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현질 전사
-7권 13화
"그러니까, 마정석을 한두 개 사겠다는 것이면 자격 운운할 필요도 없겠지요. 자격을 취득하겠다는 것은 다량으로 사들이겠다는 말인데, 왜 굳이 그러겠다는 거지요?"
"그저 제 올인원의 능력으로 마정석을 이용할 방법을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정석이 다량 필요해요."
정대식은 최소한 장한나가 윗선에 말이라도 해 보겠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장한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어찌나 칼같이 자르는지 찬바람이 쌩쌩 불 지경이었다.
정대식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내보이며 그녀를 설득해 보려 했으나 장한나 쪽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설령 정대식 씨가 외국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마정석만큼은 안 됩니다."
"왜죠?"
고민조차 않는 태도에 기분이 상해 묻자 장한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명하자면 길어요. 아무튼 마정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 취급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어요."
"길어도 해 주세요. 그 정돈 들을 권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장한나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그럼 간단하게 말하죠. 투기 세력 때문이에요."
"투기 세력이라고요?"
장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마정석의 값어치는......."
"네, 현재까지는 그렇게까지 높다고 볼 수 없죠. 국가에서 엄격하게 관리를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정석 거래를 자유 시장에 맡기는 그 순간, 마정석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겁니다."
정대식은 무슨 이야긴지 금방 이해했다.
"마정석이 석유를 대체할 신에너지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맞아요."
장한나는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어 나갔다.
"확장 현실 세계가 시작되고 던전이 인류에게 오픈되면서 우리는 몬스터라는 위험을 떠안게 되었지만 그만한 대가도 가져갈 수 있게 되었죠. 다름 아닌 던전 자원, 혹은 신비 자원으로 불리는 것들이에요. 그것은 이미 몇몇 헌터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를 안겨 주었죠. 그리고 그 부는 점차 던전 자원과 관련된 산업으로 옮겨 가고 있어요.
그러나 그건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마정석에서 뽑아낸 마력 발전 기술이 상용화되는 순간, 세상은 5차 산업 혁명을 맞이하게 될 거예요. 벌써부터 그 기술 개발 여부를 놓고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죠. 그러다 보니 좋게 말해서 투자 세력들의, 나쁘게 말을 하면 투기 세력들의 관심이 모일 수밖에요."
"국가의 관리를 벗어나면 투기 세력들이 닥치는 대로 마정석을 모을 거라는 말이군요."
"그래요. 확장 현실 세계가 시작되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죠. 던전이 출현하면서 불패 신화나 다름없던 부동산 시장이 폭락했죠. 거기서 빠져나온 돈이 다 어디로 가겠어요? 전부 던전 자원 쪽으로 몰리고 있다고요. 벌써부터 몬스터 부산물이나 신비 금속으로 인해 창출된 부가 한쪽으로만 흘러 들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마정석까지 규제가 풀려 버린다면? 답이 없어요. 아무리 마정석으로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돈 있는 자들의 소유물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요."
정대식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몬스터 부산물과 신비 금속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규제가 없죠. 이미 관리, 감독을 하기도 늦어 버린 감이 있고요. 그렇다 보니 마정석 거래 규제는 정부의 마지노선이나 마찬가지예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죠."
"제가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다른 요구라면 제가 청원을 해 볼 수도 있어요. 중국이나 미국에 준하는 조건으로 최대한 맞춰 드리게끔 노력해 보죠. 하지만 마정석 거래는 안 됩니다."
"이해했습니다."
정대식이 장한나의 말에 수긍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그녀는 조금쯤 안심한 눈치였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정대식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제가 던전을 공략해 획득한 마정석의 경우에는 그것을 자유롭게 취급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장한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까지 마정석에 집착하는지 통 이유를 모르겠군요. 게다가 현재 당신은 혼자 몸이 아니잖아요? 타이탄 공격대 소속이니 개인 사냥에서 얻은 거라면 모를까, 임무에서 획득한 마정석은 맘대로 할 수 없을 텐데요?"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공격대 측과 협의할 겁니다."
"......원래 헌터 본인이 획득한 마정석은 개인적으로 보유하는 것이 가능해요.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을 것 같네요."
"참고로 차후에 제가 창설할 공격대가 획득할 마정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장한나는 멈칫했다.
"공격대를 창설한다고요?"
정대식은 확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장한나는 조금 갈등하는 눈치였다.
정대식이 나중에 공격대를 만든다면 그것은 역대 최고의 능력을 가진 공격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그 공격대가 획득할 마정석도 값어치가 상당할 터.
경우에 따라서 정대식이 막대한 에너지를 독점하는 셈이 될 수도 있으니 고민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정대식 혼자서 획득할 수 있는 마정석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공격대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정대식이 마정석을 보유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가지게 될 힘과 부가 축소되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력 발전 기술은 아직 미완성이다.
마정석은 단순히 투자 가치가 있다고 점쳐질 뿐이지 지금 당장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어떻게 해도 마력 발전 기술을 개발해 내지 못한다면, 혹은 거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면 마정석은 소수인 헌터들에 한해 가치 있는 물건이 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장한나 본인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장한나는 정대식의 요청을 상부에 올려 보겠다고 말했다.
