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현질 전사
- 6권 1화
Chapter 31. 두 번째 훈련
"도저히 못 참겠다! 너, 이리 나와!"
한바탕 전투가 휩쓸고 지나가자 별안간 기철민이 몸을 홱 돌려 이재우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이재우의 멱살을 휘어잡고 흔들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너, 진짜 죽고 싶어? 그렇게 네 실력을 자랑하고 싶냐? 어? 그 결과가 이 꼴이야?"
기철민은 시무룩한 이재우를 경멸 어린 눈으로 훑어보며 뇌까렸다.
"종이 술사 좋아하네. 네 능력도 너 같은 놈에겐 돼지 목에 진주 격이지."
발끈한 이재우가 기철민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그러는 너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부대장에게 지명도 못 받고 선발전에서도 김태희한테 졌잖아? 널 불쌍하게 봐준 김태희가 물러서지 않았더라면 넌 지금 이 자리에 없었어.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남 탓은......."
"이봐! 쓸데없는 싸움에 날 끌어들이지 마!"
김태희가 짜증내며 하는 말에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기철민이 이재우의 뺨을 후려쳤고, 이재우가 그를 밀쳐서 넘어트렸다.
곧 그 위에 엎어져 주먹질을 하면서 구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다른 대원들은 슬슬 피했다.
허미래만 어쩔 줄 몰라 할 뿐, 고덕화나 김태희는 무관심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고, 서지원은 한심스럽다는 눈치였으며, 김송근은 방금 전에 있었던 전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원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아르고스를 보고 혼비백산했다.
전신이 백 개의 눈으로 뒤덮여 있는 아르고스는 생긴 것부터가 끔찍했다.
게다가 중형종치고는 크다 싶은 체격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난입했다.
정찰을 하던 엔트로피가 거인이 몰려오고 있다고 경고했고, 정대식도 그 사실을 대원들에게 알렸지만 그게 아르고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계속되는 대원들 간의 신경전에 지쳐 있어 자세한 설명을 빠트렸던 것이다.
대원들은 백 개나 되는 전신의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달려오는 아르고스를 맞닥뜨려 질겁했고, 그게 곧장 대열의 분산으로 이어졌다.
연이어 두 마리나 되는 아르고스가 더 달려와, 그들은 세 명의 거인에게 둘러싸이는 위기에 처했다.
정대식의 빠른 지시와 대원들의 타고난 능력으로 어찌어찌 거인들을 쓰러트리기는 했으나, 결코 손발이 잘 맞았다고는 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김송근은 이번에도 다른 대원들의 공격 범위를 생각지 않고 분신들을 풀었다가 김태희에게 한바탕 욕을 얻어먹었고, 이재우는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려 의욕 과잉이 되었다가 능력을 발휘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의 계산으로는 아르고스와 똑같은 거인을 만들어 대적하게 할 모양이었나 본데, 그가 그려 낸 거인은 등장하자마자 고덕화의 공격에 휩쓸려 쓰러졌다.
종이에서 빠져나온 거인은 아무래도 실물보다는 약한 감이 있었으므로 그건 금세 흩어져 버렸다.
자신이 만든 거인이 공격받자 성이 난 이재우가 전투 상황에서 고덕화에게 따지고 들었고, 그러느라 고덕화와 함께 공격을 가하고 있던 기철민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그래서 기철민이 이재우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거였다.
주요 딜러들끼리 손발이 하나도 안 맞으니 다른 포지션이라고 맞을 리가 없었다.
버퍼와 디버퍼 포지션의 서지원과 허미래는 삽질만 하다가 끝났다.
특히 허미래는 아르고스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 완전히 겁에 질렸다.
그녀는 몬스터가 징그러우면 징그러울수록 전투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서지원은 좌측과 우측마저 헷갈리는 지경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기철민과 이재우가 주먹다짐을 하는 가운데, 정대식은 그들을 말릴 생각도 않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걸로 펜리르 부대가 실전 훈련을 나온 게 두 번째였다.
첫 번째 훈련에서의 실패로 정대식은 그들을 번갈아 짝지으며 홀로그램 룸에 가둬 놓았다.
모의 전투를 치르며 서로의 능력을 파악하고 친해지라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역시, 직접 감독을 했어야 하는 것일까?
정대식은 훈련을 그들더러 알아서 하라고 맡겨 놓고 본인은 사냥을 하러 나갔다.
상점 업그레이드를 위한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탓이다.
사실 대원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는 탓도 있었다.
기철민과 이재우는 툭하면 싸우는데다가 서지원은 멍청했고, 고덕화는 무관심했으며, 김송근은 바보였고, 김태희는 오만했다.
허미래만 제멋대로인 대원들 사이에서 눈치를 봤다.
그 때문인지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이 점점 더 침울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모의 훈련은 그만하면 됐겠지 싶어서 정대식은 중간 점검 차 다시금 펜리르 부대를 이끌고 던전에 들어온 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대원들은 여전히 협동이 되질 않았다.
