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현질 전사
- 5권 21화
일전에 정대식 때문에 망가진 것도 수리하기 전이었는데, 이번에 또 바닥의 타일이 산산조각이 났다.
신대훈은 연거푸 공격을 가했다.
"회오리 철반!"
파바바바방!
신대훈이 그렇게 외치며 팔을 양쪽으로 떨치자, 놀랍게도 그의 팔에 붙어 있던 방패가 허공으로 뛰쳐나왔다.
그것은 허공을 쐐애애액, 가로지르며 김태희에게 쇄도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방어 자세를 갖춘 김태희는 침착하게 절구를 양쪽으로 휘둘러 방패를 막아냈다.
그러는 틈을 타 신대훈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현무기 돌진!"
김태희의 반응이 한 발짝 늦었다.
2조에 시선을 주고 있던 구경꾼들이 탄식을 터트렸다.
김태희의 가느다란 몸이 남자에게 부딪치면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도 남을 터였다.
하지만 그 탄식은 곧 경탄으로 바뀌었다.
김태희는 신대훈이 돌격해 오는 그 순간, 절구를 허공으로 던졌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노니는 정령인 양, 제자리에서 몸을 뒤집으며 신대훈을 손으로 가볍게 밀면서 공중제비를 넘었다.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신묘한 몸놀림이었다.
공중제비를 넘는 도중에 떨어지는 절구를 낚아챈 김태희는 어느새 신대훈의 널찍한 등을 밟고 서 있었다.
그의 반응이 한 박자 늦는 틈을 타서, 김태희가 절구를 아래로 휘둘렀다.
"블랙홀!"
촤아아아아앙!
가시가 돋아난 절구 부분이 세차게 회전했다.
그것으로 김태희가 신대훈의 방어구를 후려쳤다.
카아아아아앙!
불꽃과 굉음이 울리며 전기톱으로 강철을 가르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신대훈은 황급히 등을 웅크리며 방어 기술을 썼다.
"발할라 간성!"
공격과 방어의 충돌에 섬광이 연거푸 번쩍번쩍 일어났다.
정대식은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생각했다.
'이 싸움은 저 여자가 남자의 방어막을 뚫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승패를 결정짓겠어.'
두-웅!
정대식의 생각은 신대훈의 반격으로 끊어졌다.
한동안 김태희의 공격을 버티고 있던 신대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등을 튕겼던 것이다.
그러자 일종의 마력장 같은 것이 생겨나며 김태희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사람처럼 또다시 사뿐히 공중제비를 넘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몸놀림이었다.
정대식은 그 장면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으! 탐난다! 둘 다 탐나! 특히 저 남자 쪽은 같은 헌터를 상대로 싸워서 그렇지...... 몬스터가 상대였으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겠는데?'
신대훈은 일단 체급부터가 어지간한 크기의 몬스터와도 견줄 만했다.
보아하니 탱커인 모양인데 방어에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저 방어구는 원거리와 근거리 공격 양쪽을 다 가능케 하는 모양이었다.
'대단하다! 역시 헌터의 실력은 등급이 전부가 아니야. 스테이터스는 타고난 마력과 신체 조건을 판가름하는 기준일 뿐, 실력의 척도가 되지는 못해.'
헌터의 진짜 능력은 오로지 실전에서만 가늠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마력량, 갖추고 있는 무구와 장비, 그리고 함께하는 동료.
그 조건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해 최대의 결과를 뽑아내느냐.
거기에 따라 다른 것이다.
제아무리 마력량이 많고 값비싼 아이템을 두르고 있어도 실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그만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로지 생과 사를 넘나들며 익혀 온 감각, 끊임없이 단련해 온 정신과 육체의 강함, 최후의 최후를 생각하는 계획성이 헌터를 진정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헌터로서의 경력이 부족한 정대식은 다른 헌터들의 싸움을 보면서 그 사실을 통감했다.
