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현질 전사
-7권 22화
이로써 허미래는 디버퍼일 뿐만 아니라 버퍼와 힐러의 역할까지도 한꺼번에 겸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버프나 힐을 쓰는 게 어렵겠지만, 조만간 디버퍼와 버퍼, 힐러 세 가지 역할을 겸하는 대단히 값어치 있는 존재가 될 터였다.
"고맙습니다. 이 아이템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울프헤딘에게 물린 쇼크로 마력이 폭주해 죽거나, 죽음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고마움에 고개를 숙여 보이는 허미래를 보고 김송근이 한마디를 했다.
"새로운 아이템의 도움을 받은 건 너뿐만이 아니야."
그러자 모두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고비를 한차례 넘겼음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비치고 있었다.
정대식은 자신이 아이템을 잘 골랐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말했다.
"그럼 다시 이동한다. 그리고 눈보라가 멎을 때까지 쉴 자리를 찾는 게 좋겠어."
부대원들은 동의했고 그들은 맵에 지금 위치를 표시했다.
나중에 던전에서 돌아 나가면 그것을 바탕으로 지원 팀이 짐꾼들을 데리고 들어와 울프헤딘의 시체를 나를 것이다.
Chapter 43. 브세슬라브 공략
울프헤딘을 처치하고 몇 번인가 프로즌 폭스나 라쿤이 나오기는 했으나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김태희의 절구 한 방이나 기철민의 칼질 한 번에 금방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경계를 지나쳐 숲 어귀에 도착해서 그들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브세슬라브의 영역 근처에서 두 발 뻗고 있으려니 맘이 편치 않았으나 수림이 거센 눈보라를 막아 주어, 날이 갤 때까지 약 두어 시간가량을 그곳에 머물렀다.
그동안 정대식은 자신이 갖고 있는 비상식량이란 비상식량은 모조리 다 털어 먹었다.
야마환을 쓴 후유증으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허미래의 영향으로 극심한 굶주림이 지나가기는 했으나 근본적인 허기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덕분에 아공간에 던져 둔 에너지바를 한 박스나 까먹고 프로틴 빵과 음료를 쉬지 않고 섭취했다.
보다 못한 부대원들이 자기들 몫의 비상식량을 내주자, 그것까지 모조리 처치하고 나서야 비로소 살 것 같았다.
걸신들린 듯이 먹어 대는 정대식을 보고 김태희가 약간 질린 듯이 말했다.
"생전 안 그러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새로운 아이템의 영향이지."
"울프헤딘을 처치했던 그거 말인가요?"
"그래. 아귀가 깃들어 있다는 반지인데, 효과는 좋아도 부작용이 크다고 들었어. 그 말이 사실이군."
"한 번 쓸 때마다 그렇게 먹어 대야 하면 식비가 엄청나게 나오겠군요. 가성비가 안 좋기는 하네요."
그 대화를 듣고 있던 고덕화가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데 그 정도 부작용이면 양호한 것이지."
부작용 이야기를 하니까 고덕화가 있던 크툴루 부대의 참상이 생각났다.
그들이 위험 등급에 준하는 던전에 들어갔다가 버거운 상대를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결정적인 이유는 부대장의 판단 착오였다.
크툴루 부대의 부대장은 정신계 능력자인 테이머였다.
그는 몬스터를 길들일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려 키마이라를 길들여 데리고 다녔다.
지나치게 위험하지 않느냐는 우려가 끊이질 않았으나, 그는 자신의 실력을 자신했다.
그리고 키마이라를 비롯한 몬스터들을 혹독하게 부려 먹었다.
그 결과, 그가 거느린 몬스터들이 위기의 순간에 일제히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신 억압을 풀어 버렸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몬스터들은 그간의 학대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잔인하게 주인을 살해하고 부대원들을 습격했다.
테이머는 흉폭한 몬스터들을 길들일 수 있는 만큼, 항상 리스크를 상기하고 있어야 했다.
강력한 몬스터를 거느릴수록, 위험 부담도 보다 커진다.
뛰어난 능력도, 훌륭한 아이템도 다 그만한 대가를 필요로 했다.
사실 세상에는 공짜라는 게 없는 법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돈이라는 대가는 싼 건지도 몰랐다.
그때 서지원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들었다.
"그 아이템에 깃든 게 아귀라서 허기가 부작용으로 찾아온다면 조심해야 할 겁니다. 뜬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귀에 씐 헌터들은 간혹 이성을 잃고 동료를 습격하거나 자기 몸을 뜯어먹기도 한다더라고요."
"으으."
끔찍한 소리를 듣고 허미래가 있는 대로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이재우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부대장님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소시지라도 잔뜩 들고 다녀야겠습니다."
정대식은 피식 웃고 나머지 육포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물을 한 사발 마신 뒤 볼일을 보러 갔다.
휴대용 변기를 써서 볼일을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눈보라가 잦아든 게 보였다.
바람 소리에 숲이 시끄럽더니 사방이 잠잠해지기 시작해, 슬슬 출발해도 될 것 같았다.
정대식은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 부대원들에게 브세슬라브 공략 계획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거기에 빈틈이 없는지 재차 점검을 하고 난 뒤, 떠날 채비를 하고 다시금 발길을 옮겼다.
"나무 한번 우라지게 크네."
숲으로 발을 들이면서 김송근이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하나같이 거목이라 위쪽을 바라보면 목이 꺾어질 지경이었다.
"가끔 가다 로크가 나오기도 한다니 머리 위를 주의하며 걷는다."
그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발길을 옮겼고 정대식도 엔트로피를 보내어 주위를 정찰하게 했다.
