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144화 (144/297)

# 144

현질 전사

- 6권 20화

그놈은 전신에 청동 빛깔의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거의 5m에 육박하는 키에 3m에 가까운 대검을 휘두르는 대형종 괴물이었다.

"놈이 나온다면 끝장입니다. 전투기가 출격한 모양이지만 아시다시피......."

"폭탄 같은 건 아무 효과도 없죠. 핵폭탄이라면 또 모를까."

"민가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핵폭탄을 떨어트리는 건 말이 안 되죠. 헌터들이 막아야 합니다."

수염이 하는 말에 비니가 대꾸했다.

"우리 같은 헌터들이 무슨 수로 탈로스를 막는단 말입니까? 최희쯤 되는 랭커들이 오면 또 모를까......."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탈로스 쪽은 염려 안 해도 될 겁니다. 일단은 그렌델부터 먼저 처치하죠."

그들이 말하는 동안 오른쪽에서도 헌터 한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레이드를 위해 뭉쳤던 자들로 구성이 제법 알찼다.

무엇보다 힐러가 한 명 끼어 있었다.

정대식은 그들도 마찬가지로 엄폐물 뒤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렌델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관측을 썼다.

보아하니 그렌델은 6등급의 몬스터로 이만한 인원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그렌델의 약점 부위는 눈과 사타구니로 일단 덩치가 커서 조준하기 편해 보였다.

"좋습니다.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그렌델 정도는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어요. 우리는 타이탄 공격대의 특수 부대원들입니다. 그러니 저희를 믿고 따라 주셔야 합니다. 먼저, 원딜은 손을 들어 주세요...... 다해서 네 명입니까? 원딜 팀은 고덕화, 네가 맡아라. 원딜이신 분들은 이 사람의 지휘를 따라 주세요."

정대식이 그렇게 말을 하자 레이드팟의 헌터 한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 어딘가 낯이 익다고 했더니...... 정대식, 맞죠?"

그러자 다른 헌터들도 그를 하나둘씩 알아보았다.

"그래! 맞아! 정대식이네!"

"이야, 이거 트리플리스트를 이런 데서 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정대식은 선웃음을 흘리며 주의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저도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만나서 반가웠을 겁니다. 아무튼, 원딜 분들은 고덕화, 이 사람을 따라서 저쪽 건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그렌델의 눈을 집중적으로 노려 주세요. 그리고 힐러와 버퍼 분들은 이 엄폐물에 남아서 각자의 판단에 따라서 지원을 하시되, 긴장해서 마력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재우, 네가 남아서 이분들을 지켜 드려. 나머지 탱커와 근딜들은 저와 함께 이동할 겁니다. 탱커들이 그렌델을 상대할 동안 근딜들은 놈의 뒤로 돌아가 사타구니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타구니라는 말에 절로 근딜들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그럼, 갑니다!"

정대식은 원딜 팀을 먼저 보내고 지원 팀을 남겨 둔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쯤엔 이미 그렌델이 쌓아 둔 차벽에 다다른 상태였다.

다음 순간, 그 차벽의 가운데 별안간 구멍이 뻥 뚫리며 그곳으로 서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부상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 부상자는 이미 두 다리가 다 으스러져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재우, 힐러에게 데려가!"

정대식의 손짓으로 이재우의 서번트가 달려 나와 부상자를 받아 갔다.

서지원은 다시 차벽에 구멍을 뚫고 저편으로 사라져 또 다른 부상자를 데리고 왔다.

연거푸 공간 마법을 쓰느라고 서지원이 상당히 지쳐 보였기에 정대식은 그를 부상자와 함께 후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차벽 위로 솟아오른 커다란 그렌델의 머리통을 마주했다.

"그워어어어어-!"

둔중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렌델은 정대식과 함께 늘어선 헌터들을 굽어보았다.

그놈은 곧 차벽을 걷어차 부수려고 했으나 검은 나비 떼가 파르르 일어나 그렌델을 뒤덮었다.

