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현질 전사
-7권 10화
한미란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으나 장한나가 죽일 듯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 눈빛에 살기가 깃들어 있어 그 기가 센 한미란도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붉게 칠한 입술을 삐죽이다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하지만 다음엔 꼭 제 연락 받아 주세요. 원한다면 밤이든 낮이든 언제든지...... 먼저 연락 주시고요."
그렇게 말을 하며 한미란은 전에도 건네준 적 있는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허리를 숙였기에 옷깃이 처지면서 가슴이 다 보였다.
범상치 않은 몸매라고 생각했는데 상상보다 훨씬 더 굉장한 가슴이었다.
성적인 의도를 듬뿍 담은 표정으로 한미란은 눈을 찡긋해 보이고 장한나를 지나쳐 갔다.
그러면서 가방으로 장한나를 한 번 후려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악!"
장한나가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치자 한미란은 "어머, 미안해요" 하고 가식적인 웃음을 생긋 날렸다.
그리고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커피숍을 나갔다.
이윽고 정대식과 단둘이 남은 장한나는 큰일을 하나 치른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 녹아 버린 프라푸치노를 쭉 들이켜다가,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한 듯이 바로 말을 이었다.
"마기전이 실제로 있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으시겠죠? 지금 바로 보여 드릴게요. 국가 기물 금고의 출입 허가를 받아 놓았으니까."
"아뇨,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설마 장한나 씨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려고요. 어차피 AAA급 배틀 슈트와 너클 글러브도 갖고 있고......."
정대식이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늘리자 장한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올인원이 되셨으니 응당 무구의 수준도 올라가야겠지요. 마기전뿐만이 아니에요. 이번엔 SS급 이상의 무구를 대여해 드릴 수 있어요."
그래 봤자 대여지만,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 보자는 생각에 정대식은 장한나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몇 번 와 봤다고 이제는 국가 기물 금고가 제법 낯익었다.
정대식은 관리자에게 아는 체를 해 보이고 장한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SS급 이상의 아이템을 대여할 수 있다는 말에 정대식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아다만티움 갑옷이었다.
처음 국가 기물 금고에 들어왔을 때부터 군침을 흘렸던 물건이라,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곧장 아다만티움 갑옷이 있는 전시실로 향했다.
"제가 이걸 대여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요. 한번 걸쳐 보시겠어요?"
"좋습니다."
정대식은 거리낄 것 없이 아다만티움 갑옷을 한번 입어 보았다.
전신에 묵직하게 휘감기는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정대식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갑옷을 쓰다듬고 있자, 장한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도로 벗으세요."
"벗으라니까 괜히 아쉽군요."
"왜냐하면 지금부터 SSS급 이상의 무구들을 보게 될 테니까요."
"SSS급 이상이라고요?"
장한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체를 했다.
"그럼, 국가 기물 금고가 이 정도 수준에 그칠 줄 알았어요?"
정대식은 추가적인 출입 약정서에 사인을 하고 별도의 조치를 받았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통행 밴드를 문지르며 그는 장한나와 함께 국가 기물 금고의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지하로 이어져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거대한 벽 앞에 다다른 정대식은 그곳을 지키고 서 있는 담당자를 보았다.
누가 봐도 마법사임이 분명한 그는 통행 밴드를 확인하고 스태프를 들어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벽 위에 선명한 문의 형상이 나타나며 별안간 눈앞이 뻥 뚫렸다.
"들어가시죠."
장한나와 함께 발을 들인 곳은 SS급 이하의 무구가 전시되어 있는 곳보다 오히려 한 단계 낮은 곳으로 보였다.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것 같은 지하 굴에 유리관이 아닌 철창 속에 무구들이 아무렇게나 들어앉아 있었다.
심지어는 다소 먼지가 쌓여 있기도 해서, 얼핏 보기에는 SS급 이하 무구 전시관보다 더 초라해 보였다.
그 생각을 장한나 역시도 했는지 그녀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SSS급 이상의 무구들은 워낙에 엄중히 관리되다 보니...... 전시를 할 수가 없었어요. 도난을 방지하고 관리를 하는 데만도 벅차, 관리자조차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거든요."
굳이 장한나가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SSS급 이상의 무구가 있는 그 장소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결코 초라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세월과 신비가 느껴졌던 것이다.
무구가 들어 있는 철창 형태의 상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마력을 더해 제작했는지 빛이 없는 가운데서도 광택이 흘렀고, 간혹 스크롤이라 여겨지는 종잇조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거나 아예 내용물을 볼 수 없게끔 밀봉된 것도 있었다.
그렇기에 기존의 전시관과는 다르게 그 안에 든 무구를 하나하나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장한나는 다운로드받은 국가 기물 금고의 SSS급 이상 무구 목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진열이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일일이 보여 드릴 수는 없어요. 필요로 하는 무구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신다면 거기에 맞춰 찾아서 보여 드리도록 할게요."
"그렇다면......."
정대식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역시 방어구를 보고 싶습니다."
"방어구라고요? 음, 여기 좋은 게 있네요. 어디 보자......."
장한나는 한쪽 구석에 방어구 라벨이 붙은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무구가 두서없이 놓여 있었는데, 상자 몇 개를 들어낸 장한나가 낑낑거리면서 말했다.
"이것 좀 내려놔 보세요!"
"여기 두면 됩니까?"
"네, 아무 데나 적당히 두세요. 으음...... 번호가......."
장한나는 한참 상자를 이리 밀고 저리 밀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더니만, 궤짝만 한 크기의 제법 커다란 상자를 가리켜 보였다.
"저거네요! 잠시만요."