서로가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이제는 아주 보란 듯이 싸우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릴 기분도 안 났다.
'이래 가지고선 위험 등급의 던전을 공략하기는커녕...... 내분으로 해체할 판국이군.'
정대식은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지들끼리 치고받다가 지친 기철민과 이재우가 씩씩거리며 떨어져 앉아 있었다.
정대식은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 싸웠나?"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들도 저능아가 아닌 이상 본인들이 한 짓이 부끄러울 것이다.
정대식은 아르고스의 시체를 대충 토막 내 아공간에 던져 넣고 말했다.
"이만 돌아간다."
* * *
두 번째 훈련도 아무런 소득 없이 분란만 키운 채로 끝나자, 대원들은 기운 빠진 모습으로 흩어졌다.
펜리르 부대를 해산시키고 정대식은 혼자 사무실에 남았다.
아르고스 부산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타이탄 공격대의 지원 팀에 속한 몬스터 처리반에 그걸 넘겨주고 갈 작정이었다.
"후우......."
정대식은 무구와 장비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처리반에 가기 전에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곤 바깥의 정수기를 찾았다.
한데 그곳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김태희가 서 있었다.
정대식은 피로가 밀려드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여전히 다 늘어난 트레이닝복 차림인 김태희는 덥수룩한 앞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어떡하실 겁니까?"
"뭐가?"
"펜리르 부대가 부대다운 꼬락서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부대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래서?"
"이대로 대원들을 놔두실 작정입니까?"
정대식은 불쾌감을 느꼈다.
"김태희 대원. 지금 내게 훈계를 하려는 것인가?"
"훈계가 아닌 조언입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이런 상태로라면 제아무리 부대장님이라도 위험 등급 던전에 들어가면 큰일을 치르고 말 겁니다."
"넌 위험 등급 던전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 보지?"
"물론 있습니다."
"그래, 네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부대원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내가 생각할 문제다. 쓸데없는 첨언은 사양하고 싶군."
"건방졌다면 죄송하지만...... 제가 펜리르 부대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뭐?"
이미 건방질 대로 건방진 말이었다.
정대식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김태희는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사람 보는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달라는 말입니다."
정대식은 김태희에게 한 소리를 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기가 막힌 기분에 정대식은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일개 대원에게 저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나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불쾌감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김태희의 말에 틀린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대로는 안 된다.'
정대식은 펜리르 부대를 위해서 부대원들을 보다 강하게 만들 방법을 찾기 위해 상점 업그레이드에 골몰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돈을 모으는 데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닌 듯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 봤자 부대로서 기능을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무슨 수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사실은 좀, 막막했다.
'젠장...... 내가 이런 걸 해 본 적이 있어야지.'
어릴 적부터 없이 자랐고, 사회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느껴 온 정대식은 인간관계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고, 그 흔한 연애 한 번 하지 않았다.
할 만한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처지에는 사치라고 여겨지기도 했고, 감정적인 교류보다는 물질적인 성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짐꾼으로 있을 때도 그랬다.
보통 짐꾼으로 구르다 보면 몇몇 재주 좋고 눈치 빠른 사람 주위로 몰려들기 마련이다.
던전의 짐꾼이라는 게, 혼자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마치 공격대처럼 뭉쳐 다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반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일거리를 물어 오거나 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다른 짐꾼들을 부리거나 하는 것이다.
정대식도 몬스터 해체를 빠르게 배웠고 위험을 피할 줄 알았으므로 홍만기 같은 동료들이 그를 반장으로 부르며 따라다녔다.
하지만 정대식은 반장이 되는 것을 극구 피했다.
반장이라고 해서 남들보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귀찮은 일만 생길 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때 반장 노릇을 하면서 여러 짐꾼을 거느리고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요령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대식은 그런 경험이 없었다.
몇 번 파티나 막공을 꾸린 적이 있다 해도 그가 헌터가 된 지 불과 1년.
그 한계가 슬슬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제아무리 짐꾼으로 던전에서 오래 굴렀어도 헌터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하...... 이런 건 상점에서 돈을 주고 살 수도 없고.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정대식은 김시온이나 강영후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남 보기에 좋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지난번 부대원 선발 때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 박솔지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대식의 경력 부족을 들먹이며 그의 지휘를 받을 수 없노라,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대의 일로 다른 부대장이나 공대장을 찾아간다면 박솔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펜리르 부대가 만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지. 공대장의 호의는 공식 임무를 미루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강영후는 정대식이 먼저 요청하기 전까지는 임무를 맡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대식과 펜리르 부대가 충분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들이 맡아야 할 임무가 위험 등급의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니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기는 했다.
하지만 타이탄 공격대 내의 강자들을 골라 가졌으면서 차일피일, 준비를 핑계로 임무를 미룰 수는 없었다.
'제기랄.'
정대식은 종이컵을 구기며 엔트로피를 불러내 물었다.
"야,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뭔가 단합력을 끌어올린다든가, 협동심을 이끌어 낸다든가 하는 그런 스킬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