'단순히 현질에만 의지하고 있을 게 아니구나. 한 부대를 책임지는 인물이 되려면, 지금의 수준으로는 안 된다. 앞으로 내 공격대를 만들 생각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때였다.
1조를 지켜보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별안간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다.
덩달아 1조로 시선을 돌린 정대식은 1조를 둘러싼 방어막이 진동하는 것을 보았다.
안에서 기철민과 김영수가 마지막 남은 마력을 전부 짜내고 있었다.
파아아아아아!
기철민이 뽑아낸 마력이 그가 든 검에 점철되며, 그것은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검처럼 파르라니 빛났다.
김영수의 창에 버금갈 만큼, 길게 뽑아낸 검기를 쥐고 기철민이 돌격해 들어갔다.
"천노참격!"
김영수도 우우우웅, 마력의 주입으로 떨리고 있는 창을 움켜잡고 돌진했다.
무어라 장난스럽게 외칠 법도 한데 이번만큼은 그도 그러지 않았다.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빠진 것이, 이것이 마지막 공격이 될 거라는 사실을 예감한 눈치였다.
꽈꽈과과광!
기철민과 김영수가 맞부딪치고, 두 사람의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올랐다.
번쩍, 하는 눈부신 섬광이 일순 훈련장을 가득 뒤덮어, 정대식은 눈을 질끈 감는 수밖에는 없었다.
잠시 후.
빛이 걷히고 났을 땐 기철민과 김영수가 나란히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옆에 무기가 나뒹굴고, 강영후의 얼굴에 어렴풋이 근심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선발전으로 인해 소중한 대원들이 다치면 타이탄 공격대의 전력이 꺾이는 것이다.
강영후는 선발전을 일시 중지하고 힐러를 투입해야 할지, 말지 갈등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때.
"으으......."
놀랍게도 기철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움켜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가 바로 설 때까지도 김영수는 미동이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강영후가 선언했다.
"기철민, 승!"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기철민은 도로 쓰러졌다.
그의 모습을 보며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짜식, 강단은 있군.'
그때였다.
2조 쪽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그제야 2조 쪽을 쳐다본 정대식은 놀라서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어느 틈엔가 신대훈이 바닥에 엎드려 있고, 김태희가 한 발로 그 남자를 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언제 저리 됐지?'
아마 기철민과 김영수가 부닥쳤을 때 그들도 뭔가 일전이 있었나 보았다.
남자는 완전히 기절해 있었고, 여자는 멀쩡해 보였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섬광에 가리어 누구도 보지를 못했으나, 승자가 누구인지만은 명확해 보였다.
"김태희, 승!"
* * *
2차전을 가지기 전에 기철민과 김태희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쓰러진 김영수와 신대훈은 들것에 실려 나갔다.
아마 힐러의 처치를 받게 될 것이다.
힐러가 필요한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기철민도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였다.
그는 얼굴이 희게 질린 채 가쁜 숨을 씩씩 내뱉었다.
보아하니 김영수를 후려친 마지막 일격으로 모든 마력을 다 소진한 모양이었다.
마력을 바닥까지 쓰면 생명력도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기 전에 마력량을 보충해 줄 필요가 있었다.
기철민은 마력 회복 포션을 두어 병 마시고 힐러의 도움으로 상태가 진정되었다.
호흡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그는 검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종전을 겨루지요."
그가 하는 말에 정대식이 물었다.
"싸울 수 있겠어? 방금 전까지 죽다가 살아났는데."
기철민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여기가 던전이었어도 그렇게 물었을까?"
"하지만 여긴 던전이 아니잖아?"
"넌 던전에서 뒤를 믿고 맡길 동료들을 찾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되지."
기철민은 그렇게 말을 하며 김태희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멀뚱히 선 채로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신대훈과의 일전에도 멀쩡했기에 어떤 처치를 받을 필요도, 굳이 휴식을 가질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기철민은 그런 김태희를 의식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정대식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기철민의 말이 옳았다.
