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현질 전사
-7권 18화
"어? 그, 그럼?"
"그래. 네가 구현화에 써먹을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수고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먹이나 종이를 미리 제작할 필요가 없고, 그 펜촉이 네 마력을 일정하게 뽑아낼 테니 마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우와......!"
"하지만 사용에 제약이 있다."
"제약요?"
"한 번 그린 그림은 똑같이 그릴 수 없어. 저번처럼 성의 없이 그린 뱀 같은 걸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최소한 무늬 정도는 다르게 그려 줘야 한다는 것이지."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요."
흥분하며 중얼거린 이재우는 도무지 안 믿기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어, 어디서 어떻게 이런 아이템을 구입하신 겁니까?"
그간 이재우는 자신의 능력이 가진 단점을 해결하려 유사한 아이템을 찾아 수없이 헤맸다.
찾다가 안 돼서 스스로 만들어 보려고 하기까지 했으나, 줄곧 실패해 왔던 것이다.
한데 정대식이 단박에 그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찾아서 건네주었으니 그러한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정대식은 SSS급 이하라면 어떤 희귀한 아이템이든 간에 돈만 있으면 구입이 가능하다는 말을 꾹 삼켰다.
아직 상점이 레벨 6 상태인지라 그가 살 수 있는 아이템은 SSS급 까지였다.
상점 업그레이드를 하면 그 이상의 아이템도 구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의 펜리르 부대원들에게는 SSS급 아이템으로도 충분, 아니 과분했다.
"......나만 아는 브로커가 있다고 말해 두지. 그 펜이 네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도움이 되다마다요! 으으, 얼른 써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사냥이 가 보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에요!"
이재우는 빨리 펜을 써 보고 싶어 안달을 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그에게 진정하라 말해 놓고 계속해서 김송근을 마저 불렀다.
"김송근, 이걸 받아라."
"이, 이게 뭡니까?"
이재우가 받는 아이템을 보고 김송근도 기대와 떨림이 교차하는 말투로 물었다.
정대식은 꼭 크리스마스 날에 아이들 선물 주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이재우의 펜이 들었던 상자보다 훨씬 더 큰 상자를 건네주었다.
"직접 열어 봐."
삐걱.
상자 뚜껑을 열어 보고 김송근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이건, 방어구 아닙니까?"
"그래, 특수한 마력석이 박혀 있는 가슴받이다. 한번 착용해 보겠나?"
김송근은 약간 얼떨떨한 기색으로 그 가슴받이를 걸쳐 보았다.
옆구리와 어깨까지 감싸도록 되어 있는 그 브레스트 플레이트에는 양쪽 어깨와 양쪽 가슴, 그리고 명치 부근에 총 다섯 개의 세공석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마력을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마력석과는 달라서, 일종의 필터와 같은 기능을 했다.
마력석에 깃들어 있는 속성이 마력을 한 번 걸러 특수한 능력을 발휘하게끔 해 주는 것이다.
"그 흉갑의 정식 명칭은 네피림 블레스트 플레이트다. 네피림은 거인의 일족을 뜻하는 이름이지. 그걸 걸친 채로 다섯 개의 마력석에 네 마력을 흘려 넣으면, 네 몸이 자동적으로 커진다. 뿐만 아니라 그 상태로 분신술을 쓰면......."
김송근이 마침내 알겠다는 듯 뇌까렸다.
"제 분신까지도 거인처럼 몸이 커지는 것이로군요."
"그렇다. 단순히 머릿수로 승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 네 분신술의 체급이 전부 높아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덩치가 큰 몬스터를 상대하기에 훨씬 유리할 것이다."
"어, 하지만 제 마력량이 그만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김송근은 애초에 분신을 작게도, 크게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했다.
단, 그 크기가 일반 사람의 크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제아무리 덩치 큰 분신을 만들어 몬스터를 상대하려 한다 해도, 2m를 조금 넘는 크기의 근육 덩치 정도밖에는 못 만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네피림 블레스트 플레이트는 인간의 세 배 크기에 가까운 거인 정도까지 몸을 키울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과 중복해 사용할 수 있었으며 마력량의 소비도 상당량을 막아 주었다.
"거기 박혀 있는 마력석은 덩치만 키워 주는 게 아니라 마력 또한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평소 분신술을 사용하던 만큼의 마력만으로도 얼마든지 거인 분신을 운용할 수 있지. 뿐만 아니라 네가 쓰는 모든 마력의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거다. 말했다시피 그 마력석은 마력 자체를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하니까. 더불어 방어구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할 것이다. 골리앗의 머리뼈로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하니 어지간한 충격에는 꼼짝도 안 할 걸?"
"골리앗의 머리뼈라고요......? 그런 게 있었습니까?"
아직 지구에선 발견된 적 없는 던전 자원이다.
정대식은 얼렁뚱땅 설명을 넘어갔다.
"그만큼 위력적이라고 알아 두면 될 거야."
"가, 감사합니다."
김송근은 가볍게 손을 떨며 마력석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당장에 김송근의 몸이 확 커지며 그의 머리가 천장에 쾅, 부딪쳤다.
김송근이 얼른 허리를 숙였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의 머리가 천장을 뚫고 위층으로 튀어 나갔을 것이다.
놀란 김송근이 황급히 마력을 거두어들이자 그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웬 나체쇼야?"