장한나는 그 상자를 중앙으로 끄집어내 놓고, 담당자를 부르러 갔다.
금방 장한나와 돌아온 그 담당자는 장한나의 요구에 불만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이 상자를 좀 열어 보고 싶은데요."
"......보시다시피 이 상자는 봉인되어 있습니다만, 한 번 열면 다시 닫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작업이 필요합니다."
담당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아하니, 궁금하다고 해서 이것저것 열어 볼 수가 없는가 보았다.
하긴, 상자마다 스크롤이며 봉인구며 여러 장치가 되어 있어 열고 닫는 식이 아니라면 성가실 법도 할 테다.
그러나 장한나는 정대식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제가 미리 연락을 드렸을 텐데요? 오늘 이곳에 들어올 헌터는 전대미문! 사상 초유의 존재인 올인원이라고요. 이분이 바로 그분이에요!"
장한나는 왜인지 본인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SSS급 이상의 무구를 가질 만한 인물이라면 바로 여기 있는 정대식 씨뿐이라고요. 방금 전에 정대식 씨가 외국으로부터 어떤 제의를 받고 왔는지 안다면, 겨우 이깟 봉인 뜯는 게 아깝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못할 거예요. 보다시피, 이미 승인도 났고요. 설령 우리가 여기 있는 상자를 모조리 뜯어본다 하더라도 군말할 수 없다고요. 아시겠어요?"
장한나의 강압적인 어조에 담당자는 무어라 투덜거렸으나 곧 스태프로 봉인을 툭, 쳤다.
그리고 또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연거푸 스태프로 봉인된 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봉인이 한 겹 두 겹 벗겨져 나가며 이윽고는 빛을 뿜으면서 완전히 사그라져 버렸다.
그러자 담당자가 상자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젖히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정대식은 마침내 드러난 상자 안의 물건을 유심히 보았다.
"저건...... 슈트 같은 겁니까?"
"한번 만져 보세요."
정대식이 상자 안에 개켜져 있는 가죽옷 같아 보이는 무구로 손을 가져다대자, 그것이 그림자처럼 쉬리릭 일어나 정대식의 몸에 착 휘감겼다.
"어엇!"
"와! 잘 어울리시는데요?"
순식간에 자동으로 착용이 된 그 물건은 자줏빛이 감도는 검은색 광택의 가죽 슈트였다.
매우 가벼우면서도 착용감이 좋아서 아무것도 안 입은 것 같은 착각이 일 지경이었다.
팔꿈치나 무릎 같은 관절 부위는 제 피부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면서도 급소 부위는 소재 자체가 밀도 있게 응집되어 있었다.
더불어 얼굴과 입을 제외한 머리까지도 헬멧처럼 감싸고 있는지라 입는 것만으로도 전신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을 듯했다.
더불어, 기분 탓인지 힘도 세진 것 같았다.
몸 안을 흐르는 마력도 보다 잘 느껴졌고, 절로 호흡이 안정되며 숨쉬기가 편안해졌다.
단언컨대 여태껏 정대식이 착용해 보았던 모든 방어구를 통틀어 최고였다.
심지어는 그렇게 탐내던 아다만티움 갑옷도 이것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장한나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그건 블랙 드래곤의 가죽으로 만든 전신 갑옷이에요. 블랙 드래곤의 가죽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목 아랫부분의 가죽을 벗겨 만든 거죠.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라고도 하고, 올인원 슈트라고도 해요. 정대식 씨의 능력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죠?"
"용 가죽으로 만들어진 거라고요? 이게 전부 다?"
"네, 용 가죽이 아니면 그만한 성능을 내지는 못해요. 제가 장담하건대 국가 기물 금고에 있는 모든 방어구를 통틀어 이게 최고일 거예요. 특히 전신 방어구를 찾는다면 말이에요."
과연, 용의 가죽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슈트 표면에 비늘과 같은 촘촘한 무늬가 어렴풋이 보였다.
용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아이템은 까무러질 만큼 비싸기 때문에, 용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나 부츠 따위도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했다.
한데 그렇게 진귀한 용 가죽으로 만든 전신 방어구라니?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물건임이 분명했다.
"블랙 드래곤 가죽은 착용자를 만독지체로 만들어 줘요. 그 어떤 극독이라도 이것만 입고 있으면 물처럼 들이켠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죠. 게다가 어둠과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누빌 수 있게 해 줘요.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에서도 환히 볼 수 있고, 또 암흑을 불러올 수도 있어요."
"암흑을 불러온다고요?"
"한번 해 보시겠어요?"
정대식은 장한나의 손짓에 따라 굴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등을 바라보았다.
약간 의식 조작을 가하자 사방에 드리운 그림자가 짙어지며 그게 순식간에 전등의 빛을 뒤덮어 버렸다.
그러자 주위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해졌다.
한데 정대식의 시야는 장한나의 말대로 대낮처럼 환했다.
마치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상태가 길어지자 장한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정대식 씨?" 하고 불렀다.
정대식은 도로 어둠을 거두어들였고, 그러자 전등이 멀쩡하게 밝아져 와 다시 사방이 환해졌다.
"어떤 건지 알겠군요."
"대단하죠? 블랙 드래곤이 자아내는 어둠은 궁극의 어둠이라 사용하기에 따라 타인의 오감을 빼앗을 수도 있어요. 심한 경우에는 생명을 잃죠. 어둠 중의 암흑인 블랙 드래곤의 껍질을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피어의 기능도 있어요. 딱히 소리를 지르거나 겁을 주지 않아도 잡몹들은 블랙 드래곤의 그림자만 봐도 얼어붙기 마련이죠. 또한......."
"성능이 더 있다는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