여기가 던전이라면 싸울 수 있느니, 없느니 그런 말을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기철민에게 마음이 쏠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선발전이 정말로 공정하려면 그의 사정을 봐줘선 안 됐다.
기철민과 김태희는 다시 훈련장 중앙으로 나갔다.
여수희가 재차 방어막을 그들 주위에 둘렀고, 2차전이 시작되었다.
"룰은 1차전과 동일하다. 한쪽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거나 항복을 선언할 시...... 끝나게 된다. 그럼, 시작한다!"
강영후의 신호에 따라 대결이 시작됐다.
김태희는 아까처럼 뜸을 들이지는 않았다.
마력도 다 쓰고 기운이 빠져 버린 기철민을 상대로는 신중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곧장 절구를 들고 그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기철민도 이를 악물고 검을 곧추세웠다.
카앙! 캉! 카라랑!
침묵 속에서 쇠 부딪치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둘 다 이렇다 할 기술을 쓰지 않고 있었다.
기철민은 마력이 바닥나서 아마 최후의 한 방을 아껴 두려는 것일 테고, 김태희는 굳이 기술을 쓰지 않아도 되는 모양새였다.
체술만으로도 거침없이 기철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큭!"
누가 봐도 전세가 기철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다 하게 대단한 능력이 없는 기철민 역시도 몸놀림이라면 남부럽지 않았다.
김태희처럼 가벼운 느낌은 아니지만 신중하게 스텝을 밟아 가고 있었다.
발바닥을 바닥에 딱 붙이고 서서 조금씩 옮기는 모양새가 흡사 복서의 발놀림을 닮아 있었다.
교묘하게 발을 틀어 가면서 치달아 오는 김태희의 공격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 일격을 가할 틈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모를 김태희가 아니었다.
김태희는 그 무거운 절구가 무슨 부채라도 되는 양 휙휙 휘두르다가 돌연 공격의 방향을 바꾸었다.
기철민은 일순 당황해 몸을 물리는 것 같다가, 앞으로 한 발을 크게 내딛었다.
공격으로 태세를 전환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정대식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함정이다!'
김태희가 일부러 공격하는 척하며 틈을 드러내어 기철민을 제 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기철민은 그것을 모르고 김태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검을 베어 내었으나.......
"아!"
장내에 탄성이 터졌다.
기철민 또한 김태희의 속임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검은 김태희를 노리는 대신 밑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절구의 가시를 긁었다.
김태희가 쓰는 절구는 실로 낯설어서 상대하기가 매우 힘들어 보였다.
무기의 균형이 양쪽 공이에 균등하게 나뉘어 있어, 좌우 어느 쪽에 힘이 실리는지를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불어 김태희는 양손잡이처럼 오른쪽과 왼쪽 양방의 공격에 전부 능했다.
한데도 기철민은 공격이 오른쪽에서 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기철민의 검날이 카드드득, 공이의 가시를 긁으며 지나갔고, 기철민은 어깨를 앞으로 쭉 뻗었다.
그의 검 끝이 김태희의 가슴팍을 노리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김태희가 그 공격을 피하나 싶었던 그 순간.
"천래일섬!"
번-쩍!
기철민의 아껴 두었던 일격이 터졌다.
검 끄트머리에서 검기가 길게 뻗어 나오며 김태희를 찔러 들어갔다.
그 순간.
"초신성 폭발!"
파바바바바밧!
양쪽 공이에서 가시들이 튀어나왔다.
방어하지 않으면 거기에 찔려 바늘꽂이가 될 판국이었다.
한데도 기철민은 공격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그는 검기로 김태희의 가슴을 갈라놓았다.
쩌-억!
실제로는 빛이 번쩍였을 뿐이지만 정대식은 김태희의 가슴팍이 갈라지며 터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동시에 기철민의 몸에 무수한 가시가 틀어박혔다.
"아악!"
비명을 지른 건 기철민이 아니었다.
구경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