주의 확장으로도 별다른 몬스터가 발견되지 않아, 거의 세 시간 가까이를 별일 없이 걷기만 했다.
똑같아 보이는 숲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고 김송근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브세슬라브든 뭐든 좀 나왔으면 좋겠네. 지루해 죽겠어."
그 말에 동감하는지 기철민이 질문을 던져 왔다.
"이 숲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겁니까?"
"확인된 바 없다. 엔트로피를 보내어 봐도 전방 8km까지 계속 숲이다."
"이러다간 브세슬라브와 마주치기도 전에 지치겠군요. 차라리 우리 존재를 드러내어 함정을 파는 게 어떻겠습니까? 놈을 먼저 부르는 거죠."
"거기에 반드시 브세슬라브가 걸려들 거라는 보장이 없다. 여기가 브세슬라브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그놈만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 엉뚱한 몬스터가 걸려들어 전력을 낭비하면 정작 브세슬라브가 나타났을 때 제대로 못 싸우는 수가 있다. 이제 겨우 몇 시간 왔을 뿐이니 닥치고 계속 걸어라."
정대식의 말에 부대원들은 입을 다물었고 그들은 또 한참을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별안간 하늘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캬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악!"
까마귀 소리를 훨씬 더 듣기 싫게, 몇 배로 증폭시켜 놓은 것 같은 울음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숲 머리가 와스스 흔들리며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을 스쳐 지나갔다.
"저건?"
"로크다!"
이재우와 김송근이 주고받는 대화가 들리고, 정대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대한 괴조인 로크가 한 마리도 아니고 서너 마리가 한꺼번에 숲 밖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별안간 강영후가 말해 주었던 브세슬라브의 목격담이 떠올랐다.
'숲 목격자의 말에 따르자면 숲 위로 브세슬라브의 머리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고 한다.'
정대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숲을 채우고 있는 나무가 이렇게 큰데, 머리가 숲 위로 보일 정도라고......? 그럼 얼마나 크다는 거야......?'
그때 주의 확장으로 팽창되어 있는 오감이 움찔, 떨렸다.
로크가 한바탕 지나친 숲은 고요했으나 정대식은 재빨리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엔트로피를 보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늦었다는 기분이 강했다.
만약 놈이 보통의 거인보다 훨씬 더 큰 크기라면 정찰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8km 정도는 단숨에 주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미묘하게 발밑이 떨렸다.
정대식은 주의 확장으로 인한 착각인가 싶었으나, 김태희가 즉각 말했다.
"방금, 느꼈습니까?"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느꼈다."
땅이 떨리고 있었다.
대지를 울리는 묵직한 진동.
그게 미세하게 발끝을 건드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부대원들은 긴장이 역력한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땅이 쿵, 하고 떨리자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땅이...... 떨리고 있어!"
"뭔가 이쪽으로 온다!"
정대식은 즉시 명령했다.
"다들 계획은 주지하고 있겠지. 각자 위치를 잡아라!"
"예!"
부대원들이 숲 여기저기로 흩어져 모습을 감추었다.
정대식 역시도 근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점점 땅의 진동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그 진동은 아무래도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무언가의 발걸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브세슬라브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유명한 옛날 오락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쥬라기 공원>. ▒
폭우 속에서 티라노사우루스가 등장하는 씬이 딱 이랬다.
물 잔에 일어난 파문이 점점 커지면서 거대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생각이 현실이 된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진동이 아닌 소리로도 브세슬라브의 존재가 느껴지고 있었다.
쿵......!
쿵......!
쿵......!
정대식은 입을 마르게 하는 긴장감 속에서 엔트로피를 불러냈다.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이번 작전은 네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시작하지."
엔트로피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대식은 몸을 숨긴 채로 브세슬라브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쿵......!
쿵......!
쿵......!
우지지직! 우지직!
브세슬라브가 가까워지며 그의 발치 쪽에서 바위와 자라다 만 나무가 짓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대식은 그들이 자연스레 걸어오고 있던 통로가 브세슬라브가 오가는 길이었음을 깨달았다.
하긴, 브세슬라브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원시림 한가운데 그만한 길을 내놓겠는가?
우지직! 우드득! 우드드득!
정대식은 고개를 돌려 숲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브세슬라브의 모습을 확인했다.
'헉.......'
브세슬라브의 모습은 채 다 보이지 않았다.
크게 자라난 나무에 그 모습 대부분이 가리어 있는데다가, 워낙에 덩치가 커서 머리가 숲 밖으로 튀어 나가 있었다.
정대식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목만큼이나 굵직하고 시커먼 다리와 배뿐이었다.
꾸드드득! 콰과과광!
걷다가 양옆의 나무들이 거슬린 것인지, 브세슬라브가 무슨 짓을 했다.
아마 한 번 팔을 휘두른 것 같다.
그리고 그 손에는 거대한 양날 도끼가 들려 있었다.
콰과과과과!
굉음과 함께 나무 윗동이 잘려 날아갔다.
말이 나무 윗동이 잘린 것이지, 인간 기준으로 보자면 자연재해가 일어난 것과 다름없었다.
무슨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처럼 숲이 진동했고, 쓰러진 나무 기둥에 부딪친 다른 나무들이 덩달아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쿠과광! 파사삭! 콰앙! 파스스스!
브세슬라브는 몇 번인가 더 양날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자 수령이 수천 년은 되어 보이는 거목들이 맥없이 잘려 나갔다.
정대식은 마구잡이식으로 벌목을 하는 브세슬라브를 보며 놈이 자신들을 눈치챈 게 아닌가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