"알겠어요.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요."
와인을 마시며 새침하게 대꾸하는 장한나에게 정대식은 싱긋 웃어 보였다.
"세계 유일, 전무후무한 올인원을 이 땅에 붙들어 놓는 것치고는 값싼 대가 아닙니까? 반드시 허가를 받아 내주셔야 합니다. 더불어 중국과 미국이 제시한 조건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보상을 받고 싶군요."
그렇게 말한 정대식은 지나치게 값싸 보이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면서 말했다.
"현금으로요."
무리였나 보다.
장한나는 당장에 인상을 찌푸렸다.
"현금으로요?"
정대식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뻔뻔스럽게 굴었다.
"예, 강대국에서 제의한 대접까지는 기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금전적인 보상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한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냥 까놓고 말하세요. 얼마를 원하시죠?"
"중국에서 온 조건이 계약금 3,000억에, 연봉 1,000억, 이능 연구에 참여할 시 달마다 500억의 추가금이 있더군요."
"지금 5,000억에 가까운 돈을 현찰로 달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기겁을 하는 장한나를 보고 정대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시불로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 참, 기가 막혀!"
"국가에서 월급받는 셈 치고, 한 달에 500억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양호한 금액 같은데."
"50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저로선 상당 부분 양보를 한 셈입니다. 중국에서 온 추가적인 조건을 더 읊어 볼까요?"
장한나는 몹시 툴툴거렸다.
"이쯤 되니 정대식 씨가 차라리 해외로 나가 버리는 편이 제 정신 건강에는 좋을 것 같군요."
"무책임한 발언 아닙니까?"
"그래요, 실언이에요. 제가 한 말은 잊어 주세요."
"뭐, 엄밀히 말해 장한나 씨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알겠어요. 일단 말은 해 보도록 하죠."
혀를 내두르며 와인 잔을 다시금 들어 올린 장한나는 왜인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빠른 속도로 식사를 끝내 버렸다.
그리고 와인을 입 안에 때려 붓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만 돌아가죠."
"아직 디저트가......."
"디저트 같은 건 됐어요."
정대식은 왠지 모르게 뭔가 잘못한 기분을 느끼며 장한나와 함께 레스토랑을 나왔다.
자신의 요구가 지나쳐서 그런가 생각을 해 봐도 장한나가 이렇게까지 기분 나빠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수백억에 달하는 월급을 요구하는 게 당돌하다고 생각되어질 수는 있으나, 당연히 장한나도 정대식이 얼마만큼의 제의를 받았는지 알고 있을 터였다.
거기에 비하면 월 500억의 금액은 약소했다.
무엇보다 전에도 국가 기물 금고에서 아이템을 대여하는 문제로 몇 번이나 억지를 부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장한나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공무원이었고 엄밀히 말해서 주어진 업무를 수행할 뿐, 정대식이 무엇을 요구하든 본인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한데 오늘만큼은 태도가 달라서 몹시 어리둥절했다.
"전 이만 가 보겠어요."
정대식은 레스토랑 앞에서 곧장 발길을 돌리려는 장한나를 서둘러 붙잡았다.
"잠깐만요, 여기 올 때 제 차로 왔잖아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려고요?"
"택시를 부르거나, 지하철을 타면 되죠."
"그냥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타세요."
"아뇨, 괜찮아요."
"아까 와인을 원샷 했잖아요. 얼굴이 빨개요. 술이 취한 것 같으니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정대식은 간신히 장한나를 구슬려 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주소로 차를 몰아가며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제가 뭐, 말실수한 게 있습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러는 거죠?"
"제가 뭘요?"
장한나가 태연하게 굴어서 정대식은 자신이 뭔가 오해를 했나 싶었다.
장한나의 집이 그리 멀지 않아 차는 금방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정대식은 장한나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운전석에 앉은 채로 그녀를 배웅했다.
"그럼 전 이만......."
그때 장한나가 팔짱을 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불만스럽다는 듯이 내뱉었다.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놓고 본인의 요구 조건만 잔뜩 늘어놓더니, 이제는 그냥 집에 보내려고요?"
정대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차 주차하고 따라 올라와요."
그렇게 말을 하고 장한나는 몸을 휙 돌려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금세 안으로 사라졌으나 현관문을 계속 열어 둔 상태였다.
그 열린 문을 보고 정대식은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가까스로 무슨 이야기인지를 깨달았다.
'아...... 이런. 내가 무신경했네.'
정대식은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닫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장한나가 두 팔로 정대식의 등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붙여 왔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와인 맛이 났다.
정대식이 덩달아 술기운이 오른다고 생각하고 있노라니 장한나가 귓전에다 대고 속삭였다.
"정대식 씨가 저녁 식사를 하자고 말했을 때부터 전 이럴 작정이었어요."
"뜻밖이네요. 제겐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처음 만났을 땐 그랬죠.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그 콧대 높은 한미란이 추파를 던질 정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