별안간 몸이 커져 본의 아니게 나체쇼를 하게 된 김송근은 갈기갈기 찢어진 옷자락을 추스르며 핀잔주는 기철민의 말을 듣고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김태희와 허미래는 각자 다른 곳을 쳐다보고 딴청을 부렸다.
정대식은 그런 그를 보고 한마디를 했다.
"특수 처리된 옷을 걸치는 게 좋겠군."
"예, 예...... 그래야겠네요."
김송근이 거인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이재우는 툴툴거렸다.
"에잇, 뭐야! 저게 훨씬 더 멋지잖아?"
펜 받아서 좋다고 희희낙락할 때는 언제고, 그는 김송근의 아이템을 탐냈다.
어린아이처럼 들썩거리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정대식은 곧장 다음 물건을 꺼내어 허미래에게 건넸다.
"이건 널 위한 거다."
"저, 저를 위해서요?"
허미래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조그만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건 손바닥보다 더 작은 크기였는데, 안에 든 물건도 그만치 작았다.
"그것은 네가 미처 쓰지 못하고 있는 제2의 능력을 끌어올려 주는 역할을 할 거다."
허미래는 조금 놀란 눈으로 정대식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듀얼리스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정대식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네가 수시로 방출하는 마력을 저장하는 동시에, 그 마력을 반대의 성질로 바꿔 주는 역할을 하지."
"또 다른 성질이라고요?"
"네 능력이 디버프니까 일시적으로 버프를 가능케 한다는 말이다."
정대식은 그 일시적인 변화에 영향을 받아서 허미래가 변화계 쪽 능력도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정대식의 짐작으로 허미래는 힐러의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힐러는 능력의 특질에 따라 여러 계열로 나뉘는데, 그래도 대부분은 변화계나 조작계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그 두 가지 능력을 다 보유하고 있는 허미래라면, 사실 디버퍼보다는 버퍼나 힐러가 맞는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허미래의 디버프 능력을 버프로 전환시켜 주는 아이템을 건넨 것이다.
정대식의 설명을 듣고 허미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 물건인지 잘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긴가민가하는 허미래를 보고 정대식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나를 위한 아이템이 아니니, 그 위력이 어떠한지는 네가 직접 시험해 보는 편이 빠를 거다."
"알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다음은 기철민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를 위한 아이템을 찾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그렇습니까?"
피식 웃는 그를 보고 정대식은 상자를 내밀었다.
"여기에 든 것은 탈라리아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쉽게 말해서 신속의 고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군. 발목에 차는 것이니 한번 착용해 봐."
기철민은 상자 안에 든 두 개의 황금색 고리를 발목에 끼웠다.
그러자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고리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그의 몸이 바닥에서 몇 cm쯤 가볍게 떨어졌다.
"엇?"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네가 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줄 거다. 네 검술과 합쳐지면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공격을 가하는 게 가능해지겠지. 높이, 혹은 멀리 도약하는 것도 가능하니 네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공격과 방어의 폭을 다채롭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기철민은 시험 삼아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 움직임이 흡사 김태희의 몸놀림을 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아이템의 좋은 점은 마력 소모가 없다는 것이다. 마력량의 부족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기철민은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었고, 정대식은 다음으로 고덕화를 불렀다.
"너는 네 능력이 안정화되어 있는 관계로...... 그것을 증폭시켜 주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크롤을 하나 가지고 왔다. 받아라."
고덕화는 정대식이 건네주는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건 어떻게 쓰는 겁니까?"
그 두루마리에는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그려져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미소를 띤 여인의 모습에 기묘한 생기가 어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스크롤이 아닌 아이템에 가까운 물건이라, 따로 인챈트가 필요하지는 않다. 사용 방법은 간단해. 네 천강벽수선으로 그걸 내리쳐 찢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고덕화는 곧장 두루마리를 공중으로 던지고 천강벽수선을 휘둘러 북, 찢어 놓았다.
그러자 연기처럼 스크롤의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이 피어올랐다가 천강벽수선 속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졌다.
"그 여인의 이름은 실라이론이라고 한다."
고덕화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별반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고덕화치고는 대단한 표정 변화였다.
"실라이론이라고요?"
"그렇다. 그녀는 바람의 상급 정령으로, 네가 천강벽수선을 통해 쓰는 바람의 능력에 더 큰 힘을 실어 줄 것이다. 또한 네가 애정을 베풀어 주기에 따라 너를 지켜 주려고 애쓰겠지. 방어뿐만 아니라 치료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바람의 상급 정령쯤 되면 정령사들도 소환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걸 잠깐 부르는 것도 아니고 무구에 완전히 정착을 시킨다니.
평범한 무구를 SSS급으로 단번에 도약시키는 엄청난 기능의 스크롤이었다.
"그다음은 서지원, 너다."
서지원은 과연 자신에게는 무엇이 주어질지 당최 감이 안 잡힌다는 표정이었다.
정대식은 서지원에게 서클렛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너도 네 능력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지. 공간 마법은 아무나 갖고 있는 능력이 아니니까. 네게 필요한 건 단지 그 능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을 만큼 방대한 마력량이다. 물론, 마력 증진 스킬을 통해 네 마력량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마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그 리치 서클렛이 그걸 도와줄 거다."
"이 서클렛에 깃든 기능은 뭡니까?"
서지원은 음산하게 생긴 서클렛을 만지작거렸다.
딱 보기에도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모양새라 그는 그걸 선뜻 써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