어디선가 허미래가 그렌델을 훼방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못내 짜증스러운지 그렌델은 네팅을 찢어 버리며 한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 방망이를 내리쳤다.

꽈아아앙!

굉음이 울리며 쌓여 있던 차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두어 대는 허공으로 날아가고 몇 대는 바닥으로 굴러 내려왔다.

그걸 피해 앞으로 달려가면서 정대식은 탱커들을 손짓했다.

"어그로!"

<적의 집중.>

"도발!"

정대식이 그렌델의 주의를 끌자 다른 탱커 두 명이 나서 그 일을 거들었다.

그렌델은 콰아앙, 차벽을 짓밟으며 교차로 쪽으로 넘어와 그들에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후우웅- 쾅!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방망이를 정대식은 방패형의 마기장으로 쳐냈다.

그렌델은 성을 내면서 연거푸 방망이를 휘둘러 정대식을 내리쳤다.

콰앙! 콰앙! 콰앙!

그렌델의 공격이 방망이에 집중되어 있기에 마기장을 그렇게까지 넓게 펼치지 않고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었다.

정대식은 그렌델의 공격을 막아 내며 근딜들이 그렌델의 뒤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렌델의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며 붙은 양물을 겨냥했고, 곧 공격을 시작했다.

"천래일섬!"

번-쩍!

기철민의 검격을 시작으로 무차별적인 공격이 그렌델의 사타구니를 강타했다.

고통스러운지 깜짝 놀란 그렌델이 방망이를 떨어트렸고 재치 있게 정대식과 함께 있던 탱커 한 명이 그걸 저 멀리로 날려 보냈다.

곧 뒤쪽의 버퍼 중 누군가 그걸 아예 감춰 버렸다.

무기를 잃은 그렌델이 방망이를 대신해 주먹을 날려 왔다.

정대식은 망설이지 않고 마주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아앙!

그렌델의 주먹과 정대식의 주먹은 그 크기는 비견할 수 없었으나 공격력에 있어서는 정대식이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주먹이 서로 맞부딪치기가 무섭게 폭발이 일어나 그렌델의 눈이 확 불타올랐다.

"그웨에에에에에!"

그렌델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자 여태껏 조용하던 원딜들이 일거에 사격을 시작했다.

정확히 그렌델의 눈을 노리고 무수한 마력탄과 마력살들이 일섬으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그렌델의 양쪽 눈알이 퍽, 소리를 내며 깨지면서 밑으로 피가 후두둑 흘렀다.

"그워어어어어억!"

그렌델이 눈을 잃고 팔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몸부림을 쳤다.

하마터면 원딜들이 거기에 깔릴 뻔하자 허미래가 서둘러 와이어를 날려 그렌델이 쓰러지지 않도록 제자리에 고정했다.

그 틈을 타 근딜들이 막타를 그렌델의 사타구니에 꽂아 넣었다.

"그웨에에에에엑!"

퍼어어억!

오래지 않아 그렌델의 흉측한 양물이 잘리고 불알이 터지면서 사타구니가 피범벅이 되었다.

그때쯤 허미래의 와이어가 사라져 그렌델이 비틀거리다 앞으로 넘어졌다.

쿠아아아앙!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렌델은 신호등을 박살 내며 거기에 머리를 처박은 채 쓰러졌다.

그렇게 자빠진 그렌델은 더 이상 미동이 없었다.

정대식이 관측으로 살펴보자 생명력이 0에 다다라 있었다.

"끝났다."

정대식이 그렌델의 죽음을 입에 올리자 헌터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들은 기뻐하며 서로를 얼싸안고 처음 보는 펜리르 부대원들과도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상자로 인해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두 다리가 못쓰게 되었던 헌터는 사실 전신이 짓뭉개진 상태였다.

