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현질 전사
- 6권 5화
그는 정대식과 마찬가지로 타이탄 공격대의 사택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거리가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걸어서 잠깐이라 이웃사촌이라고 할 만했다.
정대식은 자신의 집과 똑같이 생긴 이재우의 집 앞에서 벨을 눌렀다.
곧 현관문이 확 열리며 이재우가 반가움과 당혹감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나타났다.
"부대장님!"
"하루 동안 잘 쉬었나?"
"그렇잖아도 찾아뵈려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죠?"
"가까우니까 잠깐 들렀다. 들어가도 될까?"
"아, 예. 어수선하지만 일단은 들어오세요."
이재우의 집 안으로 발을 들이자 정신 사나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재우는 온갖 잡동사니로 작은 집 안을 꽉꽉 채워 놓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공간과 소파 한 자리, 그리고 테이블 위를 빼놓고는 오만 가지 물건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정대식이 아연해서 묻자 이재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모으다 보니...... 하하하."
"뭐, 저장강박증...... 이런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적어도 쓰레기를 모으지는 않는다고요. 다 쓸모 있는 것들입니다."
진짠지, 아닌지 의심스러웠으나 정대식은 좁아터진 소파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는 가져온 음료수 팩을 열어 하나를 이재우에게 건네주고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찾아온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전투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걸요."
이재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결단코 방해를 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잘해 보고자 했을 뿐인데 상황이 꼬인 거예요. 게다가 기철민, 그 자식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 보니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그 이야긴 됐고, 원래는 머메이드 부대에 있었지? 여수희 부대장 휘하였잖아."
"예."
"거기 이야기를 좀 해 봐. 거기서는 어떻게 싸웠지?"
이재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떻게 싸웠다고도 할 수 없어요. 전투에서 별로 한 일이 없으니까요."
"한 일이 없다니?"
"전투에 걸리적거린다고 항상 후열에 있었거든요. 제 능력을 쓰지도 못했어요. 종이만 꺼내면 사고를 치게 되니까요. 뭐, 어차피 그 부대하고는 상성이 안 맞았어요. 아시다시피 부대장이 물을 움직이는 마력이잖아요. 종이를 쓰는 저하고는 완전 상극이죠. 항상 종이가 물에 젖어서 너덜너덜한 게......."
"그건 핑계가 안 돼."
"하지만 여수희 부대장은 그걸 핑계로 삼은 걸요? 제가 싸우지 못하게 했어요. 정산은 공평하게 나눠 줄 테니까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그랬죠. 그게 도와주는 거라고요."
이재우가 모든 전투에서 지금과 같은 식이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정대식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 전에 있던 부대에선? 너, 네 번이나 부대를 갈아탔잖아?"
"그렇죠. 근데 다 비슷했어요. 처음엔 절 전투에 참가시키다가도 나중에는 성가시다는 이유로 내외를 했죠."
"그럼 타이탄 공격대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는 건데. 타이탄 공격대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제가 들어올 당시에는 타이탄 공격대의 입대 경쟁이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들어올 수 있었죠. 물론 재계약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타이탄 공격대원으로 있을 수 없었겠지만, 공대장이 항상 계약 연장을 해 주었거든요."
"흐음."
아마 강영후는 이재우의 능력이 아까웠을 것이다.
어차피 그가 직접 이재우를 데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구현 능력은 잘만 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테니 어떻게든 붙들어만 놓자는 심산이었을 테다.
그러는 동안 이재우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이 부대, 저 부대로 떠돌았던 것이다.
"타이탄 공격대 이전은 어땠지? 파티라든지, 레이드라든지, 팀전을 해 본 적이 있느냔 말이야."
"그때는 제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어지간한 던전은 드나들 수 있었으니까. 별로 해 본 적 없어요. 간혹 썰자팟 같은 데 끼어 보긴 했는데, 모르겠어요. 다 절 싫어하더라고요. 마지막엔 꼭 시비가 붙어서......."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넌 제대로 된 팀플레이를 해 본 적이 없군. 맞지?"
"그런 셈이죠. 그렇지만, 그건 김송근이나 김태희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정대식은 이재우의 반문에 뜨끔했다.
'이 자식,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더니 그런 건 또 알아차리네.'
이재우의 항변은 계속됐다.
"김송근도 자기 분신하고만 싸우는 데 익숙해서 다른 사람들하고 협업해서 싸우지 못하잖아요? 김태희는 동료들을 무슨 벌레 보듯 하고. 고덕화는...... 그야 사연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논외로 치더라도 아무튼 저만 이런 건 아니잖아요? 제 탓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네 탓을 하러 온 게 아냐. 난 해결책을 찾으러 온 거다."
정대식은 이재우를 힐끔 보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봐. 펜리르 부대에 오게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지? 내가 일방적으로 지명해서 불러들인 거잖아. 너는 그 결정에 만족해서 따른 건가?"
이재우는 눈치를 보며 대꾸했다.
"......전 어느 부대를 가도 별 상관없었어요. 그렇잖아요?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라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결국에는 전투에서 열외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좋은지, 싫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부대원들은 어떻지? 이젠 네 동료들이잖아. 그들에게도 아무 소감이 없나?"
"기철민은 진짜 짜증 나요. 그 자식 말버릇 좀 보세요. 태어날 때부터 주둥이에 칼을 달고 있었을 것 같다고요. 실력이나 좋으면 몰라. 솔직히 우리 부대에서 제일 뒤처지잖아요?"
"설령 실력은 그렇다 한들, 우리 부대에 더 쓸모 있는 사람은 그이지. 네가 아니라."
