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현질 전사
-8권 3화
그러다가 별안간 정대식을 똑바로 쳐다보며 느닷없는 이름을 꺼냈다.
"광필두도 그런 것일까? 그저 강해지고 싶으니까, 7성 무구를 전부 모아 보려는 것인가?"
강영후는 정대식의 대답을 바라고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본인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말 속에 혼란스러움이 비쳐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강영후의 말이 정대식에게 무언가를 던져 준 것만은 분명했다.
정대식은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꾸라고 할 만한 말을 뇌까렸다.
"그러기를 바라야겠죠."
광필두가 그저 강해지고자 열망하는 순수한 헌터이기를.
설령 그로 인해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 힘이 선한 의지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 * *
브세슬라브 처리 건이 끝나고 강영후는 펜리르 부대에게 특별 휴가를 포상으로 주었다.
보너스도 두둑하게 나왔겠다, 몬스터 토벌 사례금도 받았겠다, 정대식은 부대원들에게 맘 놓고 푹 쉴 것을 권유했다.
그동안 주말도, 사생활도 죄다 반납하고 수련에만 매진했으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겨진 탓이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어째 신나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애먼 데서 돈이나 쓰고 시간이나 때울 바엔 차라리 훈련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정대식과 함께하면 노력하는 대로 고스란히 보상이 돌아오다 보니 노는 것보다 훈련이 더 즐겁다고 여기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정대식은 뻔히 '휴가 따윈 반납하고 당장 훈련이다!'라고 외쳐 주었으면 하는 그들의 눈치를 읽었으나 모르는 척했다.
부대원들이 더 강해지길 원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일중독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말이야, 자기 인생이 좀 있어야지. 욕심이 끝이 없어요.'
정대식은 강해지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헌터의 생태에 혀를 내두르며 갑작스레 주어진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궁리했다.
'역시, 사냥인가? 마정석을 더 얻으려면 그렇게 해야 되겠지?'
정대식은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와 야마환에도 좀 익숙해질 겸, 사냥 갈 만한 던전을 물색했다.
그러고 있노라니 갑작스레 한심스런 기분이 찾아들었다.
'이게 뭐야, 모처럼의 휴가인데 놀 생각은 않고 사냥이라니? 이래 가지고선 나도 다른 바보들과 다를 바가 없잖아?'
정대식은 던전 탐색에 덩달아 열을 올리고 있던 엔트로피를 보고 물었다.
"지금 내 잔고가 얼마야?"
<1,345억 가량이 있습니다.>
국가 지원금 300억 원은 부대원들 무구와 장비를 맞춰 주는 데 대부분 다 썼지만 사파이어 스톤을 판매한 금액 1,300억을 더해서 1,345억이라는 거금이 생긴 것이다.
'역시, 마정석은 상점에 파는 편이 훨씬 남는다. 공식 거래소를 통해 처분했으면 7, 800억 정도밖에는 못 받았을 거야.'
실로 대단한 금액인데도 정대식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상점 업그레이드를 위해 마련해야 할 1조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기 때문이다.
당장에 상점을 업그레이드하지 않고, 새로운 스킬을 구입하거나 능력을 개발하기에도 넉넉하다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만의 재산이라 할 수도 없었다.
부대원들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대가로 마정석을 독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부대원들과 나누어야 하는 수익이니, 아직까지는 그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을 못하고 내버려 두고 있는 참이었다.
'쩝, 가만 생각해 보니까 억울하네. 내 통장에 무려 1,000억이 넘는 돈이 들어 있는데 부자다운 기분을 전혀 못 느끼고 있잖아. 간만에 사치를 좀 해 봐?'
정대식은 뭐라도 사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실체화해 있던 엔트로피가 곧장 따라붙으며 질문을 던졌다.
<어느 던전으로 가실지 결정하신 겁니까?>
정대식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오늘은 사냥 안 갈 거야. 오늘 만큼은 휴가를 누려 보겠어. 날 위해 투자를 하겠다고. YOLO 몰라, YOLO?"
<그럼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백화점에 가서 VVIP 놀이라도 해 보려고."
<그건 무슨 뜻입니까?>
정대식은 옷장을 뒤져 일전에 맞춰 놓았던 정장을 꺼내어 걸쳐 입으며 말했다.
"생각해 봐. 난 무려 수십억, 수백억의 돈을 벌어들이는 갑부란 말이야. 이 정도면 갑부 맞지?"
<그렇게 표현해도 무리가 없기는 합니다.>
"그런데 갑부의 삶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고 있잖아. 내가 좋은 집이 있길 해, 차가 있길 해? 명품으로 도배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래 가지고서야 누가 날 갑부로 알아주겠어? 맨날 던전이나 쫓아다니며 돈 벌 궁리에 허덕이는데. 그러니 오늘만큼은 갑부답게 놀아 보겠다, 이거야!"
<좋은 궁리이십니다만, 그 셔츠에 그 넥타이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쭈? 너 지금 내 패션 센스를 의심하는 거야?"
<애초에 맞춘 대로 입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쳇."
정대식은 투덜거리며 넥타이를 바꿔 맸다.
그리고 있는 대로 멋을 부리고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덩달아 따라온 엔트로피가 마치 사람처럼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했다.
<마침 잘됐군요. 오늘 약속을 지켜 주시면 되겠습니다.>
"무슨 약속?"
