 뽑힌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미 각자의 부대장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을 터.
대부분 담담하게 정대식의 연락을 받았으나 딱 한 사람, 박솔지만이 정대식의 지명에 불만을 드러냈다.
-죄송하지만 저는 펜리르 부대로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어디까지나 에키드나 소속의 부대원이고, 정승채 부대장님 휘하가 아니라면 타이탄 공격대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화로는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고, 정승채 부대장이나 강영후 공대장과도 말을 해 봐야 할 사안이라 정대식은 그날 오후 타이탄 공격대로 향했다.
공대장의 사무실에 모인 자리에서 박솔지는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제 능력을 두고 봐도 저는 에키드나 부대에 적격입니다. 그 외 다른 부대에서 활약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더욱이 저보다 헌터 경력도 짧은 사람의 휘하에 들어가라니요! 그의 강함은 부대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박솔지의 항의에 강영후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일개 대원이 위에서부터 하달된 명령에 불복종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평소보다 더 서늘하게 굳히고는 말했다.
"그래서, 정승채 휘하가 아니면 안 되겠다?"
"그렇습니다! 제가 애초에 타이탄 공격대에 들어온 이유도 부대장님 때문입니다. 부대장님이 아니었더라면 굳이 타이탄 공격대를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전에는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여긴 자리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키드나 부대에서는 달랐습니다. 전에 없는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죽어도 부대원들과 함께 죽겠다 할 만큼 정을 쌓아 왔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다른 부대로 가라니,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강영후는 딱 잘라 말했다.
"널 여기에 부른 것은 네 의견을 묻고자 함이 아니다. 내 명령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지."
"공대장님......."
"타이탄 공격대는 네 사교장이 아니다. 타이탄 공격대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력 집단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지금 당장 계약을 파기하지. 물론 위약금은 지급하겠다. 단, 두 번 다시 타이탄 공격대로 되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강영후의 냉엄한 말에 박솔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솟아나는 눈물을 참는 눈치였다.
그런 박솔지를 보고 한숨을 내쉰 정승채가 강영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제가 가서 설득해 보겠습니다."
"다른 부대로 가 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 대원을 펜리르 부대에 밀어 넣을 순 없다. 타이탄 공격대에도 둘 수 없어!"
"죄송합니다."
정승채는 연거푸 사과를 하고 박솔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닫히는 문틈으로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겨진 정대식만 입장이 미묘하게 되었다.
남자라면 힘으로라도 끌고 올 텐데, 여자 대원이라서 무력을 행사하기가 껄끄러웠다.
아무리 양성평등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내새끼를 다루듯 막 다룰 수는 없지 않은가?
강영후도 골치 아프다 생각했는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정대식을 보고 말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타이탄 공격대를 나가지 않는 이상은 내 명령을 듣는 수밖에는 없을 거야. 정대식 자네가 원한다면 펜리르 부대에 저 아이를 넣을 수는 있다."
정대식은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할 맘이 없는 대원을 억지로 끌고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박솔지의 능력이 그만큼 탐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박솔지는 정대식의 순번에서 제일 마지막이었다.
부대원에서 제외한다 하더라도 아쉬울 것은 없었으므로 정대식은 순순히 새로 대원을 뽑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강영후의 사무실로 벨이 울렸다.
비서실이었다.
강영후는 안으로 들여보내라 말을 했고 곧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기철민?"
정대식은 무슨 볼일이 있나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철민이 정대식을 한 번 흘낏 보고 강영후를 향해 말했다.
"밖에서 에키드나 부대장과 부대원을 마주쳤는데요?"
"그런가."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박솔지는 펜리르 부대의 가입을 거부하는 모양이더군요."
"용건이 뭔가?"
강영후가 본론만 말하라는 식으로 묻자 기철민이 당돌하게 말을 뱉었다.
"제가 그 자리에 가고 싶습니다."
강영후는 멈칫했고, 정대식은 눈을 크게 떴다.
정대식이 새로운 부대를 꾸리게 될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타이탄 공격대 내에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한데 기철민은 거기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정대식에게 하지 않았었다.
겉으로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더니 느닷없이 정대식의 부대원이 되고 싶다 말을 한 것이다.
강영후는 팔짱을 끼고 대꾸했다.
"알다시피 펜리르 부대는 던전 공략의 임무를 띤 특수 부대가 될 것이다. 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부대장인 정대식의 선택을 받아야 해."
기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저를 뽑아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펜리르 부대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주십시오."
"시험이라고?"
정대식이 되뇌는 말에 기철민이 제의했다.
"뭣하면 오디션이나 토너먼트 형식이라도 좋습니다. 제가 다른 대원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강영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정대식을 물끄러미 보았다.
정대식은 결정권이 자신에게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
사실을 말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다른 대원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다.
스스로 고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순전히 능력을 볼 거라면 지원자를 뽑아서 개중에 강한 사람을 선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정대식은 고개를 돌려 강영후를 보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허락만 해 주신다면 공식 발표를 하루 더 미루고 훈련장을 빌려주십시오."
강영후는 그렇게 하라는 듯이 선선히 턱을 끄덕거렸다.
그리고 비서를 불러 일정을 조정하고 공지를 띄우라 말했다.
내일 아침 9시, 신생 펜리르 부대의 지원자는 훈련장으로 모이라, 는 내용이었다.
강영후의 승낙을 얻어 내고 정대식과 기철민은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복도를 걸어가며 정대식은 질문을 했다.
"외눈박이 부대에서 만족하는 줄 알았는데. 왜 내 부대로 들어오려는 거지?"
기철민은 코웃음을 쳤다.
"몰라서 묻는 건가?"
"모르니까 묻는 거지."
기철민은 문득 제자리에 멈춰서 정대식을 응시했다.
"그 천하의 최희조차 널 꼬시려고 발 벗고 나섰지."
"그건 올인원이 될 방법을 찾으려고......."
"나도 마찬가지야."
"너도 올인원이 되겠다고?"
"아니, 네 옆에 있으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
정대식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상하게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가 강해진 것은 순전히 현질의 덕분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쓰기는 해도, 죽어라 노력을 하거나 고뇌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정대식은 기철민에게 헛수고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납득시키려면 자신의 현질 능력에 대해 밝혀야 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존재에 대해 숨겨야 하는 이상 현질 능력에 관해서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밀에 부쳐져 있어야 했으므로, 정대식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기철민이 몸을 돌려 걸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 개인적인 친분으로 사정을 봐 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정정당당히 다른 자들과 겨루어 네 부대원이 되겠다."
정대식은 그와 엘리베이터에 올라 내려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정대식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엔트로피를 불러냈다.
"야,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내가 가지고 있는 현질 능력 말인데......."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정대식은 보조석에 마치 인형처럼 앉아 있는 엔트로피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 상점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건 상태 포인트나 스킬인가?"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럼 상점을 계속 업그레이드시켜 나가면 다른 것도 살 수 있나? 예를 들자면...... 포션이나, 아이템 같은 거."
엔트로피는 대답을 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포션이나 아이템은 이쪽 세계에서도 구입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질문을 잘못했군. 정확히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있느냐는 말이야. 그러니까...... 대상 지정 근력 증진 스킬?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내가 가진 마력을 영구적으로 준다거나...... 내 능력을 복사해서 준다거나?"
<아시다시피, 제가 가진 상점의 정보는 현재 레벨의 상점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국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