그렌델의 발에 밟혀 힐러에게 넘겨졌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뒤에 온 부상자는 힐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바로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어딘가 안전한 곳에 눕혀야 할 테지만 온 사방이 오거 밭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오거의 습격으로 인한 비명 소리가 울리고 있어, 주위를 둘러보니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그렌델과 같이 커다란 몬스터의 사체가 길 한가운데 자빠져 있는데다가, 놈이 흘리는 역겨운 피가 교차로 중앙에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사방의 건물에 온갖 체액과 살점이 흩어져 있었으며, 부서진 차들이 산을 이루었고 멀리서는 연기와 비명이 연거푸 울렸다.

정대식은 그 광경을 보며 어지럼증을 느꼈다.

이런 일은 던전 안에서만 존재해야 했다.

이계의 존재들이 현실로 기어 나와 일상을 망가트려선 안 됐다.

정대식은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부상자를 이재우의 서번트에게 챙기게 하고 나머지 오거들을 처치하러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타다다다다!' 하는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

정대식은 고개를 들어 올렸고 곧 헬리콥터 한 대가 공중에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헌터들이 뛰어내려 왔다.

촤악!

그렌델의 피 웅덩이 속으로 뛰어내린 헌터는 낯이 익었다.

정대식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미간을 찡그렸다.

무구에 튄 피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소리 내 말했다.

"광필두."

* * *

원래 체격이 좋고 눈이 부리부리해서 인상이 강렬하던 광필두는 못 보던 새 한층 기세가 더해진 것 같았다.

전에는 사자 갈기처럼 덥수룩하던 머리를 위쪽은 묶고 밑쪽은 반삭을 쳐서 스크래치를 냈는데,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그런 느낌을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광필두는 정대식의 앞에 다다라 가볍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정대식."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이름을 한 번씩 부른 그들은 뭔지 모를 기분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응시했다.

예전에 만났을 때와는 각자의 입장이 사뭇 달라졌기 때문일까?

일개 대원이던 광필두는 짧은 시간에 조디악 공격대를 접수하고 7성 무구를 두 개나 지닌 강자가 되어 있었다.

정대식 또한 타이탄 공격대에 들어가 펜리르 부대를 도맡게 되었으며, 쿼드러플리스트로 능력을 확장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다음번에 만났을 땐 또 얼마나 변해 있을지?

뭔지 모를 예감 속에서 정대식은 광필두가 묻는 말을 들었다.

"그렌델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처치하러 왔는데, 우리가 한 발 늦었군요?"

그는 조디악 공격대의 정예라고 생각되는 네 명의 대원들과 함께 온 참이었다.

정대식은 그들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금 다른 헌터들과 연합하여 막 쓰러트린 참입니다. 근원지가 어딥니까?"

"SW1D입니다. 탈로스와 그렌델 같은 거인들과 함께 오거가 출몰하는 던전이라고 하더군요."

"뉴스를 보니까 서울과 경기 지역의 던전이 다 터진 것 같던데, 상황이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공략 불가의 위험 등급 던전은 잠잠한 것 같더군요. 지난번의 몬스터 브레이크 때에도 그곳은 조용했으니까요. 그 외 던전으로는 지금 여러 정공이 괴수 대책반과 헌터 협회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럼 조디악 공격대도......."

"그렌델이 나타났다기에 탈로스도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서 저와 정예 몇 명만 나온 상태입니다. 나머지 대원들은 각 팀별로 움직이고 있고요. 듣자하니 타이탄 공격대는 의정부 쪽으로 갔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듣자 순간 묘한 기분이 일었다.

자신이 타이탄 공격대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나?

하긴, 지난번 최선과 나동일 실종 사건으로 시끄러웠으니 알고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정대식은 광필두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저희는 이쪽으로 훈련을 나왔다가 돌아가던 참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후방에서 오거들의 처리와 부상자 치료를 맡겨도 되겠습니까? 전 던전 입구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곧 탈로스가 나올 겁니다."

"아, 탈로스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째서요?"

그때 마침 정대식을 대신해 대답이라도 하듯 야산 쪽에 엄청난 속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곧 그 아래 뇌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번개가 번뜩였다.

꽈르르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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