<원피스를 사 주시겠다고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엔트로피의 말에 정대식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내가 그랬어?"
<그랬습니다. 증거도 보관하고 있습니다만. 보여 드릴까요?>
"어이구, 됐다. 그러고 보니 그런 소릴 한 것 같기도 하네. 어차피 나가는 길이니까 그렇게 하지, 뭐. 그깟 원피스 한 벌쯤, 얼마나 한다고?"
정대식은 액셀을 밟아 차를 몰았다.
그리고 번화가 한복판에 자리한 백화점으로 향했다.
한데 주말도 아닌데 주차장 입구부터 차가 바글거렸다.
정대식은 긴 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에잇, 뭔 줄이 이렇게 길어?"
<인근의 주차장을 검색해 볼까요?>
"여기 주차장이 있는데 다른 델 가자고? 그럼 주차비가 따로 들 거 아냐."
<그렇습니다.>
"내 돈 쓰러 와서 주차비까지 또 내자고?"
정대식이 버럭 하자 엔트로피가 좀 황당한 표정을 했다.
말을 하고 보니 정대식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기는 했다.
백화점에 지르러 와서 주차비 몇만 원을 아까워하다니.
아직까지 가난하던 시절의 습관을 못 버린 탓이다.
정대식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아니, 뭐...... 길바닥에서 시간 버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럼 길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정대식은 핸들을 있는 대로 꺾어서 차를 돌리려 했다.
한데 그게 통행에 방해가 되었는지, 아니면 새치기를 하려 한다 오해를 한 것인지 주차 요원이 뛰어왔다.
정대식은 차창을 내렸고 곧 주차 요원이 말했다.
"주차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아, 지금 차 돌리려고요. 주차할 거 아닙니다."
그러자 정대식의 얼굴을 본 주차 요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혹시......."
"예?"
"정대식 씨 아닙니까?"
정대식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걸 어떻게......."
그 말에 주차 요원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유명하시잖아요? 모를 수가 없죠."
정대식은 일전에 나동일과 최선 구조 작전 때의 유명세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인가 의문했다.
당시에는 그 사건이 워낙 화제가 되었기에 정대식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소 시간이 흘러 잊힌 일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정대식의 얼굴도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야 하는 것인데, 어찌 알아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때 주차 요원이 힌트가 될 만한 말을 했다.
"요전번 3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크게 활약하셨잖아요. 그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다 쓰러트리다니...... 대단하시더군요. 감사합니다."
"앗,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었는데요."
"죄송하지만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대식은 차에 탄 채로 엉겁결에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그 사진을 곧장 SNS에 올리면서 그 주차 요원이 싱글벙글했다.
"정대식 씨와 사진을 찍었으니, 그 영은하 씨도 절 부러워하겠네요."
"영은하 씨요?"
"예, 아이돌 영은하요. 정대식 씨 팬이라는데, 모르세요?"
"아뇨, 알고 있습니다."
주차 요원은 뒤에서 차들이 빵빵거리는 소리를 듣고 말했다.
"그나저나, 백화점에 들어가시는 거죠?"
"예, 그렇기는 한데 차가 많아서......."
"이쪽으로 오세요."
정대식은 주차 요원의 안내로 특별 취급을 받았다.
VIP 고객 전용 주차장에 정대식의 차를 넣을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 주차 요원은 정대식의 키를 받아 가며 쇼핑이 끝나고 나면 VIP 라운지에서 차를 가져다줄 거라고 말했다.
'아직 이 백화점에서는 10원 한 장도 안 썼는데. 이래서 사람들이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건가?'
정대식은 뜻밖의 대접에 우쭐해져 그 주차 요원에게 팁을 몇만 원 찔러 주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한데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정장을 갖춰 입은 어떤 남녀가 달려 나와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희 백화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 예. 예."
정대식이 어리둥절해하노라니 두 남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백화점에서는 특별한 고객을 최상급으로 모시기 위하여 쇼핑 메이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부디 편하게 생각해 주세요."
깍듯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정대식은 별 희한한 직업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쇼핑을 돕는 사람이라니.
확실히 차별화된 서비스 같기는 했다.
그러나 정대식은 이 백화점을 방문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VIP 등급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대우가 좀 어리둥절했다.
"어떤 분들이신지는 알겠는데...... 이 백화점은 누구에게나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겁니까?"
여자 쪽이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몇몇 특별한 고객들을 위해서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어, 전 여기 고객이 아닌데요?"
그 말에 남자 쪽도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 백화점에 발을 들이신 순간부터 저희 고객이신 겁니다. 무엇보다 세계 유일의 올인원 능력자가 아니십니까? 당연히 저희 고객 명단 최상위에 올라 계십니다."
아무튼 자신을 알아보고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쁠 리가 없었다.
처음의 당혹감이 가시자 약간은 멋쩍으면서도 은근히 으쓱한 기분이 들어서, 정대식은 지나치게 좋아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음, 쇼핑 메이트라고 하셨죠? 그럼 어떤 식으로 절 돕는다는 거지요?"
"쇼핑에 관한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해 드릴 겁니다."
"오늘은 어떤 용무로 저희 백화점을 찾아 주셨는지요?"
두 사람이 연거푸 묻는 말에 정대식은 좀 버벅댔다.