정대식이 정곡을 찌르자 이재우는 몹시 불만스런 표정이 됐다.
그는 무어라 툴툴거리며 다른 동료들을 계속해서 흉보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만 이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필하려 했다.
그런 모습에서 정대식은 인정받고자 하는 치기 어린 마음을 읽었다.
'이 녀석이 몇 살이더라? 스물두 살? 스물세 살? 그 정도면 아직 어리지. 정신 연령은 더 어린 것 같고. 미성년자 때 학교도 관두고 타이탄 공격대로 들어와 헌터들하고만 있어 봐서 그런지 사회화가 덜 되었어.'
한마디로 아직 사춘기 소년 같은 성격이었다.
중2병의 문턱을 막 넘은, 한 중3쯤 된다고 해야 하나?
정대식은 이재우를 성인 남자로 안 보기로 했다.
그냥 덩치 큰 어린애로 대하기로 결정하자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 큰 성인이라면 몰라도 어린애라면 정대식처럼 인간관계에 서툰 사람도 어떻게든 구슬릴 수가 있을 것이다.
정대식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 능력이 대단하지 않다는 말은 아냐."
"암요. 제 능력이 얼마나 보기 드문 능력인데."
정대식의 지적에 풀이 죽었던 이재우는 금방 우쭐거렸다.
정대식은 이재우가 믿을 것은 본인의 능력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종이 술사라는 그 능력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방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사자도 그거 하나 믿고 나대는 꼴이었다.
사실 그 능력을 빼고 보면 의외로 자존감이 낮고 쉽게 의기소침해지는 성격인지도 모른다.
'이 녀석이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느라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마력만 낭비하는 것도 그 맥락에서 비롯된 거겠지. 일단은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게 먼저이려나?'
"일어나."
"어, 어디로 가시게요?"
"던전으로 들어간다."
"예? 둘이서 사냥을 하자고요?"
"그래, 정확히는 사냥이 아니다. 그냥 몸풀기라고 생각해. 네 능력을 맘 편히 구경하고 싶군."
* * *
"끼르르르르!"
"끼르르륵!"
고블린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여러 마리의 뱀을 보고 혼비백산해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재우는 신이 나서 "쫓아가 잡을까요?"라고 말했지만 어차피 사냥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정대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그보다, 뱀을 자주 쓰던데 이유가 있나?"
"그리기가 제일 쉽거든요."
"아, 하긴 그렇겠네."
사실 이재우가 구현해 낸 뱀들은 뱀이라고 하기에는 영 어설퍼 보였다.
스스로를 드로잉 아티스트라 칭하고 있기는 해도, 이재우는 그림 솜씨가 별로 없었다.
뱀들도 몸통이 굵직하고 어딘지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먹으로 대충 그린 거라 윤곽도 흐리멍덩하고.
그런 모습에도 겁에 질려 도망치는 고블린들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정대식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뱀 그리기가 간단하면 전투 때마다 뱀만 그리면 되잖아? 굳이 거인이나 다른 걸 만들어 내는 이유가 뭐지?"
"그게 더 멋지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그리기 어려운 건 보통 미리 그려서 갖고 다녀요. 보여 드릴까요?"
"그래, 어디 보자."
정대식은 이재우가 꺼내는 종이 뭉치를 받아 들어 펼쳤다.
그 안엔 이재우가 초등학생보다 크게 나을 것 없는 솜씨로 그려 낸 이런저런 몬스터들이 있었다.
정대식은 그걸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말했다.
"네 능력은 네가 직접 그린 그림이어야지만 효과가 있는 것이지? 그림이 구체적일수록 뭔가 다르나? 재활용은 안 되는 거고?"
"어, 당연히 제가 그린 그림이어야 하죠. 물감도, 종이도 제가 미리 손을 봐야 하고요. 그리고 당연히 구체적일수록 실감 나니까 더 좋겠죠? 재활용은 안 되고요. 보다시피 그림이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에 백지가 되거든요."
"그래? 그럼 그림 공부를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림 실력을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스크롤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게 낫지 않나?"
"전 자유로운 예술혼을 갖고 있다고요. 학원 같은 데는 다니기 싫어요. 게다가......."
이재우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돈이 없어요."
"돈이 없다고?"
정대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동안 타이탄 공격대에 있으면서 벌어들인 돈은 다 어쨌어?"
이재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여기저기 쓰다 보면 없어지던데요? 아시다시피, 헌터들이 쓰는 아이템이 다 비싸잖아요."
정대식은 그의 집에 쌓여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을 떠올렸다.
용도가 뭔지 짐작도 가지 않는 그 쓸데없는 물건들.
그런 걸 사들이느라 낭비를 해 왔던 것인가?
정말이지 형편없는 금전 감각이었다.
뼛속까지 짠돌이인 정대식은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봤자 네가 쓰는 건 한정되어 있잖아. 왜 그런 물건들을 사들이는 거야?"
"그냥, 두면 다 쓸 데가 있지 않겠어요?"
정대식은 속이 터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이건 명령이다. 너, 앞으로 나한테 용돈 타 써!"
"예?"
"네 자금은 내가 적절히 운용하겠다. 그중 일부는 네가 그림을 배우는 데 써야겠어. 더 잘 그린 그림을 가지고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편하게 싸울 수 있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괜찮은 그림 한 장 그리려면 마력이 엄청나게 필요하다고요."
"넌 펜리르 부대원 중 최고 수준의 마력량을 가지고 있다. 나를 능가할 정도지. 그런데 뭐가 문제야?"
"부대장님이 모르셔서 그래요!"
"어디 지금 한번 그려 봐."
정대식은 빈 종이를 이